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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7화)
2 장 재림(再臨)(4)
파바바밧!
세 고수를 남겨 두고 몸을 날린 무림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주변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가부좌는 아니지만 정좌하고 앉은 화영.
무슨 일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던 무림인들은 화영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이 운기조식임을 짐작했다.
‘가부좌가 아니라니 이상하군. 가만! 서, 설마 동공인가?’
운기조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정공과 동공. 말 그대로 정공은 움직이지 않고 축기를 하는 것이요, 동공은 움직이면서도 축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동공을 익힌 사람들 중 순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축기하는 경우는 꽤 흔했다.
그럼 동공이 훨씬 뛰어난 것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공은 동공에 비해 많은 양의 기를 한 번에 모을 수 있지만 축기 중에 작은 충격이라도 받으면 주화입마라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고 동공은 언제 어디서나 주화입마의 걱정 없이 축기를 행할 수 있지만 모이는 진기의 양이 무척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각자 장점과 단점이 분명하달까?
그런데 지금 동공으로 추측되는 형태로 운기하는 자가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라 있다.
‘저 내공심법만 얻을 수 있다면!’
사방에 포진한 무림인들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후유, 일단 이 정도라면.”
동공이면서도 저런 고수를 단시간 내에 키워 낼 수 있는 내공심법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얻어야만 했다.
만일 저 내공심법이 자신의 문파의 무공과 맞지 않는다면?
그래도 얻어야 한다. 남이 얻으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은 물론이고 맞지 않는 무공이야 고치면 되니까. 어차피 각 파에 전해 오는 무공이란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한 하나의 길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이다.
그 증거로 자신들만 해도 이미 무초식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던가?
기교 따위야 나중에라도 메울 수 있지만 모든 힘의 근원이 되는 내공과 깨달음만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
모두가 두 눈 번뜩이며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질 때, 어느 정도의 마나를 회복한 화영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금만 늦었으면 마나 고갈이 일어날 뻔했네. 며칠 동안 계속 우물을 만들어야 하니까 조심해야지. 실프.”
사라락.
화영의 앞으로 미약한 한줄기 바람이 뭉쳐서 사람 형상을 갖췄다. 그러나 숨어 있는 무림인들도 이번만큼은 그 실체를 보지는 못했다.
운디네와 노움은 그 속성인 물과 땅을 구체화했기 때문에 확연히 눈으로 드러났지만 바람의 정령인 실프만큼은 친화력이 있다 해도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숲에서, 그것도 나무 뒤나 나뭇가지에 몸을 숨긴 채로 훔쳐보는 입장이니.
“길을 좀 찾아 줄래?”
‘알았어.’
정신의 교감을 통해 가고자 하는 장소와 대략적인 방향, 지금까지 왔던 길들을 전달받은 실프는 어디론가 거침없이 날아갔다.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히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극에 달한 그들의 기감은 실프의 존재를 잡아냈다. 만일 베려고 한다면, 감에 의존해서 검기를 일으킨다면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으리라. 지레 겁먹고 엉뚱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저 힘으로 암격을 펼친다면……!’
하지만 자신의 기감에 걸려든 실프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며 괜한 상상에 식은땀을 흘리는 무림인들이었다.
잠시 후, 가만히 선 채로 작은 땀방울만 흘리는 화영에게로 실프가 다시 돌아왔다.
“찾았어?”
‘이쪽이다.’
살랑.
다시 돌아온 실프는 먼저 작은 바람을 일으켜 화영의 땀방울부터 식혀 주었다. 실프가 딱히 힘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화영에게서 멀어질수록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실프가 화영에게서 빌려 오는 힘이 커지기 때문에 마나 소모가 제법 컸던 탓이다.
‘주위에 숨어 있는 자들이 있는데, 알고 있어?’
“뭐?”
특별하게 은신술을 익힌 건 아니지만 전부 노화순청의 경지에 오르면서 작은 기 하나까지 갈무리할 수 있게 된 그들이었기에 화영으로선 그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화영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숨어 있는 무림인들은 그 눈빛 하나하나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숨어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계속 널 쫓아온 것 같군.’
“왜 절 쫓아온 거죠? 숨지 말고 나오세요!”
실프의 속삭임에 화영은 곧장 숲에 대고 소리쳤다.
적일지도 모르는데 소리쳐 불러내다니? 그 행동에 놀란 실프는 화영이 아직 제대로 된 싸움을 해 보거나 적을 만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혹시 모를 전투에 대비했다.
‘헉! 진작부터 알아채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실프보다 더 놀란 것은 숨어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노화순청의 경지는 차치하고라도 화영의 이목에 걸려들지 않게 멀리서 지켜보고, 혹여 큰 소리가 날 때는 강기막까지 형성해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했는데 이렇게 쉽게 알아차리다니?
상상을 뛰어넘는 화영의 가공할 만한 능력에 무림인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한 발짝 걸어 나갔다.
“클클클, 이미 알고 있었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군.”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나? 보면 모르겠나? 늙은 거지지.”
갑작스런 개방의 전대 방주 황위의 난입에 화영의 정신이 분산되자 모습을 드러내려던 자들이 다시금 몸을 숨겼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괜히 더 있다가 뒤를 밟은 것에 대한 화영의 노여움을 사기 싫었던 것이다.
물론 화영을 빼앗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들 법했지만 그들에겐 아무리 세속을 초탈한 자라도 거지 소굴로 걸어 들어가려 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절 왜 쫓아오신 거예요?”
“클클! 거지가 원하는 게 없으면 왜 움직이겠누?”
“원하는…… 것?”
다른 자들과 달리 참으로 솔직 담백한 말이었다. 물론 너무 투박해서 오해의 소지는 다분했지만 그는 결코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
“아!”
황위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영은 알아차렸다는 듯, 왼 주먹으로 오른 손바닥을 탁! 치며 웃었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건 이쪽 방향으로 쭉 가면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무공비급’이나 ‘화영’, 그 자체를 원했던 황위였으나 손으로 방향까지 짚어 주는 화영의 친절한 설명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데려다 드리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기다리실 것 같아서요.”
화영은 황위에게 꾸벅 인사하고 실프가 이끄는 방향으로 총총총 뛰어갔다.
잠시 사라지는 화영과 화영이 가리켰던 방향을 번갈아 본 황위.
“허허허, 현인의 말은 역시 이해할 수 없구먼.”
황위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화영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한, 화영이 가리킨 방향은 기우제가 있던 곳.
화영이 애초에 의도한 바는 기우제가 열리는 곳에서 음식을 얻어먹으라는 것이었으나, 그로부터 얼마 후. 전 중원에 현 개방방주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혀 오던 후개(개방의 차기 방주) 선발을 선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마쳤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거지의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눈에 정광이 넘치는, 뛰어난 기재라는 자랑과 함께.
3 장 집을 나서다(1)
소소객잔 근처를 맴도는 이들 중 개방의 방주가 빠진 지 한 달여. 여전히 소소객잔은 무림인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화영은 능력을 보이지 않았고 저번처럼 밖으로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밖으로 나갈 때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단지 황 객주를 따라 잠깐 저잣거리에 나가거나 식재료를 구입하러 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화영과 친분을 쌓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 친근하게 굴려 하면 여지없이 숨 막히는 살기가 덮쳐왔고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느라 모두 간신히 안면만 튼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화영과 가장 가까운 자라면 얼마 전 은인이라며 온갖 폐물을 가지고 찾아온 팽가주 팽위천과 그 아들들 정도랄까?
자신이 뭘 했는지도 모르는 화영과 부(富)를 탐하기보단 조용히,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황 객주는 그들이 내민 재물들을 한사코 거절했지만 넙죽 절 하며 막무가내로 떠맡기는 팽가 식솔들을 당해 내진 못했다. 덕분에 인근 천하전장에는 지금 황 객주의 이름으로 소소객잔을 하나 더 짓고도 남을 만한 돈이 맡겨 있다. 더불어 신병이기까진 아니어도 상당한 명검 축에 드는 청한검도.
무인이라면, 검이 필요한 경지가 아니라 해도 좋은 검을 갖는 것을 좋아하는 게 본능이라 할 수 있는데도 전장에 맡겨 버리는 모습 때문에 신빙성 없는 여러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실정이니 제아무리 정신 수양을 한 자들이라도 슬슬 조급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찌한다…….”
“저, 가주.”
“무슨 일인가?”
음식을 나르는 화영을 보고 모두 입맛만 다시고 있을 때,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사 하나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벽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속닥속닥.
얘기를 듣는 남궁벽의 이마가 잠시 찌푸려졌지만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끼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속닥거린 남궁벽과 무사.
일은 그날 저녁에 벌어졌다.
사사사삭.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고,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새벽. 소소객잔의 천장으로 검은 인영 둘이 날아들었다.
“허허,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일까지 해야…….”
‘쉿! 이게 다 세가를 위한 일이다. 나도 하는데 어디서 불평이냐?’
소리 내서 탄식하는 자에게 다른 한 명이 급히 전음을 날려 입을 막았다. 전음을 보낸 쪽이 더 위인 듯, 불평하던 자는 전음으로 바꿔서 투덜거렸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명문 정파인데 이런 짓까지 하는 건…….’
‘갈! 억울하면 네놈도 자연동화경에 들어라!’
‘끄응!’
동생인 듯한 복면인은 자신들을 명문 정파로, 그것도 세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오대세가의 인물이란 말인가?
스르륵.
근처 어느 방에서 자고 있을 화영 때문인지 두 복면인은 최소한의 진기만을 사용하여 미끄러지듯 객잔 안으로 잠입했다. 그리곤 유령과 같이 흐릿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원하던 곳으로 이동해 갔다. 역시나 극미량의 진기만을 사용한 신법. 하지만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까지 온 신경을 집중했기에 소모되는 심력만큼은 진기의 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평생을 무공에 바친 그들의 얼굴이, 아니 복면이 그 잠깐 동안 땀으로 흠뻑 젖었겠는가?
‘여기다.’
끼익.
형이 전음과 함께 턱짓을 하자 동생이 조심스레 문을 돌려 열었다. 기름칠이 덜 된 듯, 문이 열리면서 가느다란 비명을 토했지만 다행히 화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서둘러!’
비록 기척은 느끼지 못했지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자연동화경의 고수라면 자신들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고도 접근할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미 상상도 못할 경지를 몇 번이나 보여준 화영이었으니!
“헉?”
‘쉿! 무슨 일이야?’
또다시 큰 소리를 내는 동생을 보고 아직 문밖에 있던 복면인이 짜증 섞인 전음을 보냈다.
“어, 없어.”
“뭐?”
“목표가…… 객잔 주인이 없다고!”
“뭣이?!”
어찌나 놀랐는지 이번엔 잘 참던 형마저도 소리를 냈다. 급히 방으로 들어온 그는 빠르게 방 안을 훑더니 결론을 내렸다.
“제길, 우리보다 먼저 손쓴 놈이 있었군. 창문으로 도주한 건가? 쫓아가자!”
정리되지 않은 이불. 열린 창문. 그리고 저 멀리 달빛에 비친, 무언가를 들쳐 멘 듯한 모습의 그림자들.
현 상황을 유추하기엔 충분한 증거요, 자료들이었다.
두 복면인은 주저하지 않고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복면인과 납치범. 딱 그만큼의 거리 차이로 다섯 쌍의 복면인들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쫓고 쫓기는 일곱 쌍의 복면인과 객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러 집단. 그들의 때 아닌 야밤의 술래잡기는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