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서리한테만 차더라고? 언제 또 보거든 밤길 조심하라 전해라.”
서리라면 무조건 싸고도는 첫째가 이를 갈자, 오양우가 달리 물었다.
“서리를 사내로 알고 있으니, 다감할 일도 없지. 그리고 서리는 그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지 않느냐?”
“그거야 서리가 통신사로 가고 싶어 허언을 하는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양우는 그리만 믿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보는 것과 서리가 느낀 것이 다를 수도 있지. 그저 차기만 하고 올바르지는 않더냐?”
“그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지적이나 꾸짖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하여간 거절하시지요. 비밀리에 들어온 혼담이고 다른 상단들도 있으니 우리가 거절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둘째는 처음 궁궐서 기별이 왔을 때의 첫째와 셋째처럼 불퉁하게 굴고 있었다.
둘째가 저리 삐딱하니, 자신이 누차 타이르고 설득해서 간신히 덜해졌다 싶은 나머지 두 아들도 처음의 반발심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둘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고 있다.
“그러니, 성사시키고 싶은 혼담이란 말이다. 네 형, 아우와 여러 번 했던 얘기들이지만, 지난번에, 송파 상단의 김석관이 동인들 편을 들다가 왕이 바뀌면서 유배를 간 것을 모르느냐?
그 아들마저 도적 떼를 만나 살해당했다는데 나는 그것도 믿지 않는다. 필시 괘씸하다며 왕이 죽였을 것이고 차후 우리 집안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말씀을 또 하십니까? 지나친 우려시라니까요.”
셋째가 지루해했다.
“글쎄, 우려는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대도. 지금 우리 상단에 북인과 서인 모두가 접촉을 해 오고 있다.
지금껏 양측 모두의 요구를 들어주어 우리 상단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조만간에 그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야 할 게야.
그리되면 정치가 어찌 흘러가느냐에 따라 우리 상단의 운명도 뒤바뀌게 되니, 그 얼마나 위태로우냐.
한데 대군의 장인이 되면 그 어느 쪽에도 설 필요가 없어져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게지.”
“우리 집안 때문에 서리에게 싫다는 혼인을 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서리가 언제 싫다고 했느냐? 대군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던. 그리고 비단 집안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난 서리가 귀한 신분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우리가 해주 오씨라 ‘해주 부부인’으로 불릴 것이니, 그 얼마나 광영이냐.”
서리가 귀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은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어머님께서 서리를 낳고 젖 한번 물려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안쓰러운 동생인지.
“나 좋자고 하는 일 아니다. 재물을 더 모으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뒤에야 정일품으로 추증해 주는 부부인의 아비가 되고 싶어서도 아니라는 말이지.”
왕의 장인이면 모를까 대군의 장인은 살아생전 아무 작호도 받지 못하니, 신분 상승의 의지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는 아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첫째가 여쭈었다.
“대군은 어릴 적부터 형님보다 잘난 이라, 주상이 보위에 오른 지금까지도 늘 경계한다는데, 어찌 안전해진다 하십니까? 도리어 더 위험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이야 대군이 위험천만하지. 하지만, 중인인 우리 집안과 낙혼을 하고 나면 달라진다. 서리가 자식이라도 낳는다면 그 아이는 중인이 되는데, 중인을 장남으로 둔 대군을 누가 왕으로 옹립하려 하겠느냐.”
“어차피 왕의 자식들은 그 어미가 하다못해 대궐 무수리라도 보위에 오르는 데 상관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야 이미 왕이 되고 나서 맞은 후궁에게서 본 자식은 그렇지. 하지만, 대군 시절 이미 중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자식을 낳은 이는 다르다.
애초 보위에 올리는 것부터 명분이 없어지니, 대군을 견제하려 안달인 주상이 그런 혼담을 우리 집안에 넣어 온 걸 게야. 이 혼담으로 주상은 안심하고 우리 집안은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니 만사가 평탄해진다.”
오양우의 말에 아들들은 섣불리 수긍하지 않았다.
“이런 만고에 없는 혼인을 과연 대군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거절하면 보위에 욕심이 있어서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니 받아들일 게다. 게다가 그는 임금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대군이 꿍꿍이를 품고 사저로 찾아드는 신료들을 모두 문전 박대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형님은 지금 대군이 문제입니까? 우리 서리가 받아들일 것이 문제지요.
부부인이고 뭐고 분명 싫다 할 겁니다. 저 싫으면 평양 감사도 안 한다는데, 부부인이니 뭐니 그런 것 답답해서 서리가 어찌 삽니까.
그러니, 애초에 청에 보내실 때 마음처럼 저 하고 싶은 것 하고 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지요.”
둘째 말도 틀리진 않지만 오양우는 그쪽으로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서리에게만 차다는 영 시원찮은 소리에는 입맛이 썼고 서리가 하는 말은 허풍처럼 들렸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야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허한 일이지. 부부인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 살지 뭐 하러 이리저리 떠돌게 두느냐.
하여간, 어찌 될지 아직 모르지만, 일단은 입조심들 하여라. 자칫 내자들에게 흘렸다가는 서리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이니.”
중신아비 노릇을 하는 동부승지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대군을 따르는 신하들의 반발을 우려하고 계시니 혼사가 성사되든 안 되든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거듭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혼삿날까지도 말이다.
그러지 말라 해도 그럴 판이다. 왕실과 혼사를 맺음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양친의 생존인데, 서리는 어미가 없지 않은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신분에 상관없이 성사될 수 없는 혼사인데, 그 사실을 감안하고라도 재물과 아우의 견제에 눈이 먼 임금이 먼저 청해 온 혼담이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우리 서리가 이 나라에서 중전 다음으로 귀한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집 안에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사랑에 모여 앉은 네 부자뿐이고 그것은 혼삿날까지도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 비밀리에 혼사를 해치우면, 치른 뒤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답니까? 괜히 우리 서리만 구박덩이 되는 것 아니냐고요.”
첫째가 둘째를 쿡 찔렀다.
“나도 그 생각을 했다만, 마음만 먹으면 주변 사람 구워삶는 데 귀신인 서리가 어디서든 쫓겨날 짓을 할 리는 없지 않느냐. 게다가 시집살이 시킬 시부모도 없는 자리지 않느냐.”
오양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란 정붙이고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니. 일단 혼인만 하면 된다.
우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도 우리 집안은 내내 외줄 타기를 해야 할 것이니 저지르고 보자는 마음이 커졌다.
“가문뿐만 아니라 서리까지 모두를 위한 일이니 다들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서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인데요.”
첫째, 셋째는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얼굴서부터 서리와 가장 닮은 둘째는 꼭 서리가 그러하듯 끝까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에 오양우는 단호한 얼굴을 했다. 누차 말했듯 재산을 불릴 욕심으로 혼사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에서 요구한 지참금을 마련하려면 허리가 휠 지경이니.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것이야? 중인한테 시집가서 우리처럼 양반네들한테 시달리며 사는 것보다 그 양반보다도 더 윗자리인 부부인으로 살면 얼마나 광영 될 것인데.”
아들들은 자자손손 안전히 먹고살고 어미도 없이 큰 딸자식은 귀하게 되고. 아비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혼담이 들어온 뒤로 밤잠을 뒤척여 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날이 갈수록 이 혼사를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지기만 했다.
억지 혼인에 서리가 반발하겠지만, 그 아이도 언제고 이 아비에게 고마워할 날이 오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 마음을 다잡은 오양우는 다음 날 중신아비인 도승지에게 긍정의 답을 전했다.
* * *
“방家 석동이라는 이를 찾고 있소만.”
해주 상단의 한양 본부. 내관 김기시가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벌써 세 번째였으나 이번에도 모르는 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만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금평대군 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꽤 큰 상단인지라 이름자만 가지고는 찾을 수 없는가? 가만있자, 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라 관리직을 맡은 자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중문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여느 보부상의 차림과 달리 갓과 비단옷 차림으로 들고 나는 것들을 적는 이가 있었다.
저이마저 모른다 하면 행수의 아들이라 했던 오家를 불러 달라 하라고 김 내관을 종용했다.
한데 한창 바쁘게 일하다가 김 내관의 질문에 흘끗 시선을 드는 모양을 보니, 석동을 아는 듯하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얼굴을 반쯤 가린 부채 너머 보이는 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시오?”
상대의 시선이 연거푸 묻는 김 내관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연겸처럼 덩치가 큰 걸 보면 오家의 피붙이인가 싶은데, 기꺼운 낯빛은 또 아니라.
역시나 그놈의 400냥 때문에 석동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더 일찍 찾아올 것을. 그사이 그이가 참혹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가 근심이 되었다.
“그이를 어찌 찾으십니까?”
“좀 아는 사람이오. 지금 어디 있소?”
“뉘신지 말씀을 하셔야 그이에게 알릴 것이 아닙니까?”
딱딱거리는 투가 어째 쉽사리 말해 줄 기미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흔이 부채를 접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이흔이라 하오. 방家와 연행사로 다녀오던 길에 안면을 익힌 사이인데 볼일이 있어 그러오.”
상대는 자신보다는 좀 작지만, 야리야리한 선비 축도 아닌 흔을 역시나 위아래로 훑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대군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지만, 초면에 경우가 좀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석동이 사내인 줄 알고 아니꼬워했던 것처럼 상대도 자신이 상단에 들어와 어정거리니, 저와 비슷한 계층이려니 생각하여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싶어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대군임을 밝히고 이 사내를 꾸짖었다가는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혔을지 모를 석동에게 해코지를 할까 저어되어 더더욱 참았고.
게다가 석동을 아는 이를 만난 것이 어딘가.
흔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짐짓 얌전히 상대를 마주 보자, 상대는 이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리시오.”
* * *
서둘러 사랑 쪽으로 걸음한 서리의 셋째 오라비 연총은 연겸이 일하는 작은 사랑으로 들어섰다.
“작은형님, 금평대군의 이름이 ‘이흔’입니까?”
도깨비처럼 뛰어들어 족치듯 물으니, 연겸은 엉겁결에 말을 더듬었다.
“어,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리 우리끼리라지만 대군 이름을 그렇게 불러 젖히다가는 자칫 경을 칠 수도 있…….”
연총이 성마르게 말을 끊고 든다.
“저리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큼. 우리 형제 중 제일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난 금평대군이 못났다고 한 적은 없……, 그런데 ‘저리’라니?”
사내 얼굴이 곱상하다고 싫어하는 여인은 별로 없다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은 연겸의 눈이 커졌다.
어째 금평대군이 지금 여기 어디에 와 있다는 말같이 들리지 않나?!
“방석동이를 찾아왔답니다.”
부루퉁히 내뱉는 것이, 마치 흔이 찾아온 연유가 연겸의 탓이라도 된다는 양이었다.
“뭐라? 그래서 지금 내어 줄 참이야?!”
연총이, 아버님 앞에서 형님과 더불어 예, 예 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삐져 있던 연겸이 펄쩍 뛰었다.
“내어 주다니요? 아직 신행 온 차림새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서 만나게 해 주려고? 너도 서리 혼사가 반가운 것만은 아닐 텐데 막지는 못할망정 어찌 만나게 해 주려는 게야? 그러고도 오라비라 할 수 있느냐?”
대군 하나 때문에 형제끼리 싸움이라도 날 판이다.
“어허, 오서리가 아닌 방석동을 찾는데, 어찌 없다고 합니까?”
“서리가 석동이지 않느냐!”
“대군은 그것을 모르니, 석동이를 찾지요. 물론 형님이 계속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저 바깥마당에 선 대군에게까지 다 들리긴 하겠습니다만.”
“하여간 아니 된다!”
합 하고 입을 다물었던 연겸이 그리 속삭임을 덧붙였지만, 승강이엔 끝이 없을 것이다.
연총은 제 불손한 태도를 여간 아니게 꾹 참아 넘기던 금평의 태도를 다시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호락호락 물러날 기세는 아니었습니다. 서리, 아니 석동이더러 나가서 얼른 보내 버리라 하는 것이 빠를 성싶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대군이 해주 상단에서 어떤 식으로든 낯 붉힐 거리를 만들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때문에 서둘러 별채로 걸음하였다.
“서리한테만 차더라고? 언제 또 보거든 밤길 조심하라 전해라.”
서리라면 무조건 싸고도는 첫째가 이를 갈자, 오양우가 달리 물었다.
“서리를 사내로 알고 있으니, 다감할 일도 없지. 그리고 서리는 그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지 않느냐?”
“그거야 서리가 통신사로 가고 싶어 허언을 하는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양우는 그리만 믿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보는 것과 서리가 느낀 것이 다를 수도 있지. 그저 차기만 하고 올바르지는 않더냐?”
“그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지적이나 꾸짖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하여간 거절하시지요. 비밀리에 들어온 혼담이고 다른 상단들도 있으니 우리가 거절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둘째는 처음 궁궐서 기별이 왔을 때의 첫째와 셋째처럼 불퉁하게 굴고 있었다.
둘째가 저리 삐딱하니, 자신이 누차 타이르고 설득해서 간신히 덜해졌다 싶은 나머지 두 아들도 처음의 반발심이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둘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고 있다.
“그러니, 성사시키고 싶은 혼담이란 말이다. 네 형, 아우와 여러 번 했던 얘기들이지만, 지난번에, 송파 상단의 김석관이 동인들 편을 들다가 왕이 바뀌면서 유배를 간 것을 모르느냐?
그 아들마저 도적 떼를 만나 살해당했다는데 나는 그것도 믿지 않는다. 필시 괘씸하다며 왕이 죽였을 것이고 차후 우리 집안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말씀을 또 하십니까? 지나친 우려시라니까요.”
셋째가 지루해했다.
“글쎄, 우려는 아무리 해도 지나침이 없대도. 지금 우리 상단에 북인과 서인 모두가 접촉을 해 오고 있다.
지금껏 양측 모두의 요구를 들어주어 우리 상단이 무사할 수 있었지만, 조만간에 그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야 할 게야.
그리되면 정치가 어찌 흘러가느냐에 따라 우리 상단의 운명도 뒤바뀌게 되니, 그 얼마나 위태로우냐.
한데 대군의 장인이 되면 그 어느 쪽에도 설 필요가 없어져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게지.”
“우리 집안 때문에 서리에게 싫다는 혼인을 시킨다는 말씀이십니까?”
“서리가 언제 싫다고 했느냐? 대군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던. 그리고 비단 집안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난 서리가 귀한 신분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우리가 해주 오씨라 ‘해주 부부인’으로 불릴 것이니, 그 얼마나 광영이냐.”
서리가 귀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은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어머님께서 서리를 낳고 젖 한번 물려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안쓰러운 동생인지.
“나 좋자고 하는 일 아니다. 재물을 더 모으자는 것도 아니고, 죽은 뒤에야 정일품으로 추증해 주는 부부인의 아비가 되고 싶어서도 아니라는 말이지.”
왕의 장인이면 모를까 대군의 장인은 살아생전 아무 작호도 받지 못하니, 신분 상승의 의지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는 아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첫째가 여쭈었다.
“대군은 어릴 적부터 형님보다 잘난 이라, 주상이 보위에 오른 지금까지도 늘 경계한다는데, 어찌 안전해진다 하십니까? 도리어 더 위험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이야 대군이 위험천만하지. 하지만, 중인인 우리 집안과 낙혼을 하고 나면 달라진다. 서리가 자식이라도 낳는다면 그 아이는 중인이 되는데, 중인을 장남으로 둔 대군을 누가 왕으로 옹립하려 하겠느냐.”
“어차피 왕의 자식들은 그 어미가 하다못해 대궐 무수리라도 보위에 오르는 데 상관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야 이미 왕이 되고 나서 맞은 후궁에게서 본 자식은 그렇지. 하지만, 대군 시절 이미 중인을 정실부인으로 맞아 자식을 낳은 이는 다르다.
애초 보위에 올리는 것부터 명분이 없어지니, 대군을 견제하려 안달인 주상이 그런 혼담을 우리 집안에 넣어 온 걸 게야. 이 혼담으로 주상은 안심하고 우리 집안은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니 만사가 평탄해진다.”
오양우의 말에 아들들은 섣불리 수긍하지 않았다.
“이런 만고에 없는 혼인을 과연 대군이 받아들이겠습니까?”
“거절하면 보위에 욕심이 있어서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니 받아들일 게다. 게다가 그는 임금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대군이 꿍꿍이를 품고 사저로 찾아드는 신료들을 모두 문전 박대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형님은 지금 대군이 문제입니까? 우리 서리가 받아들일 것이 문제지요.
부부인이고 뭐고 분명 싫다 할 겁니다. 저 싫으면 평양 감사도 안 한다는데, 부부인이니 뭐니 그런 것 답답해서 서리가 어찌 삽니까.
그러니, 애초에 청에 보내실 때 마음처럼 저 하고 싶은 것 하고 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지요.”
둘째 말도 틀리진 않지만 오양우는 그쪽으로는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서리에게만 차다는 영 시원찮은 소리에는 입맛이 썼고 서리가 하는 말은 허풍처럼 들렸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야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허한 일이지. 부부인으로 살 수 있다면 그리 살지 뭐 하러 이리저리 떠돌게 두느냐.
하여간, 어찌 될지 아직 모르지만, 일단은 입조심들 하여라. 자칫 내자들에게 흘렸다가는 서리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이니.”
중신아비 노릇을 하는 동부승지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대군을 따르는 신하들의 반발을 우려하고 계시니 혼사가 성사되든 안 되든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거듭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혼삿날까지도 말이다.
그러지 말라 해도 그럴 판이다. 왕실과 혼사를 맺음에 있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양친의 생존인데, 서리는 어미가 없지 않은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신분에 상관없이 성사될 수 없는 혼사인데, 그 사실을 감안하고라도 재물과 아우의 견제에 눈이 먼 임금이 먼저 청해 온 혼담이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우리 서리가 이 나라에서 중전 다음으로 귀한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집 안에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사랑에 모여 앉은 네 부자뿐이고 그것은 혼삿날까지도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 비밀리에 혼사를 해치우면, 치른 뒤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답니까? 괜히 우리 서리만 구박덩이 되는 것 아니냐고요.”
첫째가 둘째를 쿡 찔렀다.
“나도 그 생각을 했다만, 마음만 먹으면 주변 사람 구워삶는 데 귀신인 서리가 어디서든 쫓겨날 짓을 할 리는 없지 않느냐. 게다가 시집살이 시킬 시부모도 없는 자리지 않느냐.”
오양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란 정붙이고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니. 일단 혼인만 하면 된다.
우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도 우리 집안은 내내 외줄 타기를 해야 할 것이니 저지르고 보자는 마음이 커졌다.
“가문뿐만 아니라 서리까지 모두를 위한 일이니 다들 시키는 대로 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서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인데요.”
첫째, 셋째는 마지못해 대답했지만, 얼굴서부터 서리와 가장 닮은 둘째는 꼭 서리가 그러하듯 끝까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에 오양우는 단호한 얼굴을 했다. 누차 말했듯 재산을 불릴 욕심으로 혼사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궁에서 요구한 지참금을 마련하려면 허리가 휠 지경이니.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것이야? 중인한테 시집가서 우리처럼 양반네들한테 시달리며 사는 것보다 그 양반보다도 더 윗자리인 부부인으로 살면 얼마나 광영 될 것인데.”
아들들은 자자손손 안전히 먹고살고 어미도 없이 큰 딸자식은 귀하게 되고. 아비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혼담이 들어온 뒤로 밤잠을 뒤척여 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날이 갈수록 이 혼사를 성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지기만 했다.
억지 혼인에 서리가 반발하겠지만, 그 아이도 언제고 이 아비에게 고마워할 날이 오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 마음을 다잡은 오양우는 다음 날 중신아비인 도승지에게 긍정의 답을 전했다.
* * *
“방家 석동이라는 이를 찾고 있소만.”
해주 상단의 한양 본부. 내관 김기시가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벌써 세 번째였으나 이번에도 모르는 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만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금평대군 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꽤 큰 상단인지라 이름자만 가지고는 찾을 수 없는가? 가만있자, 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라 관리직을 맡은 자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중문을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여느 보부상의 차림과 달리 갓과 비단옷 차림으로 들고 나는 것들을 적는 이가 있었다.
저이마저 모른다 하면 행수의 아들이라 했던 오家를 불러 달라 하라고 김 내관을 종용했다.
한데 한창 바쁘게 일하다가 김 내관의 질문에 흘끗 시선을 드는 모양을 보니, 석동을 아는 듯하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얼굴을 반쯤 가린 부채 너머 보이는 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시오?”
상대의 시선이 연거푸 묻는 김 내관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연겸처럼 덩치가 큰 걸 보면 오家의 피붙이인가 싶은데, 기꺼운 낯빛은 또 아니라.
역시나 그놈의 400냥 때문에 석동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더 일찍 찾아올 것을. 그사이 그이가 참혹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는가 근심이 되었다.
“그이를 어찌 찾으십니까?”
“좀 아는 사람이오. 지금 어디 있소?”
“뉘신지 말씀을 하셔야 그이에게 알릴 것이 아닙니까?”
딱딱거리는 투가 어째 쉽사리 말해 줄 기미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해진 흔이 부채를 접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이흔이라 하오. 방家와 연행사로 다녀오던 길에 안면을 익힌 사이인데 볼일이 있어 그러오.”
상대는 자신보다는 좀 작지만, 야리야리한 선비 축도 아닌 흔을 역시나 위아래로 훑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대군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지만, 초면에 경우가 좀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석동이 사내인 줄 알고 아니꼬워했던 것처럼 상대도 자신이 상단에 들어와 어정거리니, 저와 비슷한 계층이려니 생각하여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싶어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대군임을 밝히고 이 사내를 꾸짖었다가는 가뜩이나 미운털이 박혔을지 모를 석동에게 해코지를 할까 저어되어 더더욱 참았고.
게다가 석동을 아는 이를 만난 것이 어딘가.
흔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짐짓 얌전히 상대를 마주 보자, 상대는 이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잠시 기다리시오.”
* * *
서둘러 사랑 쪽으로 걸음한 서리의 셋째 오라비 연총은 연겸이 일하는 작은 사랑으로 들어섰다.
“작은형님, 금평대군의 이름이 ‘이흔’입니까?”
도깨비처럼 뛰어들어 족치듯 물으니, 연겸은 엉겁결에 말을 더듬었다.
“어,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리 우리끼리라지만 대군 이름을 그렇게 불러 젖히다가는 자칫 경을 칠 수도 있…….”
연총이 성마르게 말을 끊고 든다.
“저리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는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큼. 우리 형제 중 제일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난 금평대군이 못났다고 한 적은 없……, 그런데 ‘저리’라니?”
사내 얼굴이 곱상하다고 싫어하는 여인은 별로 없다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속에 숨은 뜻을 깨달은 연겸의 눈이 커졌다.
어째 금평대군이 지금 여기 어디에 와 있다는 말같이 들리지 않나?!
“방석동이를 찾아왔답니다.”
부루퉁히 내뱉는 것이, 마치 흔이 찾아온 연유가 연겸의 탓이라도 된다는 양이었다.
“뭐라? 그래서 지금 내어 줄 참이야?!”
연총이, 아버님 앞에서 형님과 더불어 예, 예 했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삐져 있던 연겸이 펄쩍 뛰었다.
“내어 주다니요? 아직 신행 온 차림새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서 만나게 해 주려고? 너도 서리 혼사가 반가운 것만은 아닐 텐데 막지는 못할망정 어찌 만나게 해 주려는 게야? 그러고도 오라비라 할 수 있느냐?”
대군 하나 때문에 형제끼리 싸움이라도 날 판이다.
“어허, 오서리가 아닌 방석동을 찾는데, 어찌 없다고 합니까?”
“서리가 석동이지 않느냐!”
“대군은 그것을 모르니, 석동이를 찾지요. 물론 형님이 계속 그리 소리를 지르시면 저 바깥마당에 선 대군에게까지 다 들리긴 하겠습니다만.”
“하여간 아니 된다!”
합 하고 입을 다물었던 연겸이 그리 속삭임을 덧붙였지만, 승강이엔 끝이 없을 것이다.
연총은 제 불손한 태도를 여간 아니게 꾹 참아 넘기던 금평의 태도를 다시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호락호락 물러날 기세는 아니었습니다. 서리, 아니 석동이더러 나가서 얼른 보내 버리라 하는 것이 빠를 성싶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대군이 해주 상단에서 어떤 식으로든 낯 붉힐 거리를 만들어 주어서는 아니 된다. 때문에 서둘러 별채로 걸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