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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기묘한 상황 (4)
“누님께서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어요. 전부 불미스러운 사고 때문인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힘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 줘요.”
“고마워.”
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 이아른. 예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그건 갑자기 왜요?”
“그냥. 기억을 잃으니까 나 자체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서. 혹시 알아? 네가 해 준 얘기 덕에 기억을 되찾게 될지.”
반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나름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이아른도 납득할 만한 핑계였는지,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음……. 좋은 분이었어요.”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고……. 자세히 이야기해 줘.”
“이야기요?”
“그래, 최대한 자세하게. 마침 다음 달에 황녀님이 다과회도 주최하시잖아. 계속 기억 못 찾다가 거기 가서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아, 그것도 그러네요.”
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아른의 낯빛이 문득 흐려졌다.
“누님, 차라리 다과회에는 불참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거기 가면 힘들어하실 것 같은데…….”
“아니야, 사교계에 복귀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시기도 적절하고.”
나는 이아른이 조심스럽게 건넨 제안을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누님…….”
“미안해.”
낑낑거리는 이아른에게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엮이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지.
게다가 주최자도 다름 아닌 원작의 여자 주인공인 르티아 델리아 황녀였다. 누가 생각해도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은 모두 그 자리에 모일 거라는 걸.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제게는 가장 훌륭한 가족이에요. 사교계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셨고요. 누님과 특히 친분이 깊은 분들은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 아르지나 멜 공녀님이죠. 황녀님과도 잘 지내셨고요.”
“나와 제일 친분이 깊은 사람이……. 그렇구나.”
“네, 아르지나 공녀님과 데이지 영애는 누님이 쓰러지셨을 때도 엄청 걱정하셨어요. 특히 아르지나 공녀님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하셨죠.”
나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이아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내 완쾌한 모습도 보여 줄 겸 황실 다과회에 가기 전에 두 사람과 따로 소소하게 작은 다과회라도 가져야겠는걸.”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라. 아마 백작가의 영애일 것이다.
그녀도 원작에서 악역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릴릴이 원작의 악역 조연이라서 그런지 다른 악역들과 친분이 깊은 모양이다.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마냥 악역들끼리만 잘 지낸 게 아니라 나름 두루두루 잘 교류하며 지냈던 걸까?
뭐, 나쁘지 않았다. 적이 많은 것보단 없는 편이 나으니까. 아무리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좋은 인상으로 얼굴도장을 찍어 놓는 게 좋았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내가 황녀와도 잘 지냈다는 점이다. 그동안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이아른은 줄곧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카페론 발티아르 대공도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응?
가만히 듣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페론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아른의 표정도 어째 묘했다.
뭐야? 남자 주인공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카페론 발티아르라면 소꿉친구였던 황녀와 관계를 잘 유지하다 순조롭게 결혼에 이르는 인물이다.
황녀 외의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작중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르티아에게만 마음을 쏟았던 순정남으로 기억한다.
애초에 여자를 돌 보듯 하는데, 하물며 악역 조연인 릴릴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그가 릴릴과 평소에 잘 지냈었다고? 정말 의외의 친분이었다.
문득 다친 나를 걱정하는 문구로 가득하던, 그 정성 넘치던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 각하께서?”
“네. 왜요? 혹시 대공 각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그냥……. 신기해서.”
“누님도 대공께서 보내신 편지를 확인하셨죠? 진귀한 약재도 많이 보내 주셨어요. 저번에도 황궁에서 마주쳤는데 어찌나 누님의 안부를 자세히 물어보시던지…….”
이아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만. 그거 그냥 예의상 보낸 것 아니었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럼 제가 감히 누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어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채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음…….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그분이 황녀님하고만 친분이 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 말에 이아른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순한 강아지 같았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뭐, 친분이 깊은 건 사실이지만 누님도 아시다시피 두 분 사이에 충돌이 잦잖아요.”
아니, 뭐라고?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잘 싸워?
물론 하고 많은 작품들 중에 ‘배틀 커플’ 키워드의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두 사람만큼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르티아와 카페론은 서로 좋아하며 가볍게 삽질만 하다가, 결국 이어져서 풋풋하고 달달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는데.
그런데 지금 이아른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소꿉친구, 단순한 친구 관계로만 느껴졌다. 어째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다.
멍하니 생각하던 중,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졌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늘은 이아른이 손을 흔들어서 생긴 것이었다.
“저어…… 누님? 괜찮으시죠?”
“어, 그럼. 당연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영혼 없이 웃었다. 영혼이 없는 게 느껴졌는지 자연스레 이아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애써 그를 어르고 달랬다. 아픈 사람은 난데 어째 당사자보다 반응이 더 과한 것 같다.
[오늘 날씨 좋네.]
[응, 햇볕 쬐기 좋은 날씨 같아.]
그때 어디선가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곧바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곳엔 나와 이아른밖에 없었다. 소리가 들려온 쪽에 있는 거라곤 정원에 핀 꽃들뿐이었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아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누님, 왜 그러세요?”
“아니,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그래요? 무슨 소리요? 저는 못 들었는데요.”
“그래……?”
그 발랄한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소리가 들린 쪽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설마 저 꽃이 말했을 리는 없고.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어쩌면 외상 후에 생긴 이상 증세일지도 모르겠다.
잘못 들은 거겠지. 기분 탓일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틀 뒤, 이아른이 말한 대로 제라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금발에 자줏빛 눈을 지닌 훤칠한 남자였다. 이아른과 또래라고 들었는데, 이아른이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그는 날카롭고 딱딱한 편이었다.
나는 자리에 안내하고 제시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릴릴 누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제라드.”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릴릴과 제라드가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다 알고 있는지 내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누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보다시피 좋아졌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는 그와 차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원체 무뚝뚝한 성격인 건지 거의 나 혼자 얘기하게 되었다. 좀처럼 그의 속을 알기 힘들었다. 작중에서도 특별히 언급된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내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살피며 남몰래 분석했다.
「우직한 군인형의 남자.
딱딱한 면모가 있으나 릴릴을 꽤 생각해 주는 것으로 추정됨.」
제라드가 돌아간 후, 내 수첩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추가되었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제시, 괜찮은 편지지가 있니?”
“갑자기 편지지는 어쩐 일로요? 누워 계신 동안 받으신 편지에는 전부 답장하셨잖아요.”
“아, 초대장을 좀 쓰려고. 조만간 아르지나와 데이지만 불러서 소소하게 다과회를 가져 볼까 생각 중이거든.”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마침 예쁜 것이 있어요.”
제시는 바로 편지지를 가져왔다. 테두리에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려져 있고 은은한 향이 풍기는 편지지였다.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한참 고민하며 내용을 채운 뒤, 두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기묘한 상황 (4)
“누님께서 미안해하실 게 뭐가 있어요. 전부 불미스러운 사고 때문인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힘든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 줘요.”
“고마워.”
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 이아른. 예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그건 갑자기 왜요?”
“그냥. 기억을 잃으니까 나 자체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서. 혹시 알아? 네가 해 준 얘기 덕에 기억을 되찾게 될지.”
반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나름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이아른도 납득할 만한 핑계였는지,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음……. 좋은 분이었어요.”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고……. 자세히 이야기해 줘.”
“이야기요?”
“그래, 최대한 자세하게. 마침 다음 달에 황녀님이 다과회도 주최하시잖아. 계속 기억 못 찾다가 거기 가서 실수라도 하면 어떡해.”
“아, 그것도 그러네요.”
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아른의 낯빛이 문득 흐려졌다.
“누님, 차라리 다과회에는 불참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거기 가면 힘들어하실 것 같은데…….”
“아니야, 사교계에 복귀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시기도 적절하고.”
나는 이아른이 조심스럽게 건넨 제안을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누님…….”
“미안해.”
낑낑거리는 이아른에게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엮이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지.
게다가 주최자도 다름 아닌 원작의 여자 주인공인 르티아 델리아 황녀였다. 누가 생각해도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은 모두 그 자리에 모일 거라는 걸.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제게는 가장 훌륭한 가족이에요. 사교계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셨고요. 누님과 특히 친분이 깊은 분들은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 아르지나 멜 공녀님이죠. 황녀님과도 잘 지내셨고요.”
“나와 제일 친분이 깊은 사람이……. 그렇구나.”
“네, 아르지나 공녀님과 데이지 영애는 누님이 쓰러지셨을 때도 엄청 걱정하셨어요. 특히 아르지나 공녀님은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하셨죠.”
나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이아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내 완쾌한 모습도 보여 줄 겸 황실 다과회에 가기 전에 두 사람과 따로 소소하게 작은 다과회라도 가져야겠는걸.”
데이지 시니트라 영애라. 아마 백작가의 영애일 것이다.
그녀도 원작에서 악역으로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릴릴이 원작의 악역 조연이라서 그런지 다른 악역들과 친분이 깊은 모양이다.
사교계에서의 평판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마냥 악역들끼리만 잘 지낸 게 아니라 나름 두루두루 잘 교류하며 지냈던 걸까?
뭐, 나쁘지 않았다. 적이 많은 것보단 없는 편이 나으니까. 아무리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좋은 인상으로 얼굴도장을 찍어 놓는 게 좋았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내가 황녀와도 잘 지냈다는 점이다. 그동안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이아른은 줄곧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카페론 발티아르 대공도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응?
가만히 듣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페론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아른의 표정도 어째 묘했다.
뭐야? 남자 주인공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카페론 발티아르라면 소꿉친구였던 황녀와 관계를 잘 유지하다 순조롭게 결혼에 이르는 인물이다.
황녀 외의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작중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르티아에게만 마음을 쏟았던 순정남으로 기억한다.
애초에 여자를 돌 보듯 하는데, 하물며 악역 조연인 릴릴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그가 릴릴과 평소에 잘 지냈었다고? 정말 의외의 친분이었다.
문득 다친 나를 걱정하는 문구로 가득하던, 그 정성 넘치던 편지가 떠올랐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 각하께서?”
“네. 왜요? 혹시 대공 각하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그냥……. 신기해서.”
“누님도 대공께서 보내신 편지를 확인하셨죠? 진귀한 약재도 많이 보내 주셨어요. 저번에도 황궁에서 마주쳤는데 어찌나 누님의 안부를 자세히 물어보시던지…….”
이아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만. 그거 그냥 예의상 보낸 것 아니었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럼 제가 감히 누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어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싶었다.
나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채 드레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음……. 네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그분이 황녀님하고만 친분이 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 말에 이아른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순한 강아지 같았다.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뭐, 친분이 깊은 건 사실이지만 누님도 아시다시피 두 분 사이에 충돌이 잦잖아요.”
아니, 뭐라고?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잘 싸워?
물론 하고 많은 작품들 중에 ‘배틀 커플’ 키워드의 소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두 사람만큼은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르티아와 카페론은 서로 좋아하며 가볍게 삽질만 하다가, 결국 이어져서 풋풋하고 달달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였는데.
그런데 지금 이아른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소꿉친구, 단순한 친구 관계로만 느껴졌다. 어째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다.
멍하니 생각하던 중,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졌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늘은 이아른이 손을 흔들어서 생긴 것이었다.
“저어…… 누님? 괜찮으시죠?”
“어, 그럼. 당연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영혼 없이 웃었다. 영혼이 없는 게 느껴졌는지 자연스레 이아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애써 그를 어르고 달랬다. 아픈 사람은 난데 어째 당사자보다 반응이 더 과한 것 같다.
[오늘 날씨 좋네.]
[응, 햇볕 쬐기 좋은 날씨 같아.]
그때 어디선가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곧바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곳엔 나와 이아른밖에 없었다. 소리가 들려온 쪽에 있는 거라곤 정원에 핀 꽃들뿐이었다.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아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누님, 왜 그러세요?”
“아니,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그래요? 무슨 소리요? 저는 못 들었는데요.”
“그래……?”
그 발랄한 목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소리가 들린 쪽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설마 저 꽃이 말했을 리는 없고.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어쩌면 외상 후에 생긴 이상 증세일지도 모르겠다.
잘못 들은 거겠지. 기분 탓일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틀 뒤, 이아른이 말한 대로 제라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금발에 자줏빛 눈을 지닌 훤칠한 남자였다. 이아른과 또래라고 들었는데, 이아른이 부드러운 인상이라면 그는 날카롭고 딱딱한 편이었다.
나는 자리에 안내하고 제시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릴릴 누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제라드.”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릴릴과 제라드가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다 알고 있는지 내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그동안 잘 지냈어?”
“네. 누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보다시피 좋아졌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는 그와 차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원체 무뚝뚝한 성격인 건지 거의 나 혼자 얘기하게 되었다. 좀처럼 그의 속을 알기 힘들었다. 작중에서도 특별히 언급된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내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유심히 살피며 남몰래 분석했다.
「우직한 군인형의 남자.
딱딱한 면모가 있으나 릴릴을 꽤 생각해 주는 것으로 추정됨.」
제라드가 돌아간 후, 내 수첩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추가되었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제시, 괜찮은 편지지가 있니?”
“갑자기 편지지는 어쩐 일로요? 누워 계신 동안 받으신 편지에는 전부 답장하셨잖아요.”
“아, 초대장을 좀 쓰려고. 조만간 아르지나와 데이지만 불러서 소소하게 다과회를 가져 볼까 생각 중이거든.”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마침 예쁜 것이 있어요.”
제시는 바로 편지지를 가져왔다. 테두리에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려져 있고 은은한 향이 풍기는 편지지였다.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한참 고민하며 내용을 채운 뒤, 두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