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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기묘한 상황 (3)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무도회 때의 일…… 말이야. 혹시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내가 머뭇거리며 묻자, 이아른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펴고는 입을 열었다.

“으음, 그 무도회는 아르지나 공녀님께서 주최하신 거였어요.”

“아, 그래?”

“그런데 누님이 파티장에서 미끄러지셔서…… 다치시게 된 거예요. 그날 공녀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홀을 담당했던 고용인을 그 자리에서 해고하셨을 정도로요.”

“바닥이 원래 미끄러운 편이었나?”

“물기가 좀 있었대요.”

“내가 그날 신은 구두는?”

“그야 누님이 항상 애용하시는 그 구두죠. 저기에 있네요.”

나는 이아른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구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굽 부분을 꼼꼼히 살펴봤다.

이거…… 잘 미끄러지는 재질인데.

고무나 가죽 같은 덜 미끄러운 재질을 덧댄 흔적이 있긴 한데 헤진 건지, 아니면 떨어진 건지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구두에 문제가 생겼던 건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구두를 쳐다보고 있으니 이아른이 덧붙여 말했다.

“누님은 그런 구두를 제일 좋아하시잖아요. 촉감이 마음에 드신다고…….”

“아,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너도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

“누님……. 아직도 안색이 안 좋으신데…….”

“조금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좀 쉬면 나아질 거야.”

“네, 그럼 저는 물러가 볼게요. 혹시 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줘요.”

이아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방에서 나갔다. 찰나였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가 나가자마자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어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 모르겠는데……?

소설 속에서 아르지나 멜 공녀는 나름대로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냉철한 모습을 고수한다고 묘사되었다.

그런데 그런 아르지나 멜 공녀가 펄펄 날뛰며 화를 냈다고? 그것도 순수하게 릴릴이 다친 게 걱정돼서……?

아무리 생각해도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인 건지, 도대체 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직접 만나 봐야 감이 잡히려나.



  



의식이 없던 며칠 동안 쌓여 버린 편지 더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카페론 발티아르, 아르지나 멜, 데이지 시니트라, 르티아 델리아, 칼라일 델리아…… 기타 등등.

모두가 쾌유를 빈다는 내용으로 기나긴 편지를 보내왔다. 덤으로 좋은 약재를 딸려 보낸 사람도 있었다.

“아니,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야?”

편지를 하나하나 읽는 동안 점점 미궁에 빠졌다. 진심인 건지 형식적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편지를 읽어 봐도 혼란만 가중될 뿐이라 일단은 감사의 답장만 작성해서 보낸 후 한쪽에 넣어 뒀다.

이곳은 신기하게도 편지를 문자 메시지처럼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문이나 주요 기관 같은 곳에 마련된 편지함에 편지를 넣으면 바로 수취인에게 전달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것도 ‘꽃 정령의 가호’라고 말했다.

물론 배달할 수 있는 건 편지뿐이라는 게 함정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덕분에 먼 곳에 편지를 보낼 때도 덜 답답하고, 다른 사람들과 당일에 약속을 잡을 수도 있는데.

물론 나는 약속은커녕 혼자 나들이도 나갈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집에서 요양하는 나날만 이어졌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제시와 이아른이 나서서 좀 더 쉬어야 한다며 만류하는 통에 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를 대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이것 참, 정말 과보호라니까.”

살면서 이렇게까지 보호받은 적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도 내가 돌아다닐 때면 온 정신을 집중해 쳐다봐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단순히 서재에 가는 것도 엄청 신경 써야 했다.

꽃 정령에 대한 책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서재에 가야 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괜히 관심을 사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관련 서적에도 저번에 제시가 알려 준 것과 같은 건국 설화밖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딱히 꽃 정령의 정보나 능력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한 사람의 영혼을 다른 사람에게 빙의시키는,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특별한 능력이 정말 꽃 정령에게 있는 걸까?

하지만 궁금해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날 이후로 꽃 정령을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의 서재 견학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기본적인 교양이나 지식을 익혀야 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예법이나 몸가짐은 체화된 것인지 능숙하게 구현해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행인 점은 언어 구사 능력이나 읽고 쓰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곳의 문자는 알파벳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는데, 처음 보는 글자임에도 책이 자연스럽게 술술 읽혔다.

그리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제껏 내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 했을 정도로.

정말 안심이 됐다. 낯선 곳에서 말도 안 통하면 얼마나 힘들겠어.

“앗, 아가씨. 언제 서재에 오신 거예요?”

“하하, 좀 봐주라, 제시.”

서재를 나오다 나를 찾고 있던 제시와 마주쳤다. 나는 눈을 세모꼴로 뜨는 제시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뒤에는 이아른이 있었다. 그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누님, 정말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괜찮아요?”

“이아른, 내가 그렇게 허약해 보여?”

“네.”

윽. 이아른은 놀랍게도 망설임 없이 단번에 긍정했다.

나는 애써 팔도 돌려 보고 다리도 들어 보이며 건강하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이렇게 멀쩡한데, 뭘. 이따 정원에서 바람도 좀 쐬고 싶은데 정말 안 될까?”

“으음, 누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내가 두 손을 모아 처량한 표정까지 지으며 졸라 대자 이아른은 한 발짝 물러났다. 역시 그는 릴릴을 못 이기는 듯했다.

솔직히 원래 릴릴의 성격이라면 이런 짓은 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릴릴이 되어 버렸다. 나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소의 릴릴답지 않아서 이상해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칫하면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까.

이곳에 남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관심은 오로지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내겐 상관없었다. 나는 간절했다.

이런 속내를 감춘 채 모른 척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아른,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정원을 구경하는 동안 같이 있어 줄래?”

“음…….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이아른은 흔쾌히 수락했다. 제시는 사이좋은 남매가 보기 좋은 듯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이아른과 함께 커다란 정원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다채로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기에 앞으로 정원을 자주 찾게 될 것 같았다.

저택에 있는 여러 정원들 중에서도 이곳은 유독 크고 화려한 편이라 앉아 있거나 누군가와 차를 마시며 함께 담소를 나누기 좋을 것 같았다.

나와 이아른은 정원 한편에 놓인 테이블 쪽으로 가서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풍경이 좋네, 이아른.”

“그러게 말이에요. 아 참, 그러고 보니 제라드도 병문안차 들르겠다고 하더군요.”

“으음, 그러니까…….”

“우리 사촌이에요. 아카데미 시절에도 함께 잘 지냈고요. 지금 변방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죠. 아버지께 보고할 일이 있어 찾아오는 김에 누님께도 인사드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나는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수첩에 적을 생각이었다.

요 근래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정리 수첩을 한 줄씩 채워 가곤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뭔가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다만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아서 문제지.

일단 뭐라도 하다 보면 변하지 않을까.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선 태풍을 일으키는 것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왠지 이 침묵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혹시 이아른은 내가 알게 모르게 이 상황을 어색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않았을까? 괜히 마음이 찔렸다.

이곳의 사람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낯선 곳이라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무마해 보고자 이아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좀 뜬금없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아른, 네가 내 동생이어서 다행이야. 비록 지금은 기억이 흐려서 너에게 마음 편히 의지하지 못하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는 것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