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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2화)
1 장 선인 강림(仙人降臨)(2)


“삼룡님들이시라면 하북지방에, 아니 중원 전체에 그 명성이 자자하시지 않습니까?”
“험험, 그렇긴 하네만 내 입으로 직접 말하자니 조금 쑥스럽구먼.”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은 전혀 쑥스러워할 일이 아닙지요. 한데…….”
“한데?”
칭찬에 약한 삼룡이들에게 상인은 어찌 보면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상인의 기본은 화술이니 그것에 약한 삼룡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있는 대로 뿌려 댔고 그중 특히 화술에 능한 이들은 오히려 그들을 반기기까지 했다.
황 객주 역시 그 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말끝을 흐림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유도해 냈다. 화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경험이 만들어 낸 한 수였다.
“한데라니, 무슨 말인가?”
“지금 하시려는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높으신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지…….”
아름다운 여자도 좋지만 그들에게는 명성 또한 중요했다. 이미 여러 번 난리를 친 덕분에 악명을 쌓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구파일방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하던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크.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는 너희들만 사라져 주면 되겠구나.”
“저희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끝난다면 저희도 입을 다물겠습니다마는 대협들께서 잊으신 것이 있으시니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삼룡이들의 괴기스러운 웃음소리에 찔끔했지만 황 객주는 물러서지 않고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잊은 것이라? 한번 말해 보거라.”
“일단은 대협들께서 오늘 이곳에 방문하셨다는 걸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죠. 게다가 그 아이는 저희 객잔의 단골인데 아이가 사라지면 아이의 아버지가 찾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떻게든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대협들의 명성이 추락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추, 추락이라…….”
좋지도 않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며 화영은 그들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볼 것 없다는 듯 몸을 돌리는 순간 삼룡이들의 수하 중 한 명이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저…… 그냥 그 아비란 작자를 조용히 없애 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예상치 못한 수하의 똘똘한 대답에 삼룡이들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많은 양의 은자가 든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그런 묘수가 있었다니! 아우들, 이참에 저 아이를 우리의 군사로 임명함이 어떠한가?”
“좋습니다. 우리의 세력이 커다란 만큼 군사가 한 명쯤 필요하니 말입니다. 잘 부탁하오, 군사.”
“헤헤, 군사, 잘해 봅시다.”
“예? 아, 예! 가, 감사합니다.”
한순간 신참이 군사로 임명되자 나머지 사내들은 부러움과 질투심, 그리고 동정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움은 그가 받은 많은 양의 은자에 대한 것이요, 질투심은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참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에 대한 것이며, 마지막 동정심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성격 더러운 삼룡이들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보낼 수 있던 것도 잠시, 그들은 곧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해 내고는 비굴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들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 객주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하지만 답은 그의 생각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고 일다경(一茶頃:약15분)이란 시간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주인장. 이제 저 아이의 아비가 어디에 있는지 속 시원하게 말해 보시게나. 아아, 그런 표정 할 것 없네. 위치만 말하면 자네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 터이니.”
‘아아, 정녕 이리도 허무하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화영을 살려 볼까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검을 들고 달려들어도 무공을 익힌 저들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갈 것이고 요행히 빠져나간다 해도 하북은 저들의 집과 같은 곳이라 금세 다시 잡힐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운 좋게 팽가나 근처의 무가에 숨어 들어가도 10여 년 전의 ‘그 사건’으로 인해 많은 힘을 잃은 그들은 삼룡이들과 모종의 거래 후 화영을 넘겨줄 것이다. 예전의 정의감 넘치던 정파는 이제 없는 것이다.
그가 암담한 현실에 탄식하고 있을 때, 문 가까운 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아이가 사라졌다!!”
삼룡이들의 수하 중 하나가 외치는 소리에 모두가 허둥댔고 황 객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화영이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다니, 분명 하늘의 도우심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헤헤헤헤, 이렇게 도망치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린 걸 보니 싫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요, 형님.”
“어린것이 이미 우리를 따라가면 호강할 것이란 걸 안 모양이구나. 걱정 말거라, 내 네 아비 따위가 해 주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호강을 맛보게 해 줄 것이야. 크흐흐흐.”
그 말에 깜짝 놀라 황급히 뛰쳐나온 황 객주의 눈에 삼룡이들과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화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삼룡이들은 화영이 자신들에게 살기를 내뿜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론 몸을 압박하는 기운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화영이 무공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는 것은 무가의 자손이 아니라는 소리.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발 내딛는 순간, 분노로 인해 가늘게 떨리는 화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과하세요.”
“뭘 말이냐?”
“지금까지 한 모든 말이요.”
“오냐, 그렇게 하마. 단, 네가 우리 뜻대로만 해 준다면 말이다. 흐흐흐!”
“마지막 경고입니다. 사과하세요.”
화영이 끝까지 사과할 것을 요구하자 막내인 풍룡이 특유의 간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인상을 쓰며 화영을 향해 걸어 나왔다.
“그래, 사과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지? 그 앙증맞은 손으로 이 형님의 어깨라도 두드려 줄 건가?”
풍룡은 불혹에 가까운 자신의 나이를 망각한 채 형님이란 말을 서슴없이 뱉어 냈다. 거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인데 말이다.
화영은 그런 풍룡에게 날카롭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묻어 버려.”
화영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삼룡이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흡!”
삼룡이들은 주위에 화영의 호위가 있을 거라 예상하고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내공을 흩어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세상이 커지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자신들의 팔을 바라보았지만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 다리는 땅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저 아이가 우리에게 환술(幻術)이라도 사용했단 말인가?’
환술은 배우기도 까다롭고 사용할 때에도 많은 양의 내공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배우는 것은 몰라도 그 정도의 내공을 저런 어린아이가 가졌을 리 없지 않는가? 전설에나 나올 법한 영약을 복용하지 않고서야 말이다.
결국 그들은 주위에 조력자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느 고인께서 납시었소?”
첫째인 노룡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길 꺼리는 것인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상대가 대답도 하지 않으니 이미 협상은 결렬된 셈이다. 환술의 고수는 환각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으니 이젠 자신들의 힘으로 환술을 깨뜨려 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셋은 전신 공력을 모두 끌어올려 자신들을 삼키고 있는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무릎까지 빨려 들어간 다리는 아무리 공력을 보내도 움직이지 않았기에 손으로 땅을 쳐 보기도 하고 파 보기도 했지만 어느덧 허리까지 삼켜 버린 땅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정녕 살기 위해 저 어린것에게 빌어야 한단 말인가……!’
그때 화영이 객잔 문을 열며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에는 그 무거워 보이던 보따리를 들고.
‘보, 보따리가 떠 있다?! 설마 이기어검!’
웬만한 일류고수도 펼치기 힘들다는 허공섭물도 아니었다. 그들이 아는 한 허공섭물로는 떨어져 있는 물건을 손으로 가져올 수는 있지만 띄우고 있을 수는 없으니 저것은 강호에 전설이 되어 버린 이기어검을 이용한 능력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걸려 있는 환술 역시 저 소년, 아니 저분께서 거신 걸 테고 자신을 감시, 보호하던 자들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살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으로도 모자랐다.
“아이고, 저희가 아둔하여 반로환동의 고수님을 알아뵙지 못하였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삼룡이들은 수하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빌고 또 빌었다. 평소 그들의 자존심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저렇듯 뻔뻔스럽게 빌 수 있는 것은 속으로나마 자신을 위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설상의 인형설삼과 만년삼황을 다섯 뿌리씩 먹는다 해도 어린아이가 저런 내공을 가질 리 없다. 저런 모습에 이기어검을 사용할 정도의 막대한 내공이라면 필시 반로환동의 고수일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비는 동안에도 몸은 계속 빨려 들어가다가 결국 목만을 남기고서 멈추었다. 자신들을 생매장시키고서야 멈출 것 같던 땅의 움직임이 멈추자 약간의 여유가 생겼는지 해룡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환각이라면 저 고수의 모습도 환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차라리 이것이 환상이길 바랐다. 이기어검까지 사용하는 반로환동의 고수를 상대하느니 환술에 빠져 몇 시간 허우적거리는 편이 훨씬 살아날 확률이 높으니까.
짜악!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뺨에서 불이 났다. 내공이 실리지 않아 큰 아픔은 없었지만 그 행동은 자신들에게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기에 두려움은 더해져 갔다.
“생각 같아선 당신들을 더 깊이 묻어 버리고 싶지만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 배웠기에 방금 그것으로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우, 우리가 산 건가.”
살았다는 안도감에 기쁨의 눈물마저 흘리고 있을 때 화영은 다시 한 번 삼룡이들을 노려보며 말을 던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지만 다시 한 번 소소객잔의 영업을 방해하거나 입을 함부로 놀리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무, 물론입죠. 이제 소소객잔에서는 세금도 걷지 않고 철통같이 보호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놈의 입을 꿰매 버립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 정도까진 필요 없는데…… 뭐, 장사에 방해만 안 된다면 괜찮겠죠.”
화영은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틀어 집으로 향했고 그 뒤로 수십 개의 검은 인영(人影)이 따라 움직였다.
‘저런 세력을 거느리신 분을 건드리다니 우리가 살아난 것은 천운인 게로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우릴 꺼내지 않고.”
화영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보이지 않게 되자 삼룡이들은 일제히 수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푹. 푸욱.
“커, 크헉…… 뒷일이 무섭지도 않느냐!”
절정고수이면서도 항상 2인자였던 진유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저놈들이 죽지 않게 보호해 왔지만 이미 죽은 이상 날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
그의 생각은 정확히 먹혀들었다. 아직 노룡이 죽지 않았음에도 그를 구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서걱! 데구르르―
마지막으로 노룡의 머리가 떨어지자 매화, 구름 등 다양한 무늬의 끈을 발목에 단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사방에서 날아올랐다.

험하디험한 산의 정상에 지어진 작은 정자에 구름 문양이 박힌 통을 단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종이에 급한 듯 아무렇게나 휘갈겨진 글씨였지만 그것을 받아 본 노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북(河北) 삼룡(三龍) 사(死).
살해자(殺害子) : 절정고수 연환검 진유걸.
사망 원인(死亡原因) : 어린아이가 그들을 제압한 채 떠남. 반로환동의 고수로 추정. 십대 초반의 외모. 색목인. 사문 불명. 현재 십삼, 십사호가 추적 중. 팔파 일방을 비롯한 마교와 오대세가, 중소방파들도 따라붙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