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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6화)
2 장 재림(再臨)(3)
각 파의 고수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을 때, 정작 소란의 주인공인 화영은 인근 농가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거지?”
농부들이 일은 안 하고 제단을 쌓고 음식을 장만하자 화영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예끼, 이놈아!”
딱!
좀 더 가까이 가서 구경하려는 순간, 꼬장꼬장한 늙은이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에 별이 번쩍였다.
“아야야!”
“기우제 처음 보냐? 이놈아! 방정 떨지 말고 저만치 가 있어. 음식은 끝나면 어련히 알아서 나눠 줄까.”
노인은 화영이 눈을 반짝이며 제단으로 접근한 이유가 음식에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덕분에 화영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한 번 눈을 부라리는 노인 앞에서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치이, 구경 좀 하려던 것뿐인데.”
더 가 봐야 호통밖에 들을 게 없다는 걸 파악한 화영은 발길을 돌려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 빨며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어째서 저런 노인에게 맞은 것이지? 일종의 유희인가?’
저잣거리에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화영을 뒤쫓아 온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은 또다시 제멋대로 해석을 시작했다.
‘산에서 수련만 하다 나와서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에서부터 ‘정파인으로서 무공도 모르는 민간인에게 함부로 힘을 쓰지 않는다.’ 등의 생각은 단설운 자신의 마음 수양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사실과는 살짝 어긋나 있었다.
“헤헤, 형도 먹을 거 얻으러 온 거야?”
“응? 아, 아니. 난 그냥 구경하러 왔어.”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거지인 듯, 넝마가 된 옷에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작게 악취마저 풍기는 꼬마아이 하나가 실실 웃으며 화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과 함께 쏟아지는 경계의 눈빛들.
화영이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몫이 줄어들까 염려하는 굶주린 아이들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화영은 움찔거리며 부인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조금은 누그러진 경계심. 화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제단 쪽으로 돌렸다.
“저게 뭐 하는 거지?”
“히힛, 형은 그것도 몰라? 기우제잖아, 기우제!”
화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맨 처음 말을 걸었던 거지 꼬마가 자기도 아는 걸 모르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기우제? 그게 뭔데?”
“그게, 그러니까…….”
“비가 오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원하는 의식이다.”
“응, 맞아. 그거야!”
거지 꼬마가 딱히 답을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서 있던 소년이 대신 답했다.
이 꼬마의 형이라도 되는 듯, 마찬가지로 꼬질꼬질한 옷차림에 땟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아이답지 않게 정광이 가득했다.
“비를? 어째서?”
“그야 비가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지. 작년은 아니지만 재작년에 크게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망쳤으니까 이번에도 미리 이렇게 제단을 쌓고 하늘에 기원하는 거다.”
“이렇게 하면 정말 비가 와?”
“그야 모르지.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효과가 있든 없든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사람들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우물만 몇 개 더 있어도 이럴 필요까진 없을 텐데…….”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지만 마을에 있는 우물의 숫자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수맥이라는 게 아무 땅이나 파면 찾아지는 것이 아닌 만큼, 제대로 찾으려면 제법 큰돈을 주고 도사 같은 자들을 불러와야 하기 때문에 그 수가 충분치 못한 것이다. 몇 년 동안 연달아 풍년이어야 겨우 한 번쯤 도사를 초청할 수 있을까?
“우물? 파면 되잖아?”
“바보 같긴! 아무 데나 판다고 다 물이 나오는 게 아냐. 그게 찾기 쉬웠으면 이러지도 않지. 수맥을 찾아내려면 꽤 큰돈이 든다고.”
“으음…….”
화영은 어째서 고작 수맥 하나 찾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옛날부터 아버지에게 누누이 들어온 ‘네 능력은 특별한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묵묵히 넘어갔다.
다시 고정된 시선.
제단을 쌓고, 음식을 올리고,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치성을 드리는 모습은 화영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뒤, 기우제가 끝났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제단 쪽으로 달려갔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줬다. 물론, 먹을 것이 궁하지 않은 화영은 기우제가 끝나자 즉시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우제라, 아빠가 있었으면 컨트롤 웨더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을 사람들이 정성 들여 치성을 드리는 모습에 마음이 동했는지 화영은 비를 내리게 해 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컨트롤 웨더. 7써클의 기후조절 마법. 무공의 경지로 따지면 현경으로 볼 수 있는 지고의 경지인 7써클을 화영은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정령사’의 원래 이름이 ‘정령마법사’이고, 정령사들도 원래는 마법사를 지향하던 자들인 만큼 ‘마법’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있다 해도 7써클의 마법을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그의 아빠라는 자가 그 이상의 능력을 지녔음을 뜻했다.
‘그래, 우물 정도라면…….’
뭔가 자신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화영은 결심한 듯,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디네, 노움.”
촤라라락.
쿠구구구구.
허공에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생겨나더니 이내 하나로 뭉쳐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고 땅에서는 두더지처럼 생긴 돌덩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와 땅의 하급 정령인 노움.
최소 5써클에 올라 중급 정령을 부리기 전까진 다른 사람들에게 정령을 내보이는 것은 최대한 피하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생각해 인적이 뜸한 곳에서 두 정령을 소환해 낸 화영이었지만 그가 알아채지 못하게 정령을 바라보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자, 자연동화경?!”
어느새 도착해 화영의 행동을 살피던 각 파 최고수들은 화영의 근처로 아주 순수한 수(水)의 기운이 모이는 것을 느끼고 안력을 돋우다가 또 한 번 크게 경악했다.
유형화된 물의 기운!
무형의 음기라면 이해가 간다. 유형의 양기라면, 염화장(炎火掌)과 같은 불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삼매진화처럼 내공을 태우면 되니까.
그런데 물이라니?
물론 물을 이용한 무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대 거마 중 하나인 오행마라는 자들 중 넷째가 물을 이용한 무공을 펼치기도 했고, 간혹 도력 높은 도사나 승려들도 술법이라는 것을 펼쳐 물을 이용한 술수를 부리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만 해도 비가 오거나 강가에서 싸울 때 물방울에 내력을 불어넣어 공격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변에 물이 있을 때’의 일이다.
호수에 있는 물을 얼렸으면 얼렸지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
따라서 이미 화영에 대한 오해를 산처럼 쌓은 이들은 자연 기에서 물을 만들어 낸 화영의 재주를 무공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자연동화경과 동일시해 버렸다.
사실, 이들의 깨달음이 일정 수준을 넘어 자연 친화력이 생긴 탓에 하급 정령인 운디네가 보이는 것이었으니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이 들어맞는 경우이리라.
그나마도 절묘한 시야의 방해로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노움을 보지 못했기에 놀라움이 덜한 것이었으니…….
“운디네, 노움에게 물의 기운을 조금 나누어 줘. 그리고 노움, 넌 이 근처 땅속을 돌아다니면서 그것과 같은 기운을 찾아.”
퐁.
운디네가 손을 내밀자 조그만 물방울 하나가 살랑살랑 날아서 노움에게 흡수되었다. 순수한 땅의 기운, 그 자체인 노움인지라 흡수한 물의 기운은 약한 독과 같았지만 활동에 크게 지장을 주거나 하진 않기에 괘념치 않았다.
화영의 부탁을 받은 노움은 다시 땅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고 운디네의 등장에 놀라 노움을 미처 느끼지 못하던 자들의 몸은 또 한 번 부르르 떨렸다.
‘아아,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땅의 기운이라니!’
운디네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자신들의 실책은 탓하지 않고 화영의 뛰어난 능력에만 감탄하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런데 뭘 하려는 거지?”
자연동화경이라는 꿈같은 경지를 보긴 했지만 당최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만 지켜볼 수밖에.
‘찾았다.’
“음, 어딘지 표시 좀 해 줄래?”
살아온 세월의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정령들은 이미 나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존재. 때문에 화영은 노움을 비롯한 정령들을 친구처럼 대했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간 노움은 약간의 흔적들을 남기며 화영을 어디론가 이끌더니 어느 지점에서 작은 구덩이를 만들고 다시 화영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다. 근처에 몇 군데 더 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표시할까?’
“그렇게 해 줘.”
‘알았다.’
쿠구구구.
화영의 부탁에 노움은 다시금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화영의 시야가 닿는 몇 군데에 똑같은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네 개라,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사람들에겐 어떻게 알리지?”
정령들을 이용해 수맥을 네 개나 찾긴 했지만 사람들이 화영의 말을 믿어 줄지는 미지수였다. 수맥이 있다 하나 그 깊이까지 땅을 판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두셋의 장정들이 반나절은 걸릴 일을 어린아이의 말만 믿고 행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은가?
“하나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으음, 그래. 꼭 한 번에 할 필요는 없겠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을 테지만.”
총총총총.
나무 막대기 하나를 집어 든 화영은 발밑의 구덩이를 시작으로 다른 구덩이들을 찾아다니며 꼬불꼬불한 글씨로 뭔가를 적었다.
“노움, 이 구덩이를 좀 더 넓고 크게 파 줘. 이 정도 크기로.”
‘알았다.’
콰과과과과과.
마지막 네 번째 구덩이의 한가운데로 노움이 들어가자 구덩이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화영이 나무 막대기로 그린 크기 딱 그만큼.
노움에게 힘을 빌려 주는 것이 제법 힘들었는지 이제 자리 잡은 구덩이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화영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의 수도 늘어 갔다.
“허어!”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화영의 땀방울만 느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인들의 탄성과 경악성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갔다.
“어찌 저런……!”
무공을 이용해서 땅을 판다? 자존심이 용납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장력을 쏘아 내도 되고, 검강을 쏘아 내도 충분하다.
하지만 저렇게 조용히, 원하는 만큼만 파 내려갈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다.
장력을 내뿜든 검강을 날리든 그 파괴력을 이용하는 것인 만큼 이렇게까지 정밀한 위력 조절은 있을 수 없다. 어느 정도는 내공을 이용해 위력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그건 손바닥만 한 것을 주먹 정도로 줄이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아니, 조절할 수 있다 쳐도 그쯤 되면 위력은 현저히 줄어서 땅을 파는 속도가 차라리 수공을 이용해 손으로 파는 게 나을 지경이리라. 거기다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날려 버리는 것이 장력이고 검강이니 그 소음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이쯤 되니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갔다.
“과연 자연동화경이란 것인가!”
꽤 큰 탄성이었지만 내공을 이용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을 형성했기에 무림인들은 안심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비록 자신들만의 착각일지라도.
“마나? 아니, 이 기운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마법사만큼, 혹은 정령사만큼 마나의 유동에 민감한 사람이 또 있을까? 소리를 막는다고 기운을 내뿜은 무림인들이었지만 그 내뿜은 기운 때문에 그들은 도리어 화영의 촉각에 걸려들었다.
“음!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자. 노움, 돌아가. 그리고 운디네.”
‘알겠다.’
‘알았어.’
노움이 힘을 발휘하면서 제법 많은 마나를 소모한 까닭에 화영은 일단 노움을 정령계로 돌려보냈다.
소환할 때만 많은 마나를 잡아먹지, 소환된 후에는 미량의 마나만을 요구하는 것이 정령이지만 그 미량의 마나마저도 지금의 화영에겐 부담이 되는 것이다.
노움이 돌아가자 이번엔 운디네가 화영과의 정신적 교감에 따라 움직였다.
스르륵.
화영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이는 와중에 운디네는 화영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을 닦아 주기 위해서다. 땀이 닦이는 것은 물론, 얼굴의 물기까지 모두 가져간 운디네는 화영을 돌아보고 싱긋 웃으며 구덩이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운디네, 필라 오브 워터!”
콰과과과과과!
화영의 외침에 따라 노움이 파놓은 구덩이에서 한줄기 커다란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굵은 물줄기는 순식간에 운디네를 삼키고, 하늘 높이 치솟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무림인들의 눈에는 운디네가 그 물줄기 자체가 되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기실, 그것이 사실이었지만 그걸 아는 것은 중원에 단 한 명. 화영뿐이다.
“허억, 헉, 헉!”
약 5초간 하늘을 꿰뚫을 듯 솟구치던 물줄기는 화영의 헐떡임과 함께 잦아들었다. 비라도 온 듯 젖은 땅과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화영은 천천히 근처 숲으로 몸을 숨겼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최소 중급 정령을 얻을 때까진 정령에 대해 숨기라는 아버지의 당부가 생각나서였다.
화영이 숲으로 사라지자 화영이 있던 자리에, 혹은 그가 만든 구덩이 주위로 숨어 있던 무림인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가 적었던 꼬불꼬불한 글씨를 읽었다.
수맥(水脈).
사람들이 알아채고 파 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화영이 남긴 글자는 이 두 글자였다.
“허어, 수맥이라!”
“그럼 그것들이 술법이었던 말이오?”
“그건 아니외다. 빈도가 술법에 대해 조금 알지만 그것은 결코 술법과는 다른 무엇이었소. 아무래도 자연 기에 자신을 동화시켜 수맥을 찾고, 파낸 것 같은데…….”
수맥을 찾는 방법이라곤 술법밖에 모르는 그들이었기에 화영의 능력이 술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 반하고 나선 것이 아미의 정은사태, 곤륜의 청운진인과 더불어 술법 연구에 있어서 최고로 불리는 소림의 승원대사였으니 다시 초점은 자연동화경으로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자연동화경인가!”
“어서 그분을 쫓아가 봅…….”
“아이고, 도사님들.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수고를 해 주시다니 정말 복 받으실 겁니다!”
“으음?”
화영이 몸을 숨긴 숲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어느새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넙죽 절을 하며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오대세가는 아니었지만 구파는 모두 어떻게든 도가나 불가와 관련이 있기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술법사로 착각한 것이다.
“도사님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흠!”
“훗, 선행을 베풀다 오시구려. 우린 먼저 가겠소!”
구파의 체면이 있어 쉽게 몸을 빼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사이, 도가나 불가와 큰 연관이 없는 오대세가의 인물들은 비웃음을 흘리며 숲으로 몸을 날렸다.
“험험, 본 파도 술법에 대해선 무지하니 이만…….”
처음에는 도가 계통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세속적이 되어 도가와는 꽤 거리가 생긴 청성, 종남, 화산파가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들마저 몸을 날리자 남은 육대문파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어찌 몸을 뺄 만한 여건이 안 되었다.
“아미타불, 이 우물을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외다. 그러나, 그분의 뜻을 받들어 소승이 우물 하나를 더 파 드리겠소.”
“저도 돕도록 하지요.”
다행히도, 소림과 곤륜에서 우물 파기를 자원하는 자가 나왔다. 이제 한 명만 더 희생하면 모두가 몸을 뺄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클클클, 목구멍에 때 좀 벗기게 해 준다면 이 거지도 한 손 거들겠소.”
“허험, 그럼 우리는 필요 없겠구려. 수고들 하시오!”
개방의 인물이 나섬으로 세 명이 모두 채워지자 나머지 문파들은 민망함을 뒤로하고 몸을 날렸다. 그런 그들을 따라 소림, 곤륜, 개방의 다른 자들도 몸을 날렸지만 절대 자리를 양보해 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클클,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고 달려드는 꼴이 우리 거지나 도사나 다를 바가 없구나!”
“아미타불.”
개방의 전대 방주 황위의 핀잔에 소림과 곤륜의 두 고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맥이 있는 자리로 가서 섰다.
다시 한 번 혀를 차는 황위.
그러나 더 이상의 시비는 걸지 않았다.
“시작하지. 흐읍, 항룡십팔장!”
“태청용형검!”
“대윤회겁륜장!”
콰과과광!!
개방의 절초, 항룡십팔장을 필두로 곤륜의 태청용형검, 소림의 대윤회겁륜장이 움푹 팬 땅을 더 넓게, 더 깊이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