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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게는 왕좌가 필요하다
1화
#프롤로그
“드디어 내 이 자리를 갖게 되었구나.”
왕좌를 내려다보는 소녀가 보이는가? 너희는 저 공주가 지금 무엇을 해낸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가?
“나를 위해 싸워 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뮈블랑은 주먹에 힘을 주며 소녀를 바라본다. 스스로 영광을 거머쥔 소녀는 왕좌 앞에 우뚝 선 채 붉은 망토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짙은 황금색 머리칼이 나부끼고 오색의 유리가 역광을 쏟아붓는 가운데, 빛을 휘장처럼 두른 소녀가 만민을 굽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관식에 불순분자가 섞이지 않을 순 없는 노릇. 불현듯 살기를 느낀 뮈블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하녀의 손목을 단단하게 붙들고 은밀하게 배에 총을 겨눴다. 이자가 살기도 감출 줄 모르는 엉성한 암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서도 바로 쏘지 않은 까닭은 단순하다. 마법구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멈춰라. 암살자. 지금 그만두면 살려…….”
“카마이유 님께 영광을!”
그때 악에 받친 암살자가 칼을 들고 공주에게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쏠걸! 아무리 살기도 못 감추는 멍청한 놈이라고 해도 봐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뮈블랑은 암살자의 뒤통수에 대고 짜증스럽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그보다 공주의 곁에 머물던 칼이 빨랐다.
“아아악!”
암살자의 팔을 자른 남자, 카산은 뮈블랑을 미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암살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말든 뮈블랑은 툴툴거리면서 암살자의 다리 양쪽에 총을 쏘고 입에 손을 집어넣어 독단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경비병에게 암살자를 던졌다. 귀족들은 빠르고 간결하게 돌아가는 현황에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그것까진 뮈블랑의 알 바가 아니었다.
뮈블랑이 책임져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대처가 늦었으니 또 잔소리를 듣겠군.’
그러나 뮈블랑에게도 사정은 있었는데, 아무 짓도 안 한 사람을 쏘면 시민 단체에서 들고 일어설 것이었다. 물론 뮈블랑이야 살기를 감지했다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말은 변명 취급할 테고.
그러나 누군가가 살기를 내뿜었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즉결 처형이 가능한 국가였다면 밀렌도요프 공주를 왕으로 맞이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 국가를 걷어차 버렸겠지.
뮈블랑의 왕 밀렌도요프는 그런 사람이다.
“그대들 앞으로도 나를 따르라.”
이윽고 스스로 왕관을 쓴 공주가 반원을 그리며 돌자, 길게 늘어진 망토가 계단을 쓸어내린다.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해 소녀에게로 산란한다.
“내가 아슈타르의 왕이다!”
그날, 공주는 공식적으로 왕좌를 쟁취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녀가 왕위에 오르는 공주를 지켜보는 이야기였다.
#제1장 최초의 그 마녀가 그랬듯이
아슈타르 왕국의 공주 밀렌도요프, 밀레나는 울음이 많았다. 태생부터 애가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울었고 왕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도 목이 터지도록 울었다.
왕은 자기가 안아 들자마자 빼애애액 울기 시작하는 밀레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비로서 책임감도 없냐고? 그런 건 슬하에 자녀가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를 넘어설 때부터 없어졌다. 밀레나는 벌써 여덟째 자식이었다. 뭐, 솔직히 그 숫자를 넘기기 전부터도 딱히 자식을 예뻐하는 성품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대강 변명거리를 주워섬긴 그는 옆에 서 있던 애기 하녀에게 신경질적으로 밀레나를 던졌다.
그 애기 하녀가 바로 뮈블랑이었다.
일곱 살짜리 뮈블랑은 밀레나가 우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짜증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게 좀 예쁜 짓도 하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아비가 좋게 봐 줄 거 아닌가. 뮈블랑은 어릴 때부터 남 비위 맞추는 덴 고수였기 때문에 저렇게 자기 감정만 앞세워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애를 싫어했다.
즉 뮈블랑은 더럽게 꼬인 상황을 견뎌 내기 위해 밀레나를 탓했다. 갓난아기가 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보고 화를 내는 왕이 잘못됐다. 그런데 뮈블랑은 마냥 갓난아기 탓을 한 거다. 그게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뮈블랑은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는 성정이 아니었고 그래서 뮈블랑이 밀레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무도 뮈블랑의 잘못된 생각을 수정해 줄 수 없었다.
밀레나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언니!”
밝은 황갈색이라고 해야 할까, 탁한 금색이라고 해야 할까. 엷은 커피처럼 달콤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포스스 나부꼈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짧은 팔다리로 꾸물꾸물 뛰어오는 동작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한없이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봄볕 꽃망울처럼 어여쁘게 움터 사랑스러웠으나,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공주답게 의복에서 다소 오래 입은 티가 났다. 그러나 뮈블랑은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뮈블랑은 저 나이에 더한 나락에서 살았다.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단 것만으로도 족한 사치잖은가?
“언니가 아니라 하녀입니다, 공주님.”
왕에게는 사랑받지 못한다지만 밀레나의 주위에는 온통 밀레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뿐이다. 애착에 능숙한 아이의 뺨은 복숭앗빛으로 보송보송하게 물들어 있었고 솜털이 콕콕 박힌 낯은 보들보들했다. 어린애다운 생기와 유쾌함이 깃든 얼굴. 뮈블랑은 그런 게 몸서리치도록 지긋지긋했다.
“언니, 여기 주위에 아무도 없어.”
그러나 주위를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종종거리며 다가와 조심스럽게 이리 말하는 공주님의 명령을 계속 거절할 수도 없는 셈이고. 결국 뮈블랑은 나직하게 가짜 웃음을 드리웠다.
“저는 하녀라니까요.”
“언니이이이.”
“알겠습니다, 밀레나. 공부 즐겁게 하고 오셨나요.”
“응! 나 열심히 공부했어!”
밀레나는 이 짧은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뮈블랑이 밀레나의 이름을 불러 주며 다정하게 일상을 물어 주는 그 짧은 시간. 신분의 격차를 알고는 있으나 이해하지 못하던 밀레나에게 뮈블랑과의 격의 없는 대화는 가뭄 중 내린 단비였다.
“무얼 배우셨는데요?”
“오늘도 비밀이라면서 국제 정세에 대해 얘기했어!”
그에 비해 뮈블랑은 이 짧은 시간을 정말 싫어했다. 또한 밀레나의 스승도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 스승이란 작자는 주제도 모르고 밀레나에게 허튼 꿈을 꾸게 했기 때문이다.
밀레나는 여자다. 여자는 작위를 계승받을 수 없으므로 지식을 학습할 필요가 없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신분 상승을 하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이었다. 기왕이면 타국의 왕자나 황자, 뭐 그런 사람을 만나서 비가 된다면야 더 좋겠지.
그러나 스승은 정규 과정을 넘어선 심화 학습을 밀레나에게 가르쳤다. 그건 오직 스승과 밀레나와 뮈블랑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게 알려지면 스승은 목이 잘린다. 뮈블랑은 스승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이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왜 자신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야 하는가?
“그래요? 좋으셨겠네요.”
“응! 또 내가 뭐를 얘기했냐면……!”
“그런데 어쩌죠? 저는 아주 바빠요.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밀레나가 가진 순수가 미웠다. 다섯 살의 나이로 심화 학습에 들어간 천재성도 미웠고 마냥 환한 웃음도 미웠다. 괜스레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뮈블랑은 작정하고 말을 끊었다. 평소였으면 이렇게까지 엄하게 굴진 않았을 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것을 보면 원래 화가 나지 않나. 남만 복장 터지게 걱정하게 만들고, 안달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
“히이잉, 그치만…….”
뮈블랑은 동글동글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울며 보채지 않을 거죠? 밀레나는 착한 아이니까요.”
때로 착한 아이라는 말은 아이를 틀에 가두곤 한다. 뮈블랑은 개미를 눌러 죽이듯 속삭였고 밀레나는 서러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한참을 끅끅댔지만, 종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응.”
“좋아요. 그럼 난 이만 갈게요.”
할 일도 없으면서 먼저 일어섰다. 등 뒤에서 공주의 흐느낌이 작게 들려오자 따끔따끔한 감각이 폐부를 찔렀다. 그것은 어쩌면 희열이었을까. 잡으려 하면 터져 버리는 비눗방울처럼 작고 중독적인 희열이었을까. 미묘한 기분으로 복도를 거닐던 중에, 아직 방 안에서 수업 자료들을 살펴보던 밀레나의 스승을 마주쳤다. 뮈블랑은 그대로 고개 돌려 외면하려 했지만 스승은 자애로운 미소로 뮈블랑을 반겼다.
“안녕, 너 자주 보았었지? 이름이 뭐니?”
“……뮈블랑입니다, 기테모어 님.”
“어머, 기억력 좋구나. 내 이름도 다 기억하고 있고.”
“기테모어 님이 공주님께 극진하시니까요.”
뮈블랑은 ‘극진’에 미묘한 억양을 넣었다. 기테모어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몸을 기울였다.
“알고 있구나?”
“……들키는 날엔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그쯤에서 그만두십시오.”
“어째서?”
“공주님은 그런 것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기테모어는 뮈블랑이 이해하지 못할 심상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웃었다.
“공주니까?”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십니까. 그럼 공주님이 공주지 왕자겠어요?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공주님까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기테모어 님은 몰라도 저는 그런 형벌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마치…….”
“마녀처럼?”
소름이 끼쳤다.
“네.”
처녀의 피로 목욕하고 악마를 숭배하던 사특하고 음란한 계집들은 사술을 부리다 전부 화형당해 죽었더랬지. 뮈블랑은 마녀가 되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기테모어는 추호의 흐트러짐 없는 낯으로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뮈블랑, 너도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 공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돕고 싶을 뿐이야. 최초의 그 마녀가 그랬듯이, 더 많은 마녀를 살리기 위해서.”
여자가 속삭였다.
“나는 마녀니까.”
1화
#프롤로그
“드디어 내 이 자리를 갖게 되었구나.”
왕좌를 내려다보는 소녀가 보이는가? 너희는 저 공주가 지금 무엇을 해낸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가?
“나를 위해 싸워 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뮈블랑은 주먹에 힘을 주며 소녀를 바라본다. 스스로 영광을 거머쥔 소녀는 왕좌 앞에 우뚝 선 채 붉은 망토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짙은 황금색 머리칼이 나부끼고 오색의 유리가 역광을 쏟아붓는 가운데, 빛을 휘장처럼 두른 소녀가 만민을 굽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관식에 불순분자가 섞이지 않을 순 없는 노릇. 불현듯 살기를 느낀 뮈블랑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하녀의 손목을 단단하게 붙들고 은밀하게 배에 총을 겨눴다. 이자가 살기도 감출 줄 모르는 엉성한 암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서도 바로 쏘지 않은 까닭은 단순하다. 마법구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는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멈춰라. 암살자. 지금 그만두면 살려…….”
“카마이유 님께 영광을!”
그때 악에 받친 암살자가 칼을 들고 공주에게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쏠걸! 아무리 살기도 못 감추는 멍청한 놈이라고 해도 봐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뮈블랑은 암살자의 뒤통수에 대고 짜증스럽게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그보다 공주의 곁에 머물던 칼이 빨랐다.
“아아악!”
암살자의 팔을 자른 남자, 카산은 뮈블랑을 미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암살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말든 뮈블랑은 툴툴거리면서 암살자의 다리 양쪽에 총을 쏘고 입에 손을 집어넣어 독단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한 후 경비병에게 암살자를 던졌다. 귀족들은 빠르고 간결하게 돌아가는 현황에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그것까진 뮈블랑의 알 바가 아니었다.
뮈블랑이 책임져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대처가 늦었으니 또 잔소리를 듣겠군.’
그러나 뮈블랑에게도 사정은 있었는데, 아무 짓도 안 한 사람을 쏘면 시민 단체에서 들고 일어설 것이었다. 물론 뮈블랑이야 살기를 감지했다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말은 변명 취급할 테고.
그러나 누군가가 살기를 내뿜었다는 말 한마디만으로 즉결 처형이 가능한 국가였다면 밀렌도요프 공주를 왕으로 맞이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 국가를 걷어차 버렸겠지.
뮈블랑의 왕 밀렌도요프는 그런 사람이다.
“그대들 앞으로도 나를 따르라.”
이윽고 스스로 왕관을 쓴 공주가 반원을 그리며 돌자, 길게 늘어진 망토가 계단을 쓸어내린다.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해 소녀에게로 산란한다.
“내가 아슈타르의 왕이다!”
그날, 공주는 공식적으로 왕좌를 쟁취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녀가 왕위에 오르는 공주를 지켜보는 이야기였다.
#제1장 최초의 그 마녀가 그랬듯이
아슈타르 왕국의 공주 밀렌도요프, 밀레나는 울음이 많았다. 태생부터 애가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울었고 왕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도 목이 터지도록 울었다.
왕은 자기가 안아 들자마자 빼애애액 울기 시작하는 밀레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비로서 책임감도 없냐고? 그런 건 슬하에 자녀가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수를 넘어설 때부터 없어졌다. 밀레나는 벌써 여덟째 자식이었다. 뭐, 솔직히 그 숫자를 넘기기 전부터도 딱히 자식을 예뻐하는 성품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대강 변명거리를 주워섬긴 그는 옆에 서 있던 애기 하녀에게 신경질적으로 밀레나를 던졌다.
그 애기 하녀가 바로 뮈블랑이었다.
일곱 살짜리 뮈블랑은 밀레나가 우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짜증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게 좀 예쁜 짓도 하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아비가 좋게 봐 줄 거 아닌가. 뮈블랑은 어릴 때부터 남 비위 맞추는 덴 고수였기 때문에 저렇게 자기 감정만 앞세워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애를 싫어했다.
즉 뮈블랑은 더럽게 꼬인 상황을 견뎌 내기 위해 밀레나를 탓했다. 갓난아기가 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보고 화를 내는 왕이 잘못됐다. 그런데 뮈블랑은 마냥 갓난아기 탓을 한 거다. 그게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누구나 실수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뮈블랑은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는 성정이 아니었고 그래서 뮈블랑이 밀레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무도 뮈블랑의 잘못된 생각을 수정해 줄 수 없었다.
밀레나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언니!”
밝은 황갈색이라고 해야 할까, 탁한 금색이라고 해야 할까. 엷은 커피처럼 달콤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포스스 나부꼈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짧은 팔다리로 꾸물꾸물 뛰어오는 동작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한없이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봄볕 꽃망울처럼 어여쁘게 움터 사랑스러웠으나,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공주답게 의복에서 다소 오래 입은 티가 났다. 그러나 뮈블랑은 전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뮈블랑은 저 나이에 더한 나락에서 살았다.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을 수 있단 것만으로도 족한 사치잖은가?
“언니가 아니라 하녀입니다, 공주님.”
왕에게는 사랑받지 못한다지만 밀레나의 주위에는 온통 밀레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뿐이다. 애착에 능숙한 아이의 뺨은 복숭앗빛으로 보송보송하게 물들어 있었고 솜털이 콕콕 박힌 낯은 보들보들했다. 어린애다운 생기와 유쾌함이 깃든 얼굴. 뮈블랑은 그런 게 몸서리치도록 지긋지긋했다.
“언니, 여기 주위에 아무도 없어.”
그러나 주위를 힐끔힐끔 훔쳐보다가 종종거리며 다가와 조심스럽게 이리 말하는 공주님의 명령을 계속 거절할 수도 없는 셈이고. 결국 뮈블랑은 나직하게 가짜 웃음을 드리웠다.
“저는 하녀라니까요.”
“언니이이이.”
“알겠습니다, 밀레나. 공부 즐겁게 하고 오셨나요.”
“응! 나 열심히 공부했어!”
밀레나는 이 짧은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뮈블랑이 밀레나의 이름을 불러 주며 다정하게 일상을 물어 주는 그 짧은 시간. 신분의 격차를 알고는 있으나 이해하지 못하던 밀레나에게 뮈블랑과의 격의 없는 대화는 가뭄 중 내린 단비였다.
“무얼 배우셨는데요?”
“오늘도 비밀이라면서 국제 정세에 대해 얘기했어!”
그에 비해 뮈블랑은 이 짧은 시간을 정말 싫어했다. 또한 밀레나의 스승도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 스승이란 작자는 주제도 모르고 밀레나에게 허튼 꿈을 꾸게 했기 때문이다.
밀레나는 여자다. 여자는 작위를 계승받을 수 없으므로 지식을 학습할 필요가 없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신분 상승을 하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이었다. 기왕이면 타국의 왕자나 황자, 뭐 그런 사람을 만나서 비가 된다면야 더 좋겠지.
그러나 스승은 정규 과정을 넘어선 심화 학습을 밀레나에게 가르쳤다. 그건 오직 스승과 밀레나와 뮈블랑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이게 알려지면 스승은 목이 잘린다. 뮈블랑은 스승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이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왜 자신이 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야 하는가?
“그래요? 좋으셨겠네요.”
“응! 또 내가 뭐를 얘기했냐면……!”
“그런데 어쩌죠? 저는 아주 바빠요.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아요.”
밀레나가 가진 순수가 미웠다. 다섯 살의 나이로 심화 학습에 들어간 천재성도 미웠고 마냥 환한 웃음도 미웠다. 괜스레 심술을 부리고 싶었던 뮈블랑은 작정하고 말을 끊었다. 평소였으면 이렇게까지 엄하게 굴진 않았을 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것을 보면 원래 화가 나지 않나. 남만 복장 터지게 걱정하게 만들고, 안달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
“히이잉, 그치만…….”
뮈블랑은 동글동글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울며 보채지 않을 거죠? 밀레나는 착한 아이니까요.”
때로 착한 아이라는 말은 아이를 틀에 가두곤 한다. 뮈블랑은 개미를 눌러 죽이듯 속삭였고 밀레나는 서러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한참을 끅끅댔지만, 종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응.”
“좋아요. 그럼 난 이만 갈게요.”
할 일도 없으면서 먼저 일어섰다. 등 뒤에서 공주의 흐느낌이 작게 들려오자 따끔따끔한 감각이 폐부를 찔렀다. 그것은 어쩌면 희열이었을까. 잡으려 하면 터져 버리는 비눗방울처럼 작고 중독적인 희열이었을까. 미묘한 기분으로 복도를 거닐던 중에, 아직 방 안에서 수업 자료들을 살펴보던 밀레나의 스승을 마주쳤다. 뮈블랑은 그대로 고개 돌려 외면하려 했지만 스승은 자애로운 미소로 뮈블랑을 반겼다.
“안녕, 너 자주 보았었지? 이름이 뭐니?”
“……뮈블랑입니다, 기테모어 님.”
“어머, 기억력 좋구나. 내 이름도 다 기억하고 있고.”
“기테모어 님이 공주님께 극진하시니까요.”
뮈블랑은 ‘극진’에 미묘한 억양을 넣었다. 기테모어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몸을 기울였다.
“알고 있구나?”
“……들키는 날엔 다 같이 망하는 겁니다. 그쯤에서 그만두십시오.”
“어째서?”
“공주님은 그런 것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기테모어는 뮈블랑이 이해하지 못할 심상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웃었다.
“공주니까?”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하십니까. 그럼 공주님이 공주지 왕자겠어요?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공주님까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기테모어 님은 몰라도 저는 그런 형벌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마치…….”
“마녀처럼?”
소름이 끼쳤다.
“네.”
처녀의 피로 목욕하고 악마를 숭배하던 사특하고 음란한 계집들은 사술을 부리다 전부 화형당해 죽었더랬지. 뮈블랑은 마녀가 되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기테모어는 추호의 흐트러짐 없는 낯으로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뮈블랑, 너도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 공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돕고 싶을 뿐이야. 최초의 그 마녀가 그랬듯이, 더 많은 마녀를 살리기 위해서.”
여자가 속삭였다.
“나는 마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