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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낙혼이라면 지체 높은 집이 지체 낮은 집안과 하는 혼인으로, 떨어질 낙(落)을 쓸 정도로 스스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애초에 왕실에서 양반가의 규수를 맞아들이는 것도 낙혼이라 할 수 있지만, 양반도 아니고 천하다 싶은 중인과의 혼인은 만고에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명칭도 가례보다 낮춰 혼인이라 칭할까.
“어차피 다음 보위에 오를 왕제가 아닌 바에야 낙혼이면 어떻습니까? 게다가 한 치 아래인 양반가의 규수나 두 치 아래인 중인 집안의 여식이나 다를 것이 무에라고요.”
오라.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주상이 늘 저어하는 것이 금평을 따르는 무리들이 어느 날 역모를 일으켜 자신을 몰아낼까 하는 것인데, 드러내기도 비루한 지경의 혼인을 한다면야 그들이 내세울 명분 자체가 없어진다.
얼떨떨하던 그의 표정에도 묘한 번득임이 스쳐 갔다.
“그리 추진한다 한들, 그 약삭빠른 상인 놈들이 그 많은 재산을 내놓는 것이 쉽겠소? 그 집안 신분을 올려 준다는 말은 아예 마시오.”
더욱이 낙혼이 솔깃한 이유는 국고를 보충하는 문제보다 금평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인데 처가를 양반으로 올려 세도를 갖추게 되면 세도가와 혼인한 것과 진배없으니 절대 아니 될 일이다.
그러느니 국고를 보충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미한 양반 가문의 규수를 들이고 말지.
“그야 당연하지요.”
그가 대군에게 갖는 위화감에 대해 중전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어도 조금 전의 짧은 눈 맞춤에서 지아비의 의중을 읽었노라는 느낌을 받았다.
주상은 이제야 중전과 진정한 부부가 된 느낌을 받았다.
“상인이야 재물이 최고인 족속입니다. 이후 조정에서 상단의 뒤를 봐주어 그보다 더한 재물을 모으게 해 주겠다는 말을 흘리면 선뜻 내놓을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천한 제 집안에서 부부인이 나온다는데 혹하는 이도 있을 테고요.”
맞는 말이다. 제깟 놈들이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은 천금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내 어찌 지금껏 이 생각을 못 했을고!
“음. 그래도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인데? 그리고 대군이 반발한다면 강제로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인까지 가기는커녕 간택 단계에서부터 말이 많을 것인데?”
대신들의 반대만 없다면 손뼉을 마주칠 만큼 묘안이라는 말이다.
양반 가문이 대군의 뒷배가 되어 그가 근심할 일도 없을뿐더러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도 하는.
“비밀리에 진행하셔야지요. 가능하다면 혼삿날까지요.”
“그것이 가능한가? 간택이며 일이 많을 터인데?”
“그리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간택은 없을 것입니다. 대신 각 상단들에 의사를 타진해 봐야지요.”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중간이든 혼례 후든 알게 될 일인데, 그때 가서는 어쩌누?”
“염려 마십시오. 신료들이 반대할 리는 없을 겁니다. 국고가 바닥나 녹봉이 늦어지면 가장 먼저 곤란해지는 게 누구인데 그들이 반대를 한답니까?
혹여 한다면 그이들더러 가산을 털어 100만 냥을 만들어 내라 하십시오. 대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실의 안녕을 기해야 할 종친으로서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면 역모죄로 다스려야 할 일이지요.”
턱을 치켜든 중전이 단호히 말하자, 한때 대군과 정혼했던 일로 대군과의 사이를 의심하기까지 한 주상은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왕실의 법도에 맞춰 가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부부인 측의 신분에 맞춰 혼례를 치름으로써 대군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낙혼하는 것도 꺼릴 터인데, 가례까지?”
가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못내 미안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군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이 알려질까 그러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혼삿날까지 낙혼을 비밀로 유지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궐에서 가례를 준비하다 보면 비밀이 새어 나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되면 대군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반대가 길어져 잠시나마 조정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혼인이 파해질 수도 있을 성싶어 권해 드리는 것입니다.”
옳거니.
대군의 혼사는 내명부의 일이지만, 각 상단들에 운을 띄워 보는 것은 주상 자신이 당장에 추진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중전을 향해 눈매까지 휘어 가며 웃어 보였다. 기특한 생각을 해냈다는 칭찬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내 주상이 나가고 혼자 남아 제 배를 쓰다듬는 중전의 입가에 맴도는 것은 섬뜩한 차가움이었다.
* * *
“나리, 타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셔서 어쩝니까? 고기만두를 시켜 볼까요?”
“그건 물렸네.”
“그럼 새콤한 음식은 어떻습니까요? 그것이 우리 나리의 입맛을 좀 돋워 줄 것 같은데요?”
“글쎄…….”
청나라 식으로 의자와 탁자들이 즐비한 청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사신단 일행들이 대부분이었다.
청에 다녀오는 다섯 달도 넘는 기간 동안 지쳐 있는 데다가, 강 하나만 건너면 조선 땅인데 풍랑으로 벌써 며칠째 배가 뜨지 못해 이 청루에서 지내고 있는 참이었다.
청에 다녀오는 기간보다 이 청루의 맛없는 음식만 주야장천 먹는 며칠이 더욱 고역이라.
다들 죽상으로 앉아 있는데, 저쪽 탁자에 앉은 압물관 방家 석동만 유난히 기운이 팔팔하니 나불대며, 역시나 입맛이 하나도 없다는 얼굴로 앉은 기록관에게 아부를 떨고 있는 것이다.
이어 작은 갓을 쓴 얼굴을 점원에게로 향하며 종알종알 쏟아 내는 청나라 말은 새콤한 음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 그를 넘겨다보는 사신단의 대표인 금평대군 흔(欣)의 시선이 서늘한 것을 보았는지 옆에 섰던 내관 김기시가 고자질하듯 고한다.
“어제 그 소복 입은 기녀에게 가진 돈을 전부 다 내주어서 저런답니다.”
경멸을 담은 그 말에 젓가락을 들던 흔의 손이 멈칫했다. 누구한테 무얼 해?
“어젯밤 제가 침소로 그 기녀를 들일까 여쭈었지요? 대군 대감께서 그만두라 하시었지만 혹시나 하여 제가 청루 주인에게 말을 넣어 보았는데, 아 글쎄, 저 압물관 방家가 선수를 쳤다지 뭡니까?”
기녀를 방으로 들였다고? 저 방家가?
“그래서?”
“그 기녀의 수단이 어찌나 좋은지 베갯머리송사에 홀라당 넘어간 방家가 가진 돈을 모두 내어 주었고 기녀는 새벽같이 제 부모 관을 싣고 떠났답니다. 감히 선수 친 방자한 짓거리에 대한 인과응보이지요.”
잠이 없는 대신에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기시의 세세한 설명에, 흔은 기록관에게 차를 따라 주는 방家를 다시 넘겨다보았다.
청나라까지 가서 무역한 돈을 모두 기녀에게 털린 주제에 남의 입맛을 걱정한다고?
속이 없는 겐가, 머리가 없는 겐가?
조선 내에서 규모로 치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의 부스러기라, 신문물깨나 접했는지 동그란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며 싹싹하게 구는 모습은 누구나 흐뭇하니 쳐다볼 법했지만, 흔은 달랐다.
예물 호송관이라며 허리를 숙여 오던 한양에서의 첫 대면부터, 청에 다녀와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조선 땅인 이곳에 오도록 저이가 이상스러울 만큼 거슬리는 것이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더니 방家가 딱 그 짝으로, 웃어도 찡그려도 말을 해도 다물어도 늘 흔의 미간을 일그러지게 했다.
평소 조정 일에 무심해야 하고 호불호도 명확하지 않아야 하는 대군의 삶에 익숙해져, 딱히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무척이나 괴이쩍은 일이었다.
사신단 일행이 자그마치 5백여 명에 육박한다.
흔은 그중에서도 삼사(三使)와 역관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세 명의 수역관 정도하고나 말을 섞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운반하는 공물(貢物)이나 마필 정도와 다를 바 없을 만큼 말을 섞기는커녕 쳐다볼 일조차 없는 이들이다.
한데, 왜소한 체구의 저이가 전체 일행의 반이라도 되는 듯, 자꾸만 눈에 띄었고 자꾸만 거슬렸다.
그래서 연경에서 역관들이 인삼을 파는 것에 꽤나 도움도 주고 이윤도 많이 남게 했을 적에는, 고 계집처럼 조붓한 어깨를 이 사람 저 사람 두드려 가며 칭찬해 대는 꼴이 보기 싫어서 결국 나서서 한마디 했었다.
“인삼이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특효라며? 그래서 조선의 인삼상들이 아편 유통에도 열심이라는 소문이 있더구먼.
병 주고 약 주면서 양측으로 돈을 챙기는 것 아니냐는 말이지.”
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역관들의 얼굴이 굳어졌었다.
물론 흔도 제 나라 조선의 상인들을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다.
사신단 우두머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약아 빠진 청의 관리에게서 들었을 때 그 또한 기분이 상했던 내용이고 헛소문이라며 일축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조선의 상인들에게 알려 주어 대비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침 기고만장한 방家 때문에 말투가 삐딱하게 나오고 만 것이다.
“그저 소문만은 아닙니다만.”
억울하고 분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저 때문에 한 말임을 알았는지 역시나 나선 것은 방家였다.
함께 자리한 사내 중에서도 쑥 들어가 보일 정도로 작달막한 키나 왜소한 체구와 달리 부지런하고 이해관계에 밝으며 대인관계에도 능해 빠지지 않는 곳이 없던 주제이니, 이런 억울한 소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한데, 소문을 인정하는 건가? 말을 꺼낸 흔도 그것이 사실이 아닌 소문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한 말인데도?
흔이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을 보냈고 다른 역관들 또한 그 억울한 누명을 도리어 인정하는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방家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대군 대감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씀을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설명해 보게.”
게다가 씩 웃기까지?
낙혼이라면 지체 높은 집이 지체 낮은 집안과 하는 혼인으로, 떨어질 낙(落)을 쓸 정도로 스스로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애초에 왕실에서 양반가의 규수를 맞아들이는 것도 낙혼이라 할 수 있지만, 양반도 아니고 천하다 싶은 중인과의 혼인은 만고에 없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명칭도 가례보다 낮춰 혼인이라 칭할까.
“어차피 다음 보위에 오를 왕제가 아닌 바에야 낙혼이면 어떻습니까? 게다가 한 치 아래인 양반가의 규수나 두 치 아래인 중인 집안의 여식이나 다를 것이 무에라고요.”
오라.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주상이 늘 저어하는 것이 금평을 따르는 무리들이 어느 날 역모를 일으켜 자신을 몰아낼까 하는 것인데, 드러내기도 비루한 지경의 혼인을 한다면야 그들이 내세울 명분 자체가 없어진다.
얼떨떨하던 그의 표정에도 묘한 번득임이 스쳐 갔다.
“그리 추진한다 한들, 그 약삭빠른 상인 놈들이 그 많은 재산을 내놓는 것이 쉽겠소? 그 집안 신분을 올려 준다는 말은 아예 마시오.”
더욱이 낙혼이 솔깃한 이유는 국고를 보충하는 문제보다 금평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인데 처가를 양반으로 올려 세도를 갖추게 되면 세도가와 혼인한 것과 진배없으니 절대 아니 될 일이다.
그러느니 국고를 보충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미한 양반 가문의 규수를 들이고 말지.
“그야 당연하지요.”
그가 대군에게 갖는 위화감에 대해 중전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어도 조금 전의 짧은 눈 맞춤에서 지아비의 의중을 읽었노라는 느낌을 받았다.
주상은 이제야 중전과 진정한 부부가 된 느낌을 받았다.
“상인이야 재물이 최고인 족속입니다. 이후 조정에서 상단의 뒤를 봐주어 그보다 더한 재물을 모으게 해 주겠다는 말을 흘리면 선뜻 내놓을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천한 제 집안에서 부부인이 나온다는데 혹하는 이도 있을 테고요.”
맞는 말이다. 제깟 놈들이 왕실과 사돈을 맺는 것은 천금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내 어찌 지금껏 이 생각을 못 했을고!
“음. 그래도 대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인데? 그리고 대군이 반발한다면 강제로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혼인까지 가기는커녕 간택 단계에서부터 말이 많을 것인데?”
대신들의 반대만 없다면 손뼉을 마주칠 만큼 묘안이라는 말이다.
양반 가문이 대군의 뒷배가 되어 그가 근심할 일도 없을뿐더러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도 하는.
“비밀리에 진행하셔야지요. 가능하다면 혼삿날까지요.”
“그것이 가능한가? 간택이며 일이 많을 터인데?”
“그리 만들어야지요. 그리고 간택은 없을 것입니다. 대신 각 상단들에 의사를 타진해 봐야지요.”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중간이든 혼례 후든 알게 될 일인데, 그때 가서는 어쩌누?”
“염려 마십시오. 신료들이 반대할 리는 없을 겁니다. 국고가 바닥나 녹봉이 늦어지면 가장 먼저 곤란해지는 게 누구인데 그들이 반대를 한답니까?
혹여 한다면 그이들더러 가산을 털어 100만 냥을 만들어 내라 하십시오. 대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실의 안녕을 기해야 할 종친으로서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면 역모죄로 다스려야 할 일이지요.”
턱을 치켜든 중전이 단호히 말하자, 한때 대군과 정혼했던 일로 대군과의 사이를 의심하기까지 한 주상은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왕실의 법도에 맞춰 가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부부인 측의 신분에 맞춰 혼례를 치름으로써 대군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낙혼하는 것도 꺼릴 터인데, 가례까지?”
가례를 치르지 않는 것이 못내 미안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군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이 알려질까 그러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혼삿날까지 낙혼을 비밀로 유지하려면 그래야 합니다. 궐에서 가례를 준비하다 보면 비밀이 새어 나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되면 대군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반대가 길어져 잠시나마 조정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혼인이 파해질 수도 있을 성싶어 권해 드리는 것입니다.”
옳거니.
대군의 혼사는 내명부의 일이지만, 각 상단들에 운을 띄워 보는 것은 주상 자신이 당장에 추진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중전을 향해 눈매까지 휘어 가며 웃어 보였다. 기특한 생각을 해냈다는 칭찬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내 주상이 나가고 혼자 남아 제 배를 쓰다듬는 중전의 입가에 맴도는 것은 섬뜩한 차가움이었다.
* * *
“나리, 타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셔서 어쩝니까? 고기만두를 시켜 볼까요?”
“그건 물렸네.”
“그럼 새콤한 음식은 어떻습니까요? 그것이 우리 나리의 입맛을 좀 돋워 줄 것 같은데요?”
“글쎄…….”
청나라 식으로 의자와 탁자들이 즐비한 청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사신단 일행들이 대부분이었다.
청에 다녀오는 다섯 달도 넘는 기간 동안 지쳐 있는 데다가, 강 하나만 건너면 조선 땅인데 풍랑으로 벌써 며칠째 배가 뜨지 못해 이 청루에서 지내고 있는 참이었다.
청에 다녀오는 기간보다 이 청루의 맛없는 음식만 주야장천 먹는 며칠이 더욱 고역이라.
다들 죽상으로 앉아 있는데, 저쪽 탁자에 앉은 압물관 방家 석동만 유난히 기운이 팔팔하니 나불대며, 역시나 입맛이 하나도 없다는 얼굴로 앉은 기록관에게 아부를 떨고 있는 것이다.
이어 작은 갓을 쓴 얼굴을 점원에게로 향하며 종알종알 쏟아 내는 청나라 말은 새콤한 음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 그를 넘겨다보는 사신단의 대표인 금평대군 흔(欣)의 시선이 서늘한 것을 보았는지 옆에 섰던 내관 김기시가 고자질하듯 고한다.
“어제 그 소복 입은 기녀에게 가진 돈을 전부 다 내주어서 저런답니다.”
경멸을 담은 그 말에 젓가락을 들던 흔의 손이 멈칫했다. 누구한테 무얼 해?
“어젯밤 제가 침소로 그 기녀를 들일까 여쭈었지요? 대군 대감께서 그만두라 하시었지만 혹시나 하여 제가 청루 주인에게 말을 넣어 보았는데, 아 글쎄, 저 압물관 방家가 선수를 쳤다지 뭡니까?”
기녀를 방으로 들였다고? 저 방家가?
“그래서?”
“그 기녀의 수단이 어찌나 좋은지 베갯머리송사에 홀라당 넘어간 방家가 가진 돈을 모두 내어 주었고 기녀는 새벽같이 제 부모 관을 싣고 떠났답니다. 감히 선수 친 방자한 짓거리에 대한 인과응보이지요.”
잠이 없는 대신에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기시의 세세한 설명에, 흔은 기록관에게 차를 따라 주는 방家를 다시 넘겨다보았다.
청나라까지 가서 무역한 돈을 모두 기녀에게 털린 주제에 남의 입맛을 걱정한다고?
속이 없는 겐가, 머리가 없는 겐가?
조선 내에서 규모로 치자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의 부스러기라, 신문물깨나 접했는지 동그란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며 싹싹하게 구는 모습은 누구나 흐뭇하니 쳐다볼 법했지만, 흔은 달랐다.
예물 호송관이라며 허리를 숙여 오던 한양에서의 첫 대면부터, 청에 다녀와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조선 땅인 이곳에 오도록 저이가 이상스러울 만큼 거슬리는 것이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더니 방家가 딱 그 짝으로, 웃어도 찡그려도 말을 해도 다물어도 늘 흔의 미간을 일그러지게 했다.
평소 조정 일에 무심해야 하고 호불호도 명확하지 않아야 하는 대군의 삶에 익숙해져, 딱히 누군가에게 적대감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무척이나 괴이쩍은 일이었다.
사신단 일행이 자그마치 5백여 명에 육박한다.
흔은 그중에서도 삼사(三使)와 역관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세 명의 수역관 정도하고나 말을 섞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운반하는 공물(貢物)이나 마필 정도와 다를 바 없을 만큼 말을 섞기는커녕 쳐다볼 일조차 없는 이들이다.
한데, 왜소한 체구의 저이가 전체 일행의 반이라도 되는 듯, 자꾸만 눈에 띄었고 자꾸만 거슬렸다.
그래서 연경에서 역관들이 인삼을 파는 것에 꽤나 도움도 주고 이윤도 많이 남게 했을 적에는, 고 계집처럼 조붓한 어깨를 이 사람 저 사람 두드려 가며 칭찬해 대는 꼴이 보기 싫어서 결국 나서서 한마디 했었다.
“인삼이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특효라며? 그래서 조선의 인삼상들이 아편 유통에도 열심이라는 소문이 있더구먼.
병 주고 약 주면서 양측으로 돈을 챙기는 것 아니냐는 말이지.”
그의 말이 끝나자 주위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역관들의 얼굴이 굳어졌었다.
물론 흔도 제 나라 조선의 상인들을 비웃을 생각은 아니었다.
사신단 우두머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약아 빠진 청의 관리에게서 들었을 때 그 또한 기분이 상했던 내용이고 헛소문이라며 일축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조선의 상인들에게 알려 주어 대비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마침 기고만장한 방家 때문에 말투가 삐딱하게 나오고 만 것이다.
“그저 소문만은 아닙니다만.”
억울하고 분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저 때문에 한 말임을 알았는지 역시나 나선 것은 방家였다.
함께 자리한 사내 중에서도 쑥 들어가 보일 정도로 작달막한 키나 왜소한 체구와 달리 부지런하고 이해관계에 밝으며 대인관계에도 능해 빠지지 않는 곳이 없던 주제이니, 이런 억울한 소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지.
한데, 소문을 인정하는 건가? 말을 꺼낸 흔도 그것이 사실이 아닌 소문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한 말인데도?
흔이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을 보냈고 다른 역관들 또한 그 억울한 누명을 도리어 인정하는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방家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대군 대감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씀을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설명해 보게.”
게다가 씩 웃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