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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근처 레스토랑과 술집은 모두 만석이었다.

주호의 제안으로 지금 머무는 호텔 루프톱 바에 갔다. 술값이 비싼 곳이어서인지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한라야, 너 예전에는 로봇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어쩌다가 게임 회사에 들어간 거야?”

“그러는 너님은요?”



주호의 옆에 붙어 앉아 깐죽거린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리고 또.



“사실 작년에도 강연장에서 너 봤어. 그때 참 반갑더라.”



생각지도 못한 주호의 말과.



“나 있지. 너 나오는 기사, 다 찾아본다? 너 사진발도 잘 받아서 보는 재미가 있거든.”



팬심을 고백하고 쑥스러워 히죽히죽 웃은 기억도 나는데.

아니다. 그가 너무 빤히 쳐다봐서 그만 보라고 눈을 가렸던가? 눈 가렸던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바지 지퍼를 내리겠다며 낑낑댔는데, 그건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다.

물가 비싼 미국답게 술값이 제법 많이 나왔다. 주호는 화끈하게 카드를 긁었고, 셋이 사이좋게 호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 층으로 갔다.

일단, 혼자 똑바로 걷지도 못할 만큼 취한 준기를 룸에 데려다주었다.

“그다음엔……. 맞다. 맥주!”

딱 한 캔만 더 마시자고 마음이 통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누군가의 방으로 간 것 같은데…….

그 후의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미치겠네, 진짜.”

한라는 옆에서 곤히 잠든 주호를 보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지난밤, 마음만 통한 게 아니라 몸까지 하나가 되었으니.

대체 신주호가 왜 제 침대에서 자느냔 말이다. 아, 아니구나. 넓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보니 여긴 주호의 방이었다.

한라는 왜 자신이 주호의 방에서 잤는지 몰랐다. 기억이 흐릿해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

침대 옆 테이블에 어질러져 있는 술병을 보니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그의 방은 몇 단계 더 비싼 등급의 객실답게 미니바에 비치된 것들이 많았다.

한라는 ‘무료’ 라벨이 붙은 캔 맥주를 보고 환호했다. 주호는 그녀의 격한 반응을 즐기며 미니바를 전부 접수해 버렸다.

“둘이서 얼마나 먹은 거야?”

캔에 든 탄산음료부터 유리병에 든 과일 주스, 양주와 생수는 물론이고 과자와 초콜릿까지.

“돌겠네, 진짜.”

미니바 때문이다. 무료 캔 맥주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사귀지도 않는 남자와 이럴 수 있지?’

열여덟. 한라의 마음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들쑤셔 놓던 신주호.

한라는 9년 만에 만난 그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얘 깨워야 해? 어떻게 깨우지?”

잠든 그에게 입을 맞추면 눈을 뜨려나?

눈을 뜬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한라는 주호가 눈떴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해 보았다.

어색해하며 몸을 가리기 바쁠까?

‘아니야. 능글맞게 한 번 더 하자고 덤빌 거야.’

밤새 하고도 또 하자고 덤볐던 것 같은데.

그는 미국에 오래 살았으니 어쩌면 개방적일지도 모른다.

‘종종 이렇게 논다며 쿨하게 말할지도 몰라!’

조금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 주면 마음 편할 텐데.

“이제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한라는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주호의 벗은 몸 위에 슬그머니 덮어 주었다.

“주호야, 난 사랑이 없는 관계는 꿈에서도 싫거든. 아니, 남자라면 지긋지긋해. 근데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어. 진짜 말도 안 돼.”

그가 깊이 잠든 걸 알지만, 혹시라도 깰까 봐 속삭이듯 말했다.

“신주호, 넌 멋있고 능력 있으니까 화끈한 서양 언니들이랑 글로벌하게 즐겨. 난 남자랑 엮일 생각 절대 없어. 조용히 사라져 줄게.”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남자가 싫은 거니까 오해는 말아 줘.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급히 입은 한라는 도망치듯 룸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말은 했으니 된 거지.”

심장이 벌렁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룸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 하긴 뭘 해? 피곤해서 꿈꾼 거지. 그래, 술 섞어 마셔서 그런 거네!”

한라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크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자신을 세뇌했다.

기억이 온전치 못해 불안하지만, 주호도 과음했으니 기억하지 못할 거라 믿고 싶었다.



당장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싶었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는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뭐야, 이게. 제대로 미쳤네, 미쳤어.”

목과 얼굴은 깨끗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온몸에 불긋한 자국이 어찌나 심한지 눈뜨고 보기 힘들었다. 지난밤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만했다.

‘신주호 완전 짐승!’

그에게 물리고 빨리는 느낌이 떠올라 아찔했다.

한라는 거울에 비친 얼룩덜룩한 제 몸을 보며 크게 한숨 쉬었다.

“아니 근데, 얘도 진짜 웃기네? 뭐? 나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여자가 무서워? 그런 사람이, 날 이렇게 만들어?”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밤새 뭘 어떻게 한 거야.”

거품만 닿았는데도 쓰라렸다. 다리 사이도 불편하고 온몸이 다 쑤셨다.

한라는 엉망이 된 제 몸에 대해 생각하기 싫었다. 일부러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주호가 눈에 띄는 외모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GDC 행사장에서 그를 피해 다니기 쉬울 테니.

“나도 남자 싫은데 잘됐네. 잘난 남자는 더 싫어.”

주호는 여자가 무섭다고 하고 자신은 남자가 싫으니 잘된 일이 아닌가?

준기의 오지랖이 걱정되긴 하지만, 곧 한국으로 돌아가면 끝일 테니 마음이 놓였다.



* * *



오늘도 조식을 먹고 다 함께 모여 GDC 행사장에 가기로 했다.



<선배님, 자리 맡아 놨어요. 빨리 내려오세요.>

<땡큐. 가는 중.>



준기의 메시지에 한라는 급히 조식 레스토랑으로 갔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일행을 찾았다.

그런데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엔퍼스 사람들 틈에 있었다.

“신주호가 왜 저기 있어?”

준기와 다른 팀 남자 직원이 주호와 떠드는 게 보였다.

주호는 맞은편에 앉은 초보 개발자들의 호기심을 채워 주고 있었다.

‘나보고 신주호 옆에 앉으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한라는 잽싸게 몸을 틀어 다른 쪽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하필, 주호에게 그 모습을 걸리고 말았다.

“한라야!”

젠장.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가니 주호가 의자를 빼 주었다.

한라는 가까스로 접대용 미소를 쥐어짜며 명랑하게 인사했다.

“다들 굿모닝.”

목이 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빈 유리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주호가 생수 한 병을 새로 뜯어 물을 따라 주었다.

“속은 좀 괜찮아?”

“응…….”

“따뜻한 수프라도 갖다 줄까? 메뉴 확인해 봤는데, 여기 해장할 만한 국물은 없더라.”

‘얘가 왜 이럴까?’

한라는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구는 주호가 당황스러웠다.

“괜찮아. 나 그런 거로 해장 안 해.”

“근처 한식당에 해장 메뉴 스페셜 오더 할게. 점심은 나가서 먹자.”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근데 너는 왜 우리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

‘부담스러운데 딴 데 가서 먹지’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주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신주호 앓이’를 시작한 준기가 끼어들었다.

“혼자 드시길래 저희가 합석하자고 졸랐어요. 선배님도 좋으시죠?”

김준기, 또 헛짓했네. 한라는 과하게 사교적인 준기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역시 창가 자리가 좋네, 좋아.”

예의상이라도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일도 같이 밥 먹게 될까 봐 걱정도 되었고.

한라가 휴,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난 음식 가지러 간다. 피자 있으면 한 판 다 먹어야지.”

한라는 주호가 저를 빤히 보는 게 느껴졌지만, 옆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



접시 가득 음식을 담아 왔는데, 자리에 주호만 앉아 있었다.

단둘이 있기 싫은데……. 지난밤 일을 얘기하면 어쩌지. 조마조마했다.

주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한라는 다른 테이블을 보며 중얼댔다.

“다들 GDC 행사에 온 사람들인가. 밥을 일찍 먹네.”

“이 일대 호텔은 분위기가 다 비슷할 거야. 난 매년 오는데 올 때마다 늘 이래.”

‘매년’이라는 말이 정말로 부러웠다. 한라는 저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주호가 그녀를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얘는 뭐가 그렇게 좋을까? 주호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여 더 불안해졌다.

“한라야.”

“응.”

“우리 말인데…….”

기분 탓이겠지? 주호의 목소리가 왜 야하게 들릴까?

지난밤에도 저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우리 말인데…… 같이 씻을까?”



한라는 눈을 꽉 감았다가 뜨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신주호, 너 작년에도 이 호텔에 있었어? 여기 조식 괜찮은 거 우리 회사 총무팀에서도 아나 봐. 조식 때문에 매년 여기로 예약한다더라.”

급히 말을 돌리며 한라는 소시지를 포크로 찍어 반을 뚝 잘라 물었다.

‘왜 이렇게 자꾸 쳐다보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쩌려고!’

주호는 포크까지 내려놓고 한라의 접시만 빤히 보고 있었다. 염력으로 접시를 깨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뚫어지게.

“한라야.”

주호가 다시 불렀다.

그렇게 목소리 깔고 부르면 겁나는데. 차라리 얘기 좀 하자고 먼저 말할까?

그때 포크를 손에 쥔 한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포크가 통통한 소시지 반 토막을 달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헉!”

그 순간, 생각난 게 있었다.

소시지처럼 그걸 그렇게 물었나 봐!

‘미쳤구나, 고한라.’

기억만 떠올렸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귓불까지 뜨거워지는 느낌에 한라는 손 부채질을 했다.

붉은 소시지가 그녀의 입 안에서 몇 번 씹히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잘 잤어?”

하필 왜 지금 그런 걸 묻는 건데?

설마 소시지를 보며 같은 걸 떠올린 건 아니겠지?

귀를 막을까? 아니다. 화장실이 급한 것처럼 나가 버릴까?

“어. 나는 늘 잘 자.”

“하긴 피곤했을 거야.”

피곤하다는 말이 야한 말이었구나.

한라는 와플에 메이플 시럽이 스며드는 것을 넋 놓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