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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벗지 마! 벗지 마! 너! 벗지 마! 벗지 마! 벗으면 아주 큰일 날 줄 알아! 네가 큰일 나! 알겠어? 어! 알겠냐고! 아주 큰일 나요! 씁! 큰일 나! 어허! 이 사람!”
영희는 정신없이 삿대질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네.”
정오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근데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쫌만 더 냅둘 걸 그랬나. 영희는 얇은 셔츠 아래로 언뜻 보이는 정오의 탄탄한 몸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아쉬워했다. 정오는 영희의 시선이 닿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영희의 칭찬 아닌 칭찬에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도, 돈은 많으시죠? 부족하신 거 없죠? 사채업자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혹시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조용히 넥타이 끝을 접어 주세요.”
영희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신인 112가 찍힌 휴대 전화를 슬쩍 흔들었다.
“돈은 아쉽지 않을 만큼 있고,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대부업입니다.”
정오는 인상을 찡그렸다. 대부업이란 말을 입에 담기도 싫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럼 뭣 땜시! 뭣 때문에!”
“최영희 씨한테 은혜 갚으러 왔는데요.”
“네?”
“내친김에 서로 잘 되는 것도 노리고 있고.”
“네?”
“최영희 씨,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같이 밥 먹고 싶은데.”
연정오는 얼음이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차가운 탄산음료처럼 청량하게 웃었다. 답답한 속이 시원하다 못해 아릿아릿 아파 오며, 마음속에 켜켜이 묵은 미운 때까지 쓸어내리는 그런 청량함.
“그리고 영희 씨. 제가 큰일이 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저한테 좋은 일인가요? 다시 벗을까요? 저 유리창 말입니다. 밖에서 잘 보이던데 괜찮나요?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근데 영희 씨는 괜찮아요? 저는 가만히 있을까요?”
정오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를 내비치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물비늘처럼 반짝반짝했다. 광대뼈가 보기 좋게 잡힌 뺨은 어린애처럼 붉었다.
영희는 가게 구석에 세워 놓은 커다란 빗자루를 마치 장수처럼 들었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영희는 눈을 질끈 감고 빗자루를 힘껏 휘둘렀다.
학창 시절 삼국지에 푹 빠져 살았던 최영희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은 관우였다. 관우를 가리켜 대춧빛 얼굴이라는 묘사를 본 그 순간, 영희는 사랑에 빠졌다.
〈관우는 어떻게 이름도 관우지?〉 영희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영희가 가장 좋아했던 게임도 삼국지 시리즈였다. 거기서 관우가 청룡언월도라는 무기를 휘둘렀다. 영희는 거기에 크게 감명해서 남들 몰래 빗자루를 언월도 삼아 휘두르고 놀았는데, 실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연정오를 쫓아낼 정돈 됐다.
* * *
오후 12시 32분, 성문대학교 병원 구내식당. 다른 사람들 시선일랑 의식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식사인 것처럼 치열하게 숟가락으로 국에 만 밥을 푹푹 뜨는 사람이 있다. 간담췌외과 의사 연라사다.
몇 날 며칠 잠들지 못하고 쫄쫄 굶었던 레지던트 시절의 숱한 고생으로 라사는 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뭐든 입에 욱여넣는다. 벽에 기대서서 쪽잠을 자는 법도 습득했다. 주변에서 아귀니, 식신이니 놀려도 개의치 않는다. 단 1분이라도 좋다. 황금 같은 기회를 허투루 쓸 수 없다.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체력이 달려서 수술 도중 실수라도 하면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 라사는 그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연 선생님! 호출요.”
동료의 진석모가 식당 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라사를 불렀다. 진석모는 목소리 큰 거로는 성문대학교 병원 제일이다. 그가 레지던트로 갈려 나가던 시절, 동료 의사들이 진석모는 과연 몇 데시벨까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내기를 했던 적도 있다.
“코드 블루? 전 호출 못 받았는데요.”
라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드 블루면 누구라도 큰일이다. 심장 마비를 뜻하기 때문이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혈색이 돌던 라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과 같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아뇨, 동생분.”
석모가 이상스럽게 웃었다.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곳 성문대학교 병원에서 연라사의 동생, 연정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라사와 왕래가 잦은 의사라면 다 알고 있다.
연정오는 일단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커서 어디를 가나 눈에 들어오고, 그 얼굴도 단연 눈에 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듣는 사람의 발을 붙잡아 놓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연정오와 비즈니스 외 화제로 10분 이상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조금씩 그가 어딘가 유별난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고, 제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1시간이 지나면 기함하며 달아나게 된다. 석모도 그 피해자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악의를 품고 남을 해치려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글쎄, 이 사람 좀 아니올시다…… 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러는가?’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는 인물.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오였다.
“아, 네. 알았어요.”
석모의 말에 라사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라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유별난 제 동생 뒤치다꺼리에 이골이 났다. 동생을 꺼리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쁜 놈은 아닌데, 내 동생 나쁜 놈은 아닌데. 그래. 나쁘지 않은 또라이지.
연라사는 남들보다 유난히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껑충한 동생이 보였다.
“야! 바빠 죽겠는데 왜 찾아와! 촛불처럼 꺼질래 아님 걍 꺼질래!”
라사는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기세는 곧 꺾이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재킷은 먼지투성이에 얼굴은 그보다 더 침울한 정오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어라 더 소리 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나, 나 쫓겨났어.”
정오가 힘없이 말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당장에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짜고짜 뭔 소리야.”
“찾아갔는데, 차였어.”
“뭔 소리냐고.”
라사는 자꾸만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는 정오가 답답했다.
“피터팬한테 차였어.”
“……피터팬? 누구? 아, 설마 진짜 그 사람 만나러 간 거니? 어떻게 찾은 거야?”
피터팬. 라사는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놀랐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겨울. 15세 야구 소년 연정오는 세상이 무너지도록 펑펑 울었다. 갓난아기 때도 거의 울지 않아 〈얘는 참 순하네, 키우기 수월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정오다. 다른 의미로 키우기 벅찬 아이였지만.
모쪼록 넘어져도 울지 않고, 주사 맞을 때도 울지 않고, 어지간히 속상한 일이 아니고서는 티도 안 내던 아이가 서럽게 울어 대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부모님은 쩔쩔매고, 라사도 너무 놀라서 덩달아 울었을 정도다.
하도 울어서 숨을 껄떡거리는 정오에게 대체 왜 우냐고 물어보니 피터팬이 떠났다며 이제 네버랜드로 갈 수 없다고 엉뚱한 소릴 늘어놓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눈물을 그친 정오는 어머니가 준 백지에다가 일목요연하게 진술했다. 중요한 일이라면 문서로 작성해서 기록을 남기는 건 라사와 정오네 집만의 독특한 가풍이었다. 어머니 예지미가 검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십 년간 형사부에 몸담으며 온갖 악랄한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운 검사. 라사는 아직도 엄마와 진술서 쓸 때 앉는 생각 의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15세 연정오의 첫 번째 진술서.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가 피터팬을 만났다. 피터팬이 나를 네버랜드로 데려가 줬다. 비엔나소시지도 구워 주고, 청포도 사탕도 줬다. 맛있는 거 많이 주고 같이 게임도 하고 놀았다.
나는 피터팬에게 반했다. 피터팬은 멋있다. 피터팬이 가스레인지 앞에 서면 맛있는 게 척척 나온다. 피터팬은 뭘 먹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는다.
근데 오늘 피터팬이 사라졌다.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요원이 누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슬프다.
예지미는 이런 진술서는 받아 줄 수 없다며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쓰라고 했다. 정오는 흐르다 만 눈물을 쓱쓱 닦으며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눌러썼다. 그렇게 정오는 총 세 장의 눈물로 얼룩진 진술서를 썼고, 가족들은 정오에게 첫사랑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문제는 그 첫사랑이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 15년 동안 연정오는 잃어버린 네버랜드와 떠나 버린 피터팬을 찾아 모험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다. 고집이 쇠심줄이었다.
연라사는 그런 동생이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짠해서 일단 누구라도 먼저 만나 보고 사랑이 뭔지 알아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말했던 적이 있다. 그때, 정오 대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사람이랑 처음으로 사랑해 보고. 처음으로 연애해 보고. 그 사람 통해서 배우고 싶어. 잘 안되면…… 괜찮아. 그 사람이랑 잘 안 풀린 거고. 잘되면 좋아. 그 사람이랑 잘된 거야. 행복하지.〉
가슴에 콱 박히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모를 정오가 처음으로 제 속을 훤히 보여 준 순간이기도 했다. 라사는 그날부터 정오가 피터팬을 찾는 걸 응원해 주기로 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따라 설명해 줄래?”
하지만 걸핏하면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동생 골리는 재미도 포기할 순 없다. 라사는 이죽거리면서 캐물었다.
“…….”
정오는 침묵했다. 죽었다가 깨도 영희한테 빗자루로 얻어맞아 쫓겨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라사가 알게 되면 두고두고 놀려 먹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벌써 저 가느다랗게 흘긴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아, 연토끼야, 내 동생 연토끼야…… 누나가 네 등치로 다짜고짜 들이대면 누구라도 겁먹는다고 그랬잖아. 가련한 토끼야.”
이 자식 이거 툭 치기만 해도 사람 죽는다며 난리 치겠는데. 라사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정오의 어깨를 다독이며 다정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남들 보기에는 조롱이어도 남매 사이엔 위로다.
연토끼는 정오의 별명이다. 연정오·또라이·새끼의 줄임말. 정오가 오너로 있는 파인 다이닝 「플래티늄」의 헤드 셰프 나관율이 지어 준 별명인데, 연정오라는 사람을 단 세 글자로 압축한 기가 막힌 별명이다. 이제는 정오의 가족들도 종종 정오를 토끼라고 부른다.
“또 말 그렇게 하지. 아버지한테 이른다.”
정오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
“벗지 마! 벗지 마! 너! 벗지 마! 벗지 마! 벗으면 아주 큰일 날 줄 알아! 네가 큰일 나! 알겠어? 어! 알겠냐고! 아주 큰일 나요! 씁! 큰일 나! 어허! 이 사람!”
영희는 정신없이 삿대질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네.”
정오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근데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쫌만 더 냅둘 걸 그랬나. 영희는 얇은 셔츠 아래로 언뜻 보이는 정오의 탄탄한 몸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아쉬워했다. 정오는 영희의 시선이 닿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영희의 칭찬 아닌 칭찬에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도, 돈은 많으시죠? 부족하신 거 없죠? 사채업자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혹시 누군가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조용히 넥타이 끝을 접어 주세요.”
영희는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신인 112가 찍힌 휴대 전화를 슬쩍 흔들었다.
“돈은 아쉽지 않을 만큼 있고,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대부업입니다.”
정오는 인상을 찡그렸다. 대부업이란 말을 입에 담기도 싫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럼 뭣 땜시! 뭣 때문에!”
“최영희 씨한테 은혜 갚으러 왔는데요.”
“네?”
“내친김에 서로 잘 되는 것도 노리고 있고.”
“네?”
“최영희 씨,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같이 밥 먹고 싶은데.”
연정오는 얼음이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차가운 탄산음료처럼 청량하게 웃었다. 답답한 속이 시원하다 못해 아릿아릿 아파 오며, 마음속에 켜켜이 묵은 미운 때까지 쓸어내리는 그런 청량함.
“그리고 영희 씨. 제가 큰일이 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저한테 좋은 일인가요? 다시 벗을까요? 저 유리창 말입니다. 밖에서 잘 보이던데 괜찮나요?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근데 영희 씨는 괜찮아요? 저는 가만히 있을까요?”
정오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를 내비치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물비늘처럼 반짝반짝했다. 광대뼈가 보기 좋게 잡힌 뺨은 어린애처럼 붉었다.
영희는 가게 구석에 세워 놓은 커다란 빗자루를 마치 장수처럼 들었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영희는 눈을 질끈 감고 빗자루를 힘껏 휘둘렀다.
학창 시절 삼국지에 푹 빠져 살았던 최영희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은 관우였다. 관우를 가리켜 대춧빛 얼굴이라는 묘사를 본 그 순간, 영희는 사랑에 빠졌다.
〈관우는 어떻게 이름도 관우지?〉 영희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영희가 가장 좋아했던 게임도 삼국지 시리즈였다. 거기서 관우가 청룡언월도라는 무기를 휘둘렀다. 영희는 거기에 크게 감명해서 남들 몰래 빗자루를 언월도 삼아 휘두르고 놀았는데, 실력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연정오를 쫓아낼 정돈 됐다.
* * *
오후 12시 32분, 성문대학교 병원 구내식당. 다른 사람들 시선일랑 의식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식사인 것처럼 치열하게 숟가락으로 국에 만 밥을 푹푹 뜨는 사람이 있다. 간담췌외과 의사 연라사다.
몇 날 며칠 잠들지 못하고 쫄쫄 굶었던 레지던트 시절의 숱한 고생으로 라사는 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뭐든 입에 욱여넣는다. 벽에 기대서서 쪽잠을 자는 법도 습득했다. 주변에서 아귀니, 식신이니 놀려도 개의치 않는다. 단 1분이라도 좋다. 황금 같은 기회를 허투루 쓸 수 없다.
단지 자신만을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체력이 달려서 수술 도중 실수라도 하면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 라사는 그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
“연 선생님! 호출요.”
동료의 진석모가 식당 입구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라사를 불렀다. 진석모는 목소리 큰 거로는 성문대학교 병원 제일이다. 그가 레지던트로 갈려 나가던 시절, 동료 의사들이 진석모는 과연 몇 데시벨까지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내기를 했던 적도 있다.
“코드 블루? 전 호출 못 받았는데요.”
라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코드 블루면 누구라도 큰일이다. 심장 마비를 뜻하기 때문이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혈색이 돌던 라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터 한복판과 같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아뇨, 동생분.”
석모가 이상스럽게 웃었다. 약간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곳 성문대학교 병원에서 연라사의 동생, 연정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어도 라사와 왕래가 잦은 의사라면 다 알고 있다.
연정오는 일단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커서 어디를 가나 눈에 들어오고, 그 얼굴도 단연 눈에 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듣는 사람의 발을 붙잡아 놓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연정오와 비즈니스 외 화제로 10분 이상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조금씩 그가 어딘가 유별난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고, 제아무리 둔한 사람이어도 1시간이 지나면 기함하며 달아나게 된다. 석모도 그 피해자다.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악의를 품고 남을 해치려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글쎄, 이 사람 좀 아니올시다…… 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러는가?’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는 인물.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오였다.
“아, 네. 알았어요.”
석모의 말에 라사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라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유별난 제 동생 뒤치다꺼리에 이골이 났다. 동생을 꺼리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쁜 놈은 아닌데, 내 동생 나쁜 놈은 아닌데. 그래. 나쁘지 않은 또라이지.
연라사는 남들보다 유난히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껑충한 동생이 보였다.
“야! 바빠 죽겠는데 왜 찾아와! 촛불처럼 꺼질래 아님 걍 꺼질래!”
라사는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 기세는 곧 꺾이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지고, 재킷은 먼지투성이에 얼굴은 그보다 더 침울한 정오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어라 더 소리 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나, 나 쫓겨났어.”
정오가 힘없이 말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당장에라도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짜고짜 뭔 소리야.”
“찾아갔는데, 차였어.”
“뭔 소리냐고.”
라사는 자꾸만 영문 모를 말을 늘어놓는 정오가 답답했다.
“피터팬한테 차였어.”
“……피터팬? 누구? 아, 설마 진짜 그 사람 만나러 간 거니? 어떻게 찾은 거야?”
피터팬. 라사는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놀랐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겨울. 15세 야구 소년 연정오는 세상이 무너지도록 펑펑 울었다. 갓난아기 때도 거의 울지 않아 〈얘는 참 순하네, 키우기 수월하겠다〉는 말을 들었던 정오다. 다른 의미로 키우기 벅찬 아이였지만.
모쪼록 넘어져도 울지 않고, 주사 맞을 때도 울지 않고, 어지간히 속상한 일이 아니고서는 티도 안 내던 아이가 서럽게 울어 대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부모님은 쩔쩔매고, 라사도 너무 놀라서 덩달아 울었을 정도다.
하도 울어서 숨을 껄떡거리는 정오에게 대체 왜 우냐고 물어보니 피터팬이 떠났다며 이제 네버랜드로 갈 수 없다고 엉뚱한 소릴 늘어놓았다.
한참 후에야 겨우 눈물을 그친 정오는 어머니가 준 백지에다가 일목요연하게 진술했다. 중요한 일이라면 문서로 작성해서 기록을 남기는 건 라사와 정오네 집만의 독특한 가풍이었다. 어머니 예지미가 검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십 년간 형사부에 몸담으며 온갖 악랄한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운 검사. 라사는 아직도 엄마와 진술서 쓸 때 앉는 생각 의자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15세 연정오의 첫 번째 진술서.
비 오는 날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가 피터팬을 만났다. 피터팬이 나를 네버랜드로 데려가 줬다. 비엔나소시지도 구워 주고, 청포도 사탕도 줬다. 맛있는 거 많이 주고 같이 게임도 하고 놀았다.
나는 피터팬에게 반했다. 피터팬은 멋있다. 피터팬이 가스레인지 앞에 서면 맛있는 게 척척 나온다. 피터팬은 뭘 먹을 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는다.
근데 오늘 피터팬이 사라졌다. 어디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요원이 누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슬프다.
예지미는 이런 진술서는 받아 줄 수 없다며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 쓰라고 했다. 정오는 흐르다 만 눈물을 쓱쓱 닦으며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눌러썼다. 그렇게 정오는 총 세 장의 눈물로 얼룩진 진술서를 썼고, 가족들은 정오에게 첫사랑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문제는 그 첫사랑이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 15년 동안 연정오는 잃어버린 네버랜드와 떠나 버린 피터팬을 찾아 모험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다. 고집이 쇠심줄이었다.
연라사는 그런 동생이 한심하고, 한편으로는 짠해서 일단 누구라도 먼저 만나 보고 사랑이 뭔지 알아 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말했던 적이 있다. 그때, 정오 대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사람이랑 처음으로 사랑해 보고. 처음으로 연애해 보고. 그 사람 통해서 배우고 싶어. 잘 안되면…… 괜찮아. 그 사람이랑 잘 안 풀린 거고. 잘되면 좋아. 그 사람이랑 잘된 거야. 행복하지.〉
가슴에 콱 박히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모를 정오가 처음으로 제 속을 훤히 보여 준 순간이기도 했다. 라사는 그날부터 정오가 피터팬을 찾는 걸 응원해 주기로 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에 따라 설명해 줄래?”
하지만 걸핏하면 사람 속 뒤집어 놓는 동생 골리는 재미도 포기할 순 없다. 라사는 이죽거리면서 캐물었다.
“…….”
정오는 침묵했다. 죽었다가 깨도 영희한테 빗자루로 얻어맞아 쫓겨났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라사가 알게 되면 두고두고 놀려 먹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벌써 저 가느다랗게 흘긴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아, 연토끼야, 내 동생 연토끼야…… 누나가 네 등치로 다짜고짜 들이대면 누구라도 겁먹는다고 그랬잖아. 가련한 토끼야.”
이 자식 이거 툭 치기만 해도 사람 죽는다며 난리 치겠는데. 라사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정오의 어깨를 다독이며 다정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남들 보기에는 조롱이어도 남매 사이엔 위로다.
연토끼는 정오의 별명이다. 연정오·또라이·새끼의 줄임말. 정오가 오너로 있는 파인 다이닝 「플래티늄」의 헤드 셰프 나관율이 지어 준 별명인데, 연정오라는 사람을 단 세 글자로 압축한 기가 막힌 별명이다. 이제는 정오의 가족들도 종종 정오를 토끼라고 부른다.
“또 말 그렇게 하지. 아버지한테 이른다.”
정오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