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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3화)
1 장 선인 강림(仙人降臨)(3)
노인의 주위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 또는 그 이상인 듯한 사람들이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고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장문인. 무슨 일이기에 그리 놀라는 게요?”
“하북의 삼룡이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허허, 하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구려. 그런데 어느 고인께서 하신 일이오? 주위에 있던 자들이 가만히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을 터인데.”
“그것이…….”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사문도 알 수 없는 반로환동의 고수라 합니다. 그것도 색목인에 십대 초반의 외모를 가진…….”
“반로환동이라니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니요? 게다가 색목인에 십대 초반이라니!”
“맞소, 사문을 알 수 없는 반로환동의 고수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색목인, 그것도 십대 초반이라니?!”
“허허…….”
방 안에 있는 노인들에게 그의 존재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 그 자체였다. 수백 년간을 보완, 개량되며 이어 내려져 온 비급들과 온갖 상승의 무공을 접하고 평생을 그 무공들에 매달려 온 자신들에게도 반로환동은 아직 까마득한 경지이다. 그런데 사문도 알 수 없는 자가 자신들을 넘어서다니?
아니, 사문 불명인 것까진 괜찮다. 중원에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은거기인은 모래알처럼 많고,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실제론 엄청난 배경을 뒤에 둔 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색목인에 십대 초반의 외모라니!
그렇다는 것은 이방인에, 아무리 많아도 실제 나이가 이십대 초, 중반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반로환동이라 해도 육, 칠십대의 늙은이가 어린아이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들의 경지를 뛰어넘었단 말인가! 자신들의 깨달음이 그렇게 얕았단 말인가?!
수십 년간 익혀 온 무공과 자신하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깨어지며 그들 중 몇몇은 주화입마의 초입을, 마음의 수련이 깊은 몇몇은 새로운 깨달음으로 한층 더 높은 경지의 초입을 맛보았다.
불행과 행복은 항상 붙어 다닌다고 했던가?
중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장문인만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흠흠, 장문인께서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보시구려.”
‘깨달음’ 쪽의 노인 중 한 명인 공허가 더욱 강해진 기운을 흘리며 나섰다.
“지금 삼룡이에게 붙어 있던 감시조가 그의 거처를 찾고 있다 합니다.”
“그들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지. 한데 찾은 후에는 어찌하실 생각이오?”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단 사숙께서 가셔서 정(正)인지 사(邪)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정이라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모셔 올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무림 공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쩌저적!
성난 공소의 손이 탁자를 때리자, 탁자는 무사하고 탁자 다리와 맞닿아 있던 바닥만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장문인은 생각이 있는 것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장문인의 표정은 그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가 반로환동의 고수인 것이 마교에도 알려졌을 터, 그들이 동의할 것이라 보는가!”
처음 보는 공소의 화난 모습에 가슴을 졸이고 있던 장문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얼굴을 환하게 바꾸며 입을 열었다.
“마교 역시 그때 이후로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후우…….”
공소의 입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한숨이 터져 나오자 장내의 공기가 또다시 얼어붙었다.
“내가 마교의 교주라면 그를 선택하겠다.”
“사숙,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마교에서 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받아들이리라곤…….”
“여기 있는 일곱 모두와 그가 싸운다면 어떨 것 같나?”
“잘은 모르지만 대략 죽이는 데는 한 시진, 제압하는 데는 두 시진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난 예전에 사부님을 따라 은거한 반로환동의 고수를 만난 적이 있지. 그때 벌어진 비무에서 본 그분의 신위는 아직도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는다네. 만약 그가 그분과 비슷한 경지라 하면…… 절대 우리만으론 상대할 수 없을 것이야.”
“그, 그런…….”
“안타깝지만 어쩌겠나, 이것이 현실인 것을. 우리 모두가 덤빈다 해도 그의 옷깃이나 스칠 수 있을지……. 게다가 마교가 그를 선택한다 해서 정파가 바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 있던 마교가 정파보다 더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파에 비해 크게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정파가 마교를 제압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삼룡이들과 같은 자들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너무 말이 많았구려. 그럼 장문인, 나와 함께 가시겠소?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
“물론입니다, 사숙.”
이렇듯 각 파의 장문인을 비롯한 전대 고수들이 하북행을 결정하고 있을 때 하북의 어느 이름 모를 산에서는 큰 폭음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여러 명의 사내가 온몸에 큰 부상을 입은 채로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반로환동의 고수를 쫓아 이름 모를 산까지 오는 동안 그가 도중에 버린 알 수 없는 가루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죽은 이가 무려 셋이나 된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확히 나눠 가지기로 했으나 사람의 욕심만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했던가?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려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런 자들은 어김없이 목이 달아났다.
몇몇의 피로 값을 치른 가루의 배분이 끝나자 너 나 할 것 없이 먼저 보낸 자들이 남긴 표시를 따라 몸을 날렸다. 일 장, 이 장, 삼 장, ……오십 장! 평지라면 순간일 거리지만 나무로 빼곡히 둘러싸인 산 속에서 오십 장이란 거리를 움직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신법을 포기하고 보법만으로 움직인 오십 장의 거리.
그 끝에 나타난 공터에는 먼저 보낸 자들이 은신조차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 있다!’
뒤쫓아 오던 자들 중 조장으로 보이는 자들이 손을 가로로 가볍게 휘두르자 그 많던 인원이 증발이라도 한 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섭혼술인가? 아니면 환술?’
자신들이 쫓던 반로환동의 고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떤 결정이든 빨리 내리고 다시 추적을 시작해야 했기에 조장들이 직접 나섰다.
무음무형(無音無形)!
조장의 자리를 노름으로 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들의 움직임은 낙엽보다 조용했고 지켜보던 자들 중 무공이 약한 자는 그 모습을 놓칠 정도였다. 자신의 수하의 등 뒤로 돌아간 그들은 순식간에 마혈과 아혈을 제압하여 데리고 돌아왔다.
‘어째서?’
제압한 수하들에게 뭐든 알아내기 위해 자리에 눕힌 조장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다. 섭혼술이라면 눈에 초점이 없어야 했고, 환술이라면 허우적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의 눈은 맑다 못해 초롱초롱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얼마나 악독한 수법을 쓴 것인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화영은 정(正)도, 사(邪)도 아닌 마(魔)로 굳혀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제압된 두 개의 혈도 중 아혈이 풀린 이들은 좀 전에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그를 놓치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자신들의 혈을 제압하고 산공독까지 쓴단 말인가? 자신들의 경험상 이런 상태로 만들 때는 납치해 온 누군가에게 자백을 받을 때이다. 정보를 얻을 것이라면 어째서 같은 편인 자신들에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왜? 어째서? 그들의 머릿속엔 알 수 없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대주, 어째서……?”
한 사내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하라.”
대답은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 냉정하게 들려왔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이긴 하지만 지금껏 자신의 목숨을 수십 번이나 구해 준 목소리다.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냉각시키고 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저곳에서 그가 잠시 멈췄습니다.”
그의 눈이 가리킨 곳은 좀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였다.
“저희가 더욱 조심스럽게 몸을 숨길 때 갑자기 생겨난 빛이 그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한 호흡 만에 사라졌습니다.”
대주라 불린 사내는 수하의 눈에서 진실을 읽었으나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빛이 되어 사라지다니, 선계의 선인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혹, 도주로가 있지는 않았나?”
“저희만 있던 게 아닙니다.”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 누가 이 말을 믿어 줄 것인가? 오히려 임무에 실패하고 헛소릴 늘어놓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아직 믿어지지 않는데 누가 믿어 주겠는가?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세뇌를 염려하여 보냈던 다른 수하의 대답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투욱.
그의 손에 의해 주먹만 한 돌이 던져지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모두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으실 줄로 아오. 나 역시 현실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니까. 이렇게 된 이상,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요. 이것이 진법이라는 것!”
그의 말대로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때 역시 다른 조의 조장쯤으로 보이는 자가 나섰다.
“그것은 이미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소. 하나, 맞는다 한들 어찌 탈출할 수 있단 말이오?”
정말 이것이 진법이라면, 고수 소리 듣는 자신들이 전혀 위화감이나 어렴풋한 이질감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진법이라면 도저히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기관진식이나 진법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부는 했어도 그 공부가 깊지 않았고, 깊었다 해도 이런 진법을 해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천뇌자(天腦者)나 혈뇌자(血腦者), 만통자(万通者)가 와도 장담치 못하리라.
“내키진 않겠지만 모두가 힘을 모아 한곳을 폭사시키는 것입니다. 진법 자체를 부숴 보자는 뜻이지요. 이 정도 고수가 힘을 모은다면 어떤 진법이라도 깰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하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현실로 인정해야겠지요.”
“…….”
“그렇게 하면 여기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것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전력 손실인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더 이상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좋소, 동참하겠소이다.”
“까짓것 해 봅시다.”
“임무의 실패는 죽음뿐! 합시다.”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수하들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하는 것뿐.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의 끝에 자리 배치가 끝났고 조장들이 맨 앞, 비교적 안전한 그 뒤로 수하들이 서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최고 무공을 시전하기 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공력을 끌어올린 채 목표물이 된 좀 전의 그 돌멩이를 주시했다.
한 호흡, 두 호흡…… 다섯 호흡이 지나자 한 사내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하늘을 향해 천천히 던졌고 솟구치던 비수는 이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돌진했다.
챙―
약속한 신호이다. 반 호흡이라도 틀리면 위력은 격감할 것이다.
콰과과쾅!!
다행히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은 듯했다. 그 증거로 자신들은 큰 외상과 내상을 입은 채로 튕겨지고 있었고, 돌멩이가 있던 곳은 약 30여 장이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들이 만들어 놓은 큰 구덩이와 부상, 혹은 사상자들을 제외하고는 주위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