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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이웃을 사랑하라
“아, 새끼. 너 잡느라 힘만 뺐잖아. 얘기 좀 하자는데 왜 튀냐?”
“저번이,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뒷걸음질 치는 남학생의 뒤로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래. 저번은 작년의 마지막이었고. 오늘부터는 새 학기를 기념해서 새롭게 시작해야지.”
“새끼, 너 잡느라 뛰었더니 목마르다. 음료수 사 마시게 돈 좀 줘 봐. 한 5만 원이면 되겠다.”
“야, 나는 아까 너 잡다가 넘어졌거든? 파스값도 내놔. 나도 한 5만 원이면 되겠네.”
킥킥 웃는 무리에 둘러싸인 남학생은 부들거리는 손이 하얘지도록 가방끈을 꼭 쥐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거라고!”
“하! 꿈틀해 봐. 해 보라니까?”
남학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무리 중 한 명에게 돌진했다.
분명히 박치기를 하려고 했다. 퍽, 소리가 나야 정상인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퍽,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뒤로 나동그라진 건 오히려 그 남학생이었다.
“뭐 하냐? 쇼하냐?”
“이 새끼 미쳤나 봐. 야, 밟아.”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진 남학생의 몸 위로 운동화를 신은 발 대여섯이 동시에 날아들기 시작했다.
남학생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뭐 하냐? 이 고삐리 새끼들아, 내 말이 우습냐? 너네 진짜 죽어 볼래?”
드윽, 아스팔트 바닥을 끄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향하던 발길질이 멈추자 남학생은 실눈을 떴다.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무리를 바라보는 훤칠한 남자의 손에는 어디서 들고 온 건지 대걸레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 또 저 새끼야.”
무리 중 한 명이 작게 투덜대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뭐, 이 새끼야?”
“아, 왜요, 또!”
“그 머리는 장식이냐? 내가 잘 새겨 넣으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이 새끼들이 진짜.”
남자가 다가서자 무리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학생이 재빠르게 일어나 엉망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가방에 주워 담으며 눈앞의 남자를 흘끔거렸다.
큼직한 야상 점퍼를 입은 남자는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치고 있었다.
이제 막 3월에 들어선 터라 바람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남자는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몸,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투와 태도까지. 남학생에겐 세상 다시없을 구세주처럼 보였다.
“아저씨, 진짜 좀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가시라고요. 왜 또 그래요.”
“봤잖아. 안 끼어들 수가 없지.”
“아, 진짜.”
“더군다나 여기는 내 동네거든.”
씨익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야, 그러니까 내가 이쪽으로는 오지 말자고 그랬잖아.”
“오고 싶어서 왔냐? 저 새끼가 이쪽으로 도망치니까 따라왔지. 에이, 하필이면 걸려도…….”
웅성거리는 무리를 보던 남자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남자의 한 손에 들린 대걸레 자루가 유난히 믿음직해 보였다.
“어떡할래?”
“뭘 어떡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야. 거기, 너.”
자신을 보고 눈짓하는 남자의 부름에 남학생이 가방을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네, 네!”
“이제 시작이냐? 아직 돈 안 뜯겼어?”
“네!”
무리의 학생들이 인상을 쓴 채 대걸레 자루를 쥔 남자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학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 너 다음에 보자. 그때도 또 튀기만 해. 야, 가자.”
대장 격으로 보이는 한 명의 말에 불량스러운 무리는 발길을 돌렸다.
“다 큰 어른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왜 맨날…….”
“뭐, 이 새끼야?”
남자의 곁을 지나던 남학생의 뒤통수에 대걸레 자루가 툭, 닿았다.
“아, 왜 때려요!”
“진짜 제대로 때려 줘?”
“아니요…….”
“봐준다. 빨리 가.”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툴툴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가방을 들고 서 있던 남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냐?”
“네! 진짜 감사해요!”
“내놔.”
“……네?”
남자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자 남학생의 고개가 기울었다.
“고맙다며.”
“네, 감사한데…….”
“고마우면 성의 표시를 해야지. 아, 새끼들. 뜯은 거 같이 좀 나누는 게 뭐 어떻다고 매번 몰래 구석에 숨어서 뜯어? 어른인 내가 제일 많이 가져가는 건 당연한 건데. 하여간 장유유서를 몰라. 뭘 배웠어야 알지, 새끼들.”
한참 눈만 껌뻑이던 남학생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원래 뜯기려던 게 10만 원이면, 봐줬다. 7만 원만 내놔.”
“저 구해 주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내가?”
남학생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너를 왜 도와? 내가 경찰로 보이냐? 아, 잔말 말고 돈이나 꺼내 봐. 날도 추운데 오뎅이나 사 먹게. 얼마 있냐?”
장난 하나 섞이지 않은 그 말에 남학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구해 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까 그 무리와 함께 자신의 돈을 뜯어낸 후 제일 많이 가져가려던 것이다.
남학생은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가 나타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지갑을 열었다.
“12만 원? 어린놈이 뭐 한다고 현금을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다니냐? 오늘 새 학기 첫날 아니야? 아예 가져다 바치려고?”
“그게…… 카드를 잃어버려서요. 새 학기라 문제집 살 게 많아서…….”
“공부 대충 해라. 피 터지게 공부해 봐야 금수저 아래에서 피 터지게 일만 한다. 인마, 카드 써. 현금 많이 가지고 다녀 봐야 삥이나 뜯겨. 얼굴에 딱 삥 뜯어 달라고 쓰여 있고만. 에이, 어른으로서의 양심이 있지. 운 좋은 줄 알아.”
남자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한 장을 빼서 뒷주머니에 넣고는 지갑을 다시 건넸다.
“뭘 봐? 앞으로도 누가 삥 뜯거든 괜히 처맞지 말고 적당히 돈 내밀고 말아. 아까처럼 그러다가 맞으면 약값이 더 들어.”
“……네.”
저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노하우라고 알려 주는 건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내 돈 빼앗아 간 나쁜 새끼라고 해야 할지.
남학생이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들고 있던 대걸레 자루를 구석에 내던지고는 사라졌다.
남자가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남자는 만화방에서 킬킬거리다가 동네 분식집에서 꼬치 어묵 몇 개를 사 먹고는 집으로 향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는 좁은 골목. 세 번째 집이 남자가 사는 태순빌라였다.
“어떤 새끼가 차를 이렇게 대 놨어?”
이삿짐이 실린 트럭이 빌라 앞을 막고 있자 남자가 발을 들어 차의 타이어를 몇 번 툭툭, 쳤다.
아무래도 빌라에 누가 이사 오는 모양이었다.
“덕순 씨, 세 안 나간다고 걱정이더니. 누가 들어오기는 하는 모양이네.”
한참 이삿짐을 나르는 중인지 바닥에 박스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빵이 든 비닐봉지가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좀 나눠 먹읍시다. 이웃인데.”
남자가 중얼거리며 빵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는 그 순간.
“허락 없이 남의 것에 손대면 도둑이에요.”
똑 부러지는 맑은 목소리에 남자가 소리가 난 트럭 조수석 쪽을 보았다.
“뭐?”
“그 빵, 아저씨 거 아닌데 왜 마음대로 먹어요?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까만 머리카락이 반들반들한 남자아이가 트럭 조수석에 앉아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여기에 살거든? 이웃끼리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거라는 말, 못 들었어?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데 빵도 못 나눠 먹냐?”
“그러는 아저씨는 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도 몰라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는 남자아이는 퍽 똑똑해 보였다.
“교회 다니냐?”
“아뇨. 그냥 어디서 들었어요.”
“성경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도 있어. 사랑하면 나눠 먹어야지.”
“그 빵 주면, 아저씨는 뭐 해 줄 건데요?”
“뭐, 인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당돌한 아이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야, 너 이름이 뭔데?”
“우리 엄마가 아무한테나 이름 함부로 알려 주는 거 아니랬어요.”
“아무나 아니거든? 이웃이라니까? 난 여기 101호 사는 윤태성이야.”
조그만 입을 모아 윤, 태, 성, 이라고 발음한 남자아이의 눈이 컴컴한 건물 계단 안쪽을 향했다.
“이름 정도는 가르쳐 드려도 될 것 같아요. 저는 봄이에요. 나봄.”
“이름이 봄이야?”
“네.”
별 웃긴 이름도 다 있다고 생각한 태성은 재빠르게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말 잘하는 남자아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바닥에 놓인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었다.
“자, 그러면 이거 하나 들어다 주면 되지?”
“그거 제 장난감 상자예요. 가벼운 거 다 알아요. 그거 말고 저 뒤에 쌀 옮겨 주세요.”
태성은 상자를 내려놓고는 입에 물고 있던 빵을 우물거리며 삼켰다.
“야, 꼬맹이.”
“나봄이라고요.”
“그래, 나봄. 너 몇 살이냐?”
“일곱 살이요.”
다섯 살이나 될까 싶게 체구가 작은 봄은 태성의 질문이 이어지자 무릎 위에 펼치고 있던 책을 덮었다.
“아저씨는 몇 살인데요?”
“나는 스물여섯 살.”
아직 아저씨라 불리고 싶지 않은 나이였지만 상관없었다. 남이 뭐라 부르든 관심도 없었다.
태성은 다시 빵을 입에 물고는 커다란 쌀자루를 어깨에 올렸다. 그러고는 어수선한 계단을 향하려다 말고 멈춰 섰다.
물고 있던 빵을 한쪽 손에 든 태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보았다.
“야, 꼬맹이.”
“나봄이라니까요.”
“그래, 나봄.”
봄의 까만 눈동자가 태성을 똑바로 보았다.
“함부로 낯선 사람이랑 말하는 거 아니야.”
“이웃이라면서요.”
“그걸 어떻게 믿냐? 그냥 빵 하나 훔쳐 먹으려는 놈일지 누가 알아?”
“훔쳐 먹을 것 같지 않았어요.”
태성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훔쳐 먹을 것 같지 않다니. 훔쳐 먹으려고 했는데. 제법 똘똘해 보였지만 역시 아직은 꼬맹이구나 싶었다.
“사람 함부로 판단하는 거 아니야. 나봄, 엄마한테 다시 배워.”
어깨에 진 쌀자루를 바로 잡으며 돌아서던 태성은 계단을 내려오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와, 씨…….”
여자가 태성의 눈길에 눈을 슬쩍 찡그리고는 태성을 빙 돌아 지나쳤다.
존나 예뻐.
입 밖으로 기어 나오려던 욕설을 빵과 함께 삼켰다. 겨우 밀어 넣은 그 말은 태성의 심장을 간질였다.
태성은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쌀자루를 잡은 손까지 떨렸다.
“아, 새끼. 너 잡느라 힘만 뺐잖아. 얘기 좀 하자는데 왜 튀냐?”
“저번이,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뒷걸음질 치는 남학생의 뒤로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래. 저번은 작년의 마지막이었고. 오늘부터는 새 학기를 기념해서 새롭게 시작해야지.”
“새끼, 너 잡느라 뛰었더니 목마르다. 음료수 사 마시게 돈 좀 줘 봐. 한 5만 원이면 되겠다.”
“야, 나는 아까 너 잡다가 넘어졌거든? 파스값도 내놔. 나도 한 5만 원이면 되겠네.”
킥킥 웃는 무리에 둘러싸인 남학생은 부들거리는 손이 하얘지도록 가방끈을 꼭 쥐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매번 이렇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거라고!”
“하! 꿈틀해 봐. 해 보라니까?”
남학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무리 중 한 명에게 돌진했다.
분명히 박치기를 하려고 했다. 퍽, 소리가 나야 정상인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퍽,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뒤로 나동그라진 건 오히려 그 남학생이었다.
“뭐 하냐? 쇼하냐?”
“이 새끼 미쳤나 봐. 야, 밟아.”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진 남학생의 몸 위로 운동화를 신은 발 대여섯이 동시에 날아들기 시작했다.
남학생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뭐 하냐? 이 고삐리 새끼들아, 내 말이 우습냐? 너네 진짜 죽어 볼래?”
드윽, 아스팔트 바닥을 끄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향하던 발길질이 멈추자 남학생은 실눈을 떴다.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무리를 바라보는 훤칠한 남자의 손에는 어디서 들고 온 건지 대걸레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 또 저 새끼야.”
무리 중 한 명이 작게 투덜대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뭐, 이 새끼야?”
“아, 왜요, 또!”
“그 머리는 장식이냐? 내가 잘 새겨 넣으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이 새끼들이 진짜.”
남자가 다가서자 무리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학생이 재빠르게 일어나 엉망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가방에 주워 담으며 눈앞의 남자를 흘끔거렸다.
큼직한 야상 점퍼를 입은 남자는 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치고 있었다.
이제 막 3월에 들어선 터라 바람은 여전히 사나웠지만 남자는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몸,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투와 태도까지. 남학생에겐 세상 다시없을 구세주처럼 보였다.
“아저씨, 진짜 좀 끼어들지 말고 그냥 가시라고요. 왜 또 그래요.”
“봤잖아. 안 끼어들 수가 없지.”
“아, 진짜.”
“더군다나 여기는 내 동네거든.”
씨익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야, 그러니까 내가 이쪽으로는 오지 말자고 그랬잖아.”
“오고 싶어서 왔냐? 저 새끼가 이쪽으로 도망치니까 따라왔지. 에이, 하필이면 걸려도…….”
웅성거리는 무리를 보던 남자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남자의 한 손에 들린 대걸레 자루가 유난히 믿음직해 보였다.
“어떡할래?”
“뭘 어떡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야. 거기, 너.”
자신을 보고 눈짓하는 남자의 부름에 남학생이 가방을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네, 네!”
“이제 시작이냐? 아직 돈 안 뜯겼어?”
“네!”
무리의 학생들이 인상을 쓴 채 대걸레 자루를 쥔 남자와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학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까. 너 다음에 보자. 그때도 또 튀기만 해. 야, 가자.”
대장 격으로 보이는 한 명의 말에 불량스러운 무리는 발길을 돌렸다.
“다 큰 어른이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왜 맨날…….”
“뭐, 이 새끼야?”
남자의 곁을 지나던 남학생의 뒤통수에 대걸레 자루가 툭, 닿았다.
“아, 왜 때려요!”
“진짜 제대로 때려 줘?”
“아니요…….”
“봐준다. 빨리 가.”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툴툴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가방을 들고 서 있던 남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냐?”
“네! 진짜 감사해요!”
“내놔.”
“……네?”
남자가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자 남학생의 고개가 기울었다.
“고맙다며.”
“네, 감사한데…….”
“고마우면 성의 표시를 해야지. 아, 새끼들. 뜯은 거 같이 좀 나누는 게 뭐 어떻다고 매번 몰래 구석에 숨어서 뜯어? 어른인 내가 제일 많이 가져가는 건 당연한 건데. 하여간 장유유서를 몰라. 뭘 배웠어야 알지, 새끼들.”
한참 눈만 껌뻑이던 남학생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원래 뜯기려던 게 10만 원이면, 봐줬다. 7만 원만 내놔.”
“저 구해 주시려던 거……. 아니었어요?”
“내가?”
남학생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너를 왜 도와? 내가 경찰로 보이냐? 아, 잔말 말고 돈이나 꺼내 봐. 날도 추운데 오뎅이나 사 먹게. 얼마 있냐?”
장난 하나 섞이지 않은 그 말에 남학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구해 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까 그 무리와 함께 자신의 돈을 뜯어낸 후 제일 많이 가져가려던 것이다.
남학생은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가 나타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지갑을 열었다.
“12만 원? 어린놈이 뭐 한다고 현금을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다니냐? 오늘 새 학기 첫날 아니야? 아예 가져다 바치려고?”
“그게…… 카드를 잃어버려서요. 새 학기라 문제집 살 게 많아서…….”
“공부 대충 해라. 피 터지게 공부해 봐야 금수저 아래에서 피 터지게 일만 한다. 인마, 카드 써. 현금 많이 가지고 다녀 봐야 삥이나 뜯겨. 얼굴에 딱 삥 뜯어 달라고 쓰여 있고만. 에이, 어른으로서의 양심이 있지. 운 좋은 줄 알아.”
남자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한 장을 빼서 뒷주머니에 넣고는 지갑을 다시 건넸다.
“뭘 봐? 앞으로도 누가 삥 뜯거든 괜히 처맞지 말고 적당히 돈 내밀고 말아. 아까처럼 그러다가 맞으면 약값이 더 들어.”
“……네.”
저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노하우라고 알려 주는 건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내 돈 빼앗아 간 나쁜 새끼라고 해야 할지.
남학생이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들고 있던 대걸레 자루를 구석에 내던지고는 사라졌다.
남자가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꽤 오랫동안 들려왔다.
남자는 만화방에서 킬킬거리다가 동네 분식집에서 꼬치 어묵 몇 개를 사 먹고는 집으로 향했다. 가파른 언덕이 시작되는 좁은 골목. 세 번째 집이 남자가 사는 태순빌라였다.
“어떤 새끼가 차를 이렇게 대 놨어?”
이삿짐이 실린 트럭이 빌라 앞을 막고 있자 남자가 발을 들어 차의 타이어를 몇 번 툭툭, 쳤다.
아무래도 빌라에 누가 이사 오는 모양이었다.
“덕순 씨, 세 안 나간다고 걱정이더니. 누가 들어오기는 하는 모양이네.”
한참 이삿짐을 나르는 중인지 바닥에 박스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빵이 든 비닐봉지가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좀 나눠 먹읍시다. 이웃인데.”
남자가 중얼거리며 빵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는 그 순간.
“허락 없이 남의 것에 손대면 도둑이에요.”
똑 부러지는 맑은 목소리에 남자가 소리가 난 트럭 조수석 쪽을 보았다.
“뭐?”
“그 빵, 아저씨 거 아닌데 왜 마음대로 먹어요?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까만 머리카락이 반들반들한 남자아이가 트럭 조수석에 앉아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여기에 살거든? 이웃끼리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거라는 말, 못 들었어?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데 빵도 못 나눠 먹냐?”
“그러는 아저씨는 네 이웃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도 몰라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하는 남자아이는 퍽 똑똑해 보였다.
“교회 다니냐?”
“아뇨. 그냥 어디서 들었어요.”
“성경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도 있어. 사랑하면 나눠 먹어야지.”
“그 빵 주면, 아저씨는 뭐 해 줄 건데요?”
“뭐, 인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세상이 다 그렇잖아요.”
당돌한 아이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야, 너 이름이 뭔데?”
“우리 엄마가 아무한테나 이름 함부로 알려 주는 거 아니랬어요.”
“아무나 아니거든? 이웃이라니까? 난 여기 101호 사는 윤태성이야.”
조그만 입을 모아 윤, 태, 성, 이라고 발음한 남자아이의 눈이 컴컴한 건물 계단 안쪽을 향했다.
“이름 정도는 가르쳐 드려도 될 것 같아요. 저는 봄이에요. 나봄.”
“이름이 봄이야?”
“네.”
별 웃긴 이름도 다 있다고 생각한 태성은 재빠르게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말 잘하는 남자아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바닥에 놓인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었다.
“자, 그러면 이거 하나 들어다 주면 되지?”
“그거 제 장난감 상자예요. 가벼운 거 다 알아요. 그거 말고 저 뒤에 쌀 옮겨 주세요.”
태성은 상자를 내려놓고는 입에 물고 있던 빵을 우물거리며 삼켰다.
“야, 꼬맹이.”
“나봄이라고요.”
“그래, 나봄. 너 몇 살이냐?”
“일곱 살이요.”
다섯 살이나 될까 싶게 체구가 작은 봄은 태성의 질문이 이어지자 무릎 위에 펼치고 있던 책을 덮었다.
“아저씨는 몇 살인데요?”
“나는 스물여섯 살.”
아직 아저씨라 불리고 싶지 않은 나이였지만 상관없었다. 남이 뭐라 부르든 관심도 없었다.
태성은 다시 빵을 입에 물고는 커다란 쌀자루를 어깨에 올렸다. 그러고는 어수선한 계단을 향하려다 말고 멈춰 섰다.
물고 있던 빵을 한쪽 손에 든 태성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보았다.
“야, 꼬맹이.”
“나봄이라니까요.”
“그래, 나봄.”
봄의 까만 눈동자가 태성을 똑바로 보았다.
“함부로 낯선 사람이랑 말하는 거 아니야.”
“이웃이라면서요.”
“그걸 어떻게 믿냐? 그냥 빵 하나 훔쳐 먹으려는 놈일지 누가 알아?”
“훔쳐 먹을 것 같지 않았어요.”
태성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훔쳐 먹을 것 같지 않다니. 훔쳐 먹으려고 했는데. 제법 똘똘해 보였지만 역시 아직은 꼬맹이구나 싶었다.
“사람 함부로 판단하는 거 아니야. 나봄, 엄마한테 다시 배워.”
어깨에 진 쌀자루를 바로 잡으며 돌아서던 태성은 계단을 내려오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와, 씨…….”
여자가 태성의 눈길에 눈을 슬쩍 찡그리고는 태성을 빙 돌아 지나쳤다.
존나 예뻐.
입 밖으로 기어 나오려던 욕설을 빵과 함께 삼켰다. 겨우 밀어 넣은 그 말은 태성의 심장을 간질였다.
태성은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때문에 쌀자루를 잡은 손까지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