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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9화)
3 장 집을 나서다(3)
“이만 내려 주게.”
소소객잔의 문 앞까지 도착하자 황 객주가 자신을 업은 무인에게 말을 건넸다. 원래는 무림인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존대를 해야 했으나 자신이 어떻게 해도 이들이 존대를 멈추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고, 나이로 따져 봐도 이 무사보다는 자신이 위였기에 거리낌 없이 하대했다.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네. 잠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제 움직일 수 있고 다친 것도 아니니 내 발로 걸어가지.”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따라라.”
무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제갈추가 섭선을 접으며 명했다. 명이 떨어지자 신주단지 모시듯 조심스레 황 객주를 내려놓는 무사. 그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제갈추가 한발 걸어 나왔다.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됐네. 말했듯이 몸은 멀쩡하니 혼자 걸어가겠네. 화영아, 오늘 이 할아비하고 같이 자지 않으련?”
“좋아요, 할아버지.”
황 객주의 제안에 찌푸려져 있던 화영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정에 굶주린 화영은 황 객주와 같이 자는 걸 좋아했으나 자립심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황 객주가 자주 화영을 혼자 자도록 했기 때문이다.
화영과 황 객주가 방으로 향하자 제갈추도 따라 움직였다.
“자네는 뭔가?”
“좀 전에 그런 일도 있었으니 문밖에서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제갈추는 물러설 때와 다가설 때를 아는 자였다. 그리고 그가 내린 판단은 지금은 물러설 때라는 것이었다. 괜히 호감을 사려고 무리해서 달라붙다가는 도리어 경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밖에서 몰래 둘의 대화를 엿들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의도는 황 객주에 의해 무산되었다.
“됐네. 조금 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곳은 내 집일세. 내 집에서 내가 불안해 한다면 그 누가 이곳에서 안심하고 잘 것이며 내가 안심할 곳은 또 어디란 말인가? 그러니 괜한 수고 말고 자네도 들어가 자게!”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보통 때라면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다고 하여 크게 호통을 치거나 사단을 냈겠지만 지금은 화영의 앞.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조심해야했다.
다행히 그는 연기의 귀재였다. 속으로는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음에도 얼굴색 하나,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웃는 낯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화영을 상대로 도박하고픈 마음은 없었기에 몰래 숨어 듣는 것 따위의 일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화영아, 들어가자꾸나.”
제갈추가 이층의 자기 방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황 객주는 화영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화영을 의자에 앉히고, 진지하게 물었다.
“화영아, 혹시 이 할아비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더냐?”
“숨기고 있는 것이요?”
“그래. 예를 들면 무공을 익혔다던가…….”
황 객주의 질문에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던 화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오늘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갔던 거예요?”
“그건 아니란다. 그냥 이 할아비가 궁금해서 그래.”
화영이 믿을지는 모르지만 황 객주는 일단 사실을 숨겼다. 괜히 화영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다고 생각한 탓이다.
또다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고운 이마를 찡그린 화영은 잠시 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무공은 아니지만…… 조금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특별한 능력?”
“네. 할아버지가 믿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남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애들의 힘을 빌리기도 하구요.”
“허어! 그랬구나, 그랬어. 알았다.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 할아비를 믿고 얘기해 줘서 고맙구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볼 수 있다. 이 말에 황 객주는 화영의 능력을 지레짐작했다.
그가 짐작한 화영의 능력은 바로 무속의 힘.
귀신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영적인 힘이었다. 물론, 사실과는 꽤 많이 달랐다.
‘허허, 이 조그만 아이의 영적인 능력이 무에 그리 탐나서들 그러는지…….’
‘어? 할아버지도 정령에 대해 아는 건가? 아빠가 세상에 정령사는 아빠와 나, 둘뿐이랬는데……?’
황 객주가 정령을 아는 듯 말하자 화영은 깜짝 놀랐다. 자신만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령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다니?
너무 놀라서 미처 물어볼 생각도 못한 사이, 황 객주가 다가와서 화영을 꼭 끌어안았다. 이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황 객주는 객잔 문을 걸어 잠그고 금일휴업 팻말을 문밖에 내걸었다. 그리고 객잔 내에 묵고 있는 모든 무림인들에게 대면을 요청했다. 물론, 화영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 주고 비밀통로로 내보낸 후였다.
지난번 일로 공이라면 공을 세운 허승찬이 근무태만의 이유로 징계를 받는 것을 보고 다른 문파의 제자들도 기합이 바짝 들었기에 이번만큼은 쉽게 화영을 발견할 수 없을 터였다.
각 파에 한 명씩, 그 문파를 대표할 수 있는 자들만이 식당으로 모였다. 소소객잔이 워낙 소규모 객잔이다 보니 이들 모두를 한 번에 수용할 만한 방이 없는 것이다. 멀리서 천리지청술 따위를 펼치는 것이라면 몰라도 관계자 이외의 사람이 근처를 왔다 갔다 하거나 엿듣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구파와 일방, 그리고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모이자 가만히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던 황 객주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오시게 한 것은 화영 때문입니다.”
꿀꺽.
이제는 식당 내에 있는 무림인 모두가 화영이라는 말만 나와도 긴장해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일종의 조건 반사랄까?
“저는 여러분이 이곳에 머물면서 떠나시지 않는 이유가 화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커험!”
“크흠!”
들통 난 게 무안한지 괜한 헛기침이 식당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황 객주가 다시 입을 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잡음은 사라졌다.
“모두가 화영을 데려가고 싶어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영은 제 손자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는 않았지만 제겐 모든 것이죠. 저에게 화영과 이 객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전 주저 없이 화영을 택할 겁니다.”
그 말에 목을 길게 빼고 경청하던 무림인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 말은 ‘난 화영을 보낼 생각이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해라’라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한 심기를 직접 얼굴에 드러낼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화영이 보통 아이들과 똑같은, 평범한 아이라 말해도 믿지 않으시겠지요?”
잠시 침묵하던 황 객주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성격 급한 황보세가의 가주, 황보장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그 능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으니 그 말을 믿을 순 없습니다.”
“허허, 그 아이의 능력이 무에 그렇게 대단하다고들 이러는 겐지…….”
황보장천의 대답에 황 객주는 또 한 번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늘을 가르고 산을 쪼갠다는 무림인들이 어찌 그 아이의 영적인 능력에 이렇게 목을 매는 건지……. 허허!’
그러나 황 객주의 생각과는 달리 무림인들은 속으로 무공에 대해 무지한 황 객주를 비웃고 있었다.
“그건 객주님이 모르셔서 하는 말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그 누구보다 대단합니다. 그분이 저희의 손을 들어주신다면 다시 한 번 정사대전을 벌인다 해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습니다.”
무림에 대해 무지한 황 객주지만 정사대전에 대해서만큼은 아는 바가 있었다. 일반 문파끼리의 싸움과는 달리 정사대전은 전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물론, 황실에까지 영향을 미친 대사건이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화영만 있으면 그 처절했던 정사대전을 다시 벌여도 쉽게 승리할 수 있다니? 황 객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 마교가 강했던 이유는 힘을 최우선시하는 강자존의 법칙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종교 때문이라 했다. 그렇다면 정파에서도 화영을 앞세워 종교적인 힘을 끌어내려는 건가? 화영을 마교의 신녀와 동일시시켜서?’
무림인들 중에는 부적 등을 사용해서 요상한 술법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고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자신은 모르지만 그런 자들이라면 화영이 가진 영적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화영이 선택된 것이 아닐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황 객주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했다.
“화영이 떠난다면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게 되는 겁니까?”
“물론 높은 위치에 서게 됩니다. 각 파의 존장 이상의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제갈추가 황 객주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답변을 했다. 한 문파의, 그것도 정파의 거대 세력들의 존장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이 말에서 황 객주는 자신의 짐작에 확신을 가졌다.
“한데, 꼭 그 능력이 필요한 겁니까? 정사대전을 벌이지 않아도, 평화롭게 잘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사대전 이후, ‘그 일’까지 있은 후에 강호는 큰 분란 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매일같이 일촉즉발의 순간을 지나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간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어떤 사악한 계획을 가지고 십만대산을 내려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게 다 지금 정파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파의 힘이 마교보다 우위에 섰다면 삼룡이와 같은 자들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일반인들이 사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사파의 인물들은 성정이 불같고 악독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람들의 목을 친다는 말은 들어 보셨겠지요?”
제갈추는 표정과 억양에 변화를 줘 가면서 회유와 위협을 동시에 했다. 그 표정과 눈빛, 목소리가 어찌나 섬뜩하던지 황 객주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어루만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여전히 제갈추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럼, 몇 가지 약속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약속이요? 물론 해 드려야죠. 저희의 능력이 닿는 한 무슨 일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걸렸다!’라고 생각됐는지 제갈추를 비롯한 무림인들의 눈에 빛이 번득였다.
“첫째, 화영의 거취는 화영이 결정하게 해 주십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누가 있어 감히 그분을 억지로 끌고 가겠습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어차피 힘으로 끌고 갈 수 있지 않을뿐더러 서로의 주장 때문에 어느 한 곳으로 의견이 조율되긴 불가능했으니까.
“둘째,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신 후에는 화영을 다시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리 하지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때라는 말이 꽤 애매한 것임을 생각하며 제갈추가 대표로 웃으며 답했다.
“셋째, 여러분 문파의 무공을 어떤 것이든 한 가지씩 화영이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음, 좋습니다.”
각 문파에는 비전 무공이라는 것이 있고 자격이 되지 않는 제자가 그것을 보면 엄벌에 처한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기에 황 객주의 말은 상당히 조심스러웠지만 제갈추는 어렵지 않게 그러마 하고 답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꼭두각시처럼 앉아 있을 텐데 그동안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의 무공을 익혔으면 하는 것이 황 객주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기실 이것 역시 그들에겐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니,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각 파의 무공을 하나씩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서 되는 게 무공이던가? 초식을 익히려면 그에 맞는 보법을 익혀야 하고, 보법을 익히려면 내공 심법도 알아야 한다. 즉, 책 한 권 가지고는 제대로 익힐 수 없는 게 무공이다. 때문에 보여 줘도 크게 손해 볼 것 없다는 계산이 나왔고 화영 같은 고수라면 비급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좀 더 높은 수준의 무공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돼도 큰 손해는 없으니 어찌 아니 수락하겠는가? 게다가 그럴 일도 없겠지만 비급을 필사하려 해도 ‘본다’라고 했으니 충분히 제지를 가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고 인상을 찌푸린 자들도 간략한 설명이 동반된 제갈추의 전음에 다시 표정을 풀었다.
“넷째, 화영이 죽거나 다치지 않게 철저히 보호해 주십시오.”
“하하! 물론입니다.”
‘그건 도리어 우리가 부탁하고 싶은 말입니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황 객주는 화영의 능력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