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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4화)
2 장 재림(再臨)(1)
하북, 오대세가 중 한 곳인 하북팽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허름한 객잔. 소소객잔이란 낡은 현판이 걸린 이곳에는 언제나처럼 수십의 고정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서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아암∼. 지루해 죽겠군. 전임자는 대체 어떻게 버틴 거야?”
“그냥 참으셨죠. 자리를 이탈했다간 자칫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는데 별수 있나요.”
모두 비슷하겠지만, 연방 하품을 해대며 유독 지루해 하는 자는 화산파에서 이곳에 온 지 세 달 정도밖에 안 된 허승찬이란 자였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본문에서 보내 주는 돈으로 객잔에서 빈둥거리는 것. 이것이 그가 맡은 일의 전부다.
본문에서 보내져 오는 돈이 많다거나 건달, 혹은 무인끼리의 시비 같은 여흥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소객잔 자체가 지극히 서민적인 곳이라 보내져 오는 돈은 매우 적었고, 3년 전 그 일을 알면서도 이곳에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결단코 없었다.
때문에, 사건 사고 하나 없고 사치를 부릴 수도 없는 이곳은 아직 혈기 넘치는 이십대인 그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사실 이곳도 불과 1, 2년 전까지는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선인’을 기다린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명예 때문에 서로 차지하려 다투던 자리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선인의 코빼기도 안 보이는 지금은 좌천의 장소일 뿐이다.
‘절대 나한테 떠넘기고 놀러 다녔다는 말은 못해!’
지난 1년 동안 상관을 잘못 만나 홀로 객잔을 지켜야 했던 천충은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상관인 허승찬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이곳에 파견된 자가 자신과 허승찬, 단둘만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소소객잔 주변과 하북 곳곳에 퍼져 있기 때문에 실제 객잔에 상주하며 지키는 것은 둘뿐이었고 그중 하나가 사라져 버리면 혼자 말벗도 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니 천충의 거짓말은 당연한 것이리라.
“제길! 그깟 나무에 상처 좀 냈다고 날 좌천시키다니!”
나쁘지 않은 자질을 가지고 있던 허승찬이 이곳으로 좌천된 이유는 무공 수련 도중 한 매화나무에 깊은 상처를 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익힌 초식이 거의 완벽해지자 다른 사람들을 놀래 주려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련을 했는데 그곳이 마침 화산파 장로 중 한 명인 군무진이 따로 가꾸는 매화나무 숲이었고 연습 상대로 그 매화나무 중 하나를 택한 허승찬은 곧장 군무진에게 끌려와 이곳으로 내쳐진 것이다.
“우리 화산파에 널리고 널린 게 매화나무인데 따로 가꿀 건 또 뭐야?”
“사숙,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좌천되어 왔다 해도 거짓은 아닐 터이나 화산파 제자가 화산파에 대해 좋지 않은 소리를 하는 꼴을 보이는 것은 문파의 명예로 보나 뭐로 보나 좋지 않았다.
그러나 허승찬은 말리는 천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끼눈을 뜨고 쏘아붙였다.
“없는 데선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뭐 어떠냐! 저들이야 어차피 나랑 같은 처지이니 상관없고 너만 입 다물면 돼!”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네놈이 정녕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헉? 사, 사숙. 저기!”
“어디서 허튼수작을 부리려…… 응? 저자는?!”
천충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자 수작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허승찬은 주먹을 날리려다 속는 셈치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서, 설마?”
휘리릭.
황급히 품을 뒤진 허승찬은 이곳으로 올 때 받은 그림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방금 들어온 소년의 모습과 대조해 보았다. 키가 더 크고 앳된 모습이 조금 가시긴 했지만 틀림없다.
얼굴은 차치하고라도 갈색 머리, 파란 눈. 그리고 눈물이 글썽글썽한 황 객주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황 객주와 화영의 재회 장면을 본 수십 명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행 중 한 명씩을 자리에 남기고 일제히 객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수십 마리의 전서구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주 간단한 내용의 서찰을 발목에 묶인 통에 넣고서.
선인 재림(仙人再臨).
단 네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지만 서찰을 밀봉한 방법은 모두 각 파의 문주만 볼 수 있는 고유의 방법이었다.
보름이 지나지 않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북팽가부터 가장 멀리 운남에 있는 점창파까지 각 파의 원로고수, 혹은 장문인들이 모두 소소객잔으로 모여들었다.
혹여나 안 좋은 인상을 심어 주지 않을까 하여 각 문파의 사람들은 모든 행동에 신중을 기했고 단순한 점소이일 뿐인 왕삼에게까지 존칭을 쓰며 화영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그러나, 서로의 견제 속에 아무도 먼저 나서서 화영에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제길, 다른 문파들이 오기 전에 접근했어야 하는 건데!’
화영이 소소객잔으로 돌아온 지 반 시진도 안 되어서 소소객잔으로 달려온 하북팽가의 가주, 팽위천은 연방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멍청한 자신을 탓했다.
나름대로 신중을 기한다고 접근하지 않고 기다린 것인데 이제는 다른 문파의 견제에 밀려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 이틀 만에 제갈세가와 화산파, 종남파, 소림사까지 몽땅 몰려 올 줄 알았으면 위험 부담을 떠안고라도 접근을 시도해 봤으리라.
“여보시오, 점소이…… 님. 험험.”
아무리 반로환동의 고수라지만 점소이에게 님이라는 존칭을 붙인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은 얼굴을 붉히며 어렵게 화영에게 말을 건넸다.
“예, 손님.”
“저…… 크흠, 여기 죽엽청과 만두 좀 더 가져다주시오.”
그러나 단설운은 비웃음을 무릅쓰고 말을 건넨 보람도 없이 입을 닫아야 했다.
뭔가 친근하게 말을 건네 보려 해도 등 뒤에서 오싹한 살기가 몸을 찔러 온 탓이다.
다른 파의 장문인이나 장로급이면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찌 해소시켜 보겠지만 그 이상의 은거기인들이 객잔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 살기만으로도 크게 위협적인 것이다.
그것이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화영에게 손을 뻗치지 못한 이유였다.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왜 우리 가게에 저렇게 몰려왔을까?”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화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고.
“할아버지, 죽엽청하고 만두 하나 추가요!”
“오냐, 조금만 기다리거라.”
황 객주는 흐뭇한 표정으로 화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객잔 내를 가득 메운 무림인들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
‘저들의 목적은 우리 화영이겠지. 하아, 산 넘어 산이라더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황 객주는 지극히 서민적인 자신의 객잔에 대단해 보이는 무림인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3년 전, 화영이 벌인 일은 밑도 끝도 없이 부풀려져서 화영이 선인이며 사악한 자를 벌하러 잠시 강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덕에 삼룡이들은 천하에 다시없을 악한이 되어 버렸고 소소객잔은 어느새 하북의 명물이 되어 버렸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선인강림’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도교와 불교 계통의 문파들에게 상당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도교에서는 화영이 신선이라 주장했고,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 덕에 더 많은 신자와 속가 제자들을 끌어 모았고, 문파의 세력을 상당히 키울 수 있었다.
아마 이들은 화영을 데려가 자신들의 세력을 더 키우려고 할 것이다. 화영이 신선도 부처도 아닌 평범한 아이라고 말해 봤자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믿는다 해도 괘념치 않을 것이다. 무림인들에겐 명예와 상징이란 게 무척이나 크게 작용하니까.
여기까지가 황 객주의 생각이었다.
얼추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었지만 답은 같았다. 저들은 자신에게서 화영을 데려가려 할 것이란 것. 황 객주는 또다시 화영이 떠나게 될 거란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 저들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은 듯하니 조율되기까지의 남은 시간이나마 행복하게 보내자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저들이 힘으로 화영을 데려가려 한다면 자신으로선 불가항력이니까.
콰앙!
각 파의 장문인들도 혹시나 화영의 신경에 거슬릴까 조심조심 열고 닫던 객잔의 문이 큰 소음을 내며 열렸다.
‘아니, 저놈은 팽가의 망나니?’
“여기가, 딸꾹! 선인이 있다는, 끅! 곳이냐?”
잔뜩 술에 취한 모습으로 팽가의 셋째, 팽구연이 들어서자 장내에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그리고 팽가의 가주 팽위천은 숨 막히는 살기에 비틀대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빨리 저놈을 치워라!’
팽위천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호통이 울렸다. 일류고수나 겨우 쓸 수 있다는 전음이 사방팔방에서 비 오듯이 쏟아진 것이다. 누구든 제압하려면 눈 깜박할 사이 제압할 수 있지만 반로환동의 고수 앞에서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노릇이라 아비인 팽위천을 닦달하는 것이다(일반인은 어떨지 몰라도 무림인들은 애초부터 그가 진짜 신선일 거라 믿지 않았다). 전음과 함께 온몸을 옥죄던 무형의 기운들도 사라지자 팽위천은 서둘러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네가 화영이냐?”
“네, 그런데요?”
“컥!”
팽가의 망나니는 언제나 그렇듯 한발 먼저 사고를 쳤다.
팽구연이 화영에게 말을 걸자 팽위천이 움찔했다. 뛰쳐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이긴 하지만 팽구연은 아직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지금 뛰쳐나가면 괜히 화영만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사고를 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갈팡질팡하는 사이 팽구연은 피식 웃음을 짓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죽엽청과 오리구이, 소면을 가져오거라.”
“예.”
자신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리면서도 주방으로 달음질쳐 가는 화영의 뒤로 팽구연이 다시 한 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흥, 선인? 반로환동의 고수? 모두가 속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지!’
어른들의 말로는 저 화영이란 꼬마가 고작 20대의 나이로 반로환동의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 했다.
자신은 이제 고작 이류의 내공에, 삼류에 가까운 초식을 가졌을 뿐인데 말이다.
자신의 신체조건이 가전 무공의 성격과 잘 맞지 않아서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의 형도 아직 일류에 이르지 못했는데 사문도 확실치 않은 자 따위가! 이건 질투가 아니다. 속고 있는 어른들에게 현실을 보여 주려는 것뿐이다!
“죽엽청, 오리구이, 소면이요!”
주방에 주문을 넣은 화영은 갓 나온 요리들을 쟁반에 담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투둑.
“어엇?!”
화영이 한 손에 쟁반을 들고 옆을 지나는 순간, 팽구연의 발이 재빨리 움직이며 화영의 무릎과 다리를 찼다. 갑작스런 기습에 균형을 잃은 화영. 쟁반을 놓치고 넘어지려는 찰나, 화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한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실프!’
휘이잉!
입 밖으로 낸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말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허헛!”
“진정 이기어검이란 말인가?”
“오오오!”
“뭐, 뭐야?!”
두둥실.
바닥에 쏟아져야 할 차와 음식들, 그리고 넘어졌어야 할 화영의 몸이 짧은 시간이지만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로만 듣던 이기어검을 실제로 목격한 것이다.
‘쏟아진 찻물까지 다시 찻잔 속으로 집어넣다니!’
몸의 균형을 잡은 화영이 재빨리 쟁반을 잡고, 허공에서 정리하자 여러 사람이 속으로 경악에 가까운 탄성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내공을 내뿜어 몸을 띄우고 이기어검의 변형으로 쟁반을 잡았으며, 그와 동시에 찻물과 음식들까지 조종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완 조금 달랐지만.
‘이크! 사람들 앞에서 정령을 불러내면 안 되는데…….’
화영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실프 둘을 역소환시켰다. 그리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운동신경이 뛰어나서 그런 걸로 봐 줄 터였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이제 조심해야지.”
가져온 요리들을 가져다주고 돌아선 화영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유독 친화력이 높아서 이젠 정신의 교감만으로도 소환 가능한 바람의 정령이기에 마음대로 될지는 모르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야.”
모두가 감탄하며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팽구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한 번 화영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또 한 번의 대형 사고를 치려 들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들통 나게 해 주마. 차앗!”
스르릉.
팽구연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도가 포효하며 날아올랐다. 이 일도에 화영이 죽거나 다치면 그에 대한 모든 소문이 거짓이란 게 들통 날 터, 그러면 자신이 행한 행동은 묻힐 거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설혹 화영이 평범한 아이였다 해도 민심과 소문이란 건 무시할 게 못 돼서 차후 몇 년간은 팽가를 괴롭힐 이야기가 될 터이다.
아무리 팽가의 망나니라 불리는 그가 행한 일이라 해도.
‘기회다!’
초식은 별로라도 내공은 제법인 팽구연의 도에 미약한 뇌기가 실리자 각 파 고수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안 그래도 화영에게 접근할 구실을 찾고 있었는데 팽구연이 그 구실을 제공한 것이다.
반로환동의 고수 앞에서 힘자랑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들의 수십 년 강호 경험상 그래도 호감을 사기에 이만한 게 없었다.
그 구실이 사파로 인한 것이면 더 좋았겠지만 일단은 아무래도 좋을 터였다.
“흡.”
“크흡!”
팡, 파팡!
사방에서 날아오른 고수들이 팽구연의 도를 대신 막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자신의 경공술만 믿고 달려가는 자, 호신강기만 믿고 돌파하는 자, 그들을 쫓으면서 끊임없이 암격을 펼치는 자.
화영에게 날아드는 도를 보고도 그렇게 치열한 공방을 펼칠 수 있던 것은 팽가의 도법이 쾌도(快刀)가 아닌 중도(重刀)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미 초절정을 넘어 초극으로 치닫고 있는 실력자들이라서 일까?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음에도 여유 있게 도를 받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