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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꽃집의 아줌마는 예뻐요
“어, 그거 우리 쌀 아니에요?”
박스를 하나 들어 올리던 여자가 멈칫하더니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은 여전히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저기요, 그 쌀…….”
“엄마, 아저씨가 우리 쌀 날라 주신대요. 대신 제가 빵 드렸어요.”
봄을 보는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과 동시에 태성의 눈 역시 동그래졌다.
“엄……마?”
태성은 여자를 아래위로 훑었다.
“봄아,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말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낯선 사람 아니야. 이웃이라고 했어요. 저 아저씨는 101호에 사신대요. 이웃 어른들에게는 인사 잘 해야 하는 거잖아요.”
여자가 다시 태성을 보더니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에이, 씨.”
태성은 돌아서며 들고 있던 빵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쌀자루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예뻐서 넋을 놓고 봤는데 아줌마일 줄이야. 아직 젊어 보이는데 애가 일곱 살이라니. 저 여자 남편은 무슨 복이야? 존나 좋겠네.
201호 앞에 쌀자루를 툭, 내려놓은 태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와 제집 문을 열었다.
“왔어?”
“어. 윗집 세 나갔나 보네. 이사 오더만.”
태성이 외투를 벗고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밤새 손목에 감고 있던 파스를 떼어 내던 덕순이 태성의 곁으로 엉덩이를 옮겨 앉았다.
“어. 나도 이사 오는 거 들여다보느라고 잠깐 들어온 거야. 점심은 먹었고? 가게에 와서 먹으라니까.”
이미 점심때는 한참 지나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에 나갔던 덕순은 소파 밖으로 삐죽 나간 태성의 긴 다리를 눈으로 훑었다.
“대충 먹었어. 그놈의 파스 그만 붙이고 손목 더 망가지기 전에 병원에 가라니까.”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날 추우니까 더 아픈 것 같아. 날이 풀릴 때가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추워서는, 원.”
덕순은 잠깐 뜸 들이다가 태성을 흘끔 보았다. 하지만 태성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같이 안 갈래?”
“안 가.”
병원에 같이 가자는 말을 예상했다는 듯 태성이 빠르게 대답하자 덕순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왜. 같이 가자. 응? 날이 이래서 너도 어깨 아플 텐데. 같이 가서 그…… 재활 치료도 좀 받고…….”
태성이 인상을 쓰고는 휙 돌아 소파 등받이를 보고 누웠다.
“아, 알았어. 잔소리 안 할 테니까 똑바로 누워. 의사 선생님이 오른쪽 어깨에 무리 간다고 그렇게 눕지 말라잖아. 어?”
“나 좀 잔다.”
덕순은 한숨을 쉬며 떼어 낸 파스를 들고 일어섰다.
“하여튼 엄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들으라고 한 소리지만 태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덕순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거,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저 하나 보고 사는 거 알면서.”
외투를 껴입으면서 신발을 신는 덕순의 귀에 불퉁한 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리 치료만 받고 오지 말고. 의사가 수술하자고 하면 하겠다고 해. 파스 붙여 봤자 잠깐인 거 알면서. 그동안 쓴 파스값 모았으면 벌써 수술하고도 남았겠네.”
“수술을 어떻게 하냐? 내가 병원에 누워 있으면 가게는…….”
“며칠 문 닫는다고 손님 안 떨어져. 그리고 덕순 씨 없어도 가게에 일할 사람은 많잖아.”
한 번을 안 도와주면서 말만 잘하는 아들이 얄미웠다. 하지만 태성을 미워하기엔 덕순은 고슴도치 엄마였다.
“지금 병원에 가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혼자서 기다리면 심심하고, 시간도 아깝고. 그럴 바엔 그냥 병원 말고 다시 가게에…….”
“에이, 씨. 가서 나 보고 진료실 들어가라고 하기만 해.”
태성이 일어나 외투를 입고는 신발을 신었다.
덕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찮은 척, 무심한 척하지만 그래도 제 엄마 위할 줄은 아는 아들이었다.
“이것 좀 치우라니까.”
“왜 치우냐? 이것도 사려면 다 돈인데. 도둑놈이 들어오면 급한 대로 이거라도 있어야지.”
현관 구석에 우산과 함께 놓인 죽도를 발로 툭 찬 태성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들, 같이 가.”
“몰라.”
망할 죽도. 태성은 그 죽도가 꼴도 보기 싫었다.
* * *
“꽃이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 주세요.”
정연은 만족한 얼굴로 꽃다발을 들고 돌아서는 손님에게 인사했다.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고 유치원도 가까워 봄이 걸어올 수도 있는 곳에 새롭게 문을 연 꽃집 ‘봄’.
정연은 시간을 확인한 뒤 주문 들어온 목록을 살피고는 리시안셔스를 뽑아 들었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
리시안셔스의 꽃말을 떠올리고는 코웃음 쳤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뭐, 그 덕에 내가 밥 벌어 먹고사니까.”
법이 바뀐 탓에 꽃 선물이 줄었다지만, 센스 있는 정연의 꽃다발은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더군다나 정연이 백화점 문화센터에 플로리스트로 강연을 나가면서 더 입소문을 탔다.
“아, 맞다.”
서둘러 꽃가지들을 정리한 정연이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작업대에서 돌아 나왔다. 봄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꽃집 유리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저 멀리 봄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다 곧 눈을 가늘게 떴다.
봄의 옆에는 어제 본 그 껄렁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사 주는 건 먹는 거 아니랬어요.”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뭐가요?”
종이컵 가득 든 떡볶이를 긴 꼬치로 찍어 내밀었던 태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입으로 떡볶이를 넣었다.
“첫째. 너, 나 몰라? 우리 어제도 봤잖아. 너는 벌써 내가 사는 집도, 이름도, 나이도 아는데?”
“하지만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내가 거짓말 숱하게 했어도 그런 걸로는 안 해. 됐고. 둘째. 이건 산 게 아니야.”
태성이 다시 한번 꼬치로 떡볶이를 찍어 내밀자 봄이 머뭇거리다 꼬치를 받아 들었다.
주홍빛 양념에 버무려진 떡볶이가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빼앗은 거지.”
“네?”
“요즘 초딩들은 돈이 많아. 엄마가 바쁘다고 점심으로 떡볶이 사 먹는 애들도 많고.”
봄이 갸웃하며 손에 든 떡볶이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아저씨, 남의 걸 빼앗는 건 나쁜 거잖아요.”
“나눌 줄 모르는 애들은 어쩔 수 없어. 어려서부터 욕심만 많아서는 나눠 먹을 줄을 모른다니까. 너는 그렇게 크지 마라.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사 준 게 아니니까 먹어도 된다는 말이야.”
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떡볶이를 입에 넣으려다 꽃집 앞에 나와 있던 정연을 발견했다.
“엄마!”
반가운 마음에 봄이 정연을 힘껏 불렀다. 정연에게 달려 나가기 전, 봄은 들고 있던 꼬치를 태성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무리 나눠 먹는 게 좋은 거라고 해도 빼앗는 건 나쁜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가 남의 것 빼앗아 먹으면 아저씨네 엄마는 속상할 거예요.”
“뭐?”
“저는 엄마한테 뛰어가야 해요. 엄마는 제가 뛰어가서 안기면 웃거든요.”
태성은 자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멀어진 봄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두 팔 벌리고 뛰어가서 예쁜 엄마의 품에 안기는 봄을 보니 금세 괜한 웃음이 났다.
“아, 꽃집 하셔?”
몇 개 남은 떡볶이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태성이 근처 쓰레기통 위로 종이컵을 휙, 내던졌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꽃집 앞을 지나치며 까딱, 고개 숙여 인사했다.
봄을 안은 채 얼굴을 매만지던 정연이 뒤로 슬쩍 몸을 사리며 고개 숙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분명한 그 태도에 태성은 피식 웃고는 입술을 모았다.
꽃집의 아가씨가 예쁘다는 익숙한 멜로디에 정연은 고개 들었다. 태성의 휘파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꽃집으로 들어온 정연이 봄의 가방을 받아 알림장을 확인하는 사이, 봄이 손을 씻고는 작업대 뒤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 아저씨랑 어디서 만났어?”
“유치원 앞에서요.”
“왜 같이 왔어?”
“같은 방향이니까요. 선생님께 인사하고 나왔는데 아저씨가 집에 가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혼자 집에 갈 수 있냐고 물어서 바로 앞이고 엄마랑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연습했다고, 어렵지 않다고 했어요.”
정연은 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량해 보이는 아랫집 남자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엄마.”
“응.”
“그 아저씨는 이웃이니까. 말해도 되는 거죠?”
“응…….”
“봄이가 뭐 잘못한 거, 없는 거죠?”
“그럼. 엄마는 지금 봄이 혼내려는 게 아니야.”
봄은 생긋 웃고는 정연이 가져다 놓은 과학 잡지를 펼쳤다.
라넌큘러스를 꺼내 손질하는 정연의 귀에 자꾸만 아랫집 남자가 불던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집에 들어온 태성은 거실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며칠째 궂은 날씨에 아픈 어깨가 말썽이었다.
“졸라 아프네, 진짜.”
어깨를 돌리던 태성은 현관문 앞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덕순과 윗집 여자, 그 예쁜 아줌마인 듯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요. 떡 대신 이거라도. 죄송해요.”
“아유, 요즘 세상에 누가 이사 떡을 돌린다고. 꽃이 예쁘기도 하네. 가만, 그거 무겁지 않겠어?”
“괜찮아요.”
“잠깐만, 있어 봐. 응? 태성아! 태성아!”
문 열리는 소리에 태성이 재빠르게 소파 등받이 쪽으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덕순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성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들, 안 자는 거 알아. 너 저기, 윗집에 생수 좀 올려 주고 와라.”
덕순의 재촉에 태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편 뒀다 삶아 먹을 일이 있나, 그걸 왜 내가 옮겨?
“윤태성, 너 안 자는 거 엄마는 다 안다니까 그러네? 봄이 엄마 덕분에 엄마가 꽃을 다 받아 본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몰라. 아, 좀!”
“아들 어깨 아프다.”
“안 아픈 쪽으로 들면 되잖어!”
계속되는 덕순의 타박에 열린 현관문 너머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저 괜찮아요.”
혼자 들고 올라갈 수 있다는데 막무가내로 기다리라고 하고는 문 열고 들어간 덕순이 아들을 깨우는 소리에 정연의 마음이 불편했다.
“미리 주문한다는 게 깜빡했어.”
“엄마, 제가 하나씩 여섯 번 왔다 갔다 하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여기까지 엄마가 잘 들고 왔잖아. 다 왔는데 1층 아주머니가 기다리라고 하셔서 그래.”
정연과 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성이 에이 씨, 소리 한번 내더니 일어났다.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는 생수병 여섯 개 묶음을 번쩍 들었다. 태성이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도울 거 있으면 말해. 혼자 애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어? 내가 알지.”
“네……. 그런데 음, 괜찮아요.”
“괜찮기는. 내가 저놈 하나 키우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세상을 원망했는데. 힘들어도 누구 하나 도움 청할 곳이 없더라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응?”
계단을 오르던 태성이 뒤를 돌아봤다. 봉지에 담긴 찬거리들을 들고 뒤따라 계단을 오르던 봄이 멈춰 섰다.
“아저씨, 왜요?”
“너, 아빠 없어?”
고개 끄덕이는 봄의 뒤에서 정연이 눈을 크게 뜨고 태성을 쏘아보았다.
“어, 그거 우리 쌀 아니에요?”
박스를 하나 들어 올리던 여자가 멈칫하더니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은 여전히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저기요, 그 쌀…….”
“엄마, 아저씨가 우리 쌀 날라 주신대요. 대신 제가 빵 드렸어요.”
봄을 보는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과 동시에 태성의 눈 역시 동그래졌다.
“엄……마?”
태성은 여자를 아래위로 훑었다.
“봄아, 엄마가 낯선 사람이랑 말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낯선 사람 아니야. 이웃이라고 했어요. 저 아저씨는 101호에 사신대요. 이웃 어른들에게는 인사 잘 해야 하는 거잖아요.”
여자가 다시 태성을 보더니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에이, 씨.”
태성은 돌아서며 들고 있던 빵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쌀자루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예뻐서 넋을 놓고 봤는데 아줌마일 줄이야. 아직 젊어 보이는데 애가 일곱 살이라니. 저 여자 남편은 무슨 복이야? 존나 좋겠네.
201호 앞에 쌀자루를 툭, 내려놓은 태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와 제집 문을 열었다.
“왔어?”
“어. 윗집 세 나갔나 보네. 이사 오더만.”
태성이 외투를 벗고는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밤새 손목에 감고 있던 파스를 떼어 내던 덕순이 태성의 곁으로 엉덩이를 옮겨 앉았다.
“어. 나도 이사 오는 거 들여다보느라고 잠깐 들어온 거야. 점심은 먹었고? 가게에 와서 먹으라니까.”
이미 점심때는 한참 지나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에 나갔던 덕순은 소파 밖으로 삐죽 나간 태성의 긴 다리를 눈으로 훑었다.
“대충 먹었어. 그놈의 파스 그만 붙이고 손목 더 망가지기 전에 병원에 가라니까.”
“그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날 추우니까 더 아픈 것 같아. 날이 풀릴 때가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추워서는, 원.”
덕순은 잠깐 뜸 들이다가 태성을 흘끔 보았다. 하지만 태성은 눈을 감고 있었다.
“같이 안 갈래?”
“안 가.”
병원에 같이 가자는 말을 예상했다는 듯 태성이 빠르게 대답하자 덕순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왜. 같이 가자. 응? 날이 이래서 너도 어깨 아플 텐데. 같이 가서 그…… 재활 치료도 좀 받고…….”
태성이 인상을 쓰고는 휙 돌아 소파 등받이를 보고 누웠다.
“아, 알았어. 잔소리 안 할 테니까 똑바로 누워. 의사 선생님이 오른쪽 어깨에 무리 간다고 그렇게 눕지 말라잖아. 어?”
“나 좀 잔다.”
덕순은 한숨을 쉬며 떼어 낸 파스를 들고 일어섰다.
“하여튼 엄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들으라고 한 소리지만 태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덕순은 다시금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거,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저 하나 보고 사는 거 알면서.”
외투를 껴입으면서 신발을 신는 덕순의 귀에 불퉁한 태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리 치료만 받고 오지 말고. 의사가 수술하자고 하면 하겠다고 해. 파스 붙여 봤자 잠깐인 거 알면서. 그동안 쓴 파스값 모았으면 벌써 수술하고도 남았겠네.”
“수술을 어떻게 하냐? 내가 병원에 누워 있으면 가게는…….”
“며칠 문 닫는다고 손님 안 떨어져. 그리고 덕순 씨 없어도 가게에 일할 사람은 많잖아.”
한 번을 안 도와주면서 말만 잘하는 아들이 얄미웠다. 하지만 태성을 미워하기엔 덕순은 고슴도치 엄마였다.
“지금 병원에 가면 한참 기다려야 할 텐데. 혼자서 기다리면 심심하고, 시간도 아깝고. 그럴 바엔 그냥 병원 말고 다시 가게에…….”
“에이, 씨. 가서 나 보고 진료실 들어가라고 하기만 해.”
태성이 일어나 외투를 입고는 신발을 신었다.
덕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귀찮은 척, 무심한 척하지만 그래도 제 엄마 위할 줄은 아는 아들이었다.
“이것 좀 치우라니까.”
“왜 치우냐? 이것도 사려면 다 돈인데. 도둑놈이 들어오면 급한 대로 이거라도 있어야지.”
현관 구석에 우산과 함께 놓인 죽도를 발로 툭 찬 태성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아들, 같이 가.”
“몰라.”
망할 죽도. 태성은 그 죽도가 꼴도 보기 싫었다.
* * *
“꽃이 너무 예뻐요.”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 주세요.”
정연은 만족한 얼굴로 꽃다발을 들고 돌아서는 손님에게 인사했다.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고 유치원도 가까워 봄이 걸어올 수도 있는 곳에 새롭게 문을 연 꽃집 ‘봄’.
정연은 시간을 확인한 뒤 주문 들어온 목록을 살피고는 리시안셔스를 뽑아 들었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
리시안셔스의 꽃말을 떠올리고는 코웃음 쳤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뭐, 그 덕에 내가 밥 벌어 먹고사니까.”
법이 바뀐 탓에 꽃 선물이 줄었다지만, 센스 있는 정연의 꽃다발은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더군다나 정연이 백화점 문화센터에 플로리스트로 강연을 나가면서 더 입소문을 탔다.
“아, 맞다.”
서둘러 꽃가지들을 정리한 정연이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작업대에서 돌아 나왔다. 봄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꽃집 유리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저 멀리 봄을 확인하고는 미소 지었다. 그러다 곧 눈을 가늘게 떴다.
봄의 옆에는 어제 본 그 껄렁한 남자가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사 주는 건 먹는 거 아니랬어요.”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뭐가요?”
종이컵 가득 든 떡볶이를 긴 꼬치로 찍어 내밀었던 태성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입으로 떡볶이를 넣었다.
“첫째. 너, 나 몰라? 우리 어제도 봤잖아. 너는 벌써 내가 사는 집도, 이름도, 나이도 아는데?”
“하지만 아저씨가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내가 거짓말 숱하게 했어도 그런 걸로는 안 해. 됐고. 둘째. 이건 산 게 아니야.”
태성이 다시 한번 꼬치로 떡볶이를 찍어 내밀자 봄이 머뭇거리다 꼬치를 받아 들었다.
주홍빛 양념에 버무려진 떡볶이가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빼앗은 거지.”
“네?”
“요즘 초딩들은 돈이 많아. 엄마가 바쁘다고 점심으로 떡볶이 사 먹는 애들도 많고.”
봄이 갸웃하며 손에 든 떡볶이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아저씨, 남의 걸 빼앗는 건 나쁜 거잖아요.”
“나눌 줄 모르는 애들은 어쩔 수 없어. 어려서부터 욕심만 많아서는 나눠 먹을 줄을 모른다니까. 너는 그렇게 크지 마라. 아무튼, 모르는 사람이 사 준 게 아니니까 먹어도 된다는 말이야.”
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떡볶이를 입에 넣으려다 꽃집 앞에 나와 있던 정연을 발견했다.
“엄마!”
반가운 마음에 봄이 정연을 힘껏 불렀다. 정연에게 달려 나가기 전, 봄은 들고 있던 꼬치를 태성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무리 나눠 먹는 게 좋은 거라고 해도 빼앗는 건 나쁜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가 남의 것 빼앗아 먹으면 아저씨네 엄마는 속상할 거예요.”
“뭐?”
“저는 엄마한테 뛰어가야 해요. 엄마는 제가 뛰어가서 안기면 웃거든요.”
태성은 자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멀어진 봄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두 팔 벌리고 뛰어가서 예쁜 엄마의 품에 안기는 봄을 보니 금세 괜한 웃음이 났다.
“아, 꽃집 하셔?”
몇 개 남은 떡볶이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태성이 근처 쓰레기통 위로 종이컵을 휙, 내던졌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꽃집 앞을 지나치며 까딱, 고개 숙여 인사했다.
봄을 안은 채 얼굴을 매만지던 정연이 뒤로 슬쩍 몸을 사리며 고개 숙였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분명한 그 태도에 태성은 피식 웃고는 입술을 모았다.
꽃집의 아가씨가 예쁘다는 익숙한 멜로디에 정연은 고개 들었다. 태성의 휘파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꽃집으로 들어온 정연이 봄의 가방을 받아 알림장을 확인하는 사이, 봄이 손을 씻고는 작업대 뒤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 아저씨랑 어디서 만났어?”
“유치원 앞에서요.”
“왜 같이 왔어?”
“같은 방향이니까요. 선생님께 인사하고 나왔는데 아저씨가 집에 가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혼자 집에 갈 수 있냐고 물어서 바로 앞이고 엄마랑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연습했다고, 어렵지 않다고 했어요.”
정연은 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량해 보이는 아랫집 남자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엄마.”
“응.”
“그 아저씨는 이웃이니까. 말해도 되는 거죠?”
“응…….”
“봄이가 뭐 잘못한 거, 없는 거죠?”
“그럼. 엄마는 지금 봄이 혼내려는 게 아니야.”
봄은 생긋 웃고는 정연이 가져다 놓은 과학 잡지를 펼쳤다.
라넌큘러스를 꺼내 손질하는 정연의 귀에 자꾸만 아랫집 남자가 불던 그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집에 들어온 태성은 거실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며칠째 궂은 날씨에 아픈 어깨가 말썽이었다.
“졸라 아프네, 진짜.”
어깨를 돌리던 태성은 현관문 앞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덕순과 윗집 여자, 그 예쁜 아줌마인 듯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요. 떡 대신 이거라도. 죄송해요.”
“아유, 요즘 세상에 누가 이사 떡을 돌린다고. 꽃이 예쁘기도 하네. 가만, 그거 무겁지 않겠어?”
“괜찮아요.”
“잠깐만, 있어 봐. 응? 태성아! 태성아!”
문 열리는 소리에 태성이 재빠르게 소파 등받이 쪽으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덕순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성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들, 안 자는 거 알아. 너 저기, 윗집에 생수 좀 올려 주고 와라.”
덕순의 재촉에 태성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편 뒀다 삶아 먹을 일이 있나, 그걸 왜 내가 옮겨?
“윤태성, 너 안 자는 거 엄마는 다 안다니까 그러네? 봄이 엄마 덕분에 엄마가 꽃을 다 받아 본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몰라. 아, 좀!”
“아들 어깨 아프다.”
“안 아픈 쪽으로 들면 되잖어!”
계속되는 덕순의 타박에 열린 현관문 너머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저 괜찮아요.”
혼자 들고 올라갈 수 있다는데 막무가내로 기다리라고 하고는 문 열고 들어간 덕순이 아들을 깨우는 소리에 정연의 마음이 불편했다.
“미리 주문한다는 게 깜빡했어.”
“엄마, 제가 하나씩 여섯 번 왔다 갔다 하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여기까지 엄마가 잘 들고 왔잖아. 다 왔는데 1층 아주머니가 기다리라고 하셔서 그래.”
정연과 봄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성이 에이 씨, 소리 한번 내더니 일어났다.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는 생수병 여섯 개 묶음을 번쩍 들었다. 태성이 계단을 막 오르려는 순간.
“도울 거 있으면 말해. 혼자 애 키우기가 얼마나 힘들어? 내가 알지.”
“네……. 그런데 음, 괜찮아요.”
“괜찮기는. 내가 저놈 하나 키우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세상을 원망했는데. 힘들어도 누구 하나 도움 청할 곳이 없더라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응?”
계단을 오르던 태성이 뒤를 돌아봤다. 봉지에 담긴 찬거리들을 들고 뒤따라 계단을 오르던 봄이 멈춰 섰다.
“아저씨, 왜요?”
“너, 아빠 없어?”
고개 끄덕이는 봄의 뒤에서 정연이 눈을 크게 뜨고 태성을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