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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기묘한 상황 (2)









“허허, 이것 참…….”

나는 펜을 내려놓고 수첩을 닫으며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원작 내용과 릴릴에 대한 정리를 마친 것은 좋은데 딱히 별 성과가 없는 것 같았다. 기댈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내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릴릴의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빙의를 시킬 것이라면 기억이라도 줘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꽃 정령아, 아무리 봐도 가장 중요한 게 빠진 것 같은데. 이건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뜻인가.

한참 인상을 찡그리며 고뇌하고 있는데,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 제시예요. 허브티를 가져왔는데 드시겠어요?”

“응, 가져다주면 고맙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꾸며 내어 대답했다. 그러자 제시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은은한 허브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향이 좋네.”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시는 것으로 골라 왔어요.”

나는 차를 홀짝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희한하게도 릴릴 커프와 내 취향이 겹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취향 비슷한 사람이 한둘 있는 것도 아니고.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이겠지.

나는 떠보듯이 질문을 던졌다.

“저기, 제시. 혹시 꽃 정령이라고 알아?”

“네? 그야 당연하죠. 꽃 정령이라면 제커틀 제국 건국 설화에 나오는 영적 존재잖아요?”

“응?”

“제커틀 제국의 상징이 왜 꽃이겠어요. 물론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대 황제 폐하와 꽃 정령의 약속을 기반으로 제커틀 제국이 건국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네, 자세한 것은 관련 서적에 더 잘 나와 있을 거예요.”

예상치 못한 정보에 당황한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원작에서 따로 언급된 적이 없었으니까.

“흐음…….”

내 한숨 때문인지 허브티의 표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나는 고요한 물결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알아봐야겠다고.

“알려 줘서 고마워, 제시.”

“별말씀을요.”

제시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한참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데 제시가 연신 내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제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저어, 후작님과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보러 와도 되냐고 여쭤보셔서……. 두 분 다 그동안 엄청 걱정하셨거든요. 왜, 아가씨가 예전에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크게 아팠던 적이 있으시잖아요. 그때처럼 오랫동안 못 깨어나시는 줄 아셨대요.”

릴릴이 원래 허약 체질이었나? 이것도 모르던 정보였다.

“흐음…….”

어쨌든 내게는 낯선 사람이지만 가족이라면 한번은 만나 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제시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가 말한 사람들은 아마 아버지인 베넥트 커프 후작과 남동생인 이아른 커프이리라.

이아른은 원작의 서브 남자 주인공이다. 여자 주인공인 르티아 황녀에게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여 주는 조신한 캐릭터였고, 릴릴에게도 당연히 좋은 남동생이었지만 홍차 사건을 계기로 멀어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나 보던 이아른을 실제로 마주하게 되다니. 새삼스레 조금 긴장되었다.



제시가 물러나고 잠시 후, 내 방에 베넥트와 이아른이 들어왔다. 베넥트는 금발에 자줏빛 눈동자를 지닌 미중년의 남자였고, 이아른은 금발에 녹안을 지닌 청년이었다.

딱 보자마자 느낀 바로, 상당히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에서는 무언가 ‘깊다’는 느낌이 물씬 느껴졌다.

릴릴이 인형처럼 생겼다면 이쪽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조각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그 수려한 얼굴에 말끔한 제복 차림이 몹시 잘 어울렸다.

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잘생긴 이아른의 모습을 앞에 두고 그저 놀라기만 했다.

내가 말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베넥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릴릴, 몸은 좀 괜찮으냐. 아까 제시가 많이 불안해하더구나.”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다정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익숙하지 않았다. 내 가족은 어디까지나 엄마 한 명뿐이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대에 진학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공대는 취업이 잘되니까. 얼른 번듯한 회사에 취업해서 우리 두 식구 먹여 살려야 하니까.

혼자서 힘들게 나를 길러 주신 엄마께 제대로 된 효도도 해 보지 못하고 떠나오게 되다니. 왠지 모르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많이 도와줬던 절친한 친구들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결국 눈물이 나오려는 건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누님, 괜찮아요?”

이아른이 안절부절못하며 손수건을 꺼내 내 눈가를 살살 닦아 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모양이다. 베넥트는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아직 많이 아픈 게야?”

“아니요, 그냥…….”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아른이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 줬다. 다정한 마음과 걱정이 깃든 녹안과 제대로 마주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달래 주려는 건지 그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아른은 나를 다독이며 더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분들께는 아직 누님이 완쾌하시려면 멀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미리 말해 뒀어요.”

“다른 분들이라니?”

“다들 걱정하고 계세요. 황자님과 황녀님도 그렇고, 공녀님, 대공 각하, 그리고 그날 무도회에 오셨던 영애분들까지 전부요.”

“…….”

할 말을 잃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서로 적대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이좋게 릴릴의 걱정을 하고 있다고?

다시금 충격을 받은 나는 멍하니 이아른의 얼굴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낯에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지하게 걱정스러워하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방이 적막에 잠겼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어색했다. 걱정을 받는 것도 썩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웬만하면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려고 애썼으니까.

베넥트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네가 그때처럼 크게 앓기라도 하는 줄 알고 그간 걱정이 컸단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부디 아프지 말아 다오.”

“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그득 담겨 있었다. 그 절절한 심정이 느껴져서 나조차도 속에서 울컥할 정도였다.

이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차마 그의 앞에서 내가 당신의 진짜 딸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

베넥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아른을 쳐다봤다.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마. 이아른, 릴릴을 잘 도와주거라.”

“네, 아버지.”

이아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작중에도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는 역시 정말 어른스럽고 다정했다.

아버지라…….

입 안에 굴려 본 발음이 껄끄러웠다. 단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단어라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문득 이아른이 내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누님, 정말 괜찮아요?”

“……잠시 생각 좀 했을 뿐이야. 이제 정말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괜찮다고 말씀하시는데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힘든 일이 있다면 제게도 말해 주세요.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고마워.”

눈썹을 축 내리고 섭섭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아른에게 나는 영혼 없이 감사를 표했다.

물론 고마운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고마워하기엔 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생각 회로가 고장 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 속에서 릴릴의 삶을 바꿔야 한다니. 이미 원작의 내용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 것 같아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아른은 여전히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살피고 있었다.

“누님, 역시 더 쉬시는 게 좋겠어요. 다음 달에 있을 다과회도 빠지는 쪽으로…….”

“아니, 갈게.”

“괜찮으시겠어요?”

“그때쯤이면 더 나아질 거야. 아니, 사실 지금도 괜찮아.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머리가 울리는 것뿐이야.”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의 기억을 되살려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비스업 특유의 형식적인 미소였지만 이아른이 어떻게 느끼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에 봤던 어떤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였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꿈속에 있는 것 같을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러자 남자 주인공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현실에 적응하라고.

현실에 적응하려면 주변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다과회에 참석하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마 그때라면 이아른이 조금 전 언급했던 사람들이 웬만큼 모일 테니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보다 먼저 확인할 게 있었다. 이건 제시에게 물어봐도 썩 만족스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이아른에게라도 물어봐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아른,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

내 걱정이 무색하게 이아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오늘따라 너무 어색해하시는 거 아니에요? 누님, 꼭 다른 사람 같아요.”

“하하, 그래……?”

사실 유감스럽게도 정말 다른 사람이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남몰래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아마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것일 거예요. 너무 초조해하진 마세요.”

다행히 이아른은 별다른 의심 없이 혼자 그렇게 단정 지어 버렸다.

그래,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믿는 건 둘째 치고 병원에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아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저 웃는 얼굴을 보니 차마 다른 사람이라고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소중한 가족들 앞에 릴릴의 모습으로 있는 게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