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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라 그런지, 어찌 그럴 수 있나 충격을 받기보다는 그렇게 형님 전하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구먼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도는 연신 몰아치고 있어 품 안의 방家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흔의 몸에 두 팔과 다리를 칭칭 두른 채 매달려 있었다.
코로 들어간 물 때문에 흔의 어깨에 대고 연신 콜록거리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끌어안은 흔의 팔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누가 보면 그를 끌어안고 있어야 자신이 사는가 싶게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를 부서뜨릴 듯 흔들리던 파도가 가라앉고 거센 비와 귀청을 때릴 듯한 바람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안전해졌다 싶은지 사람들이 한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도 여전히 뱃전에 쓰러져 있었는데, 흔은 방家의 고개가 제 품에 툭 떨어지는 것으로 그가 까무룩 조는 것을 알았다.
지난밤 계집질로 늦게 잠자리에 든 데다가 풍랑에까지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일어나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고뿔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그래서 이만 깨워야겠다 생각하며 방家의 등을 안고 있던 손을 움직이려는데 그 아래에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옷 아래로 등을 가로질러 천으로 여러 번 동여맨 것이었다.
무엇이지? 처음에는 허리에 차는 전대를 가슴에 찼는가 하였지만, 기녀에게 가진 돈을 다 내주었으니 전대를 찰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좀 남은 돈이 있는가? 그렇다면 천만다행인데.
궁금증에 둘러진 천을 따라 더듬거리며 앞쪽으로 돌아 나오자니, 갑자기 도도록한 것이 만져졌다.
손안에 둥그렇게 들어차는 무언가. 그것도 가슴 양쪽에 하나씩.
그가 기대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천도 아니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몸의 일부였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니, 역시나 사내라면 상대에게도 없어야 하는 그 무언가.
오감이 곤두섰다. 제 두 팔과 가슴에 꼭 끌어안긴 방家의 몸이 기녀들의 몸처럼 나긋나긋하다는 것이 그제야 깨달아졌다.
뻣뻣한 시선을 내리니, 아까부터 훑고 또 훑던, 어느새 벗겨져 나간 안경 아래의 이목구비는, 필시 사내의 그것일 수 없을 만치 오밀조밀하였다. 허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흔의 눈이 몇 번이나 깜박여졌다. 여간해서는 미소를 머금지 않던 흔의 입가가 어느 순간 길쭉이 끌려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어 그 입술이 지난밤, 후끈한 시간을 보낸 여운이 어린 적도 없는 방家의 광대 언저리를 슬쩍 스치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당사자가 아닌 바에야 결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 상단 부스러기 방석동
“그래서, 기와집 두 채 값을 날렸다는 말이냐?”
해주 상단의 대행수 오양우는 뻔뻔한 얼굴로 제 앞에 앉은 5촌 조카 방석동을, 아니, 조카 행세를 하는 막내 여식 오서리를 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남들은 청에 다녀오면 거액을 움켜쥐고 돌아오는데 빈털터리로 온 낯짝이었다.
“에이, 아버지. 두 채 값까지는 아닙니다. 300칸이 넘는 이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되는 기와집으로 따지셔야지, 초가에 그저 기와만 얹은 것도 기와집이랍니까?”
재물 간수는 허투루면서 너스레만은 제대로다.
“그래, 400냥이면 비싼 기와집으로는 한 채 값에 불과하지.”
“그렇고말고요.”
그가 선선히 동의하자, 그냥 넘어가려는가 싶은지 여식은 손뼉까지 치며 맞장구를 친다.
“그럼, 기와집 한 채는 싼 것이냐? 기루에서 만난 기생에게 홀랑 털어 주기에?”
“물론 싼 것은 아니지요. 하오나,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세상에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남이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돕는 것도 제 스스로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전 같으면 잘했다고 등을 두드리며 화통하게 넘어갔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여식을 상인으로 만들 생각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헤헤거리며 눈치를 보는 여식도 전과 달리 어찌 이러시는가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은 오양우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시끄럽다. 넌 청에 내 자식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내 상인으로 간 것이었으니, 효를 논하기 전에 내게 갚아야 할 재물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 그렇습지요…….”
눈치 빠른 놈이라 일단은 넙죽 엎드려야겠다 생각했는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어림없다.
“하도 애원해서 사신단에 한번 끼워 줬더니만, 기어이 사고를 쳐? 다신 청에든 왜국에든 못 갈 줄 알아라.”
“앗, 아버지! 아니, 당숙 어른, 어찌 이러십니까? 또 그런 곳엘 가야 제가 손해를 충당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번에도 인삼 장사로 얼마나 많은 이윤을 남겼는데요!”
남장한 사실이 혹여 상단의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까 저리 쉬쉬하는 안쓰러운 짓도 이제 보지 않을 터였다.
“그래, 많이 남겨서 또 많이 털어 주고 오겠지.”
“제가 투전을 한 것도 아니고…….”
“한양서는 가끔 투전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장사 밑천을 주지 않으실 때 몇 번 해 보고는 소질이 있다 싶어 이후로는 재미로…… 물론 투전이 드러낼 만한 것은 아니지만,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푼돈이었…….”
여식이 잔뜩 눈치를 봐 가며 주절거리지만, 오양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푼돈이라 그냥 두었던 것이니라. 한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에 지나치게 큰 액수였다.”
“아니 되십니다! 또 보내 주셔야 해요! 기록관도 제가 유능하다며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에 천거하겠다 하였단 말입니다!”
“통신사에 든다 한들, 돈 한 푼 없이 갈 수 있을 성싶으냐?”
“그건 아버지가 융통해 주셔야지요!”
“이번에 내게 진 빚은 어쩌고? 횡령으로 옥에 갇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라.”
“그럼 그것만 갚으면 통신사에 보내 주실 것입니까?”
기실 서리가 기록관에게 매달렸던 이유는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청국에 다녀오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왜국에도 가 보고 싶어 그리했던 것이지.
“갚을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대신 갚아 주겠다는 이가 있습니다!”
그 말에 오양우뿐만 아니라 둘러앉아 있던 오라비들도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대신 돈을 갚아 주겠다는 놈은 분명 발칙한 꼼수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가 잘했다고, 그 400냥을 갚아 주겠다고 했다니까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전 그 반도 되지 않는 400냥 아닙니까? 그 정도 융통해 줄 이는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있는 것 아닙니까?”
잘했다는 말은 거짓이었지만 서리는 잔뜩 허풍을 떨었다. 실제 돈을 빌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를 지지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게다가 돈을 빌려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분명 곤란해지면 연락하라 했었다.
“누가?”
“그것이…… 정사(正使)입니다.”
갑자기 머뭇거리는 여식의 모양새에 그러면 그렇지 하던 오양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사? 설마 금평대군 말이냐?”
정사라면 사신단을 이끄는 대표이니, 답을 듣지 않아도 당연히 그이일 터였다. 어째 일이 제대로 풀려 가는 기분이었다.
“예! 아버님께서 저를 옥에 가두신다고 하면 대신하여 갚아 준다고 했습니다.”
금평대군의 이름자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제 편이 생긴 듯 서리가 우렁차게 답하자, 오양우는 함께 청에 다녀온 둘째 연겸을 바라보았다.
그도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저 말을 믿어야 하는 게야, 말아야 하는 게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던 서리는 아주 쪼오금 걱정이 되었다.
정말 그 돈을 받아 오라고 할까 봐서였다. 돈을 주고받는 것에 있어서는 부모 자식 간에도 철저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으니까.
“대군과 그 정도로 친해졌느냐?”
“처음에는 무척 괴팍하고 얄망궂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은 인사였습니다.”
어째 사사건건 저를 거슬려 하는가 싶어 저도 눈꼴이 시었는데, 배에서 제가 물에 빠질 뻔한 것을 구해 준 이후로는 눈빛이 달라졌다.
한양으로 오는 길에는 부러 말을 자신의 말 옆으로 붙이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도 하고 멀찌감치서라도 눈이 마주치면 온화한 미소를 전해 주니, 서리도 한양서 처음 만났을 때 그 걸출한 외모에 혹했던 순간으로 돌아간 듯 내내 설레기까지 했었다.
아버지께 이렇듯 왜국 통신사로 보내 달라 조르는 이유의 반도, 대군이 왜국 통신사의 대표로 또 갈까 싶어 그러는 것이었다.
청에 갈 적에는 대군이 내내 제게 야료를 부렸기에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짧던지.
다음에 왜국이든 어디든 갈 때에는 갈 적 올 적 내내 대군과 다정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그래? 마음에 들더냐?”
“아, 물론이지요. 인품이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서리가 입술에 잔뜩 침칠을 해 가며 칭찬을 했다. 그 말씀에 아버지의 얼굴이 좀 펴지는 것 같아, 슬쩍 여쭈었다.
“저, 왜국에 보내 주실 거지요?”
“음, 생각해 보마. 내 너에 대한 처리는 차차 알려 줄 것이니, 가서 자중하고 있어라. 투전 놀이니 뭐니 하며 나돌아 다니지 말고.”
“엥? 나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까? 어째서요?”
“옥에 갇히느니, 네 방에 갇히는 것이 낫지 않으냐? 자자, 물러가거라, 오라비들과 할 말이 있다.”
힝……. 아들딸을 가리지 않으며 자식들이 행복한 게 최고라고 늘 말씀하시며 화통하게 청에까지 보내 주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양 그녀를 억누르려고 하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서리가 나간 뒤, 오양우는 옆에 앉아 있던, 자신처럼 덩치가 큰 세 아들을 가까이 불러 앉혔다.
제가 아쉬울 때는 음전한 품행 따위는 내팽개치고 마는 서리가 혹여 문밖에서 귀를 대고 엿들을까 싶어서였다.
“그래, 연겸이 말해 보거라. 저게 무슨 소리냐? 대군과 저 정도로 친해졌다고?”
오양우와 나머지 두 아들의 시선을 받은 연겸은 기대와 달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다지…….”
서리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떠벌린 말인가? 순간 오양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네가 본 대군의 됨됨이는 어떠하더냐?”
자꾸만 대군 이야기를 묻는 아비가 이상했지만, 연겸은 생각나는 대로 아뢰었다.
“점잖고 의젓하였습니다. 사신단의 그 많은 일행을 잘 거두었고, 당황하거나 모자란 모습을 보인 적도 없거니와 연경에 가서는 청나라 관리들에게도 당당하였습니다.”
오양우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래? 그럼 서리를 그리 시집보내도 되겠느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후 자초지종, 즉 자신과 서리가 청에 가 있는 동안 궁궐로부터 혼담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연겸은 기가 막혔다.
“참말입니까? 바로 거절하지 않으셨다고요?”
이전에 아버지께서 서리에게 들어오는 혼담들이 영 시답지 않다며 모두 물리치던 것을 이름이었다.
“당장에 거절하기에는 어려운 자리 아니냐. 마침 서리가 대군과 함께 청에 갔으니, 돌아오는 걸 보고 결정하려고 5월 안에 기별을 해 준다 했지.”
“돌아오는 걸 보고 결정하다니요? 설마 서리가 대군과 정분이라도 나길 기대하셨다는 겁니까? 저러고 사내놈처럼 꾸미고 갔는데요?”
“그래서 네 의향을 묻는 것 아니냐.”
연겸이 정색을 하였다.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사람이 좀 차고 야멸스럽더이다.”
단정적인 그 말에 첫째인 연항이 혀를 찼다.
“그럼 우리 서리가 마음고생하니, 안 되지.”
“그러게요. 우리 서리한테는 인자하고 성품이 좋은 사내가 알맞습니다.”
셋째 연총까지 나서자, 아비인 오양우가 손을 내저었다.
“그야 쓸데없이 아무한테나 인자한 것보다는 낫다.”
“아버님께서는 대군과 서리를 짝지어 주실 생각에 그저 좋게만 보시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그자는 유독 우리 서리한테만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이라 그런지, 어찌 그럴 수 있나 충격을 받기보다는 그렇게 형님 전하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구먼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파도는 연신 몰아치고 있어 품 안의 방家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흔의 몸에 두 팔과 다리를 칭칭 두른 채 매달려 있었다.
코로 들어간 물 때문에 흔의 어깨에 대고 연신 콜록거리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끌어안은 흔의 팔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누가 보면 그를 끌어안고 있어야 자신이 사는가 싶게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배를 부서뜨릴 듯 흔들리던 파도가 가라앉고 거센 비와 귀청을 때릴 듯한 바람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제 안전해졌다 싶은지 사람들이 한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도 여전히 뱃전에 쓰러져 있었는데, 흔은 방家의 고개가 제 품에 툭 떨어지는 것으로 그가 까무룩 조는 것을 알았다.
지난밤 계집질로 늦게 잠자리에 든 데다가 풍랑에까지 시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일어나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고뿔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그래서 이만 깨워야겠다 생각하며 방家의 등을 안고 있던 손을 움직이려는데 그 아래에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옷 아래로 등을 가로질러 천으로 여러 번 동여맨 것이었다.
무엇이지? 처음에는 허리에 차는 전대를 가슴에 찼는가 하였지만, 기녀에게 가진 돈을 다 내주었으니 전대를 찰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좀 남은 돈이 있는가? 그렇다면 천만다행인데.
궁금증에 둘러진 천을 따라 더듬거리며 앞쪽으로 돌아 나오자니, 갑자기 도도록한 것이 만져졌다.
손안에 둥그렇게 들어차는 무언가. 그것도 가슴 양쪽에 하나씩.
그가 기대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천도 아니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몸의 일부였다.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니, 역시나 사내라면 상대에게도 없어야 하는 그 무언가.
오감이 곤두섰다. 제 두 팔과 가슴에 꼭 끌어안긴 방家의 몸이 기녀들의 몸처럼 나긋나긋하다는 것이 그제야 깨달아졌다.
뻣뻣한 시선을 내리니, 아까부터 훑고 또 훑던, 어느새 벗겨져 나간 안경 아래의 이목구비는, 필시 사내의 그것일 수 없을 만치 오밀조밀하였다. 허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흔의 눈이 몇 번이나 깜박여졌다. 여간해서는 미소를 머금지 않던 흔의 입가가 어느 순간 길쭉이 끌려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어 그 입술이 지난밤, 후끈한 시간을 보낸 여운이 어린 적도 없는 방家의 광대 언저리를 슬쩍 스치는데, 우연인지 아닌지 당사자가 아닌 바에야 결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 상단 부스러기 방석동
“그래서, 기와집 두 채 값을 날렸다는 말이냐?”
해주 상단의 대행수 오양우는 뻔뻔한 얼굴로 제 앞에 앉은 5촌 조카 방석동을, 아니, 조카 행세를 하는 막내 여식 오서리를 엄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남들은 청에 다녀오면 거액을 움켜쥐고 돌아오는데 빈털터리로 온 낯짝이었다.
“에이, 아버지. 두 채 값까지는 아닙니다. 300칸이 넘는 이 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은 되는 기와집으로 따지셔야지, 초가에 그저 기와만 얹은 것도 기와집이랍니까?”
재물 간수는 허투루면서 너스레만은 제대로다.
“그래, 400냥이면 비싼 기와집으로는 한 채 값에 불과하지.”
“그렇고말고요.”
그가 선선히 동의하자, 그냥 넘어가려는가 싶은지 여식은 손뼉까지 치며 맞장구를 친다.
“그럼, 기와집 한 채는 싼 것이냐? 기루에서 만난 기생에게 홀랑 털어 주기에?”
“물론 싼 것은 아니지요. 하오나,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세상에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남이 불효를 저지르지 않게 돕는 것도 제 스스로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전 같으면 잘했다고 등을 두드리며 화통하게 넘어갔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여식을 상인으로 만들 생각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헤헤거리며 눈치를 보는 여식도 전과 달리 어찌 이러시는가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은 오양우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시끄럽다. 넌 청에 내 자식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내 상인으로 간 것이었으니, 효를 논하기 전에 내게 갚아야 할 재물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 그렇습지요…….”
눈치 빠른 놈이라 일단은 넙죽 엎드려야겠다 생각했는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어림없다.
“하도 애원해서 사신단에 한번 끼워 줬더니만, 기어이 사고를 쳐? 다신 청에든 왜국에든 못 갈 줄 알아라.”
“앗, 아버지! 아니, 당숙 어른, 어찌 이러십니까? 또 그런 곳엘 가야 제가 손해를 충당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번에도 인삼 장사로 얼마나 많은 이윤을 남겼는데요!”
남장한 사실이 혹여 상단의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까 저리 쉬쉬하는 안쓰러운 짓도 이제 보지 않을 터였다.
“그래, 많이 남겨서 또 많이 털어 주고 오겠지.”
“제가 투전을 한 것도 아니고…….”
“한양서는 가끔 투전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장사 밑천을 주지 않으실 때 몇 번 해 보고는 소질이 있다 싶어 이후로는 재미로…… 물론 투전이 드러낼 만한 것은 아니지만,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푼돈이었…….”
여식이 잔뜩 눈치를 봐 가며 주절거리지만, 오양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푼돈이라 그냥 두었던 것이니라. 한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기에 지나치게 큰 액수였다.”
“아니 되십니다! 또 보내 주셔야 해요! 기록관도 제가 유능하다며 왜국으로 가는 통신사에 천거하겠다 하였단 말입니다!”
“통신사에 든다 한들, 돈 한 푼 없이 갈 수 있을 성싶으냐?”
“그건 아버지가 융통해 주셔야지요!”
“이번에 내게 진 빚은 어쩌고? 횡령으로 옥에 갇히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라.”
“그럼 그것만 갚으면 통신사에 보내 주실 것입니까?”
기실 서리가 기록관에게 매달렸던 이유는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청국에 다녀오는 것이 어찌나 재미있는지 왜국에도 가 보고 싶어 그리했던 것이지.
“갚을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대신 갚아 주겠다는 이가 있습니다!”
그 말에 오양우뿐만 아니라 둘러앉아 있던 오라비들도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대신 돈을 갚아 주겠다는 놈은 분명 발칙한 꼼수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제가 잘했다고, 그 400냥을 갚아 주겠다고 했다니까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전 그 반도 되지 않는 400냥 아닙니까? 그 정도 융통해 줄 이는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있는 것 아닙니까?”
잘했다는 말은 거짓이었지만 서리는 잔뜩 허풍을 떨었다. 실제 돈을 빌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를 지지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니 말이다.
게다가 돈을 빌려준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분명 곤란해지면 연락하라 했었다.
“누가?”
“그것이…… 정사(正使)입니다.”
갑자기 머뭇거리는 여식의 모양새에 그러면 그렇지 하던 오양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사? 설마 금평대군 말이냐?”
정사라면 사신단을 이끄는 대표이니, 답을 듣지 않아도 당연히 그이일 터였다. 어째 일이 제대로 풀려 가는 기분이었다.
“예! 아버님께서 저를 옥에 가두신다고 하면 대신하여 갚아 준다고 했습니다.”
금평대군의 이름자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제 편이 생긴 듯 서리가 우렁차게 답하자, 오양우는 함께 청에 다녀온 둘째 연겸을 바라보았다.
그도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저 말을 믿어야 하는 게야, 말아야 하는 게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던 서리는 아주 쪼오금 걱정이 되었다.
정말 그 돈을 받아 오라고 할까 봐서였다. 돈을 주고받는 것에 있어서는 부모 자식 간에도 철저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으니까.
“대군과 그 정도로 친해졌느냐?”
“처음에는 무척 괴팍하고 얄망궂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은 인사였습니다.”
어째 사사건건 저를 거슬려 하는가 싶어 저도 눈꼴이 시었는데, 배에서 제가 물에 빠질 뻔한 것을 구해 준 이후로는 눈빛이 달라졌다.
한양으로 오는 길에는 부러 말을 자신의 말 옆으로 붙이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기도 하고 멀찌감치서라도 눈이 마주치면 온화한 미소를 전해 주니, 서리도 한양서 처음 만났을 때 그 걸출한 외모에 혹했던 순간으로 돌아간 듯 내내 설레기까지 했었다.
아버지께 이렇듯 왜국 통신사로 보내 달라 조르는 이유의 반도, 대군이 왜국 통신사의 대표로 또 갈까 싶어 그러는 것이었다.
청에 갈 적에는 대군이 내내 제게 야료를 부렸기에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짧던지.
다음에 왜국이든 어디든 갈 때에는 갈 적 올 적 내내 대군과 다정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그래? 마음에 들더냐?”
“아, 물론이지요. 인품이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서리가 입술에 잔뜩 침칠을 해 가며 칭찬을 했다. 그 말씀에 아버지의 얼굴이 좀 펴지는 것 같아, 슬쩍 여쭈었다.
“저, 왜국에 보내 주실 거지요?”
“음, 생각해 보마. 내 너에 대한 처리는 차차 알려 줄 것이니, 가서 자중하고 있어라. 투전 놀이니 뭐니 하며 나돌아 다니지 말고.”
“엥? 나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까? 어째서요?”
“옥에 갇히느니, 네 방에 갇히는 것이 낫지 않으냐? 자자, 물러가거라, 오라비들과 할 말이 있다.”
힝……. 아들딸을 가리지 않으며 자식들이 행복한 게 최고라고 늘 말씀하시며 화통하게 청에까지 보내 주신 아버지께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양 그녀를 억누르려고 하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서리가 나간 뒤, 오양우는 옆에 앉아 있던, 자신처럼 덩치가 큰 세 아들을 가까이 불러 앉혔다.
제가 아쉬울 때는 음전한 품행 따위는 내팽개치고 마는 서리가 혹여 문밖에서 귀를 대고 엿들을까 싶어서였다.
“그래, 연겸이 말해 보거라. 저게 무슨 소리냐? 대군과 저 정도로 친해졌다고?”
오양우와 나머지 두 아들의 시선을 받은 연겸은 기대와 달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다지…….”
서리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떠벌린 말인가? 순간 오양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네가 본 대군의 됨됨이는 어떠하더냐?”
자꾸만 대군 이야기를 묻는 아비가 이상했지만, 연겸은 생각나는 대로 아뢰었다.
“점잖고 의젓하였습니다. 사신단의 그 많은 일행을 잘 거두었고, 당황하거나 모자란 모습을 보인 적도 없거니와 연경에 가서는 청나라 관리들에게도 당당하였습니다.”
오양우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래? 그럼 서리를 그리 시집보내도 되겠느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후 자초지종, 즉 자신과 서리가 청에 가 있는 동안 궁궐로부터 혼담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연겸은 기가 막혔다.
“참말입니까? 바로 거절하지 않으셨다고요?”
이전에 아버지께서 서리에게 들어오는 혼담들이 영 시답지 않다며 모두 물리치던 것을 이름이었다.
“당장에 거절하기에는 어려운 자리 아니냐. 마침 서리가 대군과 함께 청에 갔으니, 돌아오는 걸 보고 결정하려고 5월 안에 기별을 해 준다 했지.”
“돌아오는 걸 보고 결정하다니요? 설마 서리가 대군과 정분이라도 나길 기대하셨다는 겁니까? 저러고 사내놈처럼 꾸미고 갔는데요?”
“그래서 네 의향을 묻는 것 아니냐.”
연겸이 정색을 하였다.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사람이 좀 차고 야멸스럽더이다.”
단정적인 그 말에 첫째인 연항이 혀를 찼다.
“그럼 우리 서리가 마음고생하니, 안 되지.”
“그러게요. 우리 서리한테는 인자하고 성품이 좋은 사내가 알맞습니다.”
셋째 연총까지 나서자, 아비인 오양우가 손을 내저었다.
“그야 쓸데없이 아무한테나 인자한 것보다는 낫다.”
“아버님께서는 대군과 서리를 짝지어 주실 생각에 그저 좋게만 보시는 것 다 압니다. 하지만, 그자는 유독 우리 서리한테만 그러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