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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면 연애해 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했던 약속.”

서강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한동네에서 산 옆집 동생이었다. 이주가 S대에 합격을 하면서 서울로 올라가 자취를 시작했을 땐 잠시 떨어져 지냈지만, 방학마다 내려와 엄마의 등쌀에 밀려 서강의 공부를 종종 봐주고는 했다.

그때마다 느꼈던 건, 녀석이 참으로 ‘돌대가리’라는 거였다. 아니, 머리도 머리인데 공부를 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녀석은 늘, 자신과 하는 과외에는 빠지지 않고 꿋꿋이 앉아 있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좋아해요.”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진’이라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했던 서강을 이주는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마음에 두고 있던 학과 선배 선호 때문에 더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애한테 이성의 감정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나는 너 안 좋아해.”

“알아요. 하지만 사람이 늘 붙어 있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나랑 연애해요.”

“너 아주 당돌한 아이구나?”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누나가 나 그네 밀어 주다가 실수로 나를 밀어서 떨어트리던 그때도 나는 누나 좋아했어요.”

“왜 미안하게 그때 얘기를…… 아무튼, 나는 너 안 좋아해.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포기해.”

“싫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양아치랑 연애할 생각 없어.”

“……내가 왜 공부 안 하는지, 누나는 모르잖아요.”

“응. 궁금하지도 않아.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거든.”

“너무해요.”

“그러니까. 포기해.”

“싫다고 했잖아요.”

“어쭈, 이게 왜 말을 안 들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해 줄 거예요?”


그때 당시, 이주는 과외 학생의 성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강의 부모님이 S대를 다니는 이주가 서강의 성적을 올려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서강의 성적이 전혀 오르지 않으니 가르치는 실력을 의심하고 있던 거였다.

그래서 이주는 이판사판으로 말을 꺼내 보았던 것 같다.


“내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면 연애해 줄게.”

“인정할 만한 사람?”

“난 지금 법대 다니고 있고, 정의로운 법을 다루는 변호사가 목표야. 잘 생각해 봐. 내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무엇인지.”

“확실한 거죠?”

“뭐가?”

“누나가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면 연애해 준다는 거.”


절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전국도 아니고 전교에서도 놀지 못하는 애가 무슨 수로 자신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약속해요.”

“좋아. 약속할게.”


그래서 서강이 내밀던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까지 찍은 거였다.

과거 회상이 끝난 이주가 떳떳하게 대답했다.

“생각나. 근데 그래서? 넌 내가 인정할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해? 좋은 대학에 갔다고 내가 인정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

“아, 아직 모르는구나.”

이주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서강의 뒤로 고 사무장이 다가왔다. 그는 박 대표에게 꽤나 시달렸는지 2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송 변호사님, 왜 나와 계세요?”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아…….”

고 사무장은 등을 보이고 있는 서강에게 관심을 보였다. 곁눈질에 가깝게 슬쩍 올려다보던 고 사무장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어, 윤 변호사님 오셨어요? 어쩌죠, 대표님은 지금 막 집에 가셨는데……!”

이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사무장님?”

이주는 사무장이 서강을 바라보며 윤 ‘변호사님’이라고 한 것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저희 회식 시작할 때, 말씀 드렸죠? 조 변호사님 그만두셔서 새로운 분 오신다고요. 이번에 새로 오시기로 한 윤서강 변호사님이십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이셔서 대표님께서 잠깐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라고 연락하셨거든요.”

이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말도 안 돼, 그 꼴통이 변호사가 됐다고? 그것도 늘 전교 1등, 전국 50등 안에 들며 엘리트 코스만 차근차근 밟아왔던 자신과 똑같은 나이에?

“윤 변호사님, 들어가시죠. 다들 엄청 기대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서강은 고 사무장을 향해 대답한 후, 이주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시고.”

여유롭게 말을 한 서강은 가게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같이 들어가요.”

이주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일단, 서강이 ‘연애’ 약속을 지키라는 것보다, 저 꼴통이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에 더욱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정현이 들어오는 이주를 향해 물었다.

“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런데 선배는 어디 가?”

“너 안 오기에 걱정돼서 나가 보려고 했지.”

“아…….”

이주를 바라보던 정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민서를 포함하여 다른 변호사와 직원들의 시선도 전부 이주 뒤를 향했다.

“어머, 대표님이 말씀하신 새로 오시는 변호사인가 보네.”

“야, 진짜 훤칠하다. 모델로 착각하실 만했네.”

“그러게요. 어두침침한 이곳에 아주 밝은 조명이 들어온 것만 같네요.”

여직원들의 속닥거림이 이어지는 동안, 서강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주의 바로 옆에서 멈춰 섰다.

“다들 인사해요. 아까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윤 변호사님.”

고 사무장의 소개가 떨어지기 무섭게 민서와 함께 모든 여직원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장 먼저 살갑게 서강을 향해 인사를 건넨 사람은 정현이었다.

“제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서 변호사님.”

서강은 악수를 청하는 정현의 손을 맞잡으며 담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민서도 한껏 맑게 서강을 반겼다. 민서를 시작하여 다른 직원들이 통성명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에 이주는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말,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저 꼴통이 변호사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이주야. 2차 갈 거야?”

생각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통성명을 끝낸 후,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일어서고 있었다.

“2차?”

“응. 윤 변도 왔으니, 아예 자리를 옮기려고. 너 좋아하는 연어 먹으러 가자.”

연어.

구미가 당겼지만, 어쩐지 확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여기서 바로 집으로 갈게.”

“왜?”

“좀 피곤하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정현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눈치다.

“송 변 가려고?”

자리 정리를 끝낸 민서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응. 조금 피곤해서.”

“내일 주말인데, 달려야지.”

“다음에 달릴게요. 오늘은 정말 피곤해.”

말을 이어 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고 사무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강을 바라보았다. 꽤 눈에 띠는 외향과 묘한 분위기를 지닌 서강이었다. 확실히 예전에 보았던 모습은 없었다.

결론은,

“잘 컸네.”

정말 잘 컸다.

“응?”

“아니야. 아무것도.”

되물어 오는 민서에게 말을 덧붙이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송 변 간대.”

민서의 아쉬운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주에게로 향했다.

“왜 벌써 가세요?”

질문은 고 사무장이 했지만 이주의 신경은 그 옆에서 자신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서강에게로 쏠렸다.

“오늘 좀 피곤하네요.”

“대표님이랑 한바탕 하셔서 더 그러신가 보다.”

이주가 멋쩍게 웃었다.

“어쨌든, 같이 일하게 돼서 반갑네.”

현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한 이주가 담담하게 서강에게 악수를 청했다.

“뭐야? 두 사람 아는 사람이야?”

민서의 놀라움에 정현도 관심을 보였다.

“아, 그래? 송 변이랑 윤 변이 친분이 있는 사이야? 어떻게?”

“나중에 윤 변한테 직접 들어. 선배.”

관계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모두를 서강에 떠밀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이주는 제 손을 감싸듯 잡은 서강의 손에 살짝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크고 단단했으며 부드럽고 따뜻했다.

“네. 앞으로 저도 잘 부탁드려요. 여러 면으로.”

입꼬리를 살포시 들어 올려 웃는 미소가 의미심장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유난히도 까만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을 끼고 있는 밤바다처럼 깊어 보였다.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짙은 눈동자를 피하며 맞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월요일에 봐. 양…….”

‘양아치’라고 습관적으로 나올 뻔했다. 이제 엄연히 직장 동료가 되었고 변호사인 서강을 부르는 호칭에 매우 신경을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월요일에 봐. 윤 변.”

서강과의 인사가 끝나고 돌아서자, 정현이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아 주었다.

“고마워. 선배.”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응. 그럴게.”

뒷좌석에 올라 탄 이주가 창밖에서 자신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송 변호사님!”

“월요일에 봐, 송 변!”

연신 인사를 하는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서강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 그것도 기억하고 있겠네요? 당신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 되면 연애해 주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했던 약속.”


그냥, 오랜만에 만난 동네 누나와의 어이없는 추억을 재미 삼아 이야기 한 것이겠지?

택시가 출발했다.

“그래, 그런 거겠지.”

이주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