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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기묘한 상황 (5)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두 사람 다 흔쾌히 참석 의사를 밝혔다.
“아가씨, 그럼 어서 준비해야겠네요. 아, 이게 얼마 만의 다과회인지 몰라요.”
다과회 소식에 들뜬 건 내가 아니라 제시였다.
“그렇게 기뻐할 일이야?”
“그럼요, 아가씨는 다른 분들의 다과회 초대에 응하신 적은 있어도 직접 초대하신 적은 없었거든요. 만약 마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
제시는 말을 멈추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슬쩍 보기에 나는 일부러 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사실 나는 릴릴의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릴릴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었다. 릴릴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만 들었을 뿐이다.
침체된 분위기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 제시가 손뼉을 쳤다.
“아가씨, 장소는 어디로 정하실 생각이세요?”
“그 테라스가 있는 정원은 어떨까 해.”
“아아, 그곳도 괜찮죠. 그럼 저는 다른 하녀들과 함께 시간 맞춰 준비할게요. 차와 다과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르지나는 분명 찻잎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예전에 작품 속에서 봤던 기억이 있었다.
“찻잎은 선물로 들어온 새것을 쓰자. 아버지가 전에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하셨으니 문제없을 거야. 다과는 마카롱과 쿠키, 머핀 정도면 괜찮겠고.”
“알겠어요. 맡겨 두세요!”
제시는 정말 의욕이 넘쳤다. 나는 그녀와 함께 찻잎과 다과를 고르기도 하고, 하녀들이 꾸며 둔 정원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제시의 마음이 옮기라도 했는지 준비하는 내내 은근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죠? 손님으로 참석하는 것과 주최자가 되는 것은 또 다르니까요.”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인데 제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제시가 귀여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대체 뭘 하길래 다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거람. 준비한 대로 뭐든 잘되어야 할 텐데!]
예전에도 이곳에서 한번 들었었던 그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휙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엔 달리아 한 송이만 피어 있을 뿐이었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 봤다. 하지만 역시나 다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기분 탓인가?”
“뭐가요?”
이번에도 제시는 내 혼잣말을 듣고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기이한 목소리에 대한 생각은 금방 털어 버리고 다과회 준비 과정을 꼼꼼히 지켜봤다.
한참 준비에 열중하던 중,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음…….”
“왜 그러세요, 아가씨?”
“저기 꽃을 걸어 둔 정원의 기둥 부분이 불안정해 보여서…….”
“네? 어디가요?”
“잠깐 공구 같은 것 좀 가져와 볼래?”
제시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공구를 가져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21세기 대한민국보다 발전이 덜 된 세계라서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딱히 쓸 만한 연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낡고 투박한 망치를 골랐다.
“쯧,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써야겠네.”
“아가씨?”
“아가씨, 설마 직접 하시려고요?”
제시와 하녀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망치를 휘두르며 기둥의 불안정한 부분을 뜯어고쳤다.
“아가씨, 그런 것은 사용인들을 시키셔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너무 위험해요.”
“맞아요. 한동안 안 그러시더니 또 공구 상자를 달고 다니실 기세네요.”
그들이 내게 던지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의아해졌다. 릴릴이 전에도 이렇게 직접 뭔가를 고치거나 만들기라도 한 건가? 후작 영애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나는 애써 갈무리하며 망치질을 계속했다. 계속 말리려고 드는 그들을 한사코 밀어 내 가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과는 별개로 할 일은 해야 했다.
“됐어. 내가 더 잘해.”
“아가씨는 정말 못 말려요.”
기둥을 말끔하게 고친 후에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이번엔 공구 자체를 더 개발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고, 살아가면서 불편하게 지내기는 싫으니까.
어쩌면 나의 노력이 커프 후작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이게 일종의 변화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제시와 하녀들은 가뿐해하는 날 보며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망치를 든 채 생긋 웃었다.
학교 다니면서 실습하다 보니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고.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낸 후, 어느덧 친구들이 오기로 한 날이 밝았다. 나는 다과회 장소를 다시 한번 둘러본 후, 저택 입구로 나가서 아르지나와 데이지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정문 안으로 마차 두 대가 들어왔다. 각각의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우아한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 열기를 띠는 다갈색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에 수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눈에 확 들어오는 원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화려한 디자인인데도 마치 제 피부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아마 이쪽이 원작의 악녀, 아르지나 멜 공녀인 모양이다. 그녀는 멜 공작가의 외동딸이라 차기 가주가 될 예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아르지나 공녀 옆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쪽이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겠군.
그녀는 잿빛 머리카락을 단아하게 틀어 올리고 분홍색 장미 장식을 꽂아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진회색 눈동자가 강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르지나 공녀님, 데이지 영애. 어서 오세요.”
나는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일단 자리를 이동하죠.”
나는 아르지나와 데이지를 데리고 다과회 장소로 이동했다. 정원으로 가는 동안 극진히 존댓말을 쓰는 나를 보며 아르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예의를 차리고 그러니? 보는 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네 저택인데 편하게 해.”
“그러게, 아카데미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너 존댓말 하는 거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 같아.”
데이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르지나를 거들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이게 아닌가? 등골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백날 이아른에게 전해 들어 봤자 직접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 초장부터 헛발질이다.
살짝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정원에 도착했다. 아르지나와 데이지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온몸으로 반가운 티를 내던 아르지나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는 나를 보며 눈썹을 올렸다.
“릴릴, 설마 계속 존댓말을 쓸 생각은 아니지?”
“물론 아니지. 아까는 그냥……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거든. 하하. 다들 오랜만에 보네.”
나름 티 나지 않게 둘러댄 것 같았다.
“응, 무도회 이후로 오랜만이네. 저번에 이아른에게서 들었어. 네 몸 상태가 심히 안 좋다고 그러더라고. 게다가 너 지금 기억도 흐릿한 상태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면목이 없어. 미안해. 내 불찰이야.”
아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아르지나는 잔뜩 풀 죽은 채 말했다. 나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하게 대꾸했다.
“그건 말 그대로 사고였어. 네가 미안해할 이유 없어. 내가 네 탓을 하려고 널 여기까지 불렀겠니. 우리 다 잊고, 오랜만에 차 마시면서 즐겁게 수다나 떨자.”
“하긴, 네가 이렇게 정식으로 초대해 준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초대를 받아서 정말 영광이야.”
다행히 아르지나는 금세 다시 활짝 웃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데이지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리 기억이 흐려져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구나. 릴릴, 너는 항상 그렇게 너그럽게 넘어가서 탈이야. 아르지나에게 추가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데이지, 너 자꾸 그럴래? 아니, 아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니? 만약 있다면 편하게 말해도 돼, 릴릴.”
짓궂게 구는 데이지에게 툴툴거리나 싶더니, 아르지나는 금세 나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뭐지.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내게 엄청 친근하게 굴었다. 또 내가 죄 없는 사람들을 괜히 의심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내가 전에 소설에서 봤던 묘사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까칠하기만 할 줄 알았던 아르지나는 의외로 정이 깊었다. 나를 올곧게 향하는 다갈색 눈동자에서 깊은 호감이 엿보였다.
데이지도 풍기는 이미지와 다르게 간간이 위트 있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긴장을 풀어 줬다.
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도대체 이 세계는 어느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데이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 참. 얼마 전에 황궁에서 우연히 이아른을 만났었어. 너 황녀님이 개최하시는 다과회에 참석한다며. 정말 괜찮겠어?”
“응,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사고 후유증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야. 내가 예전에 봤던 논문 중에 후유증에 관련된 게 있었는데…….”
데이지는 금세 진지해져서는 내게 이것저것 일러 주었다.
겨우 이 정도 사고로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지인들이 많다니. 릴릴도 참 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눈매를 곱게 접었다.
기묘한 상황 (5)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두 사람 다 흔쾌히 참석 의사를 밝혔다.
“아가씨, 그럼 어서 준비해야겠네요. 아, 이게 얼마 만의 다과회인지 몰라요.”
다과회 소식에 들뜬 건 내가 아니라 제시였다.
“그렇게 기뻐할 일이야?”
“그럼요, 아가씨는 다른 분들의 다과회 초대에 응하신 적은 있어도 직접 초대하신 적은 없었거든요. 만약 마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
제시는 말을 멈추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는 듯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내 눈치를 슬쩍 보기에 나는 일부러 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구나.”
사실 나는 릴릴의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릴릴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었다. 릴릴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만 들었을 뿐이다.
침체된 분위기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 제시가 손뼉을 쳤다.
“아가씨, 장소는 어디로 정하실 생각이세요?”
“그 테라스가 있는 정원은 어떨까 해.”
“아아, 그곳도 괜찮죠. 그럼 저는 다른 하녀들과 함께 시간 맞춰 준비할게요. 차와 다과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나는 생각에 잠겼다. 아르지나는 분명 찻잎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예전에 작품 속에서 봤던 기억이 있었다.
“찻잎은 선물로 들어온 새것을 쓰자. 아버지가 전에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하셨으니 문제없을 거야. 다과는 마카롱과 쿠키, 머핀 정도면 괜찮겠고.”
“알겠어요. 맡겨 두세요!”
제시는 정말 의욕이 넘쳤다. 나는 그녀와 함께 찻잎과 다과를 고르기도 하고, 하녀들이 꾸며 둔 정원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제시의 마음이 옮기라도 했는지 준비하는 내내 은근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죠? 손님으로 참석하는 것과 주최자가 되는 것은 또 다르니까요.”
그저 혼잣말이었을 뿐인데 제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제시가 귀여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대체 뭘 하길래 다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는 거람. 준비한 대로 뭐든 잘되어야 할 텐데!]
예전에도 이곳에서 한번 들었었던 그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휙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엔 달리아 한 송이만 피어 있을 뿐이었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 봤다. 하지만 역시나 다시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기분 탓인가?”
“뭐가요?”
이번에도 제시는 내 혼잣말을 듣고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별일 아닌 듯 고개를 저었다.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기이한 목소리에 대한 생각은 금방 털어 버리고 다과회 준비 과정을 꼼꼼히 지켜봤다.
한참 준비에 열중하던 중,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이 있었다.
“음…….”
“왜 그러세요, 아가씨?”
“저기 꽃을 걸어 둔 정원의 기둥 부분이 불안정해 보여서…….”
“네? 어디가요?”
“잠깐 공구 같은 것 좀 가져와 볼래?”
제시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공구를 가져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21세기 대한민국보다 발전이 덜 된 세계라서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딱히 쓸 만한 연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낡고 투박한 망치를 골랐다.
“쯧,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써야겠네.”
“아가씨?”
“아가씨, 설마 직접 하시려고요?”
제시와 하녀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망치를 휘두르며 기둥의 불안정한 부분을 뜯어고쳤다.
“아가씨, 그런 것은 사용인들을 시키셔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너무 위험해요.”
“맞아요. 한동안 안 그러시더니 또 공구 상자를 달고 다니실 기세네요.”
그들이 내게 던지는 말들을 듣고 있자니 의아해졌다. 릴릴이 전에도 이렇게 직접 뭔가를 고치거나 만들기라도 한 건가? 후작 영애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나는 애써 갈무리하며 망치질을 계속했다. 계속 말리려고 드는 그들을 한사코 밀어 내 가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과는 별개로 할 일은 해야 했다.
“됐어. 내가 더 잘해.”
“아가씨는 정말 못 말려요.”
기둥을 말끔하게 고친 후에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이번엔 공구 자체를 더 개발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고, 살아가면서 불편하게 지내기는 싫으니까.
어쩌면 나의 노력이 커프 후작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이게 일종의 변화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제시와 하녀들은 가뿐해하는 날 보며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망치를 든 채 생긋 웃었다.
학교 다니면서 실습하다 보니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고.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낸 후, 어느덧 친구들이 오기로 한 날이 밝았다. 나는 다과회 장소를 다시 한번 둘러본 후, 저택 입구로 나가서 아르지나와 데이지를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정문 안으로 마차 두 대가 들어왔다. 각각의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우아한 발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에 열기를 띠는 다갈색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에 수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눈에 확 들어오는 원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화려한 디자인인데도 마치 제 피부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아마 이쪽이 원작의 악녀, 아르지나 멜 공녀인 모양이다. 그녀는 멜 공작가의 외동딸이라 차기 가주가 될 예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아르지나 공녀 옆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쪽이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겠군.
그녀는 잿빛 머리카락을 단아하게 틀어 올리고 분홍색 장미 장식을 꽂아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진회색 눈동자가 강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르지나 공녀님, 데이지 영애. 어서 오세요.”
나는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일단 자리를 이동하죠.”
나는 아르지나와 데이지를 데리고 다과회 장소로 이동했다. 정원으로 가는 동안 극진히 존댓말을 쓰는 나를 보며 아르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예의를 차리고 그러니? 보는 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네 저택인데 편하게 해.”
“그러게, 아카데미에서 룸메이트로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너 존댓말 하는 거 오랜만에 들어 보는 것 같아.”
데이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르지나를 거들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었다. 이게 아닌가? 등골에 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백날 이아른에게 전해 들어 봤자 직접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 초장부터 헛발질이다.
살짝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정원에 도착했다. 아르지나와 데이지는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온몸으로 반가운 티를 내던 아르지나가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하는 나를 보며 눈썹을 올렸다.
“릴릴, 설마 계속 존댓말을 쓸 생각은 아니지?”
“물론 아니지. 아까는 그냥……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았거든. 하하. 다들 오랜만에 보네.”
나름 티 나지 않게 둘러댄 것 같았다.
“응, 무도회 이후로 오랜만이네. 저번에 이아른에게서 들었어. 네 몸 상태가 심히 안 좋다고 그러더라고. 게다가 너 지금 기억도 흐릿한 상태라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면목이 없어. 미안해. 내 불찰이야.”
아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아르지나는 잔뜩 풀 죽은 채 말했다. 나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온화하게 대꾸했다.
“그건 말 그대로 사고였어. 네가 미안해할 이유 없어. 내가 네 탓을 하려고 널 여기까지 불렀겠니. 우리 다 잊고, 오랜만에 차 마시면서 즐겁게 수다나 떨자.”
“하긴, 네가 이렇게 정식으로 초대해 준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초대를 받아서 정말 영광이야.”
다행히 아르지나는 금세 다시 활짝 웃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데이지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아무리 기억이 흐려져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구나. 릴릴, 너는 항상 그렇게 너그럽게 넘어가서 탈이야. 아르지나에게 추가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데이지, 너 자꾸 그럴래? 아니, 아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니? 만약 있다면 편하게 말해도 돼, 릴릴.”
짓궂게 구는 데이지에게 툴툴거리나 싶더니, 아르지나는 금세 나를 향해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뭐지.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내게 엄청 친근하게 굴었다. 또 내가 죄 없는 사람들을 괜히 의심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내가 전에 소설에서 봤던 묘사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까칠하기만 할 줄 알았던 아르지나는 의외로 정이 깊었다. 나를 올곧게 향하는 다갈색 눈동자에서 깊은 호감이 엿보였다.
데이지도 풍기는 이미지와 다르게 간간이 위트 있게 한마디씩 툭툭 던지며 긴장을 풀어 줬다.
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도대체 이 세계는 어느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모르겠다.
데이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 참. 얼마 전에 황궁에서 우연히 이아른을 만났었어. 너 황녀님이 개최하시는 다과회에 참석한다며. 정말 괜찮겠어?”
“응,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사고 후유증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거야. 내가 예전에 봤던 논문 중에 후유증에 관련된 게 있었는데…….”
데이지는 금세 진지해져서는 내게 이것저것 일러 주었다.
겨우 이 정도 사고로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지인들이 많다니. 릴릴도 참 복받은 사람이다. 나는 눈매를 곱게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