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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수화기를 내려놓자 차라락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공중전화 몸통을 뒤덮은 이름이며 욕설 따위 조잡한 낙서를 감흥 없이 훑다가 요한은 올해 최고의 화제였던, 반으로 접는 휴대용 전화기를 떠올렸다.
모토로라에서 나온 스타택은 첫눈에 맘에 쏙 들었지만 가격이 무려 1천 달러나 한다. 한 달 집세에 생활비를 합친 것과 맞먹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비즈니스맨도 월스트리트 주식 중개인도 아니니 휴대전화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애써 구매욕을 꺾었다. 도심에 지천으로 널린 게 공중전화다. 휴대용 전화기라니,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뭐. 요한은 발치에 내려 두었던 스프레이 캔 꾸러미를 다시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5층짜리 건물 뒤편으로 돌아 관리인이 주로 쓰는 뒷문을 열었다. 계단 예닐곱 개를 경쾌하게 내려가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났다. 지면 아래로 절반 넘게 박힌 반지하층은 볕이 통 안 들어 24시간 형광등을 켜 둔다. 연한 곰팡내 사이로 풍겨 오는 진한 세제 냄새. 요한은 공용 세탁실을 지나 암녹색 철제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묵직한 문 너머 드러난 아파트 내부는 화창한 날씨와 딴 세상처럼 음습하고 컴컴하다.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모두 채웠다. 발끝으로 운동화를 대강 벗어 두고는 아담한 거실을 가로질러 한 개뿐인 방으로 들어갔다. 손바닥만 한 창문조차 두꺼운 커튼으로 가린 탓에 가구도 몇 없이 휑한 실내가 몹시 어두웠다. 제 키만 한 스탠드로 다가가 스위치를 올리자 노란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나무 마루가 깔린 방 안에는 낡아 빠진 퀸 사이즈 침대 한 개와 협탁,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초록색 철제 스탠드, 그리고 큼지막한 붐박스 하나가 놓여 있다.
요한은 침대 위에 털썩 앉은 채 아래쪽으로 팔을 뻗었다. 모서리가 구겨진 운동화 상자를 더듬어 끄집어내자 다람쥐 꼬리처럼 뭉친 먼지 덩이가 주르륵 딸려 온다. 털어 내지 않고 그냥 상자를 열었다. 맥주 열 병이랑 스프라이트 스물다섯 캔. 기억해 둔 주문대로 에시드 시트 열 장을 헤아려 비닐 팩에 넣고 마리화나 25온스를 함께 신문지로 쌌다. 메트로 신문 지면에는 NYPD 경관 모집 공고가 실려 있다. 정의로운 뉴욕시를 위해 봉사하십시오. 코끝으로 웃으며 펜을 집어 뺨으로 꼭지를 눌렀다.
접착 메모지에 숫자 7과 알파벳 T를 휘갈겨 써 붙인 다음 협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곧 팔려 나갈 꾸러미 여섯 개가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대기 중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수요가 많은 거고 평소에는 하나도 못 파는 날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5달러도 채 되지 않는 최저 시급에 비하면야 월스트리트 주식 중개인 부럽지 않은 수입이었다. 그래 봤자 스타택은 못 사지만. 그는 반으로 접는 휴대용 전화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 오늘도 흥미로운 사연이 있네요. 브루클린 레드훅에서 로타 씨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드타운 의류점에서 세일즈 일을 하는 스물다섯 살 여자입니다.
붐박스 라디오를 틀자 무덤 같던 공간이 화들짝 살아났다. 요한은 배경으로 깔리는 피아노 연주와 나지막한 여자의 음성을 흘려들으며 파카 주머니를 뒤졌다. 센트럴 파크에서 호세에게 넘겨받은 뭉치는 고깃덩이처럼 비닐 랩으로 겹겹이 포장돼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손길로 한 겹씩, 꼼꼼하게 겹쳐진 랩을 찢어 냈다.
― 첫눈에 반했다는 게 그런 느낌일까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심지어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말이죠. 아, 물론 손에 반지는 없었지만, 결혼반지를 끼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시답잖은 연애 상담을 흘려들으며 마지막 한 겹의 랩을 뜯어냈다. 사각형 비닐 팩 안에는 활석 같은 덩어리들이 가루와 아울러 모서리까지 꽉 차 있다. 내용물의 옅은 상아색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비닐 입구를 열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고 검지 끝으로 가루를 찍어 혀에 대 본다. 그 모든 과정은 심상하고도 단조로웠다.
가루가 닿은 혓바닥이 그새 얼얼했다. 호세가 대 주는, 정확하게는 그 윗선이 넘겨주는 코카인은 시내를 통틀어 단연 최고급이다. 호세는 너랑 나랑 친구니까 물 한 방울 안 타고 주는 거라고 생색이 여간 아니지만 요한은 믿지 않는다. 물 한 방울 안 타기는. 순수한 코카인은 산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는 것쯤 중학생도 알 거다.
― 예, 브루클린에 사시는 로타 씨.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리는 사연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게 궁금해지네요. 처음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시간. 얼마나 걸릴까요?
“십오 분(Fifteen minutes).”
대답하듯 중얼거리며 협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저울과 베이킹소다 봉지를 꺼내 협탁 위에 올려놓고 가로세로 2인치 크기의 새 비닐 팩도 몇 장 꺼냈다. 고리로 연결된 계량용 스푼 꾸러미까지 끄집어낸 후 서랍을 닫았다.
― 다음에 만나면 꼭 이름을 물어보세요. 어쩌면 지금, 그 사람 역시 당신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로타 씨가 신청하신 머라이어 캐리의 이모션스, 틀어 드립니다.
이모션스라니. 새로 나온 좋은 곡들 많은데 하필이면. 가볍게 투덜대며 계량스푼을 집어 상아색 가루를 한 스푼씩 비닐 팩에 덜어 넣는다. 경쾌한 리듬에 맞춘 여자의 노랫소리가 어두침침한 방 안을 휘돌았다.
― 기분이 좋아. 정말 좋아. 이렇게 만족스러운 적은 처음이야.
약 팔아 먹고사는 약사 입장에서 코카인은 희석시킬수록 돈이 된다. 이때 섞는 비율이 중요한데 이물질이 너무 많으면 당연히 맛이 떨어져 손님도 떨어져 나간다. 품질 좋은 마약을 극도로 즐길 수 있되 과하지는 않은 비율. 요한은 그 기막힌 농도를 알고 있었고 단골이 끊이지 않는 비결도 그 손맛 덕택이었다. 코카인 하는 인간들이 베이킹소다 좀 같이 들이마신다고 별 탈 있겠나. 순도가 너무 높아도 초상 치르기 십상이니, 이건 고객들의 복지에도 도움이 되는 거라고 요한은 합리화하곤 했다.
― 난 살아 있어. 취해 있어. 높이 날아. 꿈을 꾸는 것 같아.
익히 아는 가사를 흥얼대며 이번에는 베이킹소다를 비닐 팩에 퍼 넣었다. 두 가지 가루가 비율대로 담긴 비닐 팩들은 입구를 눌러 밀봉한 뒤 흔들어 잘 섞어 주면 된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앙증맞은 팩들을 대강 흔들며 그는 생각했다. 살아 있어. 취해 있어. 높이 날아. 사랑에 빠졌을 때와 마약에 취했을 때의 기분은, 그러고 보니 무척이나 흡사하지 않나.
그때 청바지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울었다. 역시 금요일엔 주문이 몰린다니까. 요한은 경쾌한 동작으로 호출기를 꺼내 숫자를 확인했고,
730911.
편안히 이완됐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젠장(Shit).”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호출기 번호를 눌러 음성사서함을 확인했다. 새로운 메시지 한 건. 익숙한 호세의 음성이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왔다.
― 야, 지금 오면서 봤는데 퀸즈보로 브릿지에 네 그래피티 없어졌어. 그 개같은 새끼가 이번엔 완전히 지웠나 본데.
빌어먹을. 전화기를 노려보며 양쪽으로 천천히 목을 꺾었다. 짧은 숨을 들이쉰 다음 호세의 목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 그런데 있잖아, 그 새끼가 희한한 걸 남겨 놨다?
요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곁에 있던 펜을 집어 든 것은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 331W4라고 적혀 있어. 너도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알려 주는데, 음, 몸조심해. ……아, 시발 찜찜하네. 여튼 몸조심하라고. 나중에 또 연락해.
메시지를 끝까지 듣고 난 후 스피커폰을 껐다. 플라스틱 볼펜이 기다란 손가락과 얽힌다. 331W4. 메모지에 남은, 암호 같은 숫자와 문자의 조합을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슴벅였다.
331 웨스트 4스트리트.
정확한 지점은 모르겠으나 분명 웨스트 빌리지 주소였다.
❖
미드타운에 문을 연 고담 태번은 개업 반년 만에 맨해튼 인기 레스토랑 대열에 합류했다. 비싸기로 이름난 이곳에 제인도 이미 여러 번 와 보았는데, 리오는 이곳의 사토브리앙과 대구 스테이크를 좋아한다.
고급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지배인은 못해도 오십 대 후반쯤은 되어 보였다. 그가 직접 주문을 받았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접시까지 친히 날라 올 줄은 몰랐다. 우아한 표정과 세련된 동작으로, 그는 점심으로 먹기엔 좀 거하다 싶은 안심 스테이크를 제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미스 비첼리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지배인이 물러가자 리오가 와인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식사 때 와인 한 잔을 반드시 곁들이는 식성까지 지배인은 꿰고 있었다. 제인은 묵직한 커트러리를 양손에 쥐고 어린애 주먹만 한 고깃덩이를 찔렀다. 새하얀 접시 위로 핏빛 물기가 울컥 배어 나왔다.
“어디로 갈 거야.”
와인을 삼킨 후 리오가 물었다. 제인은 나이프를 내려 두고 제 몫의 잔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탄산수가 담긴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되묻듯 그를 본다. 묵묵히 마주 보던 남자가 덧붙였다.
“여행 말이야.”
안다. 무슨 말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러나 제인은 자주 모른 척하고 리오는 시침 떼는 것을 못 본 척한다. 도무지 효용이라고 없는 신경전은 느슨하고도 번거롭지만 그 불필요한 과정을 그들은 매번 되풀이했다.
“나폴리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이스키아 같은 곳은 겨울에도 가 볼 만하지.”
“생각 없어요. 한겨울에 무슨 섬이야.”
“도시를 원하면 런던이나 파리도 있고.”
“도시 중에 도시는 뉴욕이라면서요.”
“해외가 내키지 않는 거면 별장이라도 다녀와. 마이애미에서 한 일주일쯤.”
추운 날씨 싫어하잖아. 느긋하게 덧붙인 리오가 와인 한 모금을 머금으며 대화는 끊어졌다.
감시꾼 딸려 가는 여행이 퍽도 즐겁겠네. 제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큼직하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욱여넣었다. 대답을 피할 핑계치곤 궁색하지만 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씹히는 고기 조각은 마치 연한 고무 같다. 죽은 동물의 설익은 살코기. 셰프의 비결이 스몄을 육즙이 돌연 역하게 느껴져 그녀는 탄산수 잔을 향해 허둥지둥 팔을 뻗었다.
“그냥 여기 있을래.”
졸업 작품 준비나 하면서. 음식물을 삼켜 낸 후 덧붙였다. 얼굴을 마주 보는 대신 그의 접시에 시선을 두었다. 은제 식기를 가볍게 쥔 커다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커트러리와 한 몸 같다고 제인은 생각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차라락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공중전화 몸통을 뒤덮은 이름이며 욕설 따위 조잡한 낙서를 감흥 없이 훑다가 요한은 올해 최고의 화제였던, 반으로 접는 휴대용 전화기를 떠올렸다.
모토로라에서 나온 스타택은 첫눈에 맘에 쏙 들었지만 가격이 무려 1천 달러나 한다. 한 달 집세에 생활비를 합친 것과 맞먹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잘나가는 비즈니스맨도 월스트리트 주식 중개인도 아니니 휴대전화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애써 구매욕을 꺾었다. 도심에 지천으로 널린 게 공중전화다. 휴대용 전화기라니,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뭐. 요한은 발치에 내려 두었던 스프레이 캔 꾸러미를 다시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5층짜리 건물 뒤편으로 돌아 관리인이 주로 쓰는 뒷문을 열었다. 계단 예닐곱 개를 경쾌하게 내려가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났다. 지면 아래로 절반 넘게 박힌 반지하층은 볕이 통 안 들어 24시간 형광등을 켜 둔다. 연한 곰팡내 사이로 풍겨 오는 진한 세제 냄새. 요한은 공용 세탁실을 지나 암녹색 철제문에 열쇠를 꽂아 돌렸다. 묵직한 문 너머 드러난 아파트 내부는 화창한 날씨와 딴 세상처럼 음습하고 컴컴하다.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모두 채웠다. 발끝으로 운동화를 대강 벗어 두고는 아담한 거실을 가로질러 한 개뿐인 방으로 들어갔다. 손바닥만 한 창문조차 두꺼운 커튼으로 가린 탓에 가구도 몇 없이 휑한 실내가 몹시 어두웠다. 제 키만 한 스탠드로 다가가 스위치를 올리자 노란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나무 마루가 깔린 방 안에는 낡아 빠진 퀸 사이즈 침대 한 개와 협탁,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초록색 철제 스탠드, 그리고 큼지막한 붐박스 하나가 놓여 있다.
요한은 침대 위에 털썩 앉은 채 아래쪽으로 팔을 뻗었다. 모서리가 구겨진 운동화 상자를 더듬어 끄집어내자 다람쥐 꼬리처럼 뭉친 먼지 덩이가 주르륵 딸려 온다. 털어 내지 않고 그냥 상자를 열었다. 맥주 열 병이랑 스프라이트 스물다섯 캔. 기억해 둔 주문대로 에시드 시트 열 장을 헤아려 비닐 팩에 넣고 마리화나 25온스를 함께 신문지로 쌌다. 메트로 신문 지면에는 NYPD 경관 모집 공고가 실려 있다. 정의로운 뉴욕시를 위해 봉사하십시오. 코끝으로 웃으며 펜을 집어 뺨으로 꼭지를 눌렀다.
접착 메모지에 숫자 7과 알파벳 T를 휘갈겨 써 붙인 다음 협탁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곧 팔려 나갈 꾸러미 여섯 개가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대기 중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수요가 많은 거고 평소에는 하나도 못 파는 날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5달러도 채 되지 않는 최저 시급에 비하면야 월스트리트 주식 중개인 부럽지 않은 수입이었다. 그래 봤자 스타택은 못 사지만. 그는 반으로 접는 휴대용 전화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 오늘도 흥미로운 사연이 있네요. 브루클린 레드훅에서 로타 씨가 보내온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드타운 의류점에서 세일즈 일을 하는 스물다섯 살 여자입니다.
붐박스 라디오를 틀자 무덤 같던 공간이 화들짝 살아났다. 요한은 배경으로 깔리는 피아노 연주와 나지막한 여자의 음성을 흘려들으며 파카 주머니를 뒤졌다. 센트럴 파크에서 호세에게 넘겨받은 뭉치는 고깃덩이처럼 비닐 랩으로 겹겹이 포장돼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손길로 한 겹씩, 꼼꼼하게 겹쳐진 랩을 찢어 냈다.
― 첫눈에 반했다는 게 그런 느낌일까요?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르는, 심지어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말이죠. 아, 물론 손에 반지는 없었지만, 결혼반지를 끼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시답잖은 연애 상담을 흘려들으며 마지막 한 겹의 랩을 뜯어냈다. 사각형 비닐 팩 안에는 활석 같은 덩어리들이 가루와 아울러 모서리까지 꽉 차 있다. 내용물의 옅은 상아색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비닐 입구를 열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고 검지 끝으로 가루를 찍어 혀에 대 본다. 그 모든 과정은 심상하고도 단조로웠다.
가루가 닿은 혓바닥이 그새 얼얼했다. 호세가 대 주는, 정확하게는 그 윗선이 넘겨주는 코카인은 시내를 통틀어 단연 최고급이다. 호세는 너랑 나랑 친구니까 물 한 방울 안 타고 주는 거라고 생색이 여간 아니지만 요한은 믿지 않는다. 물 한 방울 안 타기는. 순수한 코카인은 산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다는 것쯤 중학생도 알 거다.
― 예, 브루클린에 사시는 로타 씨.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리는 사연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이런 게 궁금해지네요. 처음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시간. 얼마나 걸릴까요?
“십오 분(Fifteen minutes).”
대답하듯 중얼거리며 협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저울과 베이킹소다 봉지를 꺼내 협탁 위에 올려놓고 가로세로 2인치 크기의 새 비닐 팩도 몇 장 꺼냈다. 고리로 연결된 계량용 스푼 꾸러미까지 끄집어낸 후 서랍을 닫았다.
― 다음에 만나면 꼭 이름을 물어보세요. 어쩌면 지금, 그 사람 역시 당신을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로타 씨가 신청하신 머라이어 캐리의 이모션스, 틀어 드립니다.
이모션스라니. 새로 나온 좋은 곡들 많은데 하필이면. 가볍게 투덜대며 계량스푼을 집어 상아색 가루를 한 스푼씩 비닐 팩에 덜어 넣는다. 경쾌한 리듬에 맞춘 여자의 노랫소리가 어두침침한 방 안을 휘돌았다.
― 기분이 좋아. 정말 좋아. 이렇게 만족스러운 적은 처음이야.
약 팔아 먹고사는 약사 입장에서 코카인은 희석시킬수록 돈이 된다. 이때 섞는 비율이 중요한데 이물질이 너무 많으면 당연히 맛이 떨어져 손님도 떨어져 나간다. 품질 좋은 마약을 극도로 즐길 수 있되 과하지는 않은 비율. 요한은 그 기막힌 농도를 알고 있었고 단골이 끊이지 않는 비결도 그 손맛 덕택이었다. 코카인 하는 인간들이 베이킹소다 좀 같이 들이마신다고 별 탈 있겠나. 순도가 너무 높아도 초상 치르기 십상이니, 이건 고객들의 복지에도 도움이 되는 거라고 요한은 합리화하곤 했다.
― 난 살아 있어. 취해 있어. 높이 날아. 꿈을 꾸는 것 같아.
익히 아는 가사를 흥얼대며 이번에는 베이킹소다를 비닐 팩에 퍼 넣었다. 두 가지 가루가 비율대로 담긴 비닐 팩들은 입구를 눌러 밀봉한 뒤 흔들어 잘 섞어 주면 된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앙증맞은 팩들을 대강 흔들며 그는 생각했다. 살아 있어. 취해 있어. 높이 날아. 사랑에 빠졌을 때와 마약에 취했을 때의 기분은, 그러고 보니 무척이나 흡사하지 않나.
그때 청바지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울었다. 역시 금요일엔 주문이 몰린다니까. 요한은 경쾌한 동작으로 호출기를 꺼내 숫자를 확인했고,
730911.
편안히 이완됐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젠장(Shit).”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재빨리 호출기 번호를 눌러 음성사서함을 확인했다. 새로운 메시지 한 건. 익숙한 호세의 음성이 스피커 밖으로 흘러나왔다.
― 야, 지금 오면서 봤는데 퀸즈보로 브릿지에 네 그래피티 없어졌어. 그 개같은 새끼가 이번엔 완전히 지웠나 본데.
빌어먹을. 전화기를 노려보며 양쪽으로 천천히 목을 꺾었다. 짧은 숨을 들이쉰 다음 호세의 목소리는 다시 이어졌다.
― 그런데 있잖아, 그 새끼가 희한한 걸 남겨 놨다?
요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곁에 있던 펜을 집어 든 것은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 331W4라고 적혀 있어. 너도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알려 주는데, 음, 몸조심해. ……아, 시발 찜찜하네. 여튼 몸조심하라고. 나중에 또 연락해.
메시지를 끝까지 듣고 난 후 스피커폰을 껐다. 플라스틱 볼펜이 기다란 손가락과 얽힌다. 331W4. 메모지에 남은, 암호 같은 숫자와 문자의 조합을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슴벅였다.
331 웨스트 4스트리트.
정확한 지점은 모르겠으나 분명 웨스트 빌리지 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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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타운에 문을 연 고담 태번은 개업 반년 만에 맨해튼 인기 레스토랑 대열에 합류했다. 비싸기로 이름난 이곳에 제인도 이미 여러 번 와 보았는데, 리오는 이곳의 사토브리앙과 대구 스테이크를 좋아한다.
고급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지배인은 못해도 오십 대 후반쯤은 되어 보였다. 그가 직접 주문을 받았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접시까지 친히 날라 올 줄은 몰랐다. 우아한 표정과 세련된 동작으로, 그는 점심으로 먹기엔 좀 거하다 싶은 안심 스테이크를 제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미스 비첼리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지배인이 물러가자 리오가 와인 잔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식사 때 와인 한 잔을 반드시 곁들이는 식성까지 지배인은 꿰고 있었다. 제인은 묵직한 커트러리를 양손에 쥐고 어린애 주먹만 한 고깃덩이를 찔렀다. 새하얀 접시 위로 핏빛 물기가 울컥 배어 나왔다.
“어디로 갈 거야.”
와인을 삼킨 후 리오가 물었다. 제인은 나이프를 내려 두고 제 몫의 잔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탄산수가 담긴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되묻듯 그를 본다. 묵묵히 마주 보던 남자가 덧붙였다.
“여행 말이야.”
안다. 무슨 말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러나 제인은 자주 모른 척하고 리오는 시침 떼는 것을 못 본 척한다. 도무지 효용이라고 없는 신경전은 느슨하고도 번거롭지만 그 불필요한 과정을 그들은 매번 되풀이했다.
“나폴리 쪽이 좋을 것 같은데. 이스키아 같은 곳은 겨울에도 가 볼 만하지.”
“생각 없어요. 한겨울에 무슨 섬이야.”
“도시를 원하면 런던이나 파리도 있고.”
“도시 중에 도시는 뉴욕이라면서요.”
“해외가 내키지 않는 거면 별장이라도 다녀와. 마이애미에서 한 일주일쯤.”
추운 날씨 싫어하잖아. 느긋하게 덧붙인 리오가 와인 한 모금을 머금으며 대화는 끊어졌다.
감시꾼 딸려 가는 여행이 퍽도 즐겁겠네. 제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큼직하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욱여넣었다. 대답을 피할 핑계치곤 궁색하지만 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 안 가득 씹히는 고기 조각은 마치 연한 고무 같다. 죽은 동물의 설익은 살코기. 셰프의 비결이 스몄을 육즙이 돌연 역하게 느껴져 그녀는 탄산수 잔을 향해 허둥지둥 팔을 뻗었다.
“그냥 여기 있을래.”
졸업 작품 준비나 하면서. 음식물을 삼켜 낸 후 덧붙였다. 얼굴을 마주 보는 대신 그의 접시에 시선을 두었다. 은제 식기를 가볍게 쥔 커다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커트러리와 한 몸 같다고 제인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