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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히버트는 눈앞의 군의관을 바라봤다. 마스크를 벗고 가까이에서 본 군의관은 생각보다 더 앳된 얼굴이었다. 군 숙소와 식당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던 한국군 장교였다. 볼 때마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처박고 다니는 모습이 꼭 병든 새처럼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여군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멍한 기운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총명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활력이 넘쳤다. 게다가 군인들을 능숙하게 치료하던 모습은 이제 막 부임한 장교라고 생각했던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여자는 거친 군인 무리에 섞여 있음에도 전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응급상황에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시선이 모자를 쓰는 여자의 손을 따라 이동했다. 여성스럽게 길게 뻗은 손가락은 새하얀 피부와 잘 어우러져 가녀리게 보였지만 아까 전 피부에 닿았던 여자의 손에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본인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고된 노력의 흔적 같아 보여 가볍게 생각되지 않았다.

여자의 손길이 떠오르자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치 합선된 전선을 잘못 만졌을 때처럼 미세한 전류가 몸 안으로 흐르는 따가움이었다. 그 찌릿한 따가움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그는 고문 의자에 묶인 사람처럼 여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호되게 넘어졌을 때 그의 생각보다 더 심하게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의 아픔을 오인했던지. 그게 아니고서야 예민한 신경 반응을 설명할 수 없었다.

「숙소로 가십니까? 어느 쪽이십니까?」

「남쪽 숙소에요.」

여자는 존의 질문에 예의 바른 어투로 대답하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 톤으로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가는 방향이 같으니 괜찮으시다면 태워드리겠습니다. 숙소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차로 이동하면 더 가깝습니다.」

존의 친절이 담긴 제안에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감사해요. 안 그래도 이곳의 뜨거운 태양 빛에 아직 적응을 못 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 했네요.」

「존 웨인 상사입니다. 이 분은 히버트 중위님이십니다.」

존이 그의 소개까지 대신했다. 여자의 시선이 따라오자 히버트는 알 수없는 긴장감에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 존 웨인 상사. 히버트 중위. 기억할게요. 전 진 킴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여자의 인사에 존이 친절한 웃음을 가득 지으며 화답했다. 그러자 여자도 마주 웃어 보였다.

「차에 오르십시오.」

존이 차 문을 열며 손짓하자 여자가 그를 지나쳐 트럭으로 다가갔다. 코끝을 간질이는 여자의 향기에 히버트는 또다시 묘한 긴장감에 들이켜던 숨을 참았다. 자신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지만, 여자는 이상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감사해요.」

진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존 웨인 상사가 친절하게도 손수 열어준 군용 트럭의 뒷좌석에 올랐다. 근무 내내 서 있었더니 붓기와 함께 근육통이 느껴졌다. 오늘처럼 진료실에 환자가 넘친다면 파견 기간 종아리에 알이 빠질 겨를이 없을 거 같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아까 전 진료실에서의 응급상황이 떠오르자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곳은 여러모로 한국과 달랐다. G-스탄은 아직 전쟁의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한 위험한 나라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군인은 늘 부상의 위험을 안고 있고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부상의 정도도 심각해질 수 있었다. 때로는 목숨을 잃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파견 기간 내내 심각한 부상자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G-스탄은 처음입니까?」

정적을 깨는 굵직한 음성에 고개를 들고 앞을 봤다. 백미러를 통해 조수석에 앉아 있는 히버트 중위와 눈이 마주쳤다.

「네, 처음이에요.」

「자원하신 겁니까? 아니면 운 나쁘게 강제발령을 받으신 겁니까?」

「자원했어요.」

「왭니까?」

「네?」

무표정에 무뚝뚝한 말투 때문에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일부러 위험한 전쟁터를 찾아오는 여성 군의관은 흔치 않으니까요.」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봉사 정신이 투철하시군요.」

「군인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이잖아요. 두 분도 그런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닌가요? G-스탄은 모두에게 위험한 곳이잖아요.」

「저흰 훈련된 전투군인입니다.」

「하지만 전쟁터에 전투군인만 필요한 건 아니죠.」

미군 중위의 말투에는 여전히 딱딱함이 배어 있었지만, 딱히 나쁜 의도가 느껴지진 않았다. 조금 고압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남성 우월주의에 가득 찬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도 평소와 다르게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한국도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에요. 긴 휴전 상태일 뿐이죠. 위험 요소가 존재하는 나라에요.」

「조금 차이는 있다고 봅니다. 한국은 G-스탄과 다르게 테러가 빈번하게 발발하진 않잖습니까? 직접적인 위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평화 휴전 상태니까요.」

「그렇다면 중위는 위험 나라에 살지 않고 위험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여군은 G-스탄에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물론 아닙니다. 제 말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여군을 배척하려는 의도를 가진 건 아닙니다. 혼란스러운 전쟁터에서 여군의 비중이 더 크고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쟁에 지친 지역민들은 여군의 존재를 더 편하게 생각하니까요. 다만 그러므로 여군이 위험에 노출되어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 않을 뿐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신체구조에서부터 어쩔 수 없는 힘의 능력치가 다르니 똑같은 위험 상황에서도 여성이 조금 더 불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기분 나쁘지 않아요. 모든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고 중위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여자가 약한 존재만은 아니에요. 충분히 위험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증명하기 위해 많은 여군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고요. 그래서 전 여성을 배려하는 데 지나침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극단적인 여성해방론자같은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나친 배려는 독이 될 수 있고 자칫 기회를 막는 게 될 수 있으니까요.」

「전혀 극단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기회를 막아서는 안 되죠.」

「그리고 사족을 덧붙이자면 위험 나라에 온 게 G-스탄이 처음은 아니에요. 국경없는의사회에 잠시 속해 있을 때 이곳만큼 위험지역에 머물렀던 적이 있어요.」

「국경없는의사회에 계셨었나요? 대단하시네요. 얼마나 계셨습니까?」

웨인 상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실 말을 하기에 부끄러울 만큼 짧아요. 반년도 채 안 되거든요.」

기간은 짧았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파병이 끝나면 다시 그곳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죠. 대단하신 겁니다.」

두 미군의 음성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상투적인 인사치레로 하는 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랑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자랑이 되었네요. 감사해요.」

타인의 칭찬을 익숙하게 받아내지 못하는 탓에 두 미군의 감탄 어린 칭찬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색함을 이기려 일부러 농담을 섞어 가볍게 말했다.

대화거리가 사라지자 침묵이 찾아왔다. 웨인 상사는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고 히버트 중위 또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판이했다. 같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스타일이 달랐다. 웨인 상사는 마른 체격으로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외모는 보통의 준수함을 넘어선 아주 미남형이었다. 군인 모집 홍보 모델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밝은 금발은 천연적 곱슬머리의 혜택으로 딱 보기 좋을 정도의 웨이브가 들어가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히버트 중위는 체격이 다부졌다. 2m에 가까워 보이는 큰 키에 근육으로 다져진 몸은 다분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얼굴선은 끌로 긁어낸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군인 스타일로 짧게 깎여 있었다. 웃음기 없는 무표정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을 풍겼다.

끼익.

차가 멈추자 진은 트럭에서 내리려 문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문에 닿기도 전에 바깥쪽에서 트럭 문이 열렸다. 분명 몇 초전까지만 해도 조수석에 앉아있던 히버트 중위가 어느새 내렸는지 바깥에서 문을 열고 있었다.

트럭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렸나?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날렵함에 놀랐다.

「감사해요.」

진은 감사 인사를 건네며 트럭에서 내렸다.

「덕분에 땀 흘리지 않고 편하게 왔네요. 두 분 모두 감사해요.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어요. 내일 소독할 때 오면 다시 볼 수 있겠네요. 혹시 오늘 밤에 뇌진탕 증상이 오면 날 불러요. 난 2층 우측 맨 끝 방에 있으니까요.」

장교가 머무는 숙소건물은 남쪽 숙소와 북쪽 숙소 두 군데뿐이었다. 히버트 중위의 숙소도 남쪽 숙소라고 했으니 같은 건물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혹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찾아올 것을 당부했다.

「대위님을 부를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사실 이곳이 정말 위험한 곳이라고는 안 느껴지는걸요. 이곳 주변은 몇백미터 내까지 미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미군기지로 들어오는 길목은 하늘을 제외하고 단 한 곳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미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기지엔 어딜 가나 무장한 미군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둘러싸인 이곳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요새처럼 느껴졌다.

「미군기지 안이니까요. 그래도 G-스탄은 위험한 곳입니다.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예측 불가능합니다.」

히버트 중위가 낮은 음성으로 강조했다.

「네. 명심하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진은 웃으며 중위의 걱정 어린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안전에 대해 신경 써주는 게 감사했다. 그럴 때마다 과하게 고마움을 표현하게 되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관심의 부재로 인한 애정 결핍 현상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향한 타인의 관심이 두려웠지만, 무관심도 고통을 동반했다. 마치 풀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자신이 정확히 무얼 더 원하는지 답을 알 수 없었다.

히버트 중위가 웨인 상사에게로 몸을 돌리자 그녀는 숙소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근육통이 일었다. 쌓인 피로를 풀어줄 뜨거운 샤워가 필요했다. 뜨거운 물줄기 속에서 종아리의 뭉친 근육을 풀어준 다음 진한 커피 한잔을 곁들인 식사를 하기로 순서를 정했다. 배가 고팠지만 다리는 더 아팠기에 샤워가 먼저였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군복을 벗어 던지고 샤워기 앞에 섰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물을 잠그고 나왔다.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뜨거운 샤워를 하고 난 뒤라 몸이 나른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쏟아지는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고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