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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90cm에 가까운 큰 키와 잘생긴 얼굴 덕분에 주호는 체격 좋고 머리 작은 백인 남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운동선수처럼 어깨가 벌어지고 골격이 큰데도 비율이 좋아 몸이 날렵해 보였다.

“……저 몸매, 저 얼굴에 왜 슈트를 안 입어? 이런 날 쫙 빼입으면 장난 아닐 텐데.”

캐주얼한 차림도 근사하지만, 그래도 왠지 좀 아쉬웠다.

뭐, 어차피 남의 남자일 테니 뭘 입어도 상관없으려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강연장에 울렸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강연장에 모인 수백 명의 귀를 사로잡았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미소 띤 얼굴에서 성공한 남자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한라는 개발 노하우를 발표하는 그림 같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기분 탓일 거다. 주호의 시선이 자꾸만 한라가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새 강연이 끝나고 질답 시간이 되었다. 조용했던 강연장에 활기가 넘쳤다.

주호를 향한 관심이 어찌나 뜨거운지, 질문하겠다고 손을 드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누굴 먼저 지목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가 안쓰러울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나 대신 누가 일정 관리 어떻게 하는지 좀 물어봐 주라.”

한라는 준기랑 같이 앉지 않은 걸 잠시 후회했다. 준기가 있었다면 궁금한 걸 대신 물어봐 달라 했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손 들고 질문하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그런데 바로 그때 수백 개의 눈이 한라가 있는 쪽을 향했다.

‘어? 안 돼. 제발!’

한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용히 절규했다.

하필 한라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인도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고, 선택받은 것이다.

“아우, 진짜!”

그렇게 좋을까? 남자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한라는 혹시라도 주호의 눈에 띌까 봐 바닥에 물건을 떨어뜨린 척 몸을 숙였다.

‘제발. 질문은 짧게 하고 앉아 주세요.’

속으로 간절히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인도 남자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유머까지 섞어 가며 어찌나 길게 말하는지.

어쩔 수 없이 허리를 펴고 앉아 고개만 숙였다. 계속 몸을 숙이고 있는 게 더 튈 테니까.

한라는 괜히 심각한 얼굴로 메모하는 척하며 주호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길 바랐다.

못 봤겠지? 만약 봤더라도 졸업한 지 9년 만이니 긴가민가하려나?

얼굴에 손대지는 않았지만, 이미지는 다를 텐데.

만약에라도 주호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났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한라는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듣고 싶은 다음 강연까지는 20분 정도 여유가 있지만 하고 싶은 게 많아 빠르게 움직였다.

“작년엔 기념품 파는 장소가 이쪽이었는데.”

GDC 기념 티셔츠를 사고 싶어 주위를 살피는데 작년보다 입장객이 많은지 너무 복잡했다.

그런데 그때 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후, 선배님 걸음 엄청 빠르시네요. 겨우 찾았어요.”

“날 왜? 뭐 그건 그렇고, GDC 첫 강연을 들은 소감이 어때?”

“신주호 씨야 완전 대단했죠. 근데 선배님, 아까 뭐 하신 거예요?”

“나? 내가 뭘?”

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기를 가만히 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준기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까 질문 시간에요. 선배님 인도 프로그래머 옆에 계셨잖아요.”

“어. 맞아. 그렇긴 한데……. 준기 씨, 자리가 어디였길래 내가 보였어?”

“저 맨 앞줄이요.”

아뿔싸. 맨 앞에서도 보였구나. 그럼 주호도 봤겠네.

서 있었으니 더 잘 보였겠지?

해맑은 준기와는 다르게 한라의 얼굴에 낭패가 번졌다.



* * *



오후에는 핀란드 개발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중국 마케터의 강연을 들었다.

중간중간 비는 시간에는 다른 회사의 게임 체험도 하고 기념품도 샀다.

오늘의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엔퍼스 직원들은 입구에서 모였다.

저녁 식사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파트장님, 마음 변하시면 메시지 보내 주세요. 대리 구매 해 드릴게요.”

“아녜요. 어서 가서 득템 하세요.”

올해도 다 함께 저녁 먹기는 어렵겠구나.

작년에도 이랬는데, 멤버가 달라져도 분위기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다들 인맥 쌓을 수 있는 파티보다는 근처 아울렛에 가고 싶어 했다. 그녀와 준기를 제외한 모두가 말이다.

‘아깝다.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유명한 개발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애프터 파티를 포기하다니.

한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참, 자기 전에 강연에 대해 간단히 메모해 두시는 거 잊지 마세요.”

한라는 택시 잡는 것을 도와주며 행사 참관 보고서 작성을 당부했다.

“그건 회사 복귀해서 해도 되는 거 아녜요?”

누군가의 삐딱한 말에도 한라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날그날 정리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개고생 해요. 제가 산증인이거든요. 한국 땅 밟는 순간 생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문서화시키려니 은근히 분량도 많고.”

“아하, 네네. 간단히라도 정리해 둘게요. 파트장님, 내일 파티 얘기 해 주세요. 파티라니, 체력 좋으신 거 진짜 부러워요.”

사실 그녀는 쌩쌩한 척하는 거였다. 너무 피곤해서 파티고 보고서고 다 집어치우고 호텔 침대에 파묻혀 쉬고 싶었다.

‘그럼 안 돼. 힘내야지.’

회사에서 큰 비용을 들여 기회를 주었으니 최대한 많이 보고 느끼고 싶을 뿐인데.

한라는 자판기에서 콜라 두 캔을 뽑아 준기에게 하나 건넸다.

각자 하나씩 벌컥벌컥 마신 후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준기 씨, 진짜 아울렛 안 가도 돼? 거기 큰 마트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수입 안 하는 특이한 맛 스팸 사고 싶다며?”

“쇼핑은 다음에도 할 수 있지만 이런 파티는 다음이라는 게 없잖아요. 제가 언제 또 다른 나라 개발자들과 어울려 보겠어요.”

덤덤하게 대답한 준기는 샌프란시스코의 예쁜 노을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오. 자랑스럽다, 후배님!”

“근데요, 선배님. 진짜 운동화 신고 가도 괜찮을까요?”

그래픽 카드를 만드는 업체에서 주최하는 파티였다.

종일 입었던 옷과 신발 차림 그대로 행사장 근처에 있는 펍을 찾아가는 중이었고.

“파티라는 단어가 왠지 거창하게 들리지?”

“네.”

“별거 없더라. 다들 행사 끝나고 바로 오는 거라 우리 정도면 완전 단정할걸?”

잔뜩 멋을 내고 고상하게 즐기는 파티가 아니었다.

탄산음료나 맥주를 마시며 편안하게 어울리고 대화하는 자리로, 운이 좋으면 유명한 개발자와 이메일 주소를 교환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임이랄까?

한라의 말에 준기는 안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와! 이런 분위기였구나.”

“그렇게 좋아?”

펍으로 들어서자 준기가 눈을 크게 뜨고 함박 웃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어로 떠드는 분위기를 보고 주눅이 든 준기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말도 버벅대면서 괜히 파티 욕심부렸나 봐요. 선배님은 혼자 다니시는 게 편하실 텐데 죄송해요.”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 데다가 누가 통역해 주기도 불편한 상황인 건 사실이었다.

“에이. 준기 씨 영어 꽤 하던데? 말하는 것만 서툴 뿐이지 다 알아듣잖아.”

한라는 준기의 팔을 툭 치며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진짜 괜찮을까요? 저 이렇게 떨리는 거 오랜만이에요.”

“긴장되면 일단 가서 한 바퀴 쓱 돌아보고 와. 난 여기 있을게.”

“선배님, 그럼 저 먼저 둘러보고 올게요.”

“그래. 사람들한테 말도 걸고 친한 척도 해 봐.”

혼자 남은 한라는 다른 나라 개발자들과 친목을 쌓고 싶었다.

그녀는 탄산음료를 손에 들고 캐나다 여자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잠시 대화를 나눈 후 SNS 친구 신청도 했다.

나중에 따로 연락하기로 하고 다른 쪽으로 가려는데 그녀에게 다가오는 준기가 보였다.

‘용케도 찾았네.’

기둥 뒤에 있어서 잘 안 보일 텐데.

“선배님, 굿 뉴스!”

“뭔데?”

“이제 올 거예요.”

“누가?”

“선배님 고등학교 친구요.”

환하게 웃으며 누군가를 향해 손 흔드는 준기.

그리고 그 시선 끝에 닿은 키 큰 동양인.

한라는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저 남자는…….”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도 없지만.

“제가 같이 놀자고 꼬셨어요. 선배님 얘기 하니까 반가워하던데요? 잘했죠?”

한라의 놀란 얼굴이 어지간히도 뿌듯한 모양이었다. 준기가 신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반가워……했다고?”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한라는 어느새 가까이 선 주호를 보았다. 어색해 죽을 것 같아 괜히 목덜미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미치겠네.’

다른 사람 앞에서 투명 인간 취급 당하긴 싫은데. 예전처럼 무시당하면 어쩌지?

“반갑다, 고한라.”

그런데 놀랍게도 주호가 커다란 손을 쓱 내밀며 먼저 인사했다.

“……신주호, 오랜만이다.”

한라는 얼떨결에 악수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손이 커다란 손에 붙들려 공중에서 흔들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성숙한 남자의 체취에 기분이 묘해졌다.

“선배님, 우리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따로 마시기로 했어요. 좋으시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준기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주호와 한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 해맑은 청년아, 같은 학교 나오면 다 친할 거라 생각한 거니?

“아, 어…….”

작년에도 올해도 주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행사장에서 요리조리 숨어 다녔다.

오래전 일 때문에 미안하고 어색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업계 최고인 실력에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마주치기 싫었던 건데, 인사로도 모자라 술까지 마시러 가게 되었다니.

이래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