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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내 말을 시작하는데 무언가 크나큰 비밀을 누설하듯 속삭이는 투로 시작한다.
“예, 우선 조선의 상인들이 아편 유통에 열심인 것은 맞습니다.
틀린 부분은 중국 상인들이 무척 비싸게 파는 아편을 우리 조선의 상인들은 공짜로 내어 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일부러 들어라 하는 듯 객잔 내의 모두에게 다 들릴 정도였다.
얼토당토않은 얘기에 흔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인이 공짜로 물건을 내어 준다니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들어 보십시오.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마신다는데, 아편은 더더욱 많이 피우겠지요?
그렇게 더 깊이 중독되고 나면 그만큼 인삼이 간절해질 것은 당연지사이니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인삼을 곱절로 비싸게 파는 겁니다.
결국에 버는 돈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양쪽에서 돈을 챙긴다는 말씀은 엄연히 틀리다 그 말씀이지요.”
허어, 이런. 자신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격이었다.
함께 있던 역관들은 크게 웃지는 못하고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들 있었다. 방家는 그에 멈추지 않고 다음 말까지 덧붙였다.
“대군 대감께서도 아편에 관심이 있으시면 제 방으로 찾아오십시오. 제가 공짜로 피우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인삼이 필요해지시면 조금 싸게 해 드립지요.”
청의 관리들에게 들었던 그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해 주었으면 시원할 법한 얘기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네들과 한통속으로 보일 입장이니 허허거리고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정도 농조차 웃어넘기지 못한다면 소인배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감히 종친을 능멸한다 벌컥 성을 낸다면 애당초 말투가 틀려먹었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꼴만 될 뿐으로, 흔은 눈을 뒤룩거리는 상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애초에 그 말을 꺼낸 것은 조금이라도 얌전해져서 내 눈에 덜 띄라는 의도였는데 이후로는 더더욱 눈에 띄었다.
동그란 안경만큼이나 댕그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도 잔뜩 휘어져 웃음을 지어도 그랬다.
열여덟이나 먹었다는데 아직까지 수염 한 올 나지 않아서는 짐 하나 제대로 들 기운은 없다더니만 나불나불 입으로나마 짐을 나를 때도 그랬다.
짐 나르는 일꾼들을 향해 영차영차 입으로 독려하여 기운 나게 하는 모양을 나란히 지켜보던 기시도 슬며시 웃음을 빼어 물었다가는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흔의 시선에 허겁지겁 웃음을 지우지 않았던가.
지금도 저쪽서 재잘대는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니, 가뜩이나 깔깔한 입맛에 젓가락이 영 움직이질 않았다.
저가 돈을 잃었다는 얘기에 내 입맛은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고만.
돈을 전부 내주다니. 예물 호송관이니 이번 수행에서 인삼 10근 정도는 유통했을 테고 그 금액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두 채가 왔다 갔다 하는 터였다.
“제 돈도 아니고 상단에서 내준 인삼이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돌아가서 대행수의 결정에 맡겨야 할 테지만, 보나 마나지요. 아침에 그 상단의 대표인 역관 오연겸이 큰소리를 내기까지 하였다니 말입니다.
인삼값에 여비까지, 그 돈을 메꾸지 못하면 공금 횡령죄까지 뒤집어쓸 것인데 참으로 무모하지요.
오늘 아침 기녀가 떠날 때 내다보니 수레에 관이 두 개 실려 있긴 했습니다마는, 열어 보지 않은 다음에야 참말 부모 시신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돌덩이가 들어 있는지 알 게 무어랍니까. 그깟 계집 말에 속아서는 제 인생을 내던진 격이지요.”
반은 비난이고, 반은 동정인 그 말에 흔은 기가 막혔다. 저런 대책 없는 인사를 봤나.
“그 돈을 기록관이 메꿔 준다는 게야? 대체 어떻게?”
“다음 달에 왜국 통신사가 떠날 예정인데, 거기에 낄 수 있도록 왜국 담당 기록관에게 말을 잘 해 달라는 것이랍니다.
목돈이 움직이는 사신단에 끼어야 제게 떨어지는 것도 많을 것이고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
어서 배가 떠야 저런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는 위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어리석은 짓거리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목격했으니까.
지난밤 다들 잘 시간에 흔은 잠이 오지 않아, 아래층에 내려가 비 구경을 하다 올라오는 중이었다.
복도를 지나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하는데, 죽 늘어선 방문 중 하나가 열리더니, 기시가 언급했던 여인이 나온 것이다.
그 여인은 기녀임에도 불구하고 소복을 입은 사연이 전해지면서 사신단의 주목을 끈 이였다.
나라의 녹을 먹던 아비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자 어미까지 원통해하며 세상을 등지니, 그 부모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 갈 돈을 벌기 위해 청루에 들어왔고 상복을 벗는 대로 몸을 팔 예정이라던가.
그래서 역관 중 우두머리인 수역당상관이 얼마를 주면 당장 그 상복을 벗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기녀의 미색은 빼어났고 다들 그 말이 우스갯소리인 줄 알면서도 대답을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기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다들 추측하기를 한 재산 톡톡히 챙길 심산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그러던 이가 사신단이 전체를 쓰는 2층 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들 일행 누군가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는 말이 되고 그 누군가는 엄청난 재물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말이 되는 터.
뭐, 흔도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였다. 바로 다음 순간, 그 뒤를 이어 방에서 나오는 이를 보기 전까지는.
바로 방家 그자였다. 흔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나란히 서고 보니, 기녀보다도 작다 싶은 그자는 생글거리며 기녀를 배웅하였다.
기녀의 사연이 사내를 후리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흔이지만, 남녀상열지사야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니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인데, 막상 방家를 보니 심하게 거슬렸다. 한심해야 마땅한데, 그게 아니라 거슬리는 것이 문제였다.
어째서인지 연유를 모르겠으니 그것이 또 거슬렸다. 그 여인을 흔의 방으로 들이겠다는 기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으니, 다른 이가 여인을 품어서 거슬리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유는 그 ‘다른 이’가 방家여서일 것이다.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 같은 여인을 억지로 배웅하고 돌아서던 방家는 뒤에 섰던 흔을 보고는 멈칫하는 것도 잠시, 곧 예의 그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군 대감, 늦은 시간에 어찌 주무시지 않고요.”
웃다니. 혹시나 방家의 광대 언저리에서 후끈한 시간을 보낸 여운을 발견하게 될까 봐 저어되면서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되레 민망해질 지경인데.
계집질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저리 수치를 모르다니 기가 찼다. 그 웃는 낯을 서늘히 바라보던 흔의 대답은 그래서 더욱 불퉁하다.
“자네처럼 불순한 행동거지를 하고 다닐까 봐 묻는 겐가?”
예의상 물은 말에 지나치게 까칠하게 답한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상대 또한 중인 주제에 감히 종친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답을 한다.
“설마요. 제 방 앞에 서 계시기에 혹여 말씀드렸던 아편을 피우러 오셨나 여쭌 게지요.”
한 번은 참고 넘어가 줬지만, 또 그 얘기다. 감히 종친에게 한 불경한 언사로 볼기를 쳐도 모자라지 않을 것인데 어쩐지 흔은 번번이 그 생각까지 가지 않았다.
그저 탐방거리는 말대답을 즐기듯 그 또한 대꾸할 뿐.
“무엄하긴.”
그런데 자신의 말투나 내용을 보면 자꾸만 그런 말대답을 들을 여지를 남겨 두는 것 같아 요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라는 말씀이신가 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끝까지 탐방거리는 말재간을 고수하면서도 몸뚱이는 지나치게 굽실대며 인사하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흔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기녀에게 딱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마치 제 계집을 빼앗긴 것처럼 상실감이 느껴져 알 수 없는 노릇이라며 밤새 되뇌었는데…….
그랬는데 가진 돈을 결국 그 기녀에게 다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하룻밤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평생을 벌어도 못다 갚을 돈이었을 터인데.
흔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잠을 자지 못해 뒷골이 서늘하던 차에 가슴까지 답답해져 기어이 젓가락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다행히 그날 오전에 간신히 바람이 잦아들어 서둘러 강을 건너는 첫 번째 배에 타서도 그랬다.
방家는 혼이 난 탓인지 늘 찰싹 붙어 있던 덩치 큰 오연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는 배 말미, 즉 흔이 앉아 있는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이다.
흔도 원체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처지였다.
돌아가 봤자 제 자리는 다시 가시방석일 테니 차라리 세상 유람이나 하러 다시 떠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데, 배가 강 가운데쯤 이르자 개었다던 하늘이 다시 어두컴컴해지더니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강이지, 거의 바다라 할 수 있는 강 하류인지라, 일렁이던 파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 탓에 빗방울마저 몰려다니는지 우르르 쏟아졌다 말았다 했다.
“다들 꼭 잡으시오!”
누군가의 경고와 함께 저만치서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시가 돛대에 묶인 밧줄로 서둘러 흔의 다리를 묶고는 단단히 잡고 있으라 주의를 주었다.
저도 모르게 배 말미로 향한 흔의 시선에 난간을 부여잡으며 엉거주춤 주저앉는 방家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런.
흔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미는데, 방家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오라……, 혀, 형님!”
반대쪽을 넘겨다보니, 조금 전 흔들릴 때 넘어갔는지 커다란 짐짝 아래 오연겸이 깔려 있었다. 방家가 오연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위험한 줄도 모르고!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흔들리는 와중이니, 나뭇잎처럼 작은 체구가 중간에 쓰러진 것은 당연했다.
한데 그게 하필 난간 쪽이라. 파도가 코앞까지 왔는데, 몸이 배 밖으로 반 이상 밀려 나간 급박한 상황으로 흔에게서 서너 발짝이나 떨어진 거리였다.
그가 잡고 있던 밧줄을 놓아야 간신히 손이 닿을 법한.
등줄기가 서늘해진 흔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파도가 배 위를 덮치기 직전, 저를 부르는 기시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어찌 밧줄을……! 위험합니다, 대군 대감!”
온몸을 내리누를 듯 무지막지하게 크고 차가운 물이 빠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 배 바닥에 드러누운 흔의 한 손이 방家의 한쪽 팔뚝을 굳세게 잡고 있었다.
물이 들어간 눈을 깜박이며 가늠하니, 다행히 방家도 난간 안쪽으로 나동그라진 채였다.
“다시 밧줄을 잡으십시오! 어서요!”
뒤에서 기시가 악을 쓰며 나무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흔은 방家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으며 고쳐 쥐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우르르 밀려나니, 다행히 방家의 몸이 그에게로 쏠렸고 흔은 두 팔로 방家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후로도 배는 수없이 요동쳤고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흔의 다리에 묶인 밧줄이었다.
부디 그것이 끊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흔이 끌어안고 있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오연겸이 어쩌고 있는지 돌아보던 방家는, 다른 이들이 짐을 끌어 내리고 오연겸을 안전하게 붙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며 흔에게 인사치레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대군 대감.”
그사이 갓도 어디로 달아나서는, 드러난 상투의 꼭대기까지 덜덜 떨면서도 그리 인사를 차린다.
“꽉 잡아라.”
“예, 옛!”
배 뒤쪽과 앞쪽이 번갈아 가며 지붕 높이만큼 쳐들리며 흔들리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3월이라지만 한겨울 냉기만큼이나 차디찬 파도가 숨 한번 고를 새도 없이 연신 들이쳤고 두 사람은 매번 거센 물세례를 뒤집어썼다.
방家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본 흔이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준비하여라.”
그 소리에 방家의 두 팔이 허겁지겁 흔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방家의 뺨이 그의 것에 맞대어졌고 다음 순간 차디찬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순간 흔은 그 바닷물이 조금 전의 것만큼 차갑지 않다고 느꼈다. 어째서지?
태어나던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가 왕권을 위협한다 여기는 형님 전하의 의심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해도 풍랑이 이는 배며 거센 파도 앞에 선 이 순간이 두렵지 않을 리 없는데.
눈에 거슬리던 역관이, 그것도 사내가 자신을 끌어안았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무뎌졌다고? 설마 자신에게 남색 기질이 있었나?
이내 말을 시작하는데 무언가 크나큰 비밀을 누설하듯 속삭이는 투로 시작한다.
“예, 우선 조선의 상인들이 아편 유통에 열심인 것은 맞습니다.
틀린 부분은 중국 상인들이 무척 비싸게 파는 아편을 우리 조선의 상인들은 공짜로 내어 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일부러 들어라 하는 듯 객잔 내의 모두에게 다 들릴 정도였다.
얼토당토않은 얘기에 흔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인이 공짜로 물건을 내어 준다니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들어 보십시오.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마신다는데, 아편은 더더욱 많이 피우겠지요?
그렇게 더 깊이 중독되고 나면 그만큼 인삼이 간절해질 것은 당연지사이니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인삼을 곱절로 비싸게 파는 겁니다.
결국에 버는 돈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양쪽에서 돈을 챙긴다는 말씀은 엄연히 틀리다 그 말씀이지요.”
허어, 이런. 자신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격이었다.
함께 있던 역관들은 크게 웃지는 못하고 웃음을 간신히 삼키고들 있었다. 방家는 그에 멈추지 않고 다음 말까지 덧붙였다.
“대군 대감께서도 아편에 관심이 있으시면 제 방으로 찾아오십시오. 제가 공짜로 피우게 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인삼이 필요해지시면 조금 싸게 해 드립지요.”
청의 관리들에게 들었던 그 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해 주었으면 시원할 법한 얘기였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네들과 한통속으로 보일 입장이니 허허거리고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정도 농조차 웃어넘기지 못한다면 소인배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감히 종친을 능멸한다 벌컥 성을 낸다면 애당초 말투가 틀려먹었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꼴만 될 뿐으로, 흔은 눈을 뒤룩거리는 상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애초에 그 말을 꺼낸 것은 조금이라도 얌전해져서 내 눈에 덜 띄라는 의도였는데 이후로는 더더욱 눈에 띄었다.
동그란 안경만큼이나 댕그란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도 잔뜩 휘어져 웃음을 지어도 그랬다.
열여덟이나 먹었다는데 아직까지 수염 한 올 나지 않아서는 짐 하나 제대로 들 기운은 없다더니만 나불나불 입으로나마 짐을 나를 때도 그랬다.
짐 나르는 일꾼들을 향해 영차영차 입으로 독려하여 기운 나게 하는 모양을 나란히 지켜보던 기시도 슬며시 웃음을 빼어 물었다가는 무표정하게 노려보는 흔의 시선에 허겁지겁 웃음을 지우지 않았던가.
지금도 저쪽서 재잘대는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니, 가뜩이나 깔깔한 입맛에 젓가락이 영 움직이질 않았다.
저가 돈을 잃었다는 얘기에 내 입맛은 멀찌감치 달아나 버렸고만.
돈을 전부 내주다니. 예물 호송관이니 이번 수행에서 인삼 10근 정도는 유통했을 테고 그 금액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두 채가 왔다 갔다 하는 터였다.
“제 돈도 아니고 상단에서 내준 인삼이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돌아가서 대행수의 결정에 맡겨야 할 테지만, 보나 마나지요. 아침에 그 상단의 대표인 역관 오연겸이 큰소리를 내기까지 하였다니 말입니다.
인삼값에 여비까지, 그 돈을 메꾸지 못하면 공금 횡령죄까지 뒤집어쓸 것인데 참으로 무모하지요.
오늘 아침 기녀가 떠날 때 내다보니 수레에 관이 두 개 실려 있긴 했습니다마는, 열어 보지 않은 다음에야 참말 부모 시신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돌덩이가 들어 있는지 알 게 무어랍니까. 그깟 계집 말에 속아서는 제 인생을 내던진 격이지요.”
반은 비난이고, 반은 동정인 그 말에 흔은 기가 막혔다. 저런 대책 없는 인사를 봤나.
“그 돈을 기록관이 메꿔 준다는 게야? 대체 어떻게?”
“다음 달에 왜국 통신사가 떠날 예정인데, 거기에 낄 수 있도록 왜국 담당 기록관에게 말을 잘 해 달라는 것이랍니다.
목돈이 움직이는 사신단에 끼어야 제게 떨어지는 것도 많을 것이고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으니 말이지요.
어서 배가 떠야 저런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는 위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어리석은 짓거리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목격했으니까.
지난밤 다들 잘 시간에 흔은 잠이 오지 않아, 아래층에 내려가 비 구경을 하다 올라오는 중이었다.
복도를 지나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하는데, 죽 늘어선 방문 중 하나가 열리더니, 기시가 언급했던 여인이 나온 것이다.
그 여인은 기녀임에도 불구하고 소복을 입은 사연이 전해지면서 사신단의 주목을 끈 이였다.
나라의 녹을 먹던 아비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자 어미까지 원통해하며 세상을 등지니, 그 부모의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 갈 돈을 벌기 위해 청루에 들어왔고 상복을 벗는 대로 몸을 팔 예정이라던가.
그래서 역관 중 우두머리인 수역당상관이 얼마를 주면 당장 그 상복을 벗겠느냐고 물을 정도로 기녀의 미색은 빼어났고 다들 그 말이 우스갯소리인 줄 알면서도 대답을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기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다들 추측하기를 한 재산 톡톡히 챙길 심산인가 보다 생각하고는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그러던 이가 사신단이 전체를 쓰는 2층 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들 일행 누군가와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는 말이 되고 그 누군가는 엄청난 재물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말이 되는 터.
뭐, 흔도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였다. 바로 다음 순간, 그 뒤를 이어 방에서 나오는 이를 보기 전까지는.
바로 방家 그자였다. 흔은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섰다.
나란히 서고 보니, 기녀보다도 작다 싶은 그자는 생글거리며 기녀를 배웅하였다.
기녀의 사연이 사내를 후리기 위해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흔이지만, 남녀상열지사야 각자 알아서 하는 일이니 모른 척 지나가면 될 일인데, 막상 방家를 보니 심하게 거슬렸다. 한심해야 마땅한데, 그게 아니라 거슬리는 것이 문제였다.
어째서인지 연유를 모르겠으니 그것이 또 거슬렸다. 그 여인을 흔의 방으로 들이겠다는 기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으니, 다른 이가 여인을 품어서 거슬리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유는 그 ‘다른 이’가 방家여서일 것이다. 어쩐지 머뭇거리는 것 같은 여인을 억지로 배웅하고 돌아서던 방家는 뒤에 섰던 흔을 보고는 멈칫하는 것도 잠시, 곧 예의 그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군 대감, 늦은 시간에 어찌 주무시지 않고요.”
웃다니. 혹시나 방家의 광대 언저리에서 후끈한 시간을 보낸 여운을 발견하게 될까 봐 저어되면서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되레 민망해질 지경인데.
계집질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지만, 저리 수치를 모르다니 기가 찼다. 그 웃는 낯을 서늘히 바라보던 흔의 대답은 그래서 더욱 불퉁하다.
“자네처럼 불순한 행동거지를 하고 다닐까 봐 묻는 겐가?”
예의상 물은 말에 지나치게 까칠하게 답한 것을 모르지는 않으나, 상대 또한 중인 주제에 감히 종친의 말에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답을 한다.
“설마요. 제 방 앞에 서 계시기에 혹여 말씀드렸던 아편을 피우러 오셨나 여쭌 게지요.”
한 번은 참고 넘어가 줬지만, 또 그 얘기다. 감히 종친에게 한 불경한 언사로 볼기를 쳐도 모자라지 않을 것인데 어쩐지 흔은 번번이 그 생각까지 가지 않았다.
그저 탐방거리는 말대답을 즐기듯 그 또한 대꾸할 뿐.
“무엄하긴.”
그런데 자신의 말투나 내용을 보면 자꾸만 그런 말대답을 들을 여지를 남겨 두는 것 같아 요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라는 말씀이신가 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끝까지 탐방거리는 말재간을 고수하면서도 몸뚱이는 지나치게 굽실대며 인사하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흔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기녀에게 딱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마치 제 계집을 빼앗긴 것처럼 상실감이 느껴져 알 수 없는 노릇이라며 밤새 되뇌었는데…….
그랬는데 가진 돈을 결국 그 기녀에게 다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하룻밤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평생을 벌어도 못다 갚을 돈이었을 터인데.
흔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지만 잠을 자지 못해 뒷골이 서늘하던 차에 가슴까지 답답해져 기어이 젓가락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다행히 그날 오전에 간신히 바람이 잦아들어 서둘러 강을 건너는 첫 번째 배에 타서도 그랬다.
방家는 혼이 난 탓인지 늘 찰싹 붙어 있던 덩치 큰 오연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는 배 말미, 즉 흔이 앉아 있는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이다.
흔도 원체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처지였다.
돌아가 봤자 제 자리는 다시 가시방석일 테니 차라리 세상 유람이나 하러 다시 떠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데, 배가 강 가운데쯤 이르자 개었다던 하늘이 다시 어두컴컴해지더니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강이지, 거의 바다라 할 수 있는 강 하류인지라, 일렁이던 파도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 탓에 빗방울마저 몰려다니는지 우르르 쏟아졌다 말았다 했다.
“다들 꼭 잡으시오!”
누군가의 경고와 함께 저만치서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기시가 돛대에 묶인 밧줄로 서둘러 흔의 다리를 묶고는 단단히 잡고 있으라 주의를 주었다.
저도 모르게 배 말미로 향한 흔의 시선에 난간을 부여잡으며 엉거주춤 주저앉는 방家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런.
흔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미는데, 방家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오라……, 혀, 형님!”
반대쪽을 넘겨다보니, 조금 전 흔들릴 때 넘어갔는지 커다란 짐짝 아래 오연겸이 깔려 있었다. 방家가 오연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위험한 줄도 모르고!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배가 흔들리는 와중이니, 나뭇잎처럼 작은 체구가 중간에 쓰러진 것은 당연했다.
한데 그게 하필 난간 쪽이라. 파도가 코앞까지 왔는데, 몸이 배 밖으로 반 이상 밀려 나간 급박한 상황으로 흔에게서 서너 발짝이나 떨어진 거리였다.
그가 잡고 있던 밧줄을 놓아야 간신히 손이 닿을 법한.
등줄기가 서늘해진 흔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파도가 배 위를 덮치기 직전, 저를 부르는 기시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어찌 밧줄을……! 위험합니다, 대군 대감!”
온몸을 내리누를 듯 무지막지하게 크고 차가운 물이 빠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 배 바닥에 드러누운 흔의 한 손이 방家의 한쪽 팔뚝을 굳세게 잡고 있었다.
물이 들어간 눈을 깜박이며 가늠하니, 다행히 방家도 난간 안쪽으로 나동그라진 채였다.
“다시 밧줄을 잡으십시오! 어서요!”
뒤에서 기시가 악을 쓰며 나무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흔은 방家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실으며 고쳐 쥐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우르르 밀려나니, 다행히 방家의 몸이 그에게로 쏠렸고 흔은 두 팔로 방家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후로도 배는 수없이 요동쳤고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휩쓸리는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흔의 다리에 묶인 밧줄이었다.
부디 그것이 끊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흔이 끌어안고 있는데도 몸부림을 치며 오연겸이 어쩌고 있는지 돌아보던 방家는, 다른 이들이 짐을 끌어 내리고 오연겸을 안전하게 붙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며 흔에게 인사치레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대군 대감.”
그사이 갓도 어디로 달아나서는, 드러난 상투의 꼭대기까지 덜덜 떨면서도 그리 인사를 차린다.
“꽉 잡아라.”
“예, 옛!”
배 뒤쪽과 앞쪽이 번갈아 가며 지붕 높이만큼 쳐들리며 흔들리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3월이라지만 한겨울 냉기만큼이나 차디찬 파도가 숨 한번 고를 새도 없이 연신 들이쳤고 두 사람은 매번 거센 물세례를 뒤집어썼다.
방家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거대한 파도를 본 흔이 팔에 더욱 힘을 주며 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준비하여라.”
그 소리에 방家의 두 팔이 허겁지겁 흔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방家의 뺨이 그의 것에 맞대어졌고 다음 순간 차디찬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순간 흔은 그 바닷물이 조금 전의 것만큼 차갑지 않다고 느꼈다. 어째서지?
태어나던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가 왕권을 위협한다 여기는 형님 전하의 의심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해도 풍랑이 이는 배며 거센 파도 앞에 선 이 순간이 두렵지 않을 리 없는데.
눈에 거슬리던 역관이, 그것도 사내가 자신을 끌어안았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무뎌졌다고? 설마 자신에게 남색 기질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