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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어찌 되었나 당연히 염려가 되었다.”

‘당연히’라니. 가슴이 주책없이 쿵쾅거렸다.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 버는 대로 갚기로 하였습지요.”

근심을 풀어 주려 큰소리를 쳤다가는 그 많은 돈을 어찌 변제받았나 하여 더 이상스레 여길까 싶어 급히 그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대군은 역시나 짠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번에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잠시 나갈 짬이 되는지 모르겠다. 여기는 너무 번잡스러워서.”

“예, 그러시지요.”

그러잖아도 저만치서 눈을 부릅뜨고 서 계신 둘째와 셋째 오라버니의 시선이 불편하던 차이니 잘되었다.

서둘러 길을 잡으며 슬쩍 돌아보니, 오라버니들이 더욱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자칫 뒤라도 쫓을 기세인지라, 서리는 등 뒤로 무작정 마다하는 손짓을 하며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혹여 뒤를 따를까 해서였다.

“점심은 자셨습니까? 제가 괜찮게 하는 국밥집을 압니다만. 아, 설마 대군 대감께 주막서 국밥을 드시라 권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건가요?”

그 집이 하도 맛나서 드린 말씀이고 또 안경을 쓰고 사사건건 마주 내지르던 때와 달리 정말 염려되어 여쭌 것인데, 오해하시면 어쩌지?

八자 눈썹이 되어 올려다보니, 대군께서 다행히 웃으신다.

“대군은 사람 아니냐. 앞장서라.”

주막이나 상단이나 사람이 들고 나는 통에 번잡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실긋 내려다보고 싱긋 올려다봄을 거듭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 모두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김 내관이 저도 모르게 하품을 하다 입을 가렸다.

점심 즈음에 만나 벌써 밤이 이슥해질 시간이니, 졸릴 법도 하였다.

하지만 주막의 평상에 대군과 마주 앉은 서리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가 어찌나 재미난 이야기 상대이던지.

책이면 책, 거문고면 거문고, 청이며 왜국 할 것 없이 박학다식한 대군은 서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척척 장단을 맞추고 더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루가 아니라 백 일을 함께해도 재미가 줄지 않을 성싶었다.

제가 모르는 세상이며 책들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진 서리와 달리 대군께서는 서리의 사정이 궁금하신지 개인적인 것도 물으셨다.

“그래서 조실부모한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아…… 사, 삼년상을 마치고 상단에 합류한 것이 지난해로 사신단이 출발할 즈음이었습니다.”

거짓말이란 언제고 들통이 나기 마련이라지만, 혹여 나중에라도 대군이 제 거짓에 대해 알게 되어 서운해하지 않도록 서리는 신중하게 앞뒤를 맞춰 가며 말을 지어냈다.

그런데 ‘나중에’라니? 서리는 자신이 대군을 또 볼 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보겠다고 볼 수 있는 신분은 아니지만, 또 보고 싶은 것이다.

“형제도 없는데 5촌 당숙이라도 제대로 두어 다행이구먼.”

청에서 오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신 것이다.

상단에 투입될 때 그리 말을 맞추었었다. 아버지는 5촌 당숙으로, 오라버니들은 6촌 형님으로.

자신에 대해 그렇게 알은척을 해 주시니 다시금 가슴이 간질거렸다. 하루 종일 몇 번이나 그랬는데, 그때마다 배시시 웃음이 났다.

오라버니들이 저를 챙겨 주는 것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물론 그 그늘에서 거저 먹고살 생각은 아니었지만, 제가 어리석어 일이 수월히 풀리질 않고 있습니다.”

400냥 이야기였다. 낮에 저를 염려하던 그 시선을 다시 받고 싶은 마음에 슬쩍 끄집어낸 것이다.

“내가 오 행수에게 돈을 보내 주마.”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보내 줄 기세였다.

“아, 아닙니다! 대군 대감께 진 빚은 빚이 아니랍니까?”

아유, 괜히 말 꺼냈다가 일이 커질 분위기였다.

“내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요.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마무리하는 것도 맞지요. 그래야 또 그런 짓을 벌이지 않습지요.”

허겁지겁 주워섬기는데 다행히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대군의 표정에 기특함이 담겼다.

어라? 이 얼굴도 보기 좋은데? 가만? 대군이 보여 주는 것은 뭐든 다 좋은 건가? 청으로 갈 때는 그리 밉상이던 양반인데 어쩌다가……? 설마 내가 변한 건가?

제 어이없는 생각에 자조적으로 허허거리니, 대군께서 정색을 하고 보셨다.

“그런 짓이라니? 넌 그 기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은 것을 어찌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만약 기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속인 이의 잘못이지, 그이를 도와준 네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

제 마음이 딱 그것이었다. 기녀의 사연을 다들 의심쩍어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부모님에 대한 마지막 효를 다하기 위해 그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뚱이를 내놓은 이의 인생이 얼마나 가련해지는 것인지.

자신도 그이를 전적으로 믿지는 못했지만, 그 한 가닥 가능성 때문에 그 큰돈을 덥석 건넸던 것이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신 분은 처음이었다. 남들은 물론이요, 아버님이며 형님들 모두 제게 손가락질하고 쥐어박는 말씀만 하셨는데.

그이가 저를 속인 것이면 어쩌나 하던 불신의 마음조차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심 어린 말을 주고받았다 생각했는데, 탁주 잔을 집어 드는 대군의 얼굴이 어쩐지 씁쓸했다.

그래서 서리가 싹싹하게 호리병을 들어 얼른 빈 잔을 채워 드렸다.

4월도 얼추 기울어 가는 즈음, 화창하던 낮과는 달리 밤은 꽤 쌀쌀했다.

탁주로나마 몸을 덥혀야겠다는 생각에 제 빈 잔에도 술을 따르려 하니 대군께서 호리병을 받아 들었다.

쪼르륵 술 떨어지는 소리마저 황공했다. 술잔의 반만 채워 주시어 서운했지만.

고개를 돌리고 홀짝 마시니, 적어 그런지 아니면 대군께서 따라 주시어 그런지 술이 다디달았다.

그때, 저만치 떨어진 투전판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예끼, 이 사람! 내가 왜 가진 것이 없어? 이번에는 마누라를 걸겠네!”

보나 마나 가진 돈을 다 잃은 이의 허세일 테지만, 귀가 솔깃하여 고개가 돌아갔다.

“자네가 걸고 싶다고 거는 겐가? 내가 자네 마누라를 따고 싶어야 말이지.”

“내 마누라가 얼마나 고운데!”

그리 고운 마누라를 고작 투전판에 건다고? 그 마누라도 딱하구먼.

“어허, 이 사람. 눈에 콩깍지가 씌었나.”

왁자지껄 웃음이 터지는 것을 끝으로 고개를 바로 하던 서리는 마찬가지로 대군의 시선도 그쪽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제 일을 염려하던 아까와 달리 무심한 표정이었다.

“돈이 없으면 그만 일어나면 될 것이지, 어찌 마누라를 건답니까?”

“그러게.”

역시나 무심히 동의하는 대군의 모습에 서리는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대군 대감께서는 혼인을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이런저런 것을 여쭈던 것과는 달랐다. 반드시 알고 싶었다. 약관은 넘기신 것으로 알고 있으니 벌써 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아직.”

그 답을 듣고 나서야, 서리는 자신이 그 말을 무척이나 고대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탁주 잔을 집어 들었다가, 빈 잔만 핥고 내려놓자, 대군께서 다시 술을 따라 주셨다. 역시나 반만.

“석동이, 너도 아직이겠지?”

“아, 그…….”

서리는 상투를 틀고 있던 터라,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가상의 인물인 방석동을 지어낼 적에 혹여 누군가 중신을 서겠다고 나서면 자칫 남장을 한 것이 들통날까 싶어 이미 혼인한 것으로 하기로 정했었다.

그런 우려와 달리 여태 제 입으로 그 말을 할 일은 없었으나, 혹여 아버지나 오라버니들이 누군가에게 말을 했다면 돌고 돌아 대군의 귀에 들어갈지 모르는 일.

그러니, 아까 염려했던 대로 대군에게 거짓을 들키지 않으려면 혼인했다 해야 하는데, 말이 영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은 사내이니, 그리 말한들 별 달라질 것은 없는데도 어쩐지…….

“한 것이냐?”

낮게 묻는 어투에는 좀 전처럼 씁쓸한 기운이 묻어났다.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대답을 아니 하면 모를까.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어찌 아직이냐 물으셨습니까?”

“삼년상을 치르기 전에는 혼인하기 어렸을 것 같고. 이후에라도 혼인하였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에 또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 라니요?”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것보다…… 여우 같은 아내와 마주 앉고 싶어 진즉에 일어섰겠지.”

“아, 그렇겠네요.”

서리가 부러 사내처럼 껄껄거리자 대군도 마주 웃었다. 서리는 대군이 제 웃음을 추측이 맞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을 알면서도 끝내 고쳐 주지 않았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서 혼인하지 않았다는 뜻을 전했으니 일단 됐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 대군의 소리 없이 눈가를 휘고 입꼬리만 들어 올리는 점잖은 웃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면서 그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중’까지 대군을 보고 또 보기라도 하면 다행이겠거니, 라는 생각도 더불어 하였고.

돌아오는 길.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에고, 비를 맞으셔서 어쩝니까?”

대군방(대군의 사저)은 상단을 지나쳐 가야 한다기에 상단으로 먼저 가는 길이었다.

상단에 도착하여야 가마를 내어 드리든, 안에 들어 비를 긋든 할 터인데 서리가 꼬불꼬불 지름길로 안내하여도 당도하기 전에 비가 점점 거세지니 급한 대로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긋기로 하였다.

서리가 갓을 벗어 탁탁 털며 근심하자, 대군께서도 갓을 벗어 내며 말씀하셨다.

“곡우(이십사절기 중 하나로 양력 4월 20일경)에 내리는 비는 그냥 비가 아니라 씨앗을 키우는 생명의 비라 하니, 너무 저어치 말아라. 종친으로서 백성들의 농사일이 원활해진다면 응당 환영할 일이지.”

그냥 빈 말씀이 아니라, 진심으로 백성들을 근심하시는 양이었다. 이번엔 가슴이 뭉클하였다.

비는 내리는데 달이 떠 있고 담벼락에 붙은 작은 창에서 새어 나온 호롱 불빛까지 더해져 운치가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아아, 정말 어쩐다지?

그 얼굴도 보아 두고 싶어 고개를 쳐들었는데, 마침 처마에서 빗방울이 서리의 눈썹으로 떨어져 내렸고 자잘하게 부서진 물방울이 속눈썹에까지 튀는 바람에 움찔하였다.

자꾸 불경스러운 마음을 먹으니 벌을 받는 것인지도 몰랐다.

“읏, 차거……!”

놀란 서리가 손을 들기도 전에 다가온 손가락이 눈썹에 닿았다. 서리는 뻣뻣하게 굳어 들었다. 그때, 배에서와 같은 느낌이었다!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는데, 속눈썹까지 문지르고 난 손은 멀어지지 않고 그 아래 뺨에 머물러 있었다.

뜨거운 듯도 하고 차가운 듯도 한데, 대군의 손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제 뺨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대군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는데,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라니.

서리가 석상이라도 된 듯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동안 얼굴은 더욱 다가왔고 대군의 입술이 그때처럼 자신의 입술을 스쳤다.

한 번. 두 번. 이번에는 그때처럼 바로 멀어지지 않고 연거푸 제 입술을 스쳤다.

그러고는 조금 멀어져 다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리가 멍청히 눈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대군께서 씩 웃으며 손을 내렸다.

“수릿날 내 집에 놀러 오지 않겠느냐?”

뺨이 서늘하고 추우니, 대군의 손이 뜨거웠던 모양인데……. 방금 뭐라고?

“……예?”

배에서의 일이 제 착각이 아니었구나 하는 확신을 주더니, 이제는 사저에 놀러 오라고?

얼떨떨했지만, 서리는 그 어느 것 하나 대놓고 묻지 않았다.

저만치 선 김 내관도 등을 돌리고 서서 본 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 상황은 호들갑을 떨 만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억지로 생각했다.

아니어도 그런 것으로 할 작정이었다. 그래야 대군을 또 볼 것이 아닌가.

“다른 예정이 있으면 하는 수 없고.”

그래 놓고는 훌쩍 물러서다니, 고약하다 싶지만 강요가 아니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일종의 배려인 것이다. 그 가만하던 시선처럼.

“예, 예―”

대군은 서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을 반달같이 늘이며 호쾌하게 웃었다.

“계곡이고 어디고 사람 천지일 테니, 시원하게 제호탕이나 나눠 마시자꾸나. 내 집을 모를 것이니, 김 내관을 보내마.”

일단 ‘예정’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하려던 차였는데 ‘예’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여인의 몸이고 아버지께 금족령을 받은 터라 어찌 될지 모르는데……. 음, 그래도, 어쨌거나, 가고 싶은데.

에라, 내가 언제부터 그리 아버지 말씀을 잘 듣는 효녀였다고.

다시 대답했다.

“예, 예―”

자신은 대답을 원래 이렇게 한다는 듯, 아까처럼 길게 늘이는 일관성을 보이면서 말이다.



* * *



“이제 그만 나가 보래도. 널 보고 있으려니 내가 참말 고뿔에 걸릴 것 같단 말이다.”

“대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기시가 나가라는 말은 안 듣고 걱정스럽게 물어 온다.

상전이 욕통에 들어가 앉기 전에는 젖은 옷을 갈아입으러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더니만.

석동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내내 유난스럽다 싶게 고뿔 타령을 하기에 어찌 저러나 싶었더니, 그 때문이었구먼.

얼른 내보내고 혼자 조용히 생각 좀 하려 했더니만 성가시게 되었다.

“뭘 말이냐?”

모른 척 되묻는 흔의 머릿속은 내일 일정을 세우느라 바빴다. 청으로 떠나던 날부터 무술 훈련을 쉬었으니, 간만에 몸을 좀 풀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점잖은 선비 노릇도 좋지만, 비리비리해서는 석동에게 영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곧 가례를 치르신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생전 이런 일 없으시다, 거동을 조심하셔야 할 시기에 이러시니, 혹여…….”

“‘이런 일’이라니?”

즐거운 양 손으로 물을 휘저으며 묻는 자신과 달리 기시는 답답한지 제 가슴을 팡팡 쳐 댔다.

“알면서 그러십니다. 도통 여인네에 관심이라고는 없으시더니, 혹여,”

흔에게서 실소가 터졌다.

“이 나이 먹어 엇나가려는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