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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 *



“아씨, 금평대군께서 참말 소문대로 그리 잘나셨습니까?”

“뭘 또 물어. 눈 코 입 다 달렸다니까.”

별채 제 방에 앉아 거문고를 손질하던 서리가 몸종 애춘의 질문에 건성으로 답하였다.

청에 다녀올 때와 달리 해주 상단의 귀한 고명딸답게 고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머리도 땋아 내린 차림이었지만, 입술에서 나오는 대답은 석동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꾸 떠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자꾸만 질문하니 그럴 수밖에.

서리의 그런 속도 모르고 애춘은 함께 청에 다녀온 일꾼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내내 그 얘기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요. 자세히 기억을 해 보세요오오.”

“안경 때문에 야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고. 너도 써 봐서 알잖아, 몇 걸음만 떨어져도 잘 구분이 가지 않는 거.”

안경으로라도 가리면 여인임을 들키지 않을까 해서 썼던 것인데, 어찌나 답답하던지.

돈푼을 셀 때는 코끝에 걸치도록 내려 써야 제대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애춘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데 등에 드리워진 댕기가 오락가락하였다.

청에 다녀오는 동안 상투를 틀고 다니다 다시 드리운 댕기의 감촉이 금평대군을 생각할 때마다 드는 생소한 느낌처럼 아직은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안경을 잃어버리셨다면서요. 그 이후로는 뵈었을 것 아니에요?”

“어, ……그랬지.”

그 이후가 아니라 그 직후라는 것이 더 정확했지만. 풍랑이 끝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을 온통 감싸 안고 있던 금평대군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거울로 보던 제 얼굴보다 더 가까이 본 그 얼굴은 참말로 수려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눈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덜컹한 것이다.

안경 때문에 보이는 게 없어, 대군이 까다롭게 굴 때마다 대거리를 한 것이 뒤늦게 오금 저려서는 아니었다. 숱 많은 속눈썹에 감싸인 눈이 크고 또렷해서도 아니었고.

그 속에 담긴 것, 즉 자신을 바라보는 그것에 담긴 신중함과 영민함, 그리고 누구든 함부로 범접치 못할 고귀함 때문이었다.

아편 이야기를 하며 조선 상인들을 매도하는 말을 할 때에 상상했던 거만함 따위를 담을 만한 눈은 아니었다.

고귀한 선의 이마와 잘 다듬어진 듯한 광대뼈, 그리고 단정히 다물어진 입매 등의 잘난 외모는 그다음이었다.

한마디로 뭔가 더러운 일이나 추한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부류의 인간이었다.

글에서 읽은 그대로 결코 한눈팔지 않고 군자의 길만 걸어갈 것 같은 인사. 이어 대군이 고개를 기울여 제게 입을 맞추는 순간, 그 생각도 모두 날아갔지만.

대체 왜 사내에게 입을 맞춘 게지? 남색을 즐기는가?

생각이 다시 그에 미치자, 서리는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이고, 답답해라. 대체 왜?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엎어졌다, 바로 누웠다를 반복하다 급기야 발길질까지 하니, 분홍 치맛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애춘이 숨넘어가게 물어 온다.

“어찌 그러셔요, 아씨?”

“그냥 그런 게 있다.”

고된 풍랑이 지나간 뒤, 잠깐 졸다 깨어난 와중이라 경황이 없던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고는 몸을 일으켜 버리니 낸들 알 수가 있나.

흡사 자신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후로 대군이 자신을 대하는 양이 좀 보드라워진 듯하니 꿈이 아니었던 것도 같고.

급기야 한양에 돌아오기 싫은 이유였던 400냥도 선뜻 빌려준다고도 하였잖나.

그러니까 대체 왜? 뭘 믿고 상단 일꾼인 내게 그 돈을 빌려준다는 게지? 입 맞춘 값인가? 내 입에 금테를 두른 것도 아니고.

음……. 한양으로 오는 길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전에는 안경을 쓴 탓에 자신을 가만히 눌러보는 대군의 눈이 보이지 않아 마냥 까다롭게만 생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언뜻언뜻 마주치는 대군의 시선은 다감했고 어느 때는 눈가를 접으며 미소를 지어 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면 자신은 화들짝 놀라 앞만 바라보며 말을 몰곤 했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갈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는 것은 자신도 좀…….

“어떠셨어요? 예? 예?”

얘가 하도 보채니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네.

“세상 물정은 정말 모르더라. 글이야 많이 읽었겠지만, 사람 사는 건 또 다르잖니? 아무것도 몰라. 영 맹탕이더라고.”

그래, 그러니까 사내에게 입 맞추고 거금을 빌려준다 어쩐다 약조를 한 것일 게다.

“아씨가 지나치게 영악하신 거래요.”

“누가 그래?”

“안 그러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시는 게 빨라요.”

“씨이, 너…….”

“아이참, 하여간 생김새가 어떻더냐고요!”

“그냥 사내라고. 개똥이나 억수처럼.”

“첫째 나리처럼 사내다운 것도 아니고 셋째 나리처럼 어여쁘신 것도 아니고 개똥이나 억수 정도라고요?”

개똥이나 억수는 한창 피어나는 애춘이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는 또래의 노비들이었다.

중인은 못 되어도 평민과 혼인하는 것이 꿈인 애춘이는 그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들이 금평대군의 외모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리해 두면 다시는 묻지 않을 것 같아 그랬더니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역시 내 몸종이다.

“너, 둘째 오라버니는 언급도 하지 않는구나? 못났다는 거냐?”

그렇지만, 난 너보다 한 수 위지.

“설마 작은 나리께 일러바치시려고요? 하이고, 하도 바쁘셔서 들어 주실 짬이나 나실까 모르겠습니다.”

“내가 바보냐? 오라버니댁한테 이르지.”

둘째 오라버니댁은 삼 형제 중에 자기 서방이 제일 평범하게 생겼다며 툭하면 타박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말에 동조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난리가 났다.

그런 이에게 이르겠다니, 좀 피곤해지겠다 싶은지, 애춘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바였지.

“아유, 거문고 좀 그만 만지셔요. 대행수께서 선비들이나 타는 거문고 말고 규수답게 가야금이나 타라고 하셨잖아요.”

애춘의 눈이 뾰족해져서는 어디 트집 잡을 것 없나 하더니, 역시나 내 몸종이다.

“아버지 안 계시니 만지는 게지. 그리고 거문고가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인데, 너까지 알지도 못하고 구박할 셈이야?”

“거문고 소리는 어쩐지 서글프니까 그렇죠. 그 나무 얘기를 아가씨가 해 주신 뒤로 더 그래요.”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만드는데, 비옥한 땅에서 편안하게 잘 자란 오동나무는 물러서 쓰지 못하고,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고된 역경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촘촘하고 단단해진 나무가 강하고 깊은 소리를 낼 수 있다 했다. 그런 나무를 석상오동(石上梧桐)이라 한다.

그래서 서리는 자신의 사내 이름을 석동으로 지었다.

비록 여인으로 났어도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규방에서만 지내다 적당히 시집가서 남들과 엇비슷하게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단을 혼자 일궈 낸 아버지처럼, 청으로 왜국으로 무수히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는 오라버니들처럼 그리 자신을 키우고 단련시키고 싶었다.

“서글프다니. 높고 낮은 음 하나하나가 얼마나 주옥같은데.”

서리가 술대로 가장 굵은 줄인 대현을 밀자, 낮고 굵은 음이 방 안을 울렸다.

으엉? 이 소리는?

뜻밖의 발견에 서리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애춘이 타박하듯 말한다.

“그 소리가 제일 서글퍼요.”

자신은 그 소리가 마치 대군 대감의 목소리처럼 점잖고 굵다 생각하던 참인데.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리, 안에 있느냐?”

지금쯤이면 상단 일을 보느라 한창 바쁘실 셋째 오라버니가 어쩐 일이시지?



“예에? 누가 찾아왔다고요?”

놀란 서리가 잠시간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어쩐지 뚱한가 싶던 셋째 오라버니가 갑자기 반색을 하셨다.

“왜, 만나기 싫으냐? 그렇다면 내 가서 석동이 놈은 청에서 돌아오자마자 내쫓아 버렸다 할까?”

엥? 그건 아니지.

서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세상에 400냥을 날린 일꾼을 내쫓아 버리는 곳이 어디 있답니까? 평생 세경 안 주는 노비로라도 부릴 일이지.”

“그럼 400냥을 갚으려고 어디 먼 곳으로 자매(自賣.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 등으로 파는 행위)하였다 할까?”

오라버니는 자신이 대군을 만나기 싫어한다고 오해하셨는가 보다. 저는 그저 놀라서 어찌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뿐인데.

“아니요……. 그러면 제가 옥에 갇혔다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매를 다시 떠올리자, 서리의 등줄기로 떨림이 내달렸다.

“그럼 나가 보겠다는 게냐?”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서리가 벌떡 일어서 방을 가로지르자, 애춘이 그 치맛자락을 덥석 잡고 늘어졌다.

“아가씨, 차림이…….”

그제야 서리도 치마저고리 차림의 자신을 내려다보고는 허둥지둥 돌아섰다.

“석동이 옷 어디 있지? 어서 내다오! 오라버니는 어서 나가시고요!”

연총은 벌에 쏘인 듯 부루퉁한 얼굴로 별채를 나섰다. 서리까지 저리 나서니 형님 말대로 동생을 정말로 그 기생오라비에게 내어 주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무사했구나.”

뒷짐을 지고 서 계시던 대군께서 돌아보며 천천히 미소 지으시니, 그 모습에 눈이 멀 듯했다.

그의 수려한 외모가 아니라 저의 무사함에 안도하는 그 표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치고 들었다는 말이다.

작은 갓과 무명옷으로 갈아입자마자 화급히 달려간 석동은 순간 다리가 꼬일 뻔했다.

그래서 바짝 마른 입에 침을 모아 간신히 대답을 했다.

“예, 대군 대감 덕분입니다.”

그래, 솔직히 외모도 한몫했다. 얇은 도포 위로 남색 쾌자에 붉은 술띠를 두른 모습이 너무나 근사했으니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지 않나.

“너를 아는 이가 없기에, 혹여 옥에라도 갇혔는가 걱정했다.”

걱정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감사해 헤 하고 입을 벌리고 웃던 서리는, 지그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대군의 시선에 어색하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설마 그 일 때문에 일부러 찾아 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