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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침대와 한 몸이 되었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6시에 정확하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이주는 침대에서 서둘러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찬물의 샤워기를 한 번 틀어서 몸을 적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잠 깨는 데엔 찬물이 최고야.”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지자 미지근한 물을 틀어 샤워를 끝낸 후, 나와서 바로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향이 집 안에 가득 퍼졌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서둘러 출근 준비를 끝냈다.
집을 나와 회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엄마.”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되지?
“금요일?”
-아니면 토요일.
다짜고짜 주말 여부를 물어보는 이유를 이주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말했잖아. 엄마, 나 맞선 안 본다니까.”
-왜? 만나는 남자 있는 거지, 너?
“……없어, 없고. 아직은 일이 좋다고 몇 번 말했잖아. 때가 되면 알아서 시집간다니까.”
한숨을 내쉰 이주는 서류들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내가 네 고모한테 그 소리를 20년 동안 듣고 살았어. 알지? 그런데 요즘 네 고모, 결혼 안 한 거 엄청 후회하고 있는 거.
“누가 결혼을 안 한답니까, 언젠가는 할 겁니다.”
-이것아, 정신 차려.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는 거야. 그 타이밍 놓치면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별걱정을 다하셔. 정말. 엄마, 나 송이주야. 몰라? 학교 다녔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됐고. 일단, 남자를 만나 봐. 만나 보고 결정해도 되는 거잖아. 사람이 정말 괜찮아서 그래. 맞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밥 먹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엄마, 그리고 나 이제 겨우 서른셋이야. 서른셋에 맞선은 좀…….”
-딱이지. 지금 만나서 1, 2년 정도 연애해 보고 결혼하면!
“엄마, 나 이제 막 회사에 도착했어.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대표님!”
이주는 언성이 높아진 엄마의 목소리에 연기까지 하며 전화를 황급하게 끊었다.
“주말 잘 보냈어요?”
“엄마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주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순간적으로 남은 할부를 생각하던 이주를 뒤에 두고, 서강은 순발력을 발휘해 휴대폰을 받아 냈다.
“많이 놀랐어요?”
서강이 잡은 휴대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어, 뭐. 고마워.”
서강은 은은한 핑크빛 정장을 입고 있었다. 파스텔 색상은 아무나 소화해 내지 못할 색이지만 그가 입고 있으니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일찍 출근했네?”
“출근 시간에 맞춰 나오면 차가 많이 밀릴 것 같아서요.”
“맞아. 그래서 나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지.”
두 사람은 아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상하 버튼을 누르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탔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지막한 서강의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깬 것이다.
“맞선.”
서강의 한마디에 이주는 민망했다.
“통화가 들렸니?”
“안 볼 거죠?”
그는 자신이 통화를 들었고 말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되물었다.
“왜? 윤 변이랑 연애해야 하니까?”
물어보는 의도를 장난스럽게 파악했다.
“네.”
그런 이주를 향해 아주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장난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낀 이주가 앞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옮겨 서강을 올려다보았다.
“윤 변, 진심이야?”
“진심이 아니라면 지난 10년 동안, 변호사 되겠다고 그렇게 미친 듯이 매달리진 않았겠죠?”
아아, 이거 큰일이다.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제게 고정되어 있는 서강의 짙은 눈동자는 너무 강건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이주는 잠시 흠칫 놀랐지만 다시 정신 차렸다.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 하지 마. 누가 보면 진짜인 줄 알겠다!”
배까지 잡고 웃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서강은 웃지 않았다. 이주는 순간 뒷골이 뻣뻣해짐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네.”
도착한 층수에서 문이 열렸다. 이주는 얼이 빠져서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서강을 올려다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안 내려요?”
“내 사무실에서 잠깐 얘기 좀 해.”
“좋아요.”
이주는 앞장서 걸었고 그 뒤를 서강이 따랐다. 자신의 방으로 가는 내내, 이주는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복잡했다.
“말도 안 돼.”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주는 들고 있던 핸드백을 책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말했다.
“뭐가 말이 안 돼요?”
“그럼, 지난 10년 동안 네가 공부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내가 좋아서? 나랑 연애하려고?”
“네. 약속했잖아요.”
이번에도 망설임 없는 깔끔하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강건하다 못해 단호했다.
“네가 공부하던 10년 안에 내가 결혼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아니지, 내가 지금 남자 친구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결혼 안 하고 남자 친구 없으니까, 맞선 얘기 나온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내가 결혼을 했었다면?”
“그럼 포기했겠죠. 당신이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행복해 한다면…… 된 거니까.”
저게 정말 진심인가, 아닌가, 매우 긴가민가하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쉽게 말을 해서 거짓말 같다가도 오히려 망설임이 없기에 오래도록 품어 왔던 진실을 토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결혼도 안 했고 남자 친구도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죠.”
이주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그때, 윤 변의 과외 선생님으로서 자극을 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알아요.”
“알아? 알았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알고 있으라고 한 말이에요.”
“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여전히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당신의 남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것.”
“…….”
“그래서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사랑받는 남자가 될 거라는 것.”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던 서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둘이 여기서 뭐 해? 아침부터 커피 타임 갖는 거야?”
출근한 민서가 문을 열고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민서의 등장에 마주 보고 있던 서강과 이주가 시선을 옮겼다.
“오셨어요?”
“오 변 왔어?”
서강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이주는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다.
“그런데 커피 마시고 있던 게 아니네? 나 지금 커피 사러 갈 건데 필요하면 두 사람 것도 같이 사다 줄까?”
“아닙니다. 제가 사 오겠습니다.”
민서의 말에 서강이 차분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럴래요? 그럼?”
“네. 뭐 드시겠습니까?”
“나는 아주 달달한 라테. 송 변은?”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네.”
커피를 사러 서강이 방에서 나갔다.
“윤 변 참 대단해. 그렇지? 송 변?”
다짜고짜 서강을 언급하는 민서의 말에 이주는 뜨끔했다. 하지만 애써 당황한 기색 없이 답하려고 노력했다.
“뭐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권도 아니었다더라.”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악물고 공부했대.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더라.”
이주는 민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대단해. 그렇지 않아?”
민서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직 서강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을 했다면 좋은 말로는 정보통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민서가 말을 안 할 리가 없었다.
서강이 아직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응. 그러게.”
“인물도 저렇게 훤칠한데 변호사니, 인기 장난 아니겠어.”
“…….”
“아니, 그날도 송 변 가고 나서 우리끼리 2차 갔잖아? 가게에 들어가는데, 여자들 눈길을 한 번에 받더라고.”
“아, 그랬어?”
“잘생기고 피지컬 좋은 건 둘째 치고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잖아.”
“응.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과거에도 꽤나 많은 여자들이 따라다닌 걸로 알고 있다.
“애인 있냐고 물어봤는데 여자 친구는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대. 누굴까? 궁금해. 누구나 탐낼 만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누구일지, 너무 궁금해.”
나.
그게 바로 네 동기인 나란다.
“아, 그랬구나.”
“반응이 왜 그래?”
“어? 뭐가?”
“실망했어?”
“뭘?”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실 텐데.”
민서의 눈이 얇게 떠졌다. 이주는 실소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마음에 두었다가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하니까, 실망한 거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해 봐. 누구나 한 번쯤은 사귀어 보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남자인데?”
지금의 서강을 보면 분명, 그렇다. 만일, 그의 어릴 적 모습을 알지 못하고 지금의 서강을 바로 봤었다면, 이주도 슬쩍 관심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주는 서강의 과거를 알고 있다.
열여덟, 물론 그때도 나이 또래에 비해 크고 지금과 별다를 바 없이 잘생긴 외모였지만, 당시 대학교 졸업반이었던 자신이 교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이성적인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잘 컸다는 생각은 들지만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당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가 될 거라는 것.”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해 줄 거예요?”
“박력이 있어지기는 했네.”
“어?”
잠시 고백의 변천사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던 이주가 되물어 오는 민서에 깜짝 놀랐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서 뭐, 오 변도 탐나?”
“음, 탐이 안 나는 건 아니지.”
“우리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촌스럽기는.”
핀잔하는 민서를 못 말린다는 듯이 보며 고개를 저어 보인 이주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사내 연애는 별로야. 일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며 보게 될 게 뻔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가 억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주는 민서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엄마의 맞선 제안에 서강의 고백에…… 뭐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참으로 스펙터클한 아침이었다.
침대와 한 몸이 되었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6시에 정확하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이주는 침대에서 서둘러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찬물의 샤워기를 한 번 틀어서 몸을 적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잠 깨는 데엔 찬물이 최고야.”
어느 정도 정신이 맑아지자 미지근한 물을 틀어 샤워를 끝낸 후, 나와서 바로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향이 집 안에 가득 퍼졌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서둘러 출근 준비를 끝냈다.
집을 나와 회사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엄마.”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되지?
“금요일?”
-아니면 토요일.
다짜고짜 주말 여부를 물어보는 이유를 이주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말했잖아. 엄마, 나 맞선 안 본다니까.”
-왜? 만나는 남자 있는 거지, 너?
“……없어, 없고. 아직은 일이 좋다고 몇 번 말했잖아. 때가 되면 알아서 시집간다니까.”
한숨을 내쉰 이주는 서류들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내가 네 고모한테 그 소리를 20년 동안 듣고 살았어. 알지? 그런데 요즘 네 고모, 결혼 안 한 거 엄청 후회하고 있는 거.
“누가 결혼을 안 한답니까, 언젠가는 할 겁니다.”
-이것아, 정신 차려.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있는 거야. 그 타이밍 놓치면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
“별걱정을 다하셔. 정말. 엄마, 나 송이주야. 몰라? 학교 다녔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됐고. 일단, 남자를 만나 봐. 만나 보고 결정해도 되는 거잖아. 사람이 정말 괜찮아서 그래. 맞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밥 먹는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엄마, 그리고 나 이제 겨우 서른셋이야. 서른셋에 맞선은 좀…….”
-딱이지. 지금 만나서 1, 2년 정도 연애해 보고 결혼하면!
“엄마, 나 이제 막 회사에 도착했어.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대표님!”
이주는 언성이 높아진 엄마의 목소리에 연기까지 하며 전화를 황급하게 끊었다.
“주말 잘 보냈어요?”
“엄마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주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순간적으로 남은 할부를 생각하던 이주를 뒤에 두고, 서강은 순발력을 발휘해 휴대폰을 받아 냈다.
“많이 놀랐어요?”
서강이 잡은 휴대폰을 돌려주며 물었다.
“어, 뭐. 고마워.”
서강은 은은한 핑크빛 정장을 입고 있었다. 파스텔 색상은 아무나 소화해 내지 못할 색이지만 그가 입고 있으니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일찍 출근했네?”
“출근 시간에 맞춰 나오면 차가 많이 밀릴 것 같아서요.”
“맞아. 그래서 나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지.”
두 사람은 아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상하 버튼을 누르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나란히 올라탔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침묵.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지막한 서강의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깬 것이다.
“맞선.”
서강의 한마디에 이주는 민망했다.
“통화가 들렸니?”
“안 볼 거죠?”
그는 자신이 통화를 들었고 말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되물었다.
“왜? 윤 변이랑 연애해야 하니까?”
물어보는 의도를 장난스럽게 파악했다.
“네.”
그런 이주를 향해 아주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장난기가 전혀 없다는 것을 느낀 이주가 앞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옮겨 서강을 올려다보았다.
“윤 변, 진심이야?”
“진심이 아니라면 지난 10년 동안, 변호사 되겠다고 그렇게 미친 듯이 매달리진 않았겠죠?”
아아, 이거 큰일이다.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제게 고정되어 있는 서강의 짙은 눈동자는 너무 강건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이주는 잠시 흠칫 놀랐지만 다시 정신 차렸다.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 하지 마. 누가 보면 진짜인 줄 알겠다!”
배까지 잡고 웃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서강은 웃지 않았다. 이주는 순간 뒷골이 뻣뻣해짐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네.”
도착한 층수에서 문이 열렸다. 이주는 얼이 빠져서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서강을 올려다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안 내려요?”
“내 사무실에서 잠깐 얘기 좀 해.”
“좋아요.”
이주는 앞장서 걸었고 그 뒤를 서강이 따랐다. 자신의 방으로 가는 내내, 이주는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 복잡했다.
“말도 안 돼.”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주는 들고 있던 핸드백을 책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말했다.
“뭐가 말이 안 돼요?”
“그럼, 지난 10년 동안 네가 공부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내가 좋아서? 나랑 연애하려고?”
“네. 약속했잖아요.”
이번에도 망설임 없는 깔끔하고 간단한 대답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강건하다 못해 단호했다.
“네가 공부하던 10년 안에 내가 결혼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아니지, 내가 지금 남자 친구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결혼 안 하고 남자 친구 없으니까, 맞선 얘기 나온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만약에라도 내가 결혼을 했었다면?”
“그럼 포기했겠죠. 당신이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행복해 한다면…… 된 거니까.”
저게 정말 진심인가, 아닌가, 매우 긴가민가하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쉽게 말을 해서 거짓말 같다가도 오히려 망설임이 없기에 오래도록 품어 왔던 진실을 토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결혼도 안 했고 남자 친구도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죠.”
이주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그때, 윤 변의 과외 선생님으로서 자극을 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알아요.”
“알아? 알았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알고 있으라고 한 말이에요.”
“뭘 알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여전히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당신의 남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라는 것.”
“…….”
“그래서 나는 반드시 당신에게 사랑받는 남자가 될 거라는 것.”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던 서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작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가 너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둘이 여기서 뭐 해? 아침부터 커피 타임 갖는 거야?”
출근한 민서가 문을 열고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민서의 등장에 마주 보고 있던 서강과 이주가 시선을 옮겼다.
“오셨어요?”
“오 변 왔어?”
서강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이주는 간단하게 눈인사를 했다.
“그런데 커피 마시고 있던 게 아니네? 나 지금 커피 사러 갈 건데 필요하면 두 사람 것도 같이 사다 줄까?”
“아닙니다. 제가 사 오겠습니다.”
민서의 말에 서강이 차분한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럴래요? 그럼?”
“네. 뭐 드시겠습니까?”
“나는 아주 달달한 라테. 송 변은?”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네.”
커피를 사러 서강이 방에서 나갔다.
“윤 변 참 대단해. 그렇지? 송 변?”
다짜고짜 서강을 언급하는 민서의 말에 이주는 뜨끔했다. 하지만 애써 당황한 기색 없이 답하려고 노력했다.
“뭐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권도 아니었다더라.”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 악물고 공부했대.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다더라.”
이주는 민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대단해. 그렇지 않아?”
민서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직 서강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을 했다면 좋은 말로는 정보통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 옮기기를 좋아하는 민서가 말을 안 할 리가 없었다.
서강이 아직 사람들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응. 그러게.”
“인물도 저렇게 훤칠한데 변호사니, 인기 장난 아니겠어.”
“…….”
“아니, 그날도 송 변 가고 나서 우리끼리 2차 갔잖아? 가게에 들어가는데, 여자들 눈길을 한 번에 받더라고.”
“아, 그랬어?”
“잘생기고 피지컬 좋은 건 둘째 치고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잖아.”
“응.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 과거에도 꽤나 많은 여자들이 따라다닌 걸로 알고 있다.
“애인 있냐고 물어봤는데 여자 친구는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있대. 누굴까? 궁금해. 누구나 탐낼 만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누구일지, 너무 궁금해.”
나.
그게 바로 네 동기인 나란다.
“아, 그랬구나.”
“반응이 왜 그래?”
“어? 뭐가?”
“실망했어?”
“뭘?”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실 텐데.”
민서의 눈이 얇게 떠졌다. 이주는 실소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거든?”
“마음에 두었다가 좋아하는 여자 있다고 하니까, 실망한 거지?”
“아니라고.”
“솔직하게 말해 봐. 누구나 한 번쯤은 사귀어 보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남자인데?”
지금의 서강을 보면 분명, 그렇다. 만일, 그의 어릴 적 모습을 알지 못하고 지금의 서강을 바로 봤었다면, 이주도 슬쩍 관심을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주는 서강의 과거를 알고 있다.
열여덟, 물론 그때도 나이 또래에 비해 크고 지금과 별다를 바 없이 잘생긴 외모였지만, 당시 대학교 졸업반이었던 자신이 교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이성적인 감정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잘 컸다는 생각은 들지만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당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가 될 거라는 것.”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해 줄 거예요?”
“박력이 있어지기는 했네.”
“어?”
잠시 고백의 변천사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하던 이주가 되물어 오는 민서에 깜짝 놀랐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서 뭐, 오 변도 탐나?”
“음, 탐이 안 나는 건 아니지.”
“우리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촌스럽기는.”
핀잔하는 민서를 못 말린다는 듯이 보며 고개를 저어 보인 이주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사내 연애는 별로야. 일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며 보게 될 게 뻔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가 억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주는 민서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엄마의 맞선 제안에 서강의 고백에…… 뭐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참으로 스펙터클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