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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청포도 사탕 자리
서울 어딘가에 특별한 곳이 있다. 바로 알록달록 꽃이 피는 향기롭고 소담한 동네 영암동.
영암동 어귀 내리막길에 떡하니 들어선 3층짜리 아담한 빨간 벽돌 건물 1층에는 꽃집 0505와 카페 안달루시아가, 2층에는 꽃집 주인 최영희가, 그리고 3층에는 건물주인 최정임 여사가 산다.
꽃집 「0505」.
2년 전 영암동에 자리 잡아 지금은 영암동 예술 거리 이정표가 된 곳. 널따란 대로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줄줄 늘어선 갤러리는 연일 크고 작은 전시로 시끌벅적하고,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0505에 들러 큼지막한 꽃다발을 안고 간다.
0505의 주인, 최진사네 셋째 딸 최영희.
그녀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명 최진사네 ATM.
그리고 못난이 오리, 연정오에게는 세상 단 하나뿐인 피터팬.
* * *
푸릇푸릇한 나뭇잎 향기가 가득한 6월, 알람보다 더 빠른 매미가 찌르찌르르 울며 아침이 밝았음을 알렸다. 이불은 진작 모서리로 밀려난 침대, 영희는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목청껏 울었다.
영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8시 정각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영희는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을 더듬었다. 알람은 멈췄으나 매미는 멈출 줄 모른다. 저 원수 같은 놈. 영희는 속으로 씨근덕거렸다.
2년 전 봄의 일이다. 드디어 자신만의 가게를 차린다는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영암동, 이 빨간 벽돌집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무엇보다도 영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 건 건물 앞에 비스듬히 선 키가 늘씬한 나무 한 그루였다. 쭉 뻗은 가지에 앉은 앙증맞은 참새가 새치름하게 지저귀었다. 영희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했다. 그리고 여름, 매미의 기습에 뼈저리게 후회했다.
“니 짝은 없어. 내 짝두.”
영희는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긁적이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저렇게 처절하게 울어 대는 것도 외로워서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나 집주인 허락을 받아 맘껏 꾸민 자신만의 아지트에도 찾아오는 사람 일절 없어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영희의 침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활짝 펼치고 헤엄쳐도 될 정도로 넓다.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최영희의 아침. 새벽 일찍 꽃시장 가는 날을 제외하면 오전 8시 기상,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바닥 타일 깨진 욕실이다.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나면 김이 뽀얗게 서린 거울을 뽀득뽀득 소리 나도록 문지르고 거기다 인사한다.
“힘내자, 내 인생.”
그리고 씩 웃으며,
“오늘 쫌 이쁘네.”
영희는 매일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다. 언젠가, 영희가 막 대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영희의 큰언니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말을 했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그래서 매일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자신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영희는 큰언니의 그 말을 법처럼 따르며 산다.
오전 10시, 영희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쭉 켰다. 탁 트인 하늘이 푸르고 높다. 깨끗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에 벌써 아지랑이가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기분 좋게 목이 타는 더위다. 밤새워 뒤척임에 뻣뻣하게 굳은 근육이 이완하며 열기가 스며들었다.
영희는 눈이 부신 여름을 사랑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 빗방울도. 한여름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뜨거움도 좋았다. 한껏 숨을 들이마시면,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이 실감 났다. 세상 모든 색채가 선명하고 진하게 물드는 것도 좋았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내딛는 계단이 오늘도 정겹다. 특별할 것 없는 낡은 계단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초록빛 내음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다.
영희는 가게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 키에 말쑥하게 생긴 남자였다. 오목조목 섬세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청량한 얼굴로 문 너머 불 꺼진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부터 눈이 시원하니, 오늘은 장사가 잘될 것 같다. 영희는 괜스레 들떴다. 혹독한 무더위, 여름은 꽃집 하는 사람들에게 보릿고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5월, 마지막 주가 되면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영희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갤러리를 끼고 있는 입지 덕분이다. 전시가 있을 때마다 꽃다발 사러 들르는 사람들이 영희 입에 풀칠이나마 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이제 막 오픈하거든요.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영희는 쪼르르 달려가서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남자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꽃다발 찾으시는 거죠?”
“아니요.”
남자가 산뜻하게 웃었다. 그는 영희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남자가 만들어 낸 그늘에 영희는 무더위를 까마득하게 잊는다. 나무 같은 사람이다.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그럼 혹시 따로 찾으시는 게…….”
“여기 있는 꽃 전부랑 최영희 씨 시간이요.”
“아, 네!”
영희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짓기만 했다. 근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이 남자 뭐야? 영희는 카드 키로 가게 보안을 해제하며 문득 생각했다.
“아하하. 제 시간요? 아하하하하.”
영희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영희는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삑― 〈경비가 해제되었습니다〉 인위적인 목소리가 그렇게 안내하고, 철커덕철커덕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아하하하. 아핫. 아하하하.”
영희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남자는 영희에게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눈동자는 옅은 노란빛과 초록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밝은 갈색이었다. 영희는 남자의 눈동자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하지만 워낙 잘생긴 사람이어서 막연히 친밀감이 드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네에, 손님. 잠시만요.”
영희는 쏜살같이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곧바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남들보다 갑절은 긴 다리로 냉큼 따라 들어왔다. 영희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카운터로 넘어가 포스기 전원을 켜는 척하며 밑으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저 범죄자 아닙니다.”
남자가 불쑥 말했다.
“네? 제가 뭐라고 했나요?”
영희는 활짝 웃으면서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문자로 신고하려고 하셨잖아요.”
“에이, 뭘 잘못 보셨겠죠. 제 동생한테 점심 먹었냐고 보내던 건데요.”
“톡이 아니라 문자로요? 그리고 아직 점심시간 아닌데요?”
“동생이 유별나서 피처 폰을 써요. 제 동생은 아점 먹어요.”
“그럼 수신인 112는 뭡니까?”
남자가 영희의 휴대 전화를 가리켰다. 갸름하고 깊은 눈매가 매섭다.
“돈 다 가져가셔도 되고, 이, 이것도 드릴게요, 얼마 안 되는데, 비싼 건 아닌데,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거거든요, 아끼는 거라구요. 제 친구가 준 거예요. 그니까 제발 이거 받고 가세요.”
영희는 허겁지겁 금고를 열어 지폐는 물론이거니와 동전까지 탈탈 털었다. 그리고 손목에 부적처럼 차고 있던 팔찌도 풀었다. 칼 든 미친놈 상대로 맞서는 거 아니라고 큰언니가 그랬다.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남자는 영희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에 서운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돈 많은데요.”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영희는 더더욱 어처구니없었다. 이 남자는 진짜다. 진짜 미친놈이다. 위기를 맞이하면 33년 평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기억에 남는 몇몇 일들이 15초짜리 하이라이트 클립 영상처럼 팡팡 떠올랐다.
남자가 갑자기 재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영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칼? 칼? 칼! 총? 아니지. 여기 미국 아니잖아. 근데 저 사람은 미쳤으니까 총이 튀어나올 수도 있어. 영희는 자기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었다. 바람만 불어도 주저앉을 정도였다.
마침내 남자가 야심만만하게 꺼낸 것은 총도 칼도 아닌 지갑이었고, 이어서 정직하게 찍은 증명사진이 떡하니 자리한 운전면허증이 튀어나왔다.
“최영희 씨, 전 이런 사람인데요.”
남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면허증 왼쪽 귀퉁이를 강조했다. 깨알같이 작은 굴림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1종대형
1종보통
영희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시선을 옮겼다.
자동차운전면허증(Driver's License)
……
연정오
……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운전자. 그가 실제로는 도로 한복판에서 분노의 질주를 하며 레이싱 영화를 찍건 말건,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다. 어쨌든 이제 이 남자의 이름이 연정오라는 걸 알았고, 나이가 서른 살이란 것도 알았다. 집 주소도 덤으로 알았다.
“아니, 저기요. 운전면허증은 왜 보여 줘요?”
영희가 높다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명함은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잖아요.”
남자는 쑥스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영희는 할 말을 잃었다. 1종대형 딴 거 자랑하는 건 잘난 척 아니고? 이 새끼 또라인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제 이름은 연정오입니다. 올해 서른 살이고, 「매드 덕MAD DUCK」이라고 카페부터 파인 다이닝까지 음식점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데, 음…… 그것 말고 몇 개 더 있는데 처음부터 다 말하면 너무 과하니까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고, 어, 자상하신 아버지와 엄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 누나도 있는데, 음, 키는 189㎝…….”
정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긴장했는지 그의 턱이 아주 살짝 떨렸다.
“딱 봐도 디게 키 커 보이시는데요. 뭘 굳이 말하고 그러세요.”
“몸무게는…….”
“아, 됐어! 됐어요! 왜 자꾸 묻지도 않은 신변잡기를 푸세요?”
영희는 더는 듣기 싫다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마트 가서 라면 살 때도 봉지 뒤에 칼로리랑 영양 성분표 보잖아요.”
정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정직한 얼굴이 어찌나 믿음직해 보이는지, 영희는 하마터면 그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설득당할 뻔했다. 영희는 얼어붙어서 고개만 내저었다. 그러자 정오가 대뜸 재킷을 벗었다. 영희는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왜 벗어! 왜 벗어! 왜 벗어! 이 사람 미쳤나 봐! 아, 왜 벗어!”
“흉기랑 둔기 소지한 거 없다고 보여 드리려고요. 저 순수한 맨몸입니다.”
정오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1. 청포도 사탕 자리
서울 어딘가에 특별한 곳이 있다. 바로 알록달록 꽃이 피는 향기롭고 소담한 동네 영암동.
영암동 어귀 내리막길에 떡하니 들어선 3층짜리 아담한 빨간 벽돌 건물 1층에는 꽃집 0505와 카페 안달루시아가, 2층에는 꽃집 주인 최영희가, 그리고 3층에는 건물주인 최정임 여사가 산다.
꽃집 「0505」.
2년 전 영암동에 자리 잡아 지금은 영암동 예술 거리 이정표가 된 곳. 널따란 대로를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줄줄 늘어선 갤러리는 연일 크고 작은 전시로 시끌벅적하고,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0505에 들러 큼지막한 꽃다발을 안고 간다.
0505의 주인, 최진사네 셋째 딸 최영희.
그녀의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명 최진사네 ATM.
그리고 못난이 오리, 연정오에게는 세상 단 하나뿐인 피터팬.
* * *
푸릇푸릇한 나뭇잎 향기가 가득한 6월, 알람보다 더 빠른 매미가 찌르찌르르 울며 아침이 밝았음을 알렸다. 이불은 진작 모서리로 밀려난 침대, 영희는 귀를 틀어막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목청껏 울었다.
영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8시 정각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영희는 손을 뻗어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을 더듬었다. 알람은 멈췄으나 매미는 멈출 줄 모른다. 저 원수 같은 놈. 영희는 속으로 씨근덕거렸다.
2년 전 봄의 일이다. 드디어 자신만의 가게를 차린다는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영암동, 이 빨간 벽돌집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무엇보다도 영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 건 건물 앞에 비스듬히 선 키가 늘씬한 나무 한 그루였다. 쭉 뻗은 가지에 앉은 앙증맞은 참새가 새치름하게 지저귀었다. 영희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했다. 그리고 여름, 매미의 기습에 뼈저리게 후회했다.
“니 짝은 없어. 내 짝두.”
영희는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마구 긁적이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저렇게 처절하게 울어 대는 것도 외로워서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나 집주인 허락을 받아 맘껏 꾸민 자신만의 아지트에도 찾아오는 사람 일절 없어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영희의 침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활짝 펼치고 헤엄쳐도 될 정도로 넓다.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최영희의 아침. 새벽 일찍 꽃시장 가는 날을 제외하면 오전 8시 기상,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바닥 타일 깨진 욕실이다.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나면 김이 뽀얗게 서린 거울을 뽀득뽀득 소리 나도록 문지르고 거기다 인사한다.
“힘내자, 내 인생.”
그리고 씩 웃으며,
“오늘 쫌 이쁘네.”
영희는 매일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다. 언젠가, 영희가 막 대학교에 진학했을 무렵, 영희의 큰언니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말을 했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그래서 매일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자신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영희는 큰언니의 그 말을 법처럼 따르며 산다.
오전 10시, 영희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기지개를 쭉 켰다. 탁 트인 하늘이 푸르고 높다. 깨끗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위에 벌써 아지랑이가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기분 좋게 목이 타는 더위다. 밤새워 뒤척임에 뻣뻣하게 굳은 근육이 이완하며 열기가 스며들었다.
영희는 눈이 부신 여름을 사랑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 빗방울도. 한여름 숨이 턱턱 막히는 그 뜨거움도 좋았다. 한껏 숨을 들이마시면,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이 실감 났다. 세상 모든 색채가 선명하고 진하게 물드는 것도 좋았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내딛는 계단이 오늘도 정겹다. 특별할 것 없는 낡은 계단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 칸, 한 칸 내려갈수록 초록빛 내음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다.
영희는 가게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 키에 말쑥하게 생긴 남자였다. 오목조목 섬세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청량한 얼굴로 문 너머 불 꺼진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부터 눈이 시원하니, 오늘은 장사가 잘될 것 같다. 영희는 괜스레 들떴다. 혹독한 무더위, 여름은 꽃집 하는 사람들에게 보릿고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5월, 마지막 주가 되면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영희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갤러리를 끼고 있는 입지 덕분이다. 전시가 있을 때마다 꽃다발 사러 들르는 사람들이 영희 입에 풀칠이나마 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이제 막 오픈하거든요.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영희는 쪼르르 달려가서 인사했다.
“괜찮습니다.”
남자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꽃다발 찾으시는 거죠?”
“아니요.”
남자가 산뜻하게 웃었다. 그는 영희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남자가 만들어 낸 그늘에 영희는 무더위를 까마득하게 잊는다. 나무 같은 사람이다. 선선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그럼 혹시 따로 찾으시는 게…….”
“여기 있는 꽃 전부랑 최영희 씨 시간이요.”
“아, 네!”
영희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짓기만 했다. 근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이 남자 뭐야? 영희는 카드 키로 가게 보안을 해제하며 문득 생각했다.
“아하하. 제 시간요? 아하하하하.”
영희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영희는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삑― 〈경비가 해제되었습니다〉 인위적인 목소리가 그렇게 안내하고, 철커덕철커덕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아하하하. 아핫. 아하하하.”
영희는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남자는 영희에게 몸을 기울였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눈동자는 옅은 노란빛과 초록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밝은 갈색이었다. 영희는 남자의 눈동자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하지만 워낙 잘생긴 사람이어서 막연히 친밀감이 드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네에, 손님. 잠시만요.”
영희는 쏜살같이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곧바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남자가 남들보다 갑절은 긴 다리로 냉큼 따라 들어왔다. 영희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카운터로 넘어가 포스기 전원을 켜는 척하며 밑으로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저 범죄자 아닙니다.”
남자가 불쑥 말했다.
“네? 제가 뭐라고 했나요?”
영희는 활짝 웃으면서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문자로 신고하려고 하셨잖아요.”
“에이, 뭘 잘못 보셨겠죠. 제 동생한테 점심 먹었냐고 보내던 건데요.”
“톡이 아니라 문자로요? 그리고 아직 점심시간 아닌데요?”
“동생이 유별나서 피처 폰을 써요. 제 동생은 아점 먹어요.”
“그럼 수신인 112는 뭡니까?”
남자가 영희의 휴대 전화를 가리켰다. 갸름하고 깊은 눈매가 매섭다.
“돈 다 가져가셔도 되고, 이, 이것도 드릴게요, 얼마 안 되는데, 비싼 건 아닌데,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거거든요, 아끼는 거라구요. 제 친구가 준 거예요. 그니까 제발 이거 받고 가세요.”
영희는 허겁지겁 금고를 열어 지폐는 물론이거니와 동전까지 탈탈 털었다. 그리고 손목에 부적처럼 차고 있던 팔찌도 풀었다. 칼 든 미친놈 상대로 맞서는 거 아니라고 큰언니가 그랬다.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남자는 영희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에 서운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돈 많은데요.” 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영희는 더더욱 어처구니없었다. 이 남자는 진짜다. 진짜 미친놈이다. 위기를 맞이하면 33년 평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기억에 남는 몇몇 일들이 15초짜리 하이라이트 클립 영상처럼 팡팡 떠올랐다.
남자가 갑자기 재킷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영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칼? 칼? 칼! 총? 아니지. 여기 미국 아니잖아. 근데 저 사람은 미쳤으니까 총이 튀어나올 수도 있어. 영희는 자기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었다. 바람만 불어도 주저앉을 정도였다.
마침내 남자가 야심만만하게 꺼낸 것은 총도 칼도 아닌 지갑이었고, 이어서 정직하게 찍은 증명사진이 떡하니 자리한 운전면허증이 튀어나왔다.
“최영희 씨, 전 이런 사람인데요.”
남자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면허증 왼쪽 귀퉁이를 강조했다. 깨알같이 작은 굴림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1종대형
1종보통
영희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시선을 옮겼다.
자동차운전면허증(Driver's License)
……
연정오
……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운전자. 그가 실제로는 도로 한복판에서 분노의 질주를 하며 레이싱 영화를 찍건 말건,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다. 어쨌든 이제 이 남자의 이름이 연정오라는 걸 알았고, 나이가 서른 살이란 것도 알았다. 집 주소도 덤으로 알았다.
“아니, 저기요. 운전면허증은 왜 보여 줘요?”
영희가 높다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명함은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잖아요.”
남자는 쑥스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영희는 할 말을 잃었다. 1종대형 딴 거 자랑하는 건 잘난 척 아니고? 이 새끼 또라인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제 이름은 연정오입니다. 올해 서른 살이고, 「매드 덕MAD DUCK」이라고 카페부터 파인 다이닝까지 음식점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데, 음…… 그것 말고 몇 개 더 있는데 처음부터 다 말하면 너무 과하니까 나중에 차차 말씀드리고, 어, 자상하신 아버지와 엄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 누나도 있는데, 음, 키는 189㎝…….”
정오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긴장했는지 그의 턱이 아주 살짝 떨렸다.
“딱 봐도 디게 키 커 보이시는데요. 뭘 굳이 말하고 그러세요.”
“몸무게는…….”
“아, 됐어! 됐어요! 왜 자꾸 묻지도 않은 신변잡기를 푸세요?”
영희는 더는 듣기 싫다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
“마트 가서 라면 살 때도 봉지 뒤에 칼로리랑 영양 성분표 보잖아요.”
정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정직한 얼굴이 어찌나 믿음직해 보이는지, 영희는 하마터면 그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설득당할 뻔했다. 영희는 얼어붙어서 고개만 내저었다. 그러자 정오가 대뜸 재킷을 벗었다. 영희는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왜 벗어! 왜 벗어! 왜 벗어! 이 사람 미쳤나 봐! 아, 왜 벗어!”
“흉기랑 둔기 소지한 거 없다고 보여 드리려고요. 저 순수한 맨몸입니다.”
정오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