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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8화)
3 장 집을 나서다(2)
“헥헥, 제발 좀 멈춰라!”
앞서 달리는 복면인을 향해 또 다른 복면인이 진기 가득 담긴 장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곧장 몸을 뒤집었다.
파바밧!
공중에서 몸을 비튼 두 번째 복면인의 옆으로 희뿌연 강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에, 한 바퀴 회전을 끝마친 두 번째 복면인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뽑아 뒤를 향해 검강을 날렸다.
“왜 나한테 시비야!”
“제길,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복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복면인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검강을 해소시켜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두 번째 복면인을 공격했던 검강은 세 번째 복면인이 아니라 네 번째 복면인이 날린 것이었으니까. 네 번째가 세 번째를 노리고 날린 공격이었으나 세 번째 복면인이 피해 버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두 번째 복면인을 노린 게 되어 버린 것이다.
두 번째 복면인이 뿌린 검강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연출했다. 세 번째 복면인이 검강의 기운을 다 해소시키기도 전에 뒤에서 날아오는 기파를 느끼고 측면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그렇게, 이전투구(泥田鬪狗)와 같은 추격전은 반 시진 가까이 계속되고 있었다.
“멈춰라!”
첫 번째 복면인이 황 객주를 보쌈한 지 반 시진하고도 일다경 만에, 일단의 무리가 복면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검은 옷과 복면, 낡은 청강장검의 복면인들과 대조되게 화려한 복색과 고풍스런 검들.
황 객주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옷에는 하나씩 각자의 문파를 나타내는 문양이 멋들어지게 수놓아져 있었다.
“너흰 뭐 하는 놈들이냐!”
한데 큰소리를 치는 쪽은 복면인들이었다.
사실 저 말에는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기에 이제야 나타나느냐!’라는 뜻이 담겨 있었으니, 화려한 복장을 한 자들은 멋들어지게 막아섰음에도 그의 호통에 움찔했다.
“어허! 어찌 죄를 지으면서 큰소리를 치는가! 어서 그분을 내려놓고 사라져라!”
기실, 이 중에 황 객주보다 나이가 적은 자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집주인이 무서우면 키우는 강아지도 무섭다고, 경우는 뒤바뀌었지만 화영 덕분에 황 객주도 존대를 받았다. 보쌈을 해 오면서 황 객주의 마혈과 아혈만을 점했을 뿐이라 보고, 듣는 것은 아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 웃기지 마라!”
어느새 추격전을 멈춘 복면인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첫 번째 복면인의 옆으로 쭉 늘어섰다. 뒤로 서는 게 분위기상 더 어울렸지만 남의 수하처럼 보이는 건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이다.
복면인들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막아선 자들도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들이로구나!”
선두에 선 백의인이 달려 나가자 같이 있던 자들도 덩달아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일제히 복면인들과 격돌했다.
자파의 전대 고수가 황 객주를 납치하는 척하면 장문인(혹은 가주)이 나서서 그와 겨루고, 전대 고수는 거짓 패배 후 도주한다. 여기서 자작극이라는 게 들통 나지 않도록 전대 고수는 알려지지 않은 무공을 사용하거나 초식은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황 객주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장문인은 되도록 화려한 초식을 사용한다.
이것이 그들이 세운 계획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공을 나눠먹기 아깝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 계획에 이상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변수는 곧 고개를 치켜들었다.
‘큭, 현천검! 공동파인가?’
‘송풍검! 청성파로군’
‘대연검법. 남궁세가!’
‘구궁반천검? 화산…….’
그랬다. 모두가 복면을 하고 있으니 막아선 자들로서는 누가 자파의 고수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복면인들은 그들의 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누가 누군지 알아차렸지만 애석하게도 먼저 덤벼든 것은 복면인들이 아니었다. 덕분에 막아선 자들과 복면인 모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대와 검을 섞게 되었다.
창! 채쟁!
광폭한 기세를 담은 찌르기를 느릿하고 부드러운 검식으로 받아 낸 도사의 검은 다시금 원을 그리며 상대의 전신 요혈을 찔러 갔다.
“큭, 태극혜검! 하지만 난 무당의 검 따위엔 지지 않는다. 이 말코 도사야!”
무당의 도사가 태극혜검으로 맞받아치자 복면인은 대연검법에서 고혼일검으로 검식을 바꾸어 마주쳐 갔다.
이 역시 남궁세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검법 중 하나. 제왕검형과 창궁무애검법이라는 뛰어난 검법들의 그림자에 묻힌 검법이었지만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무당의 비전이라는 태극혜검에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한쪽은 비교적 무공 수위가 떨어지나 최고의 무공을 발휘하고, 한쪽은 무공 수위는 월등하나 낮은 위력의 검식만을 사용하고. 이 차이는 그들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적어도 종남의 검에는!’
‘황보세가 따위에게는!’
‘질 수 없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니 자파의 인물과 상대할 때처럼 적당히 상대하다 도주해 줄 거라는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아무리 비교적 약한 무공으로 상대한다고 해도 자신보다 무공 수위가 낮음이 분명한데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니 전대 고수들로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연극이라도 여기서 밀리면 자파의 무공이 상대 문파의 무공보다 못한 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검에 실리는 진기도 더해 갔다.
“크흑, 매화만천!”
비전 심법인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의 검 끝으로 매화삼릉검의 최후 초식, 매화만천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허공을 수놓는 열한 개의 강기. 극에 달하면 모두 열네 개의 강기가 뿜어져 나오지만 지금도 꽃잎 모양의 강기 하나하나가 검을 부러뜨리고, 몸을 관통시킬 충분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대해에서 밀려오는 파도처럼 연속해서 상대를 휘몰아친다는 청성의 절기 칠십이파검으로 이 아름답지만 섬뜩한 위력의 강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도리어 반격까지 해 오는 복면인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뜬 단설운.
“이건 반칙이야! 흡, 매화노방!”
“주위나 둘러보고 그런 소리를 해라, 핫! 파랑무한!”
재빨리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매화노방의 초식으로 맞서는 단설운에게 복면인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더 매섭게, 칠십이파검의 후반부 초식들을 펼쳐 냈다.
“천왕파벽!”
“분광잔영!”
“복마환영검!”
겹겹이 더해져 오는 강기를 막아 내는 단설운의 귓가에 들려온 초식명들은 하나같이 각 파의 유명한 초식들이었다. 그리고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 복면인들의 초식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치열해진 싸움 끝에 참지 못한 복면인들이 각 파의 진산무공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면인들이 각자 자신 있는 무공을 펼치기 시작하자 금세 힘의 차이가 드러났다.
좀 전까지의 치열한 공방은 없어지고 일방적으로 몰아치고 몰리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도리어 복면인들이 승리할 듯한 상황.
이때, 또 한 번의 변수가 작용했다.
“끝이다. 파랑무한!”
“어딜 감히! 매향성류!”
쉬리릭!
청성파의 무공을 쓰는 복면인이 화산파 장문인 단설운에게 승리를 확정 짓는 한 수를 펼치는 순간, 그의 측면에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후반 초식인 매향성류가 날아들었다.
콰광!
급히 청성의 보법인 환환미종보를 펼치며 물러선 복면인. 힘겹게 방향을 튼 검으로 날아드는 강기에 맞선 그의 입가엔 옅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매향성류에 당했다기보다는 무리해서 진기의 방향을 바꾼 탓에 입은 내상이었다.
“어째서?”
같은 복면인에게 공격받은 청성파 무공의 복면인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흥, 미숙한 아이를 핍박하는 꼴이 볼썽사나워서 그랬다.”
구대문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미숙한 아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다곤 해도 진짜로 그런 이유는 아니었을 터.
아마도 자신의 눈앞에서 화산의 검이 꺾이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기에 그런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비단 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크앗!”
“이게 무슨 짓이냐!”
사방에서 복면인이 복면인을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화산파 무공을 쓰는 복면인과 거의 동일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역시 자파의 장문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 문파의 최고수는 아닐지라도 장문인(혹은 가주)은 그 문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게 설사 전대 고수였다 해도, 화산파에 더 강한 고수가 있다 해도 화산파 장문인이 진다는 것은 화산의 검이 꺾였다는 걸 의미했다.
‘화산의 검은 청성에게 무너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실수였다.
화산파 무공의 복면인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아니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화산의 검이 얼마나 잘났는지 직접 시험해 보마!’
콰과과광!
청성에 대한 도발이라 할 수 있는 화산파 복면인의 말에 청성파 복면인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두 초절정고수의 격돌!
보는 것만으로도 개안(開眼)할 수 있다는 보기 드문 비무였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격돌은 한 군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 주둥이를 뭉개 주마!”
“내 그대의 두 토막 난 검을 해검지에 걸어 드리리다!”
안타깝게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결국, 처음에 막아섰던 자들은 어색하게 구경만 하고 복면인들끼리 서로 싸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처구니없지만 그 엄청난 무공들 때문에 놀랍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마혈과 아혈을 짚인 황 객주의 눈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관조하는 자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일점파랑경천세!”
“매화난만!”
칠십이파검의 특징인 물결과 같은 강기가 한 점에 집중됐다. 거대한 울렁임과 같은 강기가 세상을 덮어 가자 상대는 정면을 향해 무수한 매화 잎과 같은 강기를 뿜어냄으로써 맞서 나갔다. 하지만 파장의 힘이 워낙에 큰지라 화산파 복면인은 오행매화보를 이용해 물러나며 상쇄시켜 가야 했다.
그사이에 생긴 약간의 시간.
그 틈을 이용해 청성의 복면인은 다시 한 번 주위를 강기의 파장으로 메워 갔다.
“파랑만변세!”
“크읏, 매화만리향!”
콰앙―
세상을 뒤엎어 버릴 듯한 강렬한 파동과 천하에 가득하게 퍼지는 매화향이 격돌했다.
화산파 복면인의 무공은 이미 검향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으나 무공 자체의 특징인지라 아찔할 정도로 짙은 매화향이 사방을 장악한 것이다.
쾅! 쾅! 콰앙!!
두 복면인이 뿜어낸 강기가 중간에서 만나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내공 대결은 아니었지만 둘의 얼굴에 나는 땀은 내공 대결만큼이나 많았고, 한 번의 실수가 불러올 위험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하압!”
“차핫!”
한참이나 주위를 강기로 뒤덮던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떨어졌다. 그리고, 승부를 결정지을 한 번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하신공으로 끌어올려진 자색 기운과, 천지일기공에서 끌어올려진, 청색 기운이 당장에라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 전신에, 검 끝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둘의 검 끝에서 자색의, 청색의 빛이 번뜩였다.
“모두 멈추시오!”
울컥.
끝장을 보려던 화산파, 청성파 복면인을 비롯한 모든 복면인, 장문인들의 고개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결정적인 순간이라 오랫동안 시선을 두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소리의 진원지에 있는 자의 모습이 워낙 놀라웠기 때문에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잔뜩 끌어올렸던 진기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흩어진 진기는 극심한 내상으로 변해 돌아왔다.
“우욱.”
기를 끌어올렸던 자들 모두가 한 사발의 피를 쏟아 냈다.
그런 그들을 비웃는 한 인물과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붙잡힌 황 객주를 쳐다보는 어린 소년.
“할아버지!”
화영이 뛰어가자 복면인들은 황급히 황 객주의 혈도를 풀고 앞으로 떠밀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화영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사방으로 도주를 감행했다. 모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면 몇 명은 무사히 도주할 수 있을 거란 기대였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래, 화영아. 난 괜찮다.”
물론 화영이 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화영이 황 객주를 부축하는 동안, 일을 벌인 일곱 문파 장문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비릿한 웃음으로 받아 내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 제갈추. 제갈세가의 현 가주였다.
“어서 돌아가시죠. 객주님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제갈추가 비릿한 웃음을 유지하며 턱짓하자 제갈세가의 무사 하나가 재빨리 달려와 황 객주를 업었다. 그리고 화영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소소객잔으로 향했다.
“화산파, 무당파, 남궁세가, 청성파, 종남파, 황보세가, 공동파. 오 파와 두 세가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하하하하!”
촤라락.
천천히 모두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한 제갈추는 들고 있던 섭선을 펼치며 큰 소리로 웃으면서 돌아섰다. 마치 모든 일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한 비웃음과 행동들.
고수들의 격돌로 인해 초토화된 대로에서 각 파 고수들은 제갈추를 보여 일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길, 죽 쒀서 개 준 꼴이군.”
“손 안 대고 코 풀다니, 제갈추다워. 쳇!”
“우리 모두가 저놈 손에서 놀아난 꼴인가?”
“두고 보자, 제갈추!”
모두가 한마디씩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미 저 멀리 사라진 제갈추. 그의 입가엔 여전히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