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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5화)
2 장 재림(再臨)(2)


채앵!
“아이야, 어찌하여 이유도 없이 사람을 핍박하려 드는 게냐!”
짧지만 긴 대결의 승자는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달려간 곤륜파의 전대 고수, 청송진인이었다.
뒤에 있던 자들이 펼친 암격은 무시할 게 못 되어서 경공만 쓰거나 호신강기로 받아 내려 했던 자들이 모두 낭패를 보았지만, 그는 호신강기를 펼쳤음에도 신중을 기하며 극에 달한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으로 공중에서 몸을 여덟 번이나 뒤집었다. 즉, 이것은 실력이라기보다는 그의 신중함이 준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큭!”
힘 조절을 했다지만 도를 놓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도를 놓치고, 시큰한 손목을 잡으며 몇 걸음이나 뒷걸음치는 팽구연. 청송진인의 호통에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청송진인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술에 취해 멋모르고 일을 저지른 것 같은데 제가 대신하여 사과를…….”
“……번개?”
무례를 저지른 팽구연을 대신해 청송진인이 사과를 했지만, 화영의 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 바로 보셨습니다. 팽가 도법의 특징은 비전 심법인 혼원벽력신공에서 만들어진 뇌기를 도에 싣는 것이죠. 때문에 위력에서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습니다만 중도라는 것과 젊었을 때만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죠.”
화영의 시선이 팽구연을 향해 있음을 알아챈 청송진인은 번개라는 말의 뜻을 알아채고 급히 설명에 들어갔다. 그리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자는 진짜 무림 초출이다!’
아무리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중원 천지에 팽가 도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라도 무림에 발을 담근 자라면.
그런 자가 어떻게 이런 경세적인 무공을 익혔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단 마교 쪽에 처음 나타난 게 아니니 안심해도 될 터였다.
아니, 그뿐 아니라 아직 백지상태에 가까우니 잘만 구슬리면 정파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기본 상식도 갖추지 않은 무림 초출을 속이는 일쯤은 삼재검법 한번 펼치기보다 쉬운 일이니까.
“중도? 그리고 젊었을 때만 위력을 발휘하다니요?”
“팽가 도법은 중도에 속합니다. 경지에 들면 제법 빨라지긴 하지만 비교적 느린 편에 속한다는 얘기죠. 아무래도 한 번의 위력을 중시한 무공이다 보니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까 보셔서 알겠지만. 그리고 팽가 도법은 첫 초식이든 최후 초식이든 순수한 힘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습니다. 그래서 힘이 달리는 노년기엔 제대로 된 도법을 펼치기 힘들죠.”
청송진인이 팽가 도법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말하자 듣고 있던 팽가의 가주, 팽위천은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주먹만 말아 쥐었다.
그것은 팽구연도 마찬가지. 아무리 내논 자식 취급을 받는다지만 팽가에 대한, 팽가 도법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무척이나 컸다.
“그럴 리가요? 번개가 강한 것은 힘이 세기 때문만이 아니라 빠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번개의 폭발력은 이 정도가…….”
“이, 이게!”
화영의 말을 ‘번개의 힘을 쓴다면서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냐?’로 이해한 팽구연은 입가에 흐른 피를 소매로 슥 닦아 없애고 다시 한 번 화영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청송진인이 손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여러 장문인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어!”
“나무아미타불.”
모두가 놀란, 그리고 부러운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보자 팽구연도 일단 도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건 놀랍게도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경지가 높아지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가부좌를 튼 채 공중에 떠 있는 팽위천.
그의 현상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부공삼매였다.
“아, 아버지……?!”
팽구연 역시 다른 자들과 똑같이 그 모습에 정신이 팔려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이 틈에 도망가자!’
부공삼매가 뭔지도 모르는 화영에게는 그 모습은 조금 신기할 뿐, 넋을 잃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가뜩이나 팽구연이 난동을 피운 것 때문에 무서워하고 있던 터라 화영은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달음질쳐 주방으로 도망쳤다.
“크핫하하!”
잠시 후, 깨달음을 온전히 소화시킨 팽위천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구연아! 찾았다, 찾았어!”
“그게 무슨……?”
팽구연은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팽위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소에도 조심스러웠지만 당장에 벌인 짓이 있으니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렸다. 아니, 우리가 틀렸다. 팽가 도법은 쾌도였어! 너도 이제 충분히 고수가 될 수 있다. 크핫하하하!”
못난 자식 취급하긴 했어도 내심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지 팽위천은 자신의 경지 상승보다 팽구연이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데에, 그리고 팽가 도법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다.
“은인은, 은인은 어디 계시냐?”
“그 꼬맹이라면 여기에…… 응? 어디 갔지?”
그제야 자신들의 초기 목적을 깨달은 자들이 황급히 화영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주방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버린 화영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놈! 은인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하, 하지만 아버지. 그 꼬맹이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는…….”
“이놈이 그래도!”
“죄, 죄송합니다.”
좀 전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며 호통 치는 팽위천의 기세에 주눅이 든 팽구연은 결국 꼬리를 내렸다.
다시 정좌하고 앉은 무리는 무작정 화영을 기다렸다. 하지만 화영은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조급해진 자들이 음식을 시키고, 주방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림에서 가진 배분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미 놀라운 무공을 보았고, 또 말 한마디로 팽위천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것까지 보았기 때문에 체면 따윈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여보시오, 객주.”
“말씀하십시오, 대협.”
“은인께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 곧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고 전해 주시오.”
한 시진이 지나도록 화영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조급해진 팽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 객주에게 대신 말을 전했다.
은인에게 마땅히 인사를 해야 하나, 그에게는 당장에 팽가 도법을 새로이 정리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도 있는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구휘!”
“예, 아버님.”
팽위천의 말에 태양혈이 불쑥 솟은 산만 한 덩치의 청년이 벌떡 일어섰다.
팽구휘, 팽위천의 첫째 아들로 타고난 근골과 신력이 대단하여 제법 유망한 후기지수로 꼽히는 자였다.
“넌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은인께서 나타나시면 즉시 본가로 달려 오거라!”
“예!”
팽구휘에게 자리를 맡긴 팽위천은 화영이 사라진 주방 쪽을 향해 넙죽 절하고 본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기…… 영감님.”
“뭐, 뭔가?”
“그분께…… 무례를 범해 죄송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팽구연은 본가로 향하기 전, 황 객주에게 대신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 그러겠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황 객주가 더듬거리며 답하자 팽구연도 아버지를 따라 본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팽가의 망나니로 널리 알려진 팽구연. 이 청년이 후에 섬전도(閃電刀)라 불릴지는 이곳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화영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상황이 이쯤 되자 황 객주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황 객주는 다시 일에 충실했다.
‘무림 고수든 아니든 화영은 화영일 뿐이다.’

덜컹!
팽위천이 본가로 돌아가고 나서 반 시진하고 일 각여가 지났을 때, 얼마 전까지 소소객잔을 감시하는 역을 맡았던 허승찬이 객잔 문을 세게 열어젖히며 난입했다.
“흡!”
순식간에 쏘아진 다수의 살기!
이미 검기상인(劍氣傷人) 정도는 훌쩍 뛰어넘은 자들의 살기이니 만큼, 더구나 사촌이 땅 사도 배 아픈 마당에 팽위천이 큰 깨달음을 얻는 걸 보고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나타난 살기이니만큼 자칫하면 큰 내상이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특출 나진 않아도 허승찬은 명색이 화산파 일대 제자! 심장을 움켜쥐며 비틀댈지언정 혼절까진 가지 않았다.
휘익―
허승찬의 가슴에 새겨진 매화무늬를 보고 화산파의 제자임을 알아챈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이 내공을 뿌려 허승찬의 주변으로 막을 형성했다.
그 모습에 각 파의 고수들은 일제히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어차피 화풀이로 살기를 쏘아 보낸 것이니 굳이 화산파와 안 좋은 인연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잠시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핀 허승찬은 간신히 전음을 사용하며 장문인에게 말을 전했다.
‘화영이 다른 곳에 나타났습니다.’
‘아는 자는?’
‘우리 화산파뿐입니다. 밖에 천충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추궁은 나중에 하겠다.’
탁!
허승찬과 달리 간단하게 전음을 사용한 단설운은 허승찬의 등을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물론, 내상을 더 도지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의 몸속에 내공을 불어넣어 치료하려는 의도였다.
울컥!
안 그래도 전음이란 수법 자체가 일류고수쯤 돼야 어렵사리 시전 할 수 있는 것인데 조금 전 살기를 받아 내느라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전음을 시전한 허승찬의 입에서 한 사발의 검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그런 일이 있다니 잠시 다녀와야겠군. 너는 이곳에 있다가 그분이 나타나면 급히 내게 알리거라.”
“예, 장문인.”
다른 문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본문의 일인 것처럼 약간의 연기를 한 단설운은 천충이 기다리고 있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젠장, 난 죽었다!’
객잔 주변을 포위하듯 감시하고 있는 다른 자들은 모르지만 그만 화영의 출현을 아는 이유. 그것이 근무지 이탈에 의한 것이란 걸 단설운이 알아챘음을 ‘추궁’이란 단어에서 깨달은 허승찬은 단설운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그로부터 일 각여,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여긴 자들의 추적과 보고로 객잔 안이 발칵 뒤집혔다.
“허허, 근처를 지키고 있는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까지 알아채지 못하게 빠져나가다니…….”
“중원 최고라는 천영살문(千影殺門)의 은영잠행술(隱影潛行術)도 이런 낮에는 소승의 이목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
뒷문에는 많은 수의 각 파 고수, 그것도 무림에서 일류나 절정고수라고 불리는 자들이 지키고 있고 객잔 곳곳에는 초절정, 혹은 초극의 고수라 불리는 자신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화영이 전혀 이목을 끌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제자들이 지키는 후문이나 창문을 통해 나갔다면 다행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옆으로 지나간 것이라면? 만일 그런 자가 검을 들고 자신을 암습한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각 파의 고수들은 밀려오는 오싹함에 한 차례 몸서리치고 황급히 화영이 나타났다는 농가 쪽으로 몸을 날렸다.
“허어, 벌써 알아차렸는가?”
각 파의 고수들이 썰물 빠지듯 객잔 내를 빠져나가고 허승찬마저 급히 내상을 다스린 뒤 몸을 날렸기 때문에 텅텅 비어 버린 객잔에서 황 객주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한번 무림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기 전엔 빠져나올 수 없다더니 그게 다 아무리 숨고 도망쳐도 금세 찾아내는 무림인들의 정보력 때문이었구나! 어이할꼬, 어이할꼬!”
주방으로 들어간 황 객주는 화영이 밖으로 나가는 데 사용한 비밀통로를 점검하며 깊게 탄식했다.
비밀통로!
객잔에, 그것도 고급객잔이 아닌 이렇게 지극히도 서민적인 객잔에 비밀통로가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으랴!
3년 전 ‘선인강림’ 사건이 있은 후, 언젠가 돌아올 화영을 위해 황 객주가 사람을 시켜 조금씩 만든 이 비밀통로는 인근 농가와 골목, 포목점. 이렇게 세 곳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매주 입이 무거운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최종 목적지를 달리 알렸기 때문에 아무도 진실한 통로의 끝을 알지 못했다. 아니, 이 비밀통로를 만든다는 소문 자체도 잠깐 일다가 금세 묻혀 버렸다. 비밀통로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는 사람들끼리의 말이 전부 다르니 비밀통로에 대한 신빙성 자체가 매우 낮다고 판단된 것이다.
팽구연의 난동에 화영이 무서워한 탓도 있고, 눈을 번뜩이며 주시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객잔 내에 있어 봐야 화영에게 좋을 것 없다고 생각해서 비밀통로로 화영을 떠민 황 객주였으나, 그 행동은 진실을 모르는 자들에겐 더 깊은 착각의 수렁으로 빠져들 촉매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