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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또다. 또 고한라에게 몸을 바치고 말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함께였을 뿐.
주호는 왜 자신이 한라와 뒹굴고 있는지, 누가 먼저 유혹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랑 이러고 싶었던 거야?”
“흣, 흐읏…….”
“이제 네가 원하는 걸 해 줄게.”
“하! 주호야.”
어쩌면 한라가 먼저 입 맞추며 도발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그랬을 수도 있다.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취해 마음이 맞았을 테고, 술기운을 빌어 과감해졌겠지.
그날처럼 그렇게.
“하아!”
익숙하지 않은 쾌감이 아찔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목이 타들어 갔다.
“기억에서 지워 달라는 말, 이번에는 안 통해.”
절대 그건 안 될 일이다.
또 당할 수는 없다.
그는 복수의 대상인 한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열락에 젖은 작은 얼굴을 보며 혼란스러운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건 복수를 위한 단계일 뿐이야.’
뒤끝 없이 즐기는 가벼운 만남, 언젠가 한라가 말한 원 나잇. 그런 거였다.
그렇게 결론 내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녀의 마음을 한번 떠봐야겠지만…….
주호는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말했다.
“고한라, 확실히 해 두고 싶어. 나랑 이래도 괜찮아? 남자가 싫다며. 앞으로 남자랑 엮일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
제 품에 안긴 한라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얀 살결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잇자국 덕에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다.
“흣! 모르겠…….”
“한라야, 나도 남자야. 너 지금 남자랑 뭐 하고 있는지 알려 줘?”
짓궂은 손길에 한라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아, 주호야. 사, 사실은…….”
한라가 무슨 말을 했지만 신음에 파묻혀 알아듣지 못했다.
“날 좋아하면 차라리 고백을 해. 멀쩡한 남자, 짐승 만들지 말고.”
주호는 애써 여유 있는 척, 경험이 많은 척 느긋하게 말하며 더 빠르고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한라는 끝내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달뜬 얼굴로 정신없이 흔들릴 뿐.
“내가 그럴, 흣……. 그러고 싶……. 흐읏!”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구나.
거칠게 내쉬는 뜨거운 숨결, 음심을 자극하는 여린 목소리에 주호는 몸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었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흥분해서 그런 건지 불덩어리가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복수고 뭐고. 차라리 이대로 녹아 없어져 버릴까? 그러면 홀가분해질 텐데.
“왜 이렇게 날 흔드는지 모르겠어.”
이러면 안 되는데. 고한라 때문에 또 힘들어지는 건 자존심 상하는데.
애타게 해야 하는 건 저인데. 제게 푹 빠지게 해서 한라의 마음을 힘들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자꾸만 그녀에게 휩쓸리고만 있으니…….
“내가 이렇게 해 주니까 좋지? 한라야, 말해 봐.”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한라가 반응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하!”
하얀 살결에 영역 표시를 하듯 입을 맞추자 그녀가 자지러졌다. 쾌감이 묻어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주, 주호야. 하아…….”
그동안 한라를 유혹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에게 고백받지 못했다.
“흣.”
주호는 거칠게 터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나랑은 이래도 되지만, 다른 놈은 절대 안 돼. 약속해, 앞으로 이런 건 나하고만 하겠다고.”
“하아……. 으응.”
“네 인생에 남자는 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해 줘.”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이 당황스러웠다.
* * *
엔퍼스 직원 열 명을 태운 미니버스가 샌프란시스코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준기 씨, 하늘 파란 것 좀 봐.”
1년 만에 다시 찾은 샌프란시스코.
버스 창가에 앉은 한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아, 미국 구름은 저렇게 생겼구나. 왠지 좀 달라 보이는데요?”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준기는 미국이 처음이라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선배님은 좋으시겠어요. 우수 사원으로 뽑히신 게 벌써 두 번째잖아요.”
“그럼 좋지. 미국 하늘을 보면 없던 애사심이 절로 생긴다니까.”
국내 최대 규모의 게임회사 엔퍼스에서는 매년 여덟 명을 선발해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에 보내 주었다.
한라는 엔퍼스의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에 참관하게 되었다.
2년 연속은 선발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마 한라의 팀에서 론칭한 게임이 대박을 터뜨렸기에 가산점을 받았겠지.
“선배님, 오늘 일정표에 관광지 여러 곳이 적혀 있던데, 피곤하지 않을까요?”
“노노. 오늘은 억지로라도 몸을 굴리는 게 좋아. 지칠 때까지 관광하고 호텔 들어가서 바로 자면 시차 적응하기가 수월하거든.”
“아하, 역시 유경험자!”
한라는 대답 대신 싱긋 웃으며 창문에 기댔다.
언젠가 이곳에서 꼭 한 달쯤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참! 작년에 왔던 팀원한테 들었는데요. 유명한 개발자들과 화장실에서 마주치기도 하나 봐요. 화장실 밖에서 기다렸다가 사인 요청해도 괜찮겠죠?”
“준기 씨, 꿈은 크게 꾸자. GDC 기간에는 저녁마다 파티도 열린다니까? 파티에서 만나 같이 어울려야지. 겨우 사인으로 만족하려고?”
“그냥 전 선배님만 따라 다닐래요.”
“알았어. 대신 적당한 거리 유지!”
작년과 똑같은 코스로 관광을 하고 행사장 근처 호텔에 체크인 했다.
숙소는 2인 1실로, 이번 우수 사원 중에 여자는 총 세 명이었다.
그중 직급이 가장 높은 한라는 싱글 룸을 배정받았다.
* * *
미국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선배님! 완전 빅뉴스요!”
조식 레스토랑에 조금 늦게 나타난 준기가 한라의 맞은편에 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뭔데? 준기 씨, 일단 음식부터 담아 와. 빨리 나가야 하니까 먹으면서 얘기하자.”
“대박, 저 엘리베이터에서 신주호 씨 봤어요.”
“……어? 누구?”
“지니어스 버드 개발자요. 선배님이랑 과학고 동기라면서요?”
“응, 근데 안 친했어.”
신주호도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같은 호텔이라니.
혹시라도 마주치면 어쩌지?
아는 체를 해 볼까?
“아쉽네요. 선배님도 이따 신주호 씨 강연 들으실 거죠?”
“그럼 그건 꼭 들어야지.”
천재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리는 신주호는 5년 연속으로 ‘1인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한다고 했다.
한라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의 강연을 들을 예정이었다.
그녀는 신주호의 팬이었다. 남자 신주호가 아니라 게임 개발자로서의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절교한 거나 다름없는 동창이지만,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아 왔다. 그녀만의 일방적인 마음이었다.
업계에서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에 그의 소식은 꾸준히 들을 수 있었다.
기사를 읽다 보면 주호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게임 개발과 관련된 내용뿐이지만.
‘마주치면 많이 어색하겠지?’
그래도 한 번쯤은 인사라도 해 보고 싶은데. 프로그래머 신주호는 한라를 비롯한 많은 개발자의 롤 모델이니까.
GDC 행사장 입구에서 엔퍼스 한국 직원들을 담당할 미국 법인의 직원을 만났다.
담당자의 도움으로 입장 등록을 마친 그들은 하나둘 행사장 안으로 흩어졌다.
“준기 씨는 왜 안 가? 듣고 싶은 강연 많다며?”
다들 사라졌는데 준기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어에 자신이 없다더니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선배님은 어떤 강연 들으실 거예요? 체험은요?”
“비밀.”
일단 작년처럼 그를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무의 방해도 안 받고 조용히.
“전 듣고 싶은 것도, 체험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고민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마. 앉아서 듣기만 하는 건데도 오후 되면 엄청 피곤하더라.”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외국어는 외국어였다.
머릿속에서 한 번 걸러서 이해해야 하기에 강의 몇 개만 들어도 지쳤다.
“아참, 준기 씨. 점심은 행사장 안에서 샌드위치 사 먹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편하더라.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자. 괜찮지?”
준기는 대학교 후배라 회사의 다른 후배들보다는 대하기 편했다.
하지만 미국까지 와서 계속 붙어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와 얽힌 소문은 예나 지금이나 질색이었다.
시간 맞춰 찾아간 강연장은 입장이 한창이었다. 주호의 1인 게임 개발 노하우에 관한 강연은 올해도 인기였다.
“다행이다. 들어갈 수는 있겠네.”
장난삼아 만들었던 첫 게임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그는 게임 업계 종사자라면, 아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다 알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몇 번이나 큰 성공을 거둔 주호는 1인 개발의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다.
‘어디 앉았지? 안 보이는데.’
한라는 준기 없이 혼자 조용히 듣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맞춰 왔다. 그런데 하마터면 인원이 다 차서 입장하지 못할 뻔했다.
“쟤는 하나도 안 변했네.”
예전에도, 그리고 작년에도 멋졌는데, 올해도 여전했다.
강연장 출입문이 닫혔다.
한양 과학 고등학교의 이름난 수재였던 신주호.
그가 한라의 후회스러운 추억을 잔뜩 묻힌 채 마이크 앞에 섰다.
주호는 수재들만 모이는 과학 고등학교에서도 유난히 잘난 학생이었다.
재학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 후에는 미국 명문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글로벌하게 노는구나. 부럽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한라 역시 과학고 조기 졸업 후 국내 최고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주호 앞에서 성적 내세우긴 민망할지언정, 그녀도 공부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요즘에는 퍼즐 게임 만든다던데. 스크린 샷 공개할 건가?’
게임 매거진과 동종 업계 커뮤니티를 통해 꾸준히 그의 소식을 접해 온 덕분에 한라는 올해도 주호의 강연을 듣게 된 것이었다.
또다. 또 고한라에게 몸을 바치고 말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함께였을 뿐.
주호는 왜 자신이 한라와 뒹굴고 있는지, 누가 먼저 유혹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랑 이러고 싶었던 거야?”
“흣, 흐읏…….”
“이제 네가 원하는 걸 해 줄게.”
“하! 주호야.”
어쩌면 한라가 먼저 입 맞추며 도발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그랬을 수도 있다.
끈적끈적한 분위기에 취해 마음이 맞았을 테고, 술기운을 빌어 과감해졌겠지.
그날처럼 그렇게.
“하아!”
익숙하지 않은 쾌감이 아찔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목이 타들어 갔다.
“기억에서 지워 달라는 말, 이번에는 안 통해.”
절대 그건 안 될 일이다.
또 당할 수는 없다.
그는 복수의 대상인 한라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열락에 젖은 작은 얼굴을 보며 혼란스러운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이건 복수를 위한 단계일 뿐이야.’
뒤끝 없이 즐기는 가벼운 만남, 언젠가 한라가 말한 원 나잇. 그런 거였다.
그렇게 결론 내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녀의 마음을 한번 떠봐야겠지만…….
주호는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말했다.
“고한라, 확실히 해 두고 싶어. 나랑 이래도 괜찮아? 남자가 싫다며. 앞으로 남자랑 엮일 일은 없을 거라고 했잖아.”
제 품에 안긴 한라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얀 살결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잇자국 덕에 우쭐한 마음마저 들었다.
“흣! 모르겠…….”
“한라야, 나도 남자야. 너 지금 남자랑 뭐 하고 있는지 알려 줘?”
짓궂은 손길에 한라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아, 주호야. 사, 사실은…….”
한라가 무슨 말을 했지만 신음에 파묻혀 알아듣지 못했다.
“날 좋아하면 차라리 고백을 해. 멀쩡한 남자, 짐승 만들지 말고.”
주호는 애써 여유 있는 척, 경험이 많은 척 느긋하게 말하며 더 빠르고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한라는 끝내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달뜬 얼굴로 정신없이 흔들릴 뿐.
“내가 그럴, 흣……. 그러고 싶……. 흐읏!”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구나.
거칠게 내쉬는 뜨거운 숨결, 음심을 자극하는 여린 목소리에 주호는 몸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 없었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흥분해서 그런 건지 불덩어리가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복수고 뭐고. 차라리 이대로 녹아 없어져 버릴까? 그러면 홀가분해질 텐데.
“왜 이렇게 날 흔드는지 모르겠어.”
이러면 안 되는데. 고한라 때문에 또 힘들어지는 건 자존심 상하는데.
애타게 해야 하는 건 저인데. 제게 푹 빠지게 해서 한라의 마음을 힘들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자꾸만 그녀에게 휩쓸리고만 있으니…….
“내가 이렇게 해 주니까 좋지? 한라야, 말해 봐.”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한라가 반응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하!”
하얀 살결에 영역 표시를 하듯 입을 맞추자 그녀가 자지러졌다. 쾌감이 묻어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주, 주호야. 하아…….”
그동안 한라를 유혹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그런데도 아직 그녀에게 고백받지 못했다.
“흣.”
주호는 거칠게 터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나랑은 이래도 되지만, 다른 놈은 절대 안 돼. 약속해, 앞으로 이런 건 나하고만 하겠다고.”
“하아……. 으응.”
“네 인생에 남자는 나밖에 없을 거라고 말해 줘.”
그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이 당황스러웠다.
* * *
엔퍼스 직원 열 명을 태운 미니버스가 샌프란시스코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준기 씨, 하늘 파란 것 좀 봐.”
1년 만에 다시 찾은 샌프란시스코.
버스 창가에 앉은 한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아, 미국 구름은 저렇게 생겼구나. 왠지 좀 달라 보이는데요?”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준기는 미국이 처음이라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선배님은 좋으시겠어요. 우수 사원으로 뽑히신 게 벌써 두 번째잖아요.”
“그럼 좋지. 미국 하늘을 보면 없던 애사심이 절로 생긴다니까.”
국내 최대 규모의 게임회사 엔퍼스에서는 매년 여덟 명을 선발해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에 보내 주었다.
한라는 엔퍼스의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에 참관하게 되었다.
2년 연속은 선발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마 한라의 팀에서 론칭한 게임이 대박을 터뜨렸기에 가산점을 받았겠지.
“선배님, 오늘 일정표에 관광지 여러 곳이 적혀 있던데, 피곤하지 않을까요?”
“노노. 오늘은 억지로라도 몸을 굴리는 게 좋아. 지칠 때까지 관광하고 호텔 들어가서 바로 자면 시차 적응하기가 수월하거든.”
“아하, 역시 유경험자!”
한라는 대답 대신 싱긋 웃으며 창문에 기댔다.
언젠가 이곳에서 꼭 한 달쯤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참! 작년에 왔던 팀원한테 들었는데요. 유명한 개발자들과 화장실에서 마주치기도 하나 봐요. 화장실 밖에서 기다렸다가 사인 요청해도 괜찮겠죠?”
“준기 씨, 꿈은 크게 꾸자. GDC 기간에는 저녁마다 파티도 열린다니까? 파티에서 만나 같이 어울려야지. 겨우 사인으로 만족하려고?”
“그냥 전 선배님만 따라 다닐래요.”
“알았어. 대신 적당한 거리 유지!”
작년과 똑같은 코스로 관광을 하고 행사장 근처 호텔에 체크인 했다.
숙소는 2인 1실로, 이번 우수 사원 중에 여자는 총 세 명이었다.
그중 직급이 가장 높은 한라는 싱글 룸을 배정받았다.
* * *
미국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선배님! 완전 빅뉴스요!”
조식 레스토랑에 조금 늦게 나타난 준기가 한라의 맞은편에 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뭔데? 준기 씨, 일단 음식부터 담아 와. 빨리 나가야 하니까 먹으면서 얘기하자.”
“대박, 저 엘리베이터에서 신주호 씨 봤어요.”
“……어? 누구?”
“지니어스 버드 개발자요. 선배님이랑 과학고 동기라면서요?”
“응, 근데 안 친했어.”
신주호도 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같은 호텔이라니.
혹시라도 마주치면 어쩌지?
아는 체를 해 볼까?
“아쉽네요. 선배님도 이따 신주호 씨 강연 들으실 거죠?”
“그럼 그건 꼭 들어야지.”
천재 프로그래머로 이름을 날리는 신주호는 5년 연속으로 ‘1인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한다고 했다.
한라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의 강연을 들을 예정이었다.
그녀는 신주호의 팬이었다. 남자 신주호가 아니라 게임 개발자로서의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절교한 거나 다름없는 동창이지만,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아 왔다. 그녀만의 일방적인 마음이었다.
업계에서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에 그의 소식은 꾸준히 들을 수 있었다.
기사를 읽다 보면 주호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다. 물론 게임 개발과 관련된 내용뿐이지만.
‘마주치면 많이 어색하겠지?’
그래도 한 번쯤은 인사라도 해 보고 싶은데. 프로그래머 신주호는 한라를 비롯한 많은 개발자의 롤 모델이니까.
GDC 행사장 입구에서 엔퍼스 한국 직원들을 담당할 미국 법인의 직원을 만났다.
담당자의 도움으로 입장 등록을 마친 그들은 하나둘 행사장 안으로 흩어졌다.
“준기 씨는 왜 안 가? 듣고 싶은 강연 많다며?”
다들 사라졌는데 준기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영어에 자신이 없다더니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선배님은 어떤 강연 들으실 거예요? 체험은요?”
“비밀.”
일단 작년처럼 그를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무의 방해도 안 받고 조용히.
“전 듣고 싶은 것도, 체험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고민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마. 앉아서 듣기만 하는 건데도 오후 되면 엄청 피곤하더라.”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외국어는 외국어였다.
머릿속에서 한 번 걸러서 이해해야 하기에 강의 몇 개만 들어도 지쳤다.
“아참, 준기 씨. 점심은 행사장 안에서 샌드위치 사 먹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편하더라. 점심은 각자 알아서 먹자. 괜찮지?”
준기는 대학교 후배라 회사의 다른 후배들보다는 대하기 편했다.
하지만 미국까지 와서 계속 붙어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와 얽힌 소문은 예나 지금이나 질색이었다.
시간 맞춰 찾아간 강연장은 입장이 한창이었다. 주호의 1인 게임 개발 노하우에 관한 강연은 올해도 인기였다.
“다행이다. 들어갈 수는 있겠네.”
장난삼아 만들었던 첫 게임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그는 게임 업계 종사자라면, 아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다 알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몇 번이나 큰 성공을 거둔 주호는 1인 개발의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다.
‘어디 앉았지? 안 보이는데.’
한라는 준기 없이 혼자 조용히 듣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맞춰 왔다. 그런데 하마터면 인원이 다 차서 입장하지 못할 뻔했다.
“쟤는 하나도 안 변했네.”
예전에도, 그리고 작년에도 멋졌는데, 올해도 여전했다.
강연장 출입문이 닫혔다.
한양 과학 고등학교의 이름난 수재였던 신주호.
그가 한라의 후회스러운 추억을 잔뜩 묻힌 채 마이크 앞에 섰다.
주호는 수재들만 모이는 과학 고등학교에서도 유난히 잘난 학생이었다.
재학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졸업 후에는 미국 명문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글로벌하게 노는구나. 부럽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한라 역시 과학고 조기 졸업 후 국내 최고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주호 앞에서 성적 내세우긴 민망할지언정, 그녀도 공부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요즘에는 퍼즐 게임 만든다던데. 스크린 샷 공개할 건가?’
게임 매거진과 동종 업계 커뮤니티를 통해 꾸준히 그의 소식을 접해 온 덕분에 한라는 올해도 주호의 강연을 듣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