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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기묘한 상황 (1)
“아가씨, 혹시 일어나신 건가요?”
힘겹게 눈꺼풀을 올려 보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덤으로 낯선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야, 난 방금까지 꽃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 일어나신 거 맞죠?”
기쁨이 담긴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뒤로 배경처럼 펼쳐진 방 안은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나는 난데없는 상황에 얼떨떨해져서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응? 여기는 또 어디야?”
“네?”
“아까 하얀 배경보단 낫긴 한데 또 이상한 곳에 와 있네.”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 별것 아니에요.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인지 아나요?”
“어디냐니요, 아가씨의 집이죠!”
“집이요? 우리 집은 이렇게 화려하지 않은데. 그냥 평범한 아파트인데……. 내가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가씨, 죽었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뭘 잘못 말했는지 소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급기야 울 것 같은 표정까지 지었다.
나는 당황해서 머뭇거리며 그녀를 달래려다가, 얼떨결에 뒤편에 있는 거울을 보게 되었다.
가을날 은행잎 색깔 같은 금발이 물결처럼 흘러 내려오고, 녹음을 담은 듯한 싱그러운 녹안을 지닌 소녀가 비쳤다. 무척이나 인형 같은 외모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울이 아니라 그림인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다니 무엇이요?”
“이 상황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데……. 저기 아가씨, 저거 누구 초상화예요?”
“아가씨, 시녀인 제게 아가씨라니요! 그리고 그건 초상화가 아니라 거울이에요…….”
“거울이요? 에이, 무슨. 아……. 그나저나 실례지만 그쪽은 누구신지…….”
“정말 절 잊어버리기라도 하신 건가요? 저 제시예요, 아가씨. 어릴 때부터 아가씨와 자매처럼 지내 온 제시라고요. 저한테 존칭을 쓰시면 안 돼요…….”
제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아까 꽃 정령이 보여 준 내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 같았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우는 소녀를 달래는 법은 모른다. 게다가 여기에서 내가 솔직하게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면 진짜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릴릴 커프 아가씨! 아아, 어쩌면 좋아……. 아가씨는 얼마 전에 무도회에서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뒤로 내내 의식이 없으시더니…….”
“무도회? 사고?”
“네.”
“아, 무도회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사고를 당하긴 했죠.”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트럭.
엄연한 신호 위반이었다. 나는 분명히 초록 불에 걸어갔는데 사람을 치고 가다니.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겨우 취업해서 드디어 광명을 찾나 싶었는데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릴릴 커프’라니. 문득 스쳐 가듯 가볍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샀던 책인 <그 황녀님의 대공>에 나오는 악역 조연 캐릭터 이름 같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젓다가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내 이름은 릴릴 커프가 아니에요.”
“아가씨,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아가씨는 커프 후작가의 영애, 릴릴 커프 영애시잖아요.”
어째 나와 제시라는 소녀의 대화는 조금씩 엇갈리고 있었다. 환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의 소녀도 눈을 깜빡였다. 어색하게 손을 올려 봤다. 똑같이 행동했다.
이런, 맙소사.
거울 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 줄을 놓아 버릴 지경이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여기…… 제커틀 제국이야?”
“네! 이제 기억이 좀 나시나요?”
미쳤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제시가 아프면 더 쉬어야 한다며 약을 갖다주었다.
제시는 내가 약을 제대로 먹는지 확인까지 해 놓고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줄곧 나를 지켜봤다. 당연히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나는 제시가 불편해졌다.
“저기, 제시. 일단 물러나 주지 않을래?”
“아, 그럴게요. 푹 쉬세요. 일단 다른 분들께도 아가씨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릴게요. 많이 걱정하고 계시니까요.”
나를 쳐다보는 제시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얼떨결에 약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제시가 말하는 ‘다른 분들’을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뭔가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그 황녀님의 대공>이라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악역 조연 캐릭터에 빙의된 모양이다.
“하필이면 릴릴 커프라니……. 아니, 이건 아니잖아! 주인공이나 그냥 비중 없는 조연도 아니고 악역 조연이라고? 설마 그 꽃 정령이 말했던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사람이 릴릴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답이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꽃 정령아. 쉬울 거라면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들었어야 했는데. 사기 계약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일. 얼른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쓸데없이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은 관리를 잘 받은 건지, 아니면 타고난 건지 결이 좋고 부드러웠다. 그게 더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혹시 몰라 양손으로 뺨을 철썩 쳐 봤지만 말랑한 볼만 얼얼할 뿐이었다.
넓은 방 안에 나 혼자 남으니 고요했다. 나는 조용한 가운데 애써 마음을 차분히 다잡으려 했지만 너무나 엉뚱한 상황이라 쉽지 않았다.
“허허,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하고, 하얀 공간에서 꽃 정령을 만나고, 이제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악역 조연이 되었다니.
“이런 일은 로맨스 판타지 속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건만……. 내가 살다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꽃 정령은 ‘누군가의 삶’이라고만 말했지, 그게 꼭 실존 인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충분히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아직도 이 비현실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한 현상이 환상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보고 겪은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일단 삶을 바꿔야 하는 사람이 릴릴 커프인 것은 맞겠지.”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곱고 새하얀 손까지 이질적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했다.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면.
아직도 거울을 통해 본 소중한 사람들, 회사에 붙었다는 문자 메시지, 읽지 못한 책들,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다.
“흠, 나라고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어. 시작도 해 보기 전에 포기하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버릴 테니까. 일단 내용 정리부터 해 보자.”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찾아 <그 황녀님의 대공>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에 봤지만 좋아하던 글이라 그나마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여자 주인공인 르티아 델리아 황녀와 남자 주인공인 카페론 발티아르 대공의 달달한 연애물이었지.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가게 되는 감정선이 끝내줬어.”
나는 눈을 감았다.
「르티아와 카페론은 황궁의 뒤편에 자리한 정원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카페론, 너…….”
“르티아, 이번만큼은 호칭을 빼고 부르고 싶어.”
르티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사실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소꿉친구이자 훌륭한 지지자인 그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는 것을.
카페론은 르티아의 곱슬거리는 흑발을 뒤로 살짝 넘겨 주며 가까이 다가왔다.
“친구나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데. 부디 네 옆에 내가 자리하면 안 될까? 늘 그랬듯이.”」
책의 내용을 회상하던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이지, 친구처럼 지내던 카페론이 훅 다가오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지. 릴릴 커프는…….”
<그 황녀님의 대공>은 안 그래도 조연의 비중이 적은 작품이었다. 게다가 릴릴 커프는 악역 조연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글로 내용을 정리했다. 간략한 원작의 줄거리나 릴릴 커프가 작중에 한 일 따위를.
내가 릴릴 커프를 기억하는 이유는 너무 대충 지은 것 같은 이름 때문이었다.
게다가 릴릴은 르티아에게 계속 거슬리게 굴다가, 그녀의 드레스에 일부러 홍차를 쏟은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처리된 인물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았다.
“아직은 별일 없는 것 같은데 홍차를 쏟기 전의 상황인 건가? 아니면 아무 일도 안 저지른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억을 더듬어 릴릴 커프가 등장하는 구간을 되짚어 봤다.
파티장에서 영애들과 부채를 부치는 장면.
티 파티에서 이름 모를 다른 영애들에게 짤막한 대사를 던지는 장면.
악녀인 아르지나를 도왔다는 묘사 한두 줄.
그리고 대망의 황녀 드레스에 홍차를 쏟는 장면.
홍차를 쏟고 감옥에 간 후부터는 아예 등장한 적이 없었지. 인생을 종 친 거나 다름없었다.
기묘한 상황 (1)
“아가씨, 혹시 일어나신 건가요?”
힘겹게 눈꺼풀을 올려 보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덤으로 낯선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뭐야, 난 방금까지 꽃 정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 일어나신 거 맞죠?”
기쁨이 담긴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뒤로 배경처럼 펼쳐진 방 안은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나는 난데없는 상황에 얼떨떨해져서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응? 여기는 또 어디야?”
“네?”
“아까 하얀 배경보단 낫긴 한데 또 이상한 곳에 와 있네.”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 별것 아니에요.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인지 아나요?”
“어디냐니요, 아가씨의 집이죠!”
“집이요? 우리 집은 이렇게 화려하지 않은데. 그냥 평범한 아파트인데……. 내가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가씨, 죽었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뭘 잘못 말했는지 소녀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급기야 울 것 같은 표정까지 지었다.
나는 당황해서 머뭇거리며 그녀를 달래려다가, 얼떨결에 뒤편에 있는 거울을 보게 되었다.
가을날 은행잎 색깔 같은 금발이 물결처럼 흘러 내려오고, 녹음을 담은 듯한 싱그러운 녹안을 지닌 소녀가 비쳤다. 무척이나 인형 같은 외모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울이 아니라 그림인가?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다니 무엇이요?”
“이 상황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데……. 저기 아가씨, 저거 누구 초상화예요?”
“아가씨, 시녀인 제게 아가씨라니요! 그리고 그건 초상화가 아니라 거울이에요…….”
“거울이요? 에이, 무슨. 아……. 그나저나 실례지만 그쪽은 누구신지…….”
“정말 절 잊어버리기라도 하신 건가요? 저 제시예요, 아가씨. 어릴 때부터 아가씨와 자매처럼 지내 온 제시라고요. 저한테 존칭을 쓰시면 안 돼요…….”
제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아까 꽃 정령이 보여 준 내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 같았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우는 소녀를 달래는 법은 모른다. 게다가 여기에서 내가 솔직하게 ‘당신이 누군지 모른다’고 말하면 진짜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릴릴 커프 아가씨! 아아, 어쩌면 좋아……. 아가씨는 얼마 전에 무도회에서 사고를 당하셨어요. 그 뒤로 내내 의식이 없으시더니…….”
“무도회? 사고?”
“네.”
“아, 무도회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사고를 당하긴 했죠.”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트럭.
엄연한 신호 위반이었다. 나는 분명히 초록 불에 걸어갔는데 사람을 치고 가다니.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겨우 취업해서 드디어 광명을 찾나 싶었는데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릴릴 커프’라니. 문득 스쳐 가듯 가볍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샀던 책인 <그 황녀님의 대공>에 나오는 악역 조연 캐릭터 이름 같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젓다가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내 이름은 릴릴 커프가 아니에요.”
“아가씨,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장난치시는 건 아니죠? 아가씨는 커프 후작가의 영애, 릴릴 커프 영애시잖아요.”
어째 나와 제시라는 소녀의 대화는 조금씩 엇갈리고 있었다. 환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의 소녀도 눈을 깜빡였다. 어색하게 손을 올려 봤다. 똑같이 행동했다.
이런, 맙소사.
거울 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 줄을 놓아 버릴 지경이었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여기…… 제커틀 제국이야?”
“네! 이제 기억이 좀 나시나요?”
미쳤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제시가 아프면 더 쉬어야 한다며 약을 갖다주었다.
제시는 내가 약을 제대로 먹는지 확인까지 해 놓고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줄곧 나를 지켜봤다. 당연히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나는 제시가 불편해졌다.
“저기, 제시. 일단 물러나 주지 않을래?”
“아, 그럴게요. 푹 쉬세요. 일단 다른 분들께도 아가씨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릴게요. 많이 걱정하고 계시니까요.”
나를 쳐다보는 제시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얼떨결에 약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제시가 말하는 ‘다른 분들’을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뭔가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그 황녀님의 대공>이라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악역 조연 캐릭터에 빙의된 모양이다.
“하필이면 릴릴 커프라니……. 아니, 이건 아니잖아! 주인공이나 그냥 비중 없는 조연도 아니고 악역 조연이라고? 설마 그 꽃 정령이 말했던 인생을 바꿔야 한다는 사람이 릴릴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답이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꽃 정령아. 쉬울 거라면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들었어야 했는데. 사기 계약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이미 늦은 일. 얼른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쓸데없이 찰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은 관리를 잘 받은 건지, 아니면 타고난 건지 결이 좋고 부드러웠다. 그게 더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혹시 몰라 양손으로 뺨을 철썩 쳐 봤지만 말랑한 볼만 얼얼할 뿐이었다.
넓은 방 안에 나 혼자 남으니 고요했다. 나는 조용한 가운데 애써 마음을 차분히 다잡으려 했지만 너무나 엉뚱한 상황이라 쉽지 않았다.
“허허,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하고, 하얀 공간에서 꽃 정령을 만나고, 이제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악역 조연이 되었다니.
“이런 일은 로맨스 판타지 속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건만……. 내가 살다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 꽃 정령은 ‘누군가의 삶’이라고만 말했지, 그게 꼭 실존 인물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충분히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아직도 이 비현실적이고 과학적이지 못한 현상이 환상처럼 느껴졌지만 내가 보고 겪은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일단 삶을 바꿔야 하는 사람이 릴릴 커프인 것은 맞겠지.”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곱고 새하얀 손까지 이질적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익숙해져야 했다.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해서라면.
아직도 거울을 통해 본 소중한 사람들, 회사에 붙었다는 문자 메시지, 읽지 못한 책들,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다.
“흠, 나라고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어. 시작도 해 보기 전에 포기하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버릴 테니까. 일단 내용 정리부터 해 보자.”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찾아 <그 황녀님의 대공>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꽤 오래전에 봤지만 좋아하던 글이라 그나마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여자 주인공인 르티아 델리아 황녀와 남자 주인공인 카페론 발티아르 대공의 달달한 연애물이었지.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가게 되는 감정선이 끝내줬어.”
나는 눈을 감았다.
「르티아와 카페론은 황궁의 뒤편에 자리한 정원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카페론, 너…….”
“르티아, 이번만큼은 호칭을 빼고 부르고 싶어.”
르티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사실 그녀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소꿉친구이자 훌륭한 지지자인 그가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는 것을.
카페론은 르티아의 곱슬거리는 흑발을 뒤로 살짝 넘겨 주며 가까이 다가왔다.
“친구나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이어 가고 싶은데. 부디 네 옆에 내가 자리하면 안 될까? 늘 그랬듯이.”」
책의 내용을 회상하던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이지, 친구처럼 지내던 카페론이 훅 다가오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지. 릴릴 커프는…….”
<그 황녀님의 대공>은 안 그래도 조연의 비중이 적은 작품이었다. 게다가 릴릴 커프는 악역 조연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글로 내용을 정리했다. 간략한 원작의 줄거리나 릴릴 커프가 작중에 한 일 따위를.
내가 릴릴 커프를 기억하는 이유는 너무 대충 지은 것 같은 이름 때문이었다.
게다가 릴릴은 르티아에게 계속 거슬리게 굴다가, 그녀의 드레스에 일부러 홍차를 쏟은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처리된 인물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았다.
“아직은 별일 없는 것 같은데 홍차를 쏟기 전의 상황인 건가? 아니면 아무 일도 안 저지른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기억을 더듬어 릴릴 커프가 등장하는 구간을 되짚어 봤다.
파티장에서 영애들과 부채를 부치는 장면.
티 파티에서 이름 모를 다른 영애들에게 짤막한 대사를 던지는 장면.
악녀인 아르지나를 도왔다는 묘사 한두 줄.
그리고 대망의 황녀 드레스에 홍차를 쏟는 장면.
홍차를 쏟고 감옥에 간 후부터는 아예 등장한 적이 없었지. 인생을 종 친 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