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리오는 여자의 동그란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회피한 채 식사에 열중한 척 시늉에 한창이다. 연신 음식을 썰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조금은 조급해 보이는 턱의 움직임과 그에 맞춰 팔딱이는 관자놀이 근육. 조금은 우습기도, 어딘가 막막하기도 한 광경을 바라보며 그가 짧은 숨을 뱉었다.
“작품 준비는.”
화제가 바뀌자 제인이 비로소 시선을 들어 상대와 눈을 맞췄다. 느슨하게 뜬 남자의 눈매. 실내의 아늑한 조도 탓에 그의 눈동자는 거의 검게 보인다.
“주제 바꾸려고요.”
“어째서.”
“별로인 것 같아서.”
“난 좋은 것 같은데.”
접시 위에서 커트러리를 다루며 리오가 말을 이었다.
“흥미롭잖아. 시의성도 있고.”
“그렇긴 한데 아티스트를 찾아낼 방법이 없어요. 특히나 그 사람은.”
“하필 그런 자를 고른 것도 본인이지.”
“그러게요.”
제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발단은 지난봄, 학교에서 시작됐다. 오전 강의가 있어 학교로 향하는데 웬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굳이 가까이 가 볼 필요는 없었다. 7애비뉴에 면한 학교 건물의 오른쪽, 대리석 벽면을 채운 낯선 색채는 멀찌감치서도 아주 잘 보였으니까.
검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래피티는 사이즈가 상당했다. 높이가 어지간한 남자 키만 했다. 예술(Art). 흑백 음영을 곁들인 작품의 내용은 꽤나 명료했다.
‘말도 안 돼.’
‘세븐써리야.’
‘어젯밤에 왔다 간 거지? 새벽인가?’
‘나 어제 작업하다 아홉 시 넘어서 갔는데 그땐 없었어.’
‘이걸 진짜 십 분 만에 그렸을까?’
‘십 분? 말이 돼?’
‘세븐써리는 십 분 만에 그린다던데?’
입을 떡 벌린 학생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예술대학 건물에 굳이 ‘예술’이라고 써 놓은 창의력은 그저 그랬지만 조형미만큼은 일품이었다. 이런 건 누가 그렸을까. 제인은 습관적으로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 시선을 주었다. 아티스트의 서명은 무척이나 생경한, 마치 수감 번호 같은 숫자였다.
730
뉴욕에는 그래피티를 그리는 인간들이 많다. 대부분은 개가 전봇대마다 오줌을 갈기듯 제 이름이나 별명 따위를 끄적이는 수준이지만 간혹 볼만한 작품을 남기는 거리의 예술가도 있다. 평론가의 고상한 안목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세븐써리는 단연코 후자에 속했다.
‘글자 균형 완벽한 거 봐. 밑그림 없이 바로 뿌린 건데.’
‘이전 작품들보다 직선 느낌이 강하네. 터치가 거칠어.’
‘작년에 소호 우체국에 그렸던 거 있잖아. 그거랑 좀 비슷한 거 같지 않냐?’
세븐써리는 오직 글자만 그렸다. 한 번에 한 가지 색으로 하나의 단어만을 남긴다. 그의 그래피티는 그림보다 캘리그라피에 가까웠다. 장소마다 단어도 필체도 달라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를테면 시청 건물에는 ‘얼빠진 놈(Goofy)’, 경찰서 앞에는 ‘짭새들(Pigs)’, 공중화장실 문에는 ‘시궁창(Cesspool)’ 따위를 멋들어지게 써 놓는 식이다. 선뜻 지우기도 아까울 만큼 훌륭한 퀄리티로.
‘근데 세븐써리 우리 학교 좋아하냐?’
‘그러게. 아트라니.’
‘단어 선택 너무 호의적인데.’
‘내 말이.’
세븐써리의 작품은 뮤직비디오와 각종 화보 촬영에 배경으로 끼어 나오기도 했다. <뉴요커> 같은 잡지에 실린 적도 있는데, 주로 ‘무례하고 아름다운 뉴욕의 메신저’, ‘힙합을 듣지 않는 독자들도 좋아하는 그래피티’, ‘NYPD가 가장 잡고 싶어 하는 거리의 낙서꾼’따위의 긴 수식어가 붙는다. 특히 경찰과는 악연이 꽤나 깊어서, 매달 7일과 30일마다 뉴욕시경 본부 건물에 맹랑한 작품을 남긴 전설 같은 일화는 거리 예술에 별 관심 없는 제인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걸 무려 6개월 동안 했는데도 체포되지 않아 그 새끼 정녕 스파이더맨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지.
‘너나 나나 다 같이 예술 하는 입장이다, 뭐 이런 뜻 아닐까?’
‘아트로 하나 되자?’
‘알고 보면 우리 학교 학생 아냐?’
‘설마.’
‘가능하지.’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인 후, 제인이 기억하기로는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날따라 새벽에 일찍 깼다. 마천루 사이로 푸르게 번지는 새벽이 유별나게 투명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뜸 사진이 찍고 싶어져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습기 품은 이른 아침을 들이마시며 그리니치 빌리지를 가로질렀고, 7애비뉴를 따라 걷다 보니 학교 앞에 다다랐다.
아마도 오전 6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나서고 한산하던 도로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던 시간, 그녀는 학교 건물 앞에 홀로 섰다. 사흘 전 등장해 온 학교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래피티 왼쪽으로 못 보던 단어가 거짓말처럼 돋아 있었다.
가짜(Fake).
오른쪽의 어휘를 합치면 가짜 예술. 그러니까 이 발칙한 거리 예술가가 예술대학 건물에 붙여 준 이름표는 페이크 아트. 제인은 아마도 그때 피식 웃었던가. 눈으로 충분히 감상한 후에 연거푸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지금 내 손에 카메라가 있는 것이 다행스럽단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냥 찍어 둔 사진 중에 골라서 낼까 봐.”
음식을 삼킨 뒤 중얼거리듯 말을 보탰다. 명성 높은 예술대학 정면에 새겨진 ‘가짜 예술’은 그날 오전 관리 직원들에 의해 깨끗이 지워졌으니 필름에 담은 사람은 아마도 그녀가 유일할 것이다. 큼직하게 인화해서 제출하면 교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졸업 작품 전시회에 끼워 주지 않으려나. 오히려 좋은 자리에 보란 듯이 걸어 줄 수도 있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참신함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보수적으로 보이길 두려워하니까.
“기다려 봐.”
리오가 말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말뚝을 박아도 레몬나무로 자라니까.”
제인이 눈을 들어 남자를 본다. 리오는 저렇게 종종 이탈리아 속담을 썼다. 미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방문은 손에 꼽을 정도인 주제에 그 나라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평소엔 영어로 말할 때도 이탈리아 속담이나 격언을 불쑥 인용하곤 한다. 노인 같은 구석이 있죠. 그의 독특한 습관을 가리켜 베런은 그리 평가했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고. 레몬이 열릴지, 아니면 그냥 말뚝으로 썩어 버릴지.”
그가 알맞게 썬 고기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은빛 포크 끝이 창날처럼 푸르다. 제인은 식사에 열중한 남자를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레몬 향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일어, 육즙에도 메마르던 입 안에 비로소 침이 고였다.
❖
“아, 시발.”
331 웨스트 4스트리트까지 찾아오는 데 꼬박 반 시간이 걸렸다. 찾고 보니까 아는 데라서 기어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코너 비스트로. 오픈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이곳은 웨스트 빌리지에서 손에 꼽히는 맛집이다. 물론 요한도 여러 번 와 보았으며, 설익은 패티를 끼운 이곳의 두툼한 햄버거와 약간 싱거운 생맥주를 좋아한다.
331W4
철문 위쪽에 붙은 금빛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실내는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불그스름한 백열등 조명이 조금은 갑갑하게 띄엄띄엄 들어와 있다. 점심시간은 한참 지났고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 오후 나절. 한산한 바를 지키며 글라스를 닦던 덩치 좋은 바텐더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살갑게 눈짓하는 바텐더를 향해 다가갔다. 소매를 걷어붙여 드러낸 팔뚝은 근육도 불끈댔지만 그중 왼쪽 하완을 꼼꼼히 채운 문신이 가장 먼저 시선을 채었다. 화려한 색채의 정교한 문신. 그쪽을 힐끗 본 요한은 애써 그의 얼굴로 관심을 돌렸다. 사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이쪽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도와드릴까.”
그러게.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하나 요한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니까 오밤중에 죽을 둥 살 둥 원숭이처럼 다리로 기어 올라가 간신히 작가 정신을 발휘했는데, 어느 말아먹을 놈의 새끼가 그걸 감쪽같이 지워 놓고는 댁네 주소를 남겨 놔서요. 그 새끼 만나면 일단은 몇 대 쳐야 대화가 가능할 거 같은데 누군지 혹시 아시는지. 설마 댁이 그 개새끼는 아니시겠지. 목젖 아래 들끓는 생각들을 누르며 입술을 뗐다.
“세븐써리 찾아왔는데요.”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바텐더가 대꾸 없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훑는 시선의 의미를 읽어 내려 요한은 애를 썼다. 변화 없는 표정에 살짝 흥미로운 빛이 스치는 것 같았고, 응시가 지나치다 싶은 순간 시선을 거둔 남자가 열심히도 닦던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바 안쪽에서 꺼내 이쪽으로 내민 것은 반으로 접힌 메모지 한 장.
“그리로 전화 한 통 부탁한다고 하던데.”
간략한 전언과 함께 저쪽 맞은편에 놓인 전화기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이게 누군데요.”
“그야 통화해 보면 알겠지.”
불친절하게도 짤막한 대꾸에 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냥 전달만 부탁받아서. 덧붙인 바텐더의 말은 변명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상했으나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바텐더는 어느새 아까 닦다 놔둔 글라스를 도로 집어 열심히 닦고 있었다.
그를 등지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벽에 걸린 초록색 유선전화기는 손님들 쓰라고 둔 모양이었다. 컨셉인 건지 연식이 20년도 넘어 보이는 구식 디자인이지만 소리만큼은 깨끗하게 잘 들렸다. 턱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 메모지에 적힌 대로 열 번의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정확히 세 번 울린 후 저편에서 누군가 응답했다.
― Hello.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헬로. 두 개의 모음이 단일한 톤이라 어딘지 모르게 공격적인 음성. 요한은 잠깐 틈을 둔 뒤 입을 뗐다.
“코너 비스트로, 찾아왔는데.”
상대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가늠하듯 입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하더니,
― 지금 그리로 가지. 십 분이면 될 거 같은데.
“당신 누구야?”
― 십 분 후면 알게 될 거야. 기다리는 동안 뭐라도 한 잔 마시든가.
“미친 새끼. 내가 누군지는 알고 만나자는 거야?”
― 세븐써리.
리오는 여자의 동그란 이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선을 회피한 채 식사에 열중한 척 시늉에 한창이다. 연신 음식을 썰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 조금은 조급해 보이는 턱의 움직임과 그에 맞춰 팔딱이는 관자놀이 근육. 조금은 우습기도, 어딘가 막막하기도 한 광경을 바라보며 그가 짧은 숨을 뱉었다.
“작품 준비는.”
화제가 바뀌자 제인이 비로소 시선을 들어 상대와 눈을 맞췄다. 느슨하게 뜬 남자의 눈매. 실내의 아늑한 조도 탓에 그의 눈동자는 거의 검게 보인다.
“주제 바꾸려고요.”
“어째서.”
“별로인 것 같아서.”
“난 좋은 것 같은데.”
접시 위에서 커트러리를 다루며 리오가 말을 이었다.
“흥미롭잖아. 시의성도 있고.”
“그렇긴 한데 아티스트를 찾아낼 방법이 없어요. 특히나 그 사람은.”
“하필 그런 자를 고른 것도 본인이지.”
“그러게요.”
제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발단은 지난봄, 학교에서 시작됐다. 오전 강의가 있어 학교로 향하는데 웬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굳이 가까이 가 볼 필요는 없었다. 7애비뉴에 면한 학교 건물의 오른쪽, 대리석 벽면을 채운 낯선 색채는 멀찌감치서도 아주 잘 보였으니까.
검은색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래피티는 사이즈가 상당했다. 높이가 어지간한 남자 키만 했다. 예술(Art). 흑백 음영을 곁들인 작품의 내용은 꽤나 명료했다.
‘말도 안 돼.’
‘세븐써리야.’
‘어젯밤에 왔다 간 거지? 새벽인가?’
‘나 어제 작업하다 아홉 시 넘어서 갔는데 그땐 없었어.’
‘이걸 진짜 십 분 만에 그렸을까?’
‘십 분? 말이 돼?’
‘세븐써리는 십 분 만에 그린다던데?’
입을 떡 벌린 학생들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예술대학 건물에 굳이 ‘예술’이라고 써 놓은 창의력은 그저 그랬지만 조형미만큼은 일품이었다. 이런 건 누가 그렸을까. 제인은 습관적으로 작품의 오른쪽 하단에 시선을 주었다. 아티스트의 서명은 무척이나 생경한, 마치 수감 번호 같은 숫자였다.
730
뉴욕에는 그래피티를 그리는 인간들이 많다. 대부분은 개가 전봇대마다 오줌을 갈기듯 제 이름이나 별명 따위를 끄적이는 수준이지만 간혹 볼만한 작품을 남기는 거리의 예술가도 있다. 평론가의 고상한 안목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세븐써리는 단연코 후자에 속했다.
‘글자 균형 완벽한 거 봐. 밑그림 없이 바로 뿌린 건데.’
‘이전 작품들보다 직선 느낌이 강하네. 터치가 거칠어.’
‘작년에 소호 우체국에 그렸던 거 있잖아. 그거랑 좀 비슷한 거 같지 않냐?’
세븐써리는 오직 글자만 그렸다. 한 번에 한 가지 색으로 하나의 단어만을 남긴다. 그의 그래피티는 그림보다 캘리그라피에 가까웠다. 장소마다 단어도 필체도 달라지는 것이 특징인데 이를테면 시청 건물에는 ‘얼빠진 놈(Goofy)’, 경찰서 앞에는 ‘짭새들(Pigs)’, 공중화장실 문에는 ‘시궁창(Cesspool)’ 따위를 멋들어지게 써 놓는 식이다. 선뜻 지우기도 아까울 만큼 훌륭한 퀄리티로.
‘근데 세븐써리 우리 학교 좋아하냐?’
‘그러게. 아트라니.’
‘단어 선택 너무 호의적인데.’
‘내 말이.’
세븐써리의 작품은 뮤직비디오와 각종 화보 촬영에 배경으로 끼어 나오기도 했다. <뉴요커> 같은 잡지에 실린 적도 있는데, 주로 ‘무례하고 아름다운 뉴욕의 메신저’, ‘힙합을 듣지 않는 독자들도 좋아하는 그래피티’, ‘NYPD가 가장 잡고 싶어 하는 거리의 낙서꾼’따위의 긴 수식어가 붙는다. 특히 경찰과는 악연이 꽤나 깊어서, 매달 7일과 30일마다 뉴욕시경 본부 건물에 맹랑한 작품을 남긴 전설 같은 일화는 거리 예술에 별 관심 없는 제인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걸 무려 6개월 동안 했는데도 체포되지 않아 그 새끼 정녕 스파이더맨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지.
‘너나 나나 다 같이 예술 하는 입장이다, 뭐 이런 뜻 아닐까?’
‘아트로 하나 되자?’
‘알고 보면 우리 학교 학생 아냐?’
‘설마.’
‘가능하지.’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인 후, 제인이 기억하기로는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날따라 새벽에 일찍 깼다. 마천루 사이로 푸르게 번지는 새벽이 유별나게 투명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뜸 사진이 찍고 싶어져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습기 품은 이른 아침을 들이마시며 그리니치 빌리지를 가로질렀고, 7애비뉴를 따라 걷다 보니 학교 앞에 다다랐다.
아마도 오전 6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나서고 한산하던 도로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던 시간, 그녀는 학교 건물 앞에 홀로 섰다. 사흘 전 등장해 온 학교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래피티 왼쪽으로 못 보던 단어가 거짓말처럼 돋아 있었다.
가짜(Fake).
오른쪽의 어휘를 합치면 가짜 예술. 그러니까 이 발칙한 거리 예술가가 예술대학 건물에 붙여 준 이름표는 페이크 아트. 제인은 아마도 그때 피식 웃었던가. 눈으로 충분히 감상한 후에 연거푸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지금 내 손에 카메라가 있는 것이 다행스럽단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냥 찍어 둔 사진 중에 골라서 낼까 봐.”
음식을 삼킨 뒤 중얼거리듯 말을 보탰다. 명성 높은 예술대학 정면에 새겨진 ‘가짜 예술’은 그날 오전 관리 직원들에 의해 깨끗이 지워졌으니 필름에 담은 사람은 아마도 그녀가 유일할 것이다. 큼직하게 인화해서 제출하면 교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졸업 작품 전시회에 끼워 주지 않으려나. 오히려 좋은 자리에 보란 듯이 걸어 줄 수도 있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참신함에 집착하며 어떻게든 보수적으로 보이길 두려워하니까.
“기다려 봐.”
리오가 말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말뚝을 박아도 레몬나무로 자라니까.”
제인이 눈을 들어 남자를 본다. 리오는 저렇게 종종 이탈리아 속담을 썼다. 미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방문은 손에 꼽을 정도인 주제에 그 나라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평소엔 영어로 말할 때도 이탈리아 속담이나 격언을 불쑥 인용하곤 한다. 노인 같은 구석이 있죠. 그의 독특한 습관을 가리켜 베런은 그리 평가했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고. 레몬이 열릴지, 아니면 그냥 말뚝으로 썩어 버릴지.”
그가 알맞게 썬 고기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은빛 포크 끝이 창날처럼 푸르다. 제인은 식사에 열중한 남자를 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레몬 향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일어, 육즙에도 메마르던 입 안에 비로소 침이 고였다.
❖
“아, 시발.”
331 웨스트 4스트리트까지 찾아오는 데 꼬박 반 시간이 걸렸다. 찾고 보니까 아는 데라서 기어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코너 비스트로. 오픈한 지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이곳은 웨스트 빌리지에서 손에 꼽히는 맛집이다. 물론 요한도 여러 번 와 보았으며, 설익은 패티를 끼운 이곳의 두툼한 햄버거와 약간 싱거운 생맥주를 좋아한다.
331W4
철문 위쪽에 붙은 금빛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실내는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불그스름한 백열등 조명이 조금은 갑갑하게 띄엄띄엄 들어와 있다. 점심시간은 한참 지났고 저녁 먹기엔 아직 이른 오후 나절. 한산한 바를 지키며 글라스를 닦던 덩치 좋은 바텐더가 손님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살갑게 눈짓하는 바텐더를 향해 다가갔다. 소매를 걷어붙여 드러낸 팔뚝은 근육도 불끈댔지만 그중 왼쪽 하완을 꼼꼼히 채운 문신이 가장 먼저 시선을 채었다. 화려한 색채의 정교한 문신. 그쪽을 힐끗 본 요한은 애써 그의 얼굴로 관심을 돌렸다. 사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이쪽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 도와드릴까.”
그러게.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하나 요한은 잠깐 고민했다. 그러니까 오밤중에 죽을 둥 살 둥 원숭이처럼 다리로 기어 올라가 간신히 작가 정신을 발휘했는데, 어느 말아먹을 놈의 새끼가 그걸 감쪽같이 지워 놓고는 댁네 주소를 남겨 놔서요. 그 새끼 만나면 일단은 몇 대 쳐야 대화가 가능할 거 같은데 누군지 혹시 아시는지. 설마 댁이 그 개새끼는 아니시겠지. 목젖 아래 들끓는 생각들을 누르며 입술을 뗐다.
“세븐써리 찾아왔는데요.”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바텐더가 대꾸 없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 얼굴을 훑는 시선의 의미를 읽어 내려 요한은 애를 썼다. 변화 없는 표정에 살짝 흥미로운 빛이 스치는 것 같았고, 응시가 지나치다 싶은 순간 시선을 거둔 남자가 열심히도 닦던 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바 안쪽에서 꺼내 이쪽으로 내민 것은 반으로 접힌 메모지 한 장.
“그리로 전화 한 통 부탁한다고 하던데.”
간략한 전언과 함께 저쪽 맞은편에 놓인 전화기를 턱짓으로 가리킨다.
“이게 누군데요.”
“그야 통화해 보면 알겠지.”
불친절하게도 짤막한 대꾸에 요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냥 전달만 부탁받아서. 덧붙인 바텐더의 말은 변명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이 상했으나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바텐더는 어느새 아까 닦다 놔둔 글라스를 도로 집어 열심히 닦고 있었다.
그를 등지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벽에 걸린 초록색 유선전화기는 손님들 쓰라고 둔 모양이었다. 컨셉인 건지 연식이 20년도 넘어 보이는 구식 디자인이지만 소리만큼은 깨끗하게 잘 들렸다. 턱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 메모지에 적힌 대로 열 번의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정확히 세 번 울린 후 저편에서 누군가 응답했다.
― Hello.
굵직한 남자 목소리였다. 헬로. 두 개의 모음이 단일한 톤이라 어딘지 모르게 공격적인 음성. 요한은 잠깐 틈을 둔 뒤 입을 뗐다.
“코너 비스트로, 찾아왔는데.”
상대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가늠하듯 입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하더니,
― 지금 그리로 가지. 십 분이면 될 거 같은데.
“당신 누구야?”
― 십 분 후면 알게 될 거야. 기다리는 동안 뭐라도 한 잔 마시든가.
“미친 새끼. 내가 누군지는 알고 만나자는 거야?”
― 세븐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