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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도서는 실제 인물, 사건, 배경, 회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1
“피해자는 술을 마신 상태로 저항할 수 없는 심신 미약 상태였습니다. 그런 피해자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것은 명백히 살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됩니다. 재판장님.”
검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겁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이주는 그런 여자의 손을 침착한 얼굴로 꼭 잡아 주었다.
“피고인 측, 변론하세요.”
“네.”
이주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의자는 지난 25년 동안, 가정 폭력에 시달려 왔습니다. 골프채로 머리를 맞아 스무 바늘을 넘게 꿰매기도 하고 깨진 소주병으로 복부를 찔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피해자에게 칼을 휘둘렀기에 명백한 살인의 의도가 있다고 하셨는데, 지난 25년 동안 피해자는 수도 없이 많은 폭력과 살해 위협을 가했습니다.”
재판장은 숙연해졌다. 이번에 이주가 맡은 사건은 25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한 아내가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잠든 사이에 칼을 휘둘러 특수상해죄로 기소된 사건의 재판이었다.
이주는 매우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남편은 술을 마셔서 저항할 상태가 아닌 심신 미약이라고 하셨죠? 그런 남편이 술을 마시고 부인에게 수시로 저지른 폭행과 악행은 대체, 어떤 상태로 정의를 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도 심신 미약이라는 단어로 인정될 수 있는 범위라고 보십니까?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인 폭력을 심신 미약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걸까요?”
검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일어섰다.
“판사님, 변호인은 본 사건과 관련 없는 주장으로 판단을 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의자는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칼을 들고 피해자에게 덮쳤습니다. 우발적 범행이 아닌 계획된 범행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도구가 어떤 것이든, 피해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명백한 살인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검사님.”
“…….”
“맨손으로 사람 죽이는 살인자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허를 찌르는 이주의 말에 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진짜 심신 미약인 사람은 25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려 온 이가 아닐까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지옥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 하나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외면해 버린 진짜 ‘피해자’는 바로 김선옥 씨입니다.”
“…….”
“또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성범 씨가 먼저 칼을 휘둘렀으며, 잠이 든 남편 손에 있던 칼을 잡고 있다가 깬 고성범 씨가 또다시 위협을 하자 방어의 목적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결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지? 특수상해죄로 기소됐는데 집행 유예를 받아 내다니! 우리 송 변호사 능력은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다니! 덕분에 우리 로펌의 명성이 아주 올라가고 있어. 언론사들도 서로 기사 내느라 바쁜데 고 사무장, 내일 중으로 보도 자료 싹 돌려!”
“그럼 월급 좀 더 올려 주세요.”
“자, 한 잔씩들 시원하게 들이켜!”
대견하다는 듯이 호탕한 목소리를 내던 박 대표가 이주의 월급 얘기에 황급히 소맥을 나누어 주었다.
변호사들이 각자 잔을 받아 들고 거침없이 들이마셨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고 재판도 이겨 기분도 좋겠다, 이주도 부담 없이 술을 들이켰다. 술이 막힘없이 넘어가고 달달했다. 재판을 이겼다는 기쁨 때문일 거였다.
역시, 누군가를 이긴다는 건 짜릿해. 늘 새로워.
“아차, 박 대표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변호사 온다고 했죠?”
상추에 고기를 싸먹고 있던 오민서 변호사가 불쑥 물어왔다.
“응. 완전 햇병아리야, 햇병아리.”
“에이, 키랑 덩치는 햇병아리가 아니시던데요?”
박 대표의 말에 사무장이 덧붙였다.
“그러지? 나는 잠깐 인사하러 들렀을 때, 의뢰인인 줄 알았어. 그것도 모델.”
“얼굴도 훤칠한 게, 다음 생에 꼭 그런 얼굴로 태어나 보고 싶어요.”
두 사람이 하는 대화에 민서가 번뜩,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나 잘생겼어요? 나이가 몇 살인데요?”
“올해, 스물여덟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스물여덟? 아휴, 어리다. 어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성격이 맞으면 아무 문제없지. 그렇지 않아? 송 변?”
갑작스러운 박 대표의 물음으로 인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주에게 쏟아졌다.
“그럼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서로 얼마나 통하느냐고 중요하지.”
영양가 없는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바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늘 눈치를 발로 차 버리면서 사는 박 대표가 말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송 변은 왜 연애 안 해?”
“일을 그렇게나 많이 주시는데,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요?”
“에이, 그건 핑계다. 아무리 바빠도 연애하는 사람들은 다 연애해. 우리 송 변이 변호사로서는 참, 훌륭하고 야무진데. 약간 그쪽으로, 아니 연애 쪽으로는 젬병인가 봐.”
“네……?”
“아니, 능력 되지 그 정도면 얼굴 되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연애를 못 하나?”
박 대표는 말을 이으며 이주의 몸을 끈적하게 살폈다.
“하하하.”
뜬금없이 터져 버린 이주의 웃음에 변호사들과 사무장은 흠칫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눈치라는 것을 늘 짓밟고 살아가는 박 대표는 이주가 어떤 상황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기업들을 주로 관리하고 있어 늘 이런 회식 자리에만 참석하는 박 대표는 아직 이주가 정확히 얼마나 더러운 성격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이주는 제 잔을 술로 또 한 번 채워 쭉 들이켠 후, 아주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박 대표님은 왜 아직도 결혼 안 하셨어요?”
“어? 나는 워낙 바쁘기도 하고…….”
“아니죠. 박 대표님도 영, 젬, 벼어어엉~ 신이라 그러신 거 아니세요? 그쪽에서는.”
“뭐 병신? 그쪽에서는?”
“아니, 벼어어엉과 신 사이 ‘이’를 분명히 말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난 못 들었는데, 자기들 들었어?”
다급한 박 대표의 물음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변호사들은 늘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주의 뒤끝이 회식 자리나 중요한 회의 때만 나타나는 박 대표보다 더 두려웠기 때문에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박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모두가 다 들은 걸 못 들으셨지? 아무래도 그쪽에 문제가 있으셔서 그런가?”
“송 변!”
“네. 제가 송이주 변호사입니다.”
흥분한 자신과는 달리, 아주 사람 약 올리듯이 여유로운 이주에 박 대표는 더욱 팔짝 뛰었다.
“뭘 그리 흥분하세요. 우리 여태 연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이주는 눈을 슬쩍 박 대표의 아래로 옮기고서는 덧붙였다.
“제가 말한 건 연애지, 그쪽을 얘기한 게 아닌데? 찔리시는 거 있으신가 봐요.”
결국, 박 대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대로 자리를 벅차고 나갔다. 고 사무장이 급하게 뒤를 따라갈 뿐 그 누구도 일어서지 않았다.
“살살해라, 송이주. 그래도 대표님이신데.”
정현이 자신의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못 말린다는 듯이 핀잔했다.
“선배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내가 이 로펌에 남아 있어 주는 게 선배에 대한 의리라는 걸 몰라?”
“알지. 알아. 인마. 그래서 미안하고. 정말 미안하다.”
뇌물을 받았다는 억울한 혐의로 검사직에서 끌려 내려오다시피 한 정현을 받아 주는 변호사 사무실은 없었다. 그때, 정현을 유일하게 써 준 사람이 지금의 박 대표였다.
그게 고마웠던 걸까, 박 대표 역시 썩 좋은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억울함이 밝혀져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도 정현은 늘 고사했다.
그리고 이주는 대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정현의 제안으로 ‘박앤서’ 로펌에 들어오게 된 거였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충분했지만 이주에게 정현은 대학을 다닐 때 잊지 못할 도움을 준 사람이었고 그런 이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옛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지 씁쓸해하는 정현의 모습이 안타까워 이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게?”
혼자 술을 따는 정현을 자신만큼 안타까워하며 바라보던 민서가 물었다.
“바람 좀 쐬러. 2차 가려면 술을 좀 깨야 할 거 아니야.”
애써 명쾌하게 그리 말하고서는 가게를 빠져 나왔다. 근처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줄 알았던 박 대표와 고 사무장은 보이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아…….”
가게 문 옆쪽에 서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갑갑했던 마음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
“야야, 노래방 가서 놀자.”
“나 돈 없는데?”
“내가 아버지 지갑 제대로 털어 왔지. 돈 따위 걱정 하지 말고 오늘 밤은 이 엉아를 즐겁게 해 줄 생각이나 해라.”
뒤에서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이주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무방비한 상태의 이주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프기보다는 놀랐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뒤를 돌았는데, 방금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던 놈들이 이주를 쳐다보며 낄낄거리면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면상들이다.
“저기요.”
이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주를 업신여기듯 위, 아래로 흘기며 노려보았다.
“뭐요.”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고 해야죠.”
어깨가 얼얼하지만, 정말 좋게 얘기했다. 하지만 이주는 금방 깨달았다. 역시, 못나고 못된 사람들에게는 절대 좋게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과? 우리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 건데? 그러게 술 처마시고 집에 가서 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어. 막고 서 있기를.”
사과 한마디만 하면 끝났을 문제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좋은 기회를 송두리째 차 버렸다.
“뭐? 자빠져 자? 길을 막아? 문은 내가 서 있던 옆에 있었는데, 벽 뚫고 나오는 초능력이라도 있나 봐.”
“아, 진짜 오늘 기분 제대로 좋았는데, 이 아줌마가 우리 기분 다 망치려고 드네.”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자신을 못 건드려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로 똘똘 뭉쳐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개념과 예의를 지키지 않아 세상의 법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을.
“네 기분만 좋았어? 내 기분도 좋았어.”
“그래서 어쩌라고.”
“실수로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념도 못 담고 사는 그 머리를 뭐 하러 달고 다녀?”
“아, 근데 이게 말끝마다 너, 야로 끝나? 기분 나쁘게……!”
남자가 팔을 위로 확 올렸다. 누군가에게 절대 주눅 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굵직한 팔뚝이 위협적이게 보여 본능적으로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그런데 뺨 위로 세게 내쳐질 거라고 생각했던 투박한 손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지. 변호사 건드려서 좋을 건, 콩밥 먹는 일밖에 없을 텐데.”
정현이라도 나온 건가? 하는 마음에 이주가 눈을 찔끔 뜨고 고개를 올렸다. 자신을 때리려 했던 이와는 달리 다부진 느낌을 하고 있는 남자.
길쭉한 다리부터 시작하여 올곧은 허리 라인, 널찍하게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곧게 뻗은 목 선. 선명하고 굴곡 없는 얼굴의 옆 라인, 얇은 쌍꺼풀의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 작위적이지 않은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이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너, 양아치?”
이주의 아는 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미간을 구기며 눈을 마주 보았다.
“나 양아치 아니에요.”
그 반항기가 가득했던 눈빛이 오버랩 되었다. 그때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지만 눈빛은 확실했다.
그 양아치……!
“아이 씨, 이거 놔!”
서로를 담고 있던 두 사람이 눈빛은 금방 떨어졌다. 이주를 때리려고 했던 남자가 크게 반항을 한 탓이었다.
남자는 저보다 얼굴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사람이 제 팔을 잡자 겁이 난 듯 보였다. 거기다가 아까 ‘변호사’라는 말에 당황한 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과해요. 변호사님께.”
그걸 읽기라도 했는지,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미, 미안합니다! 됐죠? 이제 좀 놔줘요!”
손을 놓아주자마자 남자는 일행과 함께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날쌘 돌이처럼 사라졌다.
비로소 이제 이주는 10년 만에 만난 옆집 양아치 동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얼마만이야? 완전 반갑다.”
“그러게요. 딱 10년 만이죠.”
“마지막으로 본 게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차 네 소식은 들었어. 재수해서 K대 갔다고. 지금은 졸업하고도 남았겠네. 취업은 했어?”
“그전에.”
“…….”
“내 이름은 기억해요?”
“윤서강이잖아.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 머리가 워낙 똑똑해서.”
이주는 자신의 칭찬에 야박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당당하게 제 자랑을 하는 이주를 보며 서강이 다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면 그 똑똑한 머리로 그것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겠네요?”
“뭐를?”
서강은 대답을 하는 대신 옅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의 간격이 아주 좁혀졌고 이주는 더 이상 서강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됐다.
“내가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연애해 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했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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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술을 마신 상태로 저항할 수 없는 심신 미약 상태였습니다. 그런 피해자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것은 명백히 살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됩니다. 재판장님.”
검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겁에 질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이주는 그런 여자의 손을 침착한 얼굴로 꼭 잡아 주었다.
“피고인 측, 변론하세요.”
“네.”
이주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의자는 지난 25년 동안, 가정 폭력에 시달려 왔습니다. 골프채로 머리를 맞아 스무 바늘을 넘게 꿰매기도 하고 깨진 소주병으로 복부를 찔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피해자에게 칼을 휘둘렀기에 명백한 살인의 의도가 있다고 하셨는데, 지난 25년 동안 피해자는 수도 없이 많은 폭력과 살해 위협을 가했습니다.”
재판장은 숙연해졌다. 이번에 이주가 맡은 사건은 25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한 아내가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잠든 사이에 칼을 휘둘러 특수상해죄로 기소된 사건의 재판이었다.
이주는 매우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남편은 술을 마셔서 저항할 상태가 아닌 심신 미약이라고 하셨죠? 그런 남편이 술을 마시고 부인에게 수시로 저지른 폭행과 악행은 대체, 어떤 상태로 정의를 해야 하는 걸까요? 그것도 심신 미약이라는 단어로 인정될 수 있는 범위라고 보십니까?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인 폭력을 심신 미약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걸까요?”
검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일어섰다.
“판사님, 변호인은 본 사건과 관련 없는 주장으로 판단을 흐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피의자는 사람에게 가장 위협적인 칼을 들고 피해자에게 덮쳤습니다. 우발적 범행이 아닌 계획된 범행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도구가 어떤 것이든, 피해자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명백한 살인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검사님.”
“…….”
“맨손으로 사람 죽이는 살인자들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허를 찌르는 이주의 말에 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진짜 심신 미약인 사람은 25년간 가정 폭력에 시달려 온 이가 아닐까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지옥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 하나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외면해 버린 진짜 ‘피해자’는 바로 김선옥 씨입니다.”
“…….”
“또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성범 씨가 먼저 칼을 휘둘렀으며, 잠이 든 남편 손에 있던 칼을 잡고 있다가 깬 고성범 씨가 또다시 위협을 하자 방어의 목적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결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지? 특수상해죄로 기소됐는데 집행 유예를 받아 내다니! 우리 송 변호사 능력은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다니! 덕분에 우리 로펌의 명성이 아주 올라가고 있어. 언론사들도 서로 기사 내느라 바쁜데 고 사무장, 내일 중으로 보도 자료 싹 돌려!”
“그럼 월급 좀 더 올려 주세요.”
“자, 한 잔씩들 시원하게 들이켜!”
대견하다는 듯이 호탕한 목소리를 내던 박 대표가 이주의 월급 얘기에 황급히 소맥을 나누어 주었다.
변호사들이 각자 잔을 받아 들고 거침없이 들이마셨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고 재판도 이겨 기분도 좋겠다, 이주도 부담 없이 술을 들이켰다. 술이 막힘없이 넘어가고 달달했다. 재판을 이겼다는 기쁨 때문일 거였다.
역시, 누군가를 이긴다는 건 짜릿해. 늘 새로워.
“아차, 박 대표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변호사 온다고 했죠?”
상추에 고기를 싸먹고 있던 오민서 변호사가 불쑥 물어왔다.
“응. 완전 햇병아리야, 햇병아리.”
“에이, 키랑 덩치는 햇병아리가 아니시던데요?”
박 대표의 말에 사무장이 덧붙였다.
“그러지? 나는 잠깐 인사하러 들렀을 때, 의뢰인인 줄 알았어. 그것도 모델.”
“얼굴도 훤칠한 게, 다음 생에 꼭 그런 얼굴로 태어나 보고 싶어요.”
두 사람이 하는 대화에 민서가 번뜩,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나 잘생겼어요? 나이가 몇 살인데요?”
“올해, 스물여덟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네? 스물여덟? 아휴, 어리다. 어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성격이 맞으면 아무 문제없지. 그렇지 않아? 송 변?”
갑작스러운 박 대표의 물음으로 인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이주에게 쏟아졌다.
“그럼요. 나이가 뭐가 중요해요. 서로 얼마나 통하느냐고 중요하지.”
영양가 없는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바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늘 눈치를 발로 차 버리면서 사는 박 대표가 말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송 변은 왜 연애 안 해?”
“일을 그렇게나 많이 주시는데,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요?”
“에이, 그건 핑계다. 아무리 바빠도 연애하는 사람들은 다 연애해. 우리 송 변이 변호사로서는 참, 훌륭하고 야무진데. 약간 그쪽으로, 아니 연애 쪽으로는 젬병인가 봐.”
“네……?”
“아니, 능력 되지 그 정도면 얼굴 되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연애를 못 하나?”
박 대표는 말을 이으며 이주의 몸을 끈적하게 살폈다.
“하하하.”
뜬금없이 터져 버린 이주의 웃음에 변호사들과 사무장은 흠칫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눈치라는 것을 늘 짓밟고 살아가는 박 대표는 이주가 어떤 상황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기업들을 주로 관리하고 있어 늘 이런 회식 자리에만 참석하는 박 대표는 아직 이주가 정확히 얼마나 더러운 성격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이주는 제 잔을 술로 또 한 번 채워 쭉 들이켠 후, 아주 거칠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박 대표님은 왜 아직도 결혼 안 하셨어요?”
“어? 나는 워낙 바쁘기도 하고…….”
“아니죠. 박 대표님도 영, 젬, 벼어어엉~ 신이라 그러신 거 아니세요? 그쪽에서는.”
“뭐 병신? 그쪽에서는?”
“아니, 벼어어엉과 신 사이 ‘이’를 분명히 말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난 못 들었는데, 자기들 들었어?”
다급한 박 대표의 물음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변호사들은 늘 함께 부대끼며 사는 이주의 뒤끝이 회식 자리나 중요한 회의 때만 나타나는 박 대표보다 더 두려웠기 때문에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박 대표님 많이 취하셨네. 모두가 다 들은 걸 못 들으셨지? 아무래도 그쪽에 문제가 있으셔서 그런가?”
“송 변!”
“네. 제가 송이주 변호사입니다.”
흥분한 자신과는 달리, 아주 사람 약 올리듯이 여유로운 이주에 박 대표는 더욱 팔짝 뛰었다.
“뭘 그리 흥분하세요. 우리 여태 연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이주는 눈을 슬쩍 박 대표의 아래로 옮기고서는 덧붙였다.
“제가 말한 건 연애지, 그쪽을 얘기한 게 아닌데? 찔리시는 거 있으신가 봐요.”
결국, 박 대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대로 자리를 벅차고 나갔다. 고 사무장이 급하게 뒤를 따라갈 뿐 그 누구도 일어서지 않았다.
“살살해라, 송이주. 그래도 대표님이신데.”
정현이 자신의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못 말린다는 듯이 핀잔했다.
“선배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내가 이 로펌에 남아 있어 주는 게 선배에 대한 의리라는 걸 몰라?”
“알지. 알아. 인마. 그래서 미안하고. 정말 미안하다.”
뇌물을 받았다는 억울한 혐의로 검사직에서 끌려 내려오다시피 한 정현을 받아 주는 변호사 사무실은 없었다. 그때, 정현을 유일하게 써 준 사람이 지금의 박 대표였다.
그게 고마웠던 걸까, 박 대표 역시 썩 좋은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억울함이 밝혀져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도 정현은 늘 고사했다.
그리고 이주는 대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정현의 제안으로 ‘박앤서’ 로펌에 들어오게 된 거였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충분했지만 이주에게 정현은 대학을 다닐 때 잊지 못할 도움을 준 사람이었고 그런 이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옛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지 씁쓸해하는 정현의 모습이 안타까워 이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게?”
혼자 술을 따는 정현을 자신만큼 안타까워하며 바라보던 민서가 물었다.
“바람 좀 쐬러. 2차 가려면 술을 좀 깨야 할 거 아니야.”
애써 명쾌하게 그리 말하고서는 가게를 빠져 나왔다. 근처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줄 알았던 박 대표와 고 사무장은 보이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아…….”
가게 문 옆쪽에 서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갑갑했던 마음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
“야야, 노래방 가서 놀자.”
“나 돈 없는데?”
“내가 아버지 지갑 제대로 털어 왔지. 돈 따위 걱정 하지 말고 오늘 밤은 이 엉아를 즐겁게 해 줄 생각이나 해라.”
뒤에서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우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이주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무방비한 상태의 이주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프기보다는 놀랐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뒤를 돌았는데, 방금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던 놈들이 이주를 쳐다보며 낄낄거리면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면상들이다.
“저기요.”
이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남자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주를 업신여기듯 위, 아래로 흘기며 노려보았다.
“뭐요.”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고 해야죠.”
어깨가 얼얼하지만, 정말 좋게 얘기했다. 하지만 이주는 금방 깨달았다. 역시, 못나고 못된 사람들에게는 절대 좋게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과? 우리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 건데? 그러게 술 처마시고 집에 가서 자빠져 잠이나 잘 것이지, 왜 사람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어. 막고 서 있기를.”
사과 한마디만 하면 끝났을 문제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좋은 기회를 송두리째 차 버렸다.
“뭐? 자빠져 자? 길을 막아? 문은 내가 서 있던 옆에 있었는데, 벽 뚫고 나오는 초능력이라도 있나 봐.”
“아, 진짜 오늘 기분 제대로 좋았는데, 이 아줌마가 우리 기분 다 망치려고 드네.”
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자신을 못 건드려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로 똘똘 뭉쳐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개념과 예의를 지키지 않아 세상의 법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을.
“네 기분만 좋았어? 내 기분도 좋았어.”
“그래서 어쩌라고.”
“실수로 사람을 쳤으면 미안하다는 말은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념도 못 담고 사는 그 머리를 뭐 하러 달고 다녀?”
“아, 근데 이게 말끝마다 너, 야로 끝나? 기분 나쁘게……!”
남자가 팔을 위로 확 올렸다. 누군가에게 절대 주눅 드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굵직한 팔뚝이 위협적이게 보여 본능적으로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그런데 뺨 위로 세게 내쳐질 거라고 생각했던 투박한 손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지. 변호사 건드려서 좋을 건, 콩밥 먹는 일밖에 없을 텐데.”
정현이라도 나온 건가? 하는 마음에 이주가 눈을 찔끔 뜨고 고개를 올렸다. 자신을 때리려 했던 이와는 달리 다부진 느낌을 하고 있는 남자.
길쭉한 다리부터 시작하여 올곧은 허리 라인, 널찍하게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곧게 뻗은 목 선. 선명하고 굴곡 없는 얼굴의 옆 라인, 얇은 쌍꺼풀의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 작위적이지 않은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이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너, 양아치?”
이주의 아는 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미간을 구기며 눈을 마주 보았다.
“나 양아치 아니에요.”
그 반항기가 가득했던 눈빛이 오버랩 되었다. 그때와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지만 눈빛은 확실했다.
그 양아치……!
“아이 씨, 이거 놔!”
서로를 담고 있던 두 사람이 눈빛은 금방 떨어졌다. 이주를 때리려고 했던 남자가 크게 반항을 한 탓이었다.
남자는 저보다 얼굴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사람이 제 팔을 잡자 겁이 난 듯 보였다. 거기다가 아까 ‘변호사’라는 말에 당황한 듯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과해요. 변호사님께.”
그걸 읽기라도 했는지,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미, 미안합니다! 됐죠? 이제 좀 놔줘요!”
손을 놓아주자마자 남자는 일행과 함께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날쌘 돌이처럼 사라졌다.
비로소 이제 이주는 10년 만에 만난 옆집 양아치 동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게 정말 얼마만이야? 완전 반갑다.”
“그러게요. 딱 10년 만이죠.”
“마지막으로 본 게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차 네 소식은 들었어. 재수해서 K대 갔다고. 지금은 졸업하고도 남았겠네. 취업은 했어?”
“그전에.”
“…….”
“내 이름은 기억해요?”
“윤서강이잖아.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 머리가 워낙 똑똑해서.”
이주는 자신의 칭찬에 야박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당당하게 제 자랑을 하는 이주를 보며 서강이 다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면 그 똑똑한 머리로 그것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겠네요?”
“뭐를?”
서강은 대답을 하는 대신 옅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의 간격이 아주 좁혀졌고 이주는 더 이상 서강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됐다.
“내가 당신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연애해 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했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