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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
무림정령사 1권(1화)
1 장 선인 강림(仙人降臨)(1)
구파일방을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 알려진 다섯 곳, 세인(世人)들은 흔히 그들을 오대세가(五大世家)라 부른다.
그중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하북팽가(河北彭家)가 위치한 허베이 지방.
예전이라면 팽가가 하북을 지배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대 세가와 구파가 존재하는 지역 역시 마찬가지다.
각 지역에는 그 지역 사파를 통일한 일류, 혹은 절정 급의 고수들이 있었고, 거대 문파들은 모종의 세금을 받는 것으로 그들의 횡포를 눈감아줄 뿐만 아니라 감시조를 만들어 감시와 보호까지 해 주었다. 이것은 그들이 제거되면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것을 염두해 둔 것이었는데, 정파의 힘이 많이 약해졌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좋은 예이기도 했다.
물론,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사파와의 전쟁에서 뒤통수 맞지 않도록 각 지역 패자들의 세력은 정파에 의해 철저히 통제됐고, 사파와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살기 위해 정파의 졸(卒)이 될 것이다.
사파이긴 하되, 실질적으론 정파의 하수인쯤 되는 세력이랄까?
이들은 일류의 끝자락, 혹은 절정 수준의 뛰어난 무공 실력 때문에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전까지 상가를 뒤에서 지배하던 파락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실질적인 하북의 지배자는 누굴까?
‘지배’까지는 아니지만 하북지방의 반 이상을 관리하고 있는 자들은 ‘삼룡파(三龍派)’, 혹은 ‘삼룡이파’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들 삼형제는 각각이 고작 일류의 무인이었지만 본래 하북지방을 지배하던 절정고수, 무적철구(無敵鐵球) 장거한과의 내기에서 이겨 그의 광대한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하게 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장거한이 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합격술에 맞춰 만들어진 자신들의 무공을 방심하던 장거한에게 십분 발휘한 노룡, 해룡, 풍룡 삼형제는 어렵사리 절정고수인 장거한을 꺾었고, 장거한이 약속대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정파의 감시조는 그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덕에 장거한이 통일해 놓은 하북의 사파 세력을 대부분 흡수한 삼룡이들은 반항하는 자를 가차 없이 척살하는 철권통치로 장거한 때 못지않은 세력을 갖추었다.
“헤헤헤헤. 형님들, 오늘 수입이 꽤 짭짤합니다요.”
“이게 다 노룡 형님의 높으신 덕 때문이 아니겠는가?”
“허허, 아우들이 이 형을 너무 띄워 주는구먼. 그저 40여 년을 성실히 살다 보니 덕이라는 놈이 조금 생겼을 뿐일세.”
“너무 겸손하십니다요, 형님.”
“그렇지 않아도 그리 생각하였네.”
“하하하하.”
“헤헤헤헤.”
대로 한복판에서 점소이처럼 얍삽하게 생긴 사내와 제법 글공부를 한 듯,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사내. 그리고 갑옷이라도 걸친 듯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인 사내까지.
이렇게 세 명의 중년인들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기 시작하자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스무 명의 사내들도 목에 핏줄까지 세우며 필사적으로 따라 웃었다.
“기분도 좋은데 어디 가서 한잔할까?”
“마다할 리 없지 않습니까, 형님.”
“그럼 오늘은 어디가 좋을지 의견들을 내어 보시게나.”
“마침 근처에 황룡루(黃龍樓)라는 고급 주루(酒樓)가 생겼다 하니 그곳에 가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오, 황룡루라. 이름에 용(龍)이라는 말을 붙이다니 솜씨에 꽤 자신이 있는 모양일세, 우리처럼 말이야.”
“하하하하하하.”
그들의 자신감에 차다 못해,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듯한 눈빛과 언행으로 보아 자신들의 이름과 능력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말뿐인지,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내 친히 가서 확인을 해…….”
순간, 막내인 풍룡이 중요한 무언가가 떠오른 듯 다급히 노룡과 해룡의 귀에 속삭였다.
‘형님, 그러고 보니 요즘 황룡루에 팽구연이 자주 드나든다고 합니다.’
‘뭐, 뭣이?! 이런 개 같은 일이…….’
대체 팽구연이 누구이기에 천하의 삼룡이들이 저리도 소스라치며 놀라는 것일까?
팽구연. 그는 무공과 학문, 그 어느 쪽에도 소질이 없고 진전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아 가주인 팽위천을 비롯한 여섯 장로들과 그의 형제인 팽구휘, 팽가연마저도 포기해 버린 하북팽가의 가주 팽위천의 막내아들로, 어린 나이임에도 술에 찌들어 사는 개망나니였다.
팽가 도법을 익혔음에도, 도법의 핵심인 힘과 무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무공으로 겨룬다면 이류의 무인에게도 삼초지적이 되지 못하는, 삼류라고도 쉽게 말하지 못할 위인이지만 팽가라는 그의 배경은 무시 못할 것이라 삼룡이들이 꺼려 하는 상대 중 단연 첫째를 차지하는 자였다.
‘이를 어쩐다…….’
수하들 앞에서 이미 내뱉은 말이라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고, 그들의 머리는 바삐 돌아가며 이 상황을 벗어날 묘안을 떠올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해 낸 듯, 노룡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험험, ……보아야겠으나, 우리는 한 파의 우두머리가 되는 자들로서 수하들에게 검소함을 보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또한……. 고로, 황룡루에 가서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모범을 보여야 하기에 눈물을 머금고 소소객잔으로 향하겠다. 자, 아우들이 앞장서시게.”
자신이 좀 전에 말을 완전히 끊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계속 말을 이은 것처럼 어색한 연기를 한 것이다.
“예, 형님.”
그러나 뒤따라가는 스무 명의 사내들 얼굴에는 설득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해는 서로 기울어 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어린아이의 손톱만큼이나 가느다란 초승달만이 어두운 도시에 희미한 빛을 뿌려 주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해시정(亥時正. 22시부터 23시까지)을 지나 자시초(子時初. 23시부터 24시까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정적마저 흐르는 주위의 여느 집들과는 달리 소소객잔(笑笑客棧)이라 쓰인 현판을 단 이곳만은 야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의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인장, 술을 빚어 오는 거야 뭐야!!”
“여기 오리구이는 어떻게 됐어?!”
“만두도 더 가져와!!!”
“예, 지금 갑니다요.”
비록 건달답지 않게 먹은 만큼의 값을 치른다고는 하지만 객잔 내의 모든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따금 가게의 물건을 부수기도 하는 삼룡이들이니 사람 좋은 황 객주(客主)의 얼굴에도 짜증과 긴장감이 역력했다.
대해에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주문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막간의 여유를 찾으려는 순간 금일휴업(今日休業)이라 써 붙여 놓아 낮부터 지금까지 미동조차 없던 문이 약간의 소음을 동반하며 움직였다.
끼익.
산적 같은 사내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였지만 삼룡이들을 주시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황 객주에겐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이 들렸고, 황 객주의 고개는 자연 소리의 근원지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조그만 죽립(竹笠)으로 얼굴을 가린, 4척(1척은 약 30cm)을 조금 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금일휴업이라 써 붙여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발견한 황 객주는 반가운 기색을 띠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현 상황을 인식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기우(杞憂)였던 것일까? 삼룡이들은 소년이 너무 어려 보여서인지 잠시 훑어보고는 다시 술 마시는 데 열중했고 소년은 별 탈 없이 처음 목적지인 황 객주의 앞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소년은 황 객주와 안면이 있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 또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큰소리로 반갑게 맞을 수는 없었지만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맞이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 삼룡이들의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황 객주는 있는 힘껏 주방으로 달려 들어가 웬만한 어른들도 버거워 보일 정도의 보따리를 들고, 아니 끌고 나왔다.
“응?”
“뭐야? 저건.”
벌써 수년간 반복해 온 일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보따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었으나 아직 어린 소년이 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크기와 무게의 보따리는 모두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황 객주는 크게 당황했다.
“꼬마야, 무거워 보이는데 이 형님이 좀 들어 줄까?”
“허허, 풍룡 아우가 또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보구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도와주는 척하면서 저 소년의 누나라도 꼬셔 볼 요량이겠지요.”
“그래도 저 나이로 어린 소년에게 형님이라 부르라니, 풍룡 아우도 주책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아니, 형님들은 절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요. 뭐,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요. 헤헤헤.”
이렇게 험상궂은 자들이 코앞에서 자신의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겁먹을 법도 하건만 겁을 먹은 것은 황 객주뿐, 소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 누나가 없는데요?”
흠칫.
그야말로 심금을 울리는 맑고 고운 목소리, 순간 음공(音功)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그 가늘고 맑은 목소리에서는 요사스럽거나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소년의 육성(肉聲)임을 확인시켰다.
“형님, 오늘 물건을 건진 것 같습니다요?”
“그런 말은 저 죽립부터 벗기고 나서 해도 늦지 않네.”
급할 것도 없건만 해룡은 보법(步法)까지 전개하며 소년을 향해 다가갔고, 둘 역시 그를 말릴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다.
미소년(美少年)은 뒷거래를 통해서 대갓집 마님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팔리기 때문이다.
객잔을 비롯한 여러 상점들에서 보호비 명목으로 일정량의 돈을 걷고는 있지만 딸린 입이 많은 만큼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던 차였기에 삼룡이들은 더욱 신이 났다.
휘릭.
자금성의 성벽처럼 굳게 자리를 지키며 그 누구의 눈도 철저히 막아내던 죽립이 암기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주인의 머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다.
한 갈래로 묶은 긴 갈색 생머리. 하얗다 못해 은은한 빛마저 감돌고 있는 뽀얀 피부, 조그맣고 오뚝한 코에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맑고 푸른 눈동자.
날아간 죽립이 있던 자리에는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미(美)를 지닌 소년의 이국적인 얼굴만이 남았다.
“색목인?”
“허, 헙! 형님, 이거 몇 년만 키우면 대단하겠습니다요.”
“그러게 말일세, 크하하하!”
황 객주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음을 느끼고 소년을 구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지만 삼룡이들이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실실거리는 것으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난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대협들.”
“대협? 우릴 말하는 것인가?”
“예, 삼룡님들 말고 그 누가 감히 대협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으하하하, 주인장이 뭘 좀 아는구먼! 그래, 할 말이라도 있나?”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중원의 복장이기는 하나 뭔가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사내가 객잔에 찾아왔다.
타국의 사람인 듯, 구사하는 언어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무척이나 어설펐다.
그런 그가 몇 가지 보석과 금을 내밀며 요구한 것은 음식을 싸 달라는 것. 객잔에서 음식을 사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나 문제는 그 양이었다.
그가 원한 음식의 양은 3인 가족이 한 달은 먹을 정도로 엄청난 양인 것이다. 하는 행동이나 말, 요구 사항까지 전부 이상한 것투성이였지만, 난 그냥 평범한 객잔의 주인. 그저 숙식을 제공하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 후 한 달 뒤, 사내는 다시 나타나 보석과 음식을 바꾸어 갔고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타난 그는 드디어 끝이 없어 보이던 보석이 바닥을 드러냈는지 보석 대신 온갖 약초를 담은 보따리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5, 6세로 보이는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는데 남자아이임에도 그 아이의 미모(美貌)가 심상치 않아, 그에게 아이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할 것을 충고해 줬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겠느냐마는 수십 년 객잔을 운영하다 보니 별 희한한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에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자는 뜻에서 한 얘기였다. 또한 계속 약초를 돈 대신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꽤 양심적인 약초상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을까?
항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던 아이가 이제는 혼자 음식을 사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매번 가져가는 음식 보따리는 절대 아이 혼자서 들고 갈 수 없는 무게인데 말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모셔오라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돈을 내밀며 음식을 달라는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 아이가 무공을 배웠을 것이라 생각하며 평소대로 많은 양의 음식을 챙겼다. 어린아이에게도 해당될지는 모르지만 무공을 배운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가볍게 드는 것은 물론, 집채만 한 바위도 맨주먹으로 깨부술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 예상이 맞은 것인지 아이는 전혀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음식이 든 보따리를 가져갔다. 그런데 그 보따리와 아이의 손이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인 것은 착시현상(錯視現狀)이었을까?
그 다음 달에도, 또 그 다음 달에도 아이는 혼자 음식을 사기 위해 찾아왔고 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아이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어머니라도 계신다면 혼자 오게 하진 않았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이에 대한 동정심이 생겨났고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올 때마다 조금씩 말을 붙이며 편하게 대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마음의 문이 열렸는지 아이는 날 친할아버지처럼 따랐고 만난 지 수년 만에 아이의 이름이 화영(花穎)이라는 것과 아버지가 몇 해 전부터 특이한 병에 걸려 거의 움직일 수 없다는 것, 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무(全無)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많이는 아니지만 화영의 출입이 늘어났고 점점 커 가는 녀석을 보면서 내가 친할아버지라도 된 듯이 흐뭇했다. 가족도 없는 내게 화영은 유일한 삶의 낙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조금씩 요리를 가르쳤고 몇 년 후에는 이 객잔을 물려줄 계획까지 세웠다.
그런데…… 삼룡이들의 눈에 띄어 버리다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뭔가 해야 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결국, 40여 년 전 점소이 때부터 쌓아 온 화술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