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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게는 왕좌가 필요하다
2화
말의 무게가 너무도 컸다. 뮈블랑은 희게 질린 얼굴로 두어 발자국 물러서려다가, 악에 받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녀는 전부 불타 죽었어. 당신이 마녀일 리 없다고.”
기테모어가 작게 웃었다.
“그래. 전부 불타 죽었어. 그러니 이제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지 않겠니.”
“밀레나는 마녀가 아니야!”
“내가 마녀이듯이 그녀도 마녀야. 공부를 꿈꾸는 여자가, 세상을 바꾸려는 여자가 마녀라면.”
뮈블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테모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대체 무슨 헛소리를…… 헉!”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뮈블랑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꿇었다. 망할, 왕궁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그것도 이런 안건으로 이야기하던 중에 소리를 지르다니 제정신인가? 만약 지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이 다른 궁의 사람이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알몸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성벽에 걸려도 할 말이 없었다.
뮈블랑 혼자만 그 꼴을 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나 마녀에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도 중대한 죄이기에 그분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뮈블랑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잘못……!”
한데 무언가가 달랐다. 매서운 채찍질이 없었다. 다만 다가온 것은 손을 잡은 손. 이게 무엇일까?
뮈블랑의 등 뒤에서 다가온 사람은 호들갑스럽게 포옹을 시도하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손 위에 손을 겹쳐 올리고 다독였다.
아, 그분이었다. 그녀를 나락에서 꺼내어 준 이였다. 뮈블랑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밀레나의 어미, 뮈블랑의 주인, 아슈타르에 잡혀 온 샛별.
블리마데세가 그곳에 있었다.
당신에게 피해 끼치지 않을 수 있단 사실이 뮈블랑을 안심하게 했다. 뮈블랑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충성스러운 개처럼 웃었다. 블리마데세는 밀렌도요프에게 물려준 것과 똑같은 하늘색 눈동자로 뮈블랑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니?”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놀라게 해서 미안해.”
“주인님은 제게 그런 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 그보다!”
뮈블랑이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펄쩍 뛰어올랐다.
“주인님! 저 여자를 쫓아내야 해요! 마녀라고 했어요! 밀레나, 아니, 공주님께 이상한 것을 가르쳤다구요!”
그러나 블리마데세는 곤란한 양 웃을 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뮈블랑은 자기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가만두면 큰일이 날 거예요!”
“음, 뮈블랑……. 사실 기테모어를 초빙한 건 나야.”
“네에?”
“밀레나가 그녀에게 교육받길 원했거든.”
뮈블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너도 언젠간 알지 않을까?”
그렇지만 뮈블랑은 도무지 다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결국 기테모어를 내쫓으라는 뮈블랑의 건의는 그대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러나 뮈블랑은 그 후로도 내내 기테모어를 경계했는데, 매일같이 밀레나와 기테모어의 수업을 참관하며 그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일일이 감시할 정도로 그 경계심은 강렬했다. 졸지에 뮈블랑까지 수업에 참여하게 된 셈이었지만 뮈블랑만 그걸 몰랐다.
뮈블랑은 그들과 함께 정치에 대해서, 철학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배웠다.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교류했다. 그렇게 사창가 골목 심부름꾼 아이로만 살아가던 뮈블랑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뮈블랑, 너는 신화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니? 공주님은 들으셨던 내용이겠지만 덧대어 말하자면, 신화에는 아주 많은 내용이 나오지만 개중에는 여신이 강간당하는 설화도 아주 많아.”
‘미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구나.”
‘들켰네.’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도 많단다. 그게 현실이야.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런 이야기들에서 얻을 수 있는 현명하고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자의 교훈을 알려 주진 않을 거야. 그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마. 밀레나 공주님도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신들의 경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 옛날에, 고대의 사람들은 숱하면 경합을 벌였답니다…….”
기테모어의 수업을 들으며, 뮈블랑은 포만감이 들어차도록 풍부하게 지식을 섭취했다. 교육이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은 한번 알게 된 이상은 눈 돌릴 수 없는 환희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정의 내릴 단어를 원했고 더 넓은 세계를 맛보기 위해 살기에.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밀레나가 여섯 살, 뮈블랑이 열세 살이 된 것이다.
“뮈블랑!”
이제 밀레나도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뮈블랑을 언니라 부름으로써 뮈블랑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도 더없는 애정은 여전해서 그녀가 뮈블랑을 볼 때면 눈에서 꿀이 떨어질 정도였다. 뮈블랑은 그 무구한 사랑을 느낄 때마다 개미를 눌러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은 차마 품어서는 안 될 무엄한 것이었다. 그녀는 심장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을 애써 내리누르며 대꾸했다.
“네, 공주님의 뮈블랑이 여기 있어요.”
이런들 저런들 뮈블랑은 공주님의 뮈블랑이었다. 밀레나는 뮈블랑에게 팔짱을 끼며 볼을 비볐다.
“헤헤, 오늘 나들이 나가는 거 너무 신난다, 그치?”
오늘은 간만에 외출 승인을 받아 내 기사들을 대동하고 바깥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다. 블리마데세는 별다른 작위 없는 평민 무희 출신 첩이었기에 왕에게 청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고 따라서 이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밀레나가 들떠 뛰어다니는 게 당연했다.
“공주님이 신나신다니 다행이에요.”
그러나 뮈블랑은 전혀 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테모어까지 함께 나들이를 가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과 공주님은 저 망할 스승을 너무 좋아했다. 아, 그래, 단신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학문을 가르쳤으니 머리가 좋은 건 인정한다, 그러나 사상이 글러 먹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물론 아주 다 글러 먹은 건 아니지만. 일 년간의 토론 끝에 솔직한 심정으로 어느 정도 동조하는 면도 생기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 당시 들었던 마녀 운운은 너무 심하지 않았나. 밀레나와 자신이 교육받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모든 여자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마녀는 화형 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밀레나는 마녀가 아니고.
뮈블랑이 은근슬쩍 기테모어를 노려보자 기테모어가 조금 웃었다.
“내 둘째 제자님은 참 귀엽다니까.”
뮈블랑은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는 욕설을 삼켰다.
“기테모어 님, 저는 귀하신 분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요. 저는 하녀로서 공주님이 수업을 들으시는 내내 시중을 들 뿐이에요.”
물론 지혜롭고 원숙한 기테모어의 눈에는 그런 속내가 전부 다 읽혔다.
“그런 면까지 합쳐서 전부 귀여워. 그렇지요, 블리마데세 님?”
“물론이지. 우리 밀레나랑, 뮈블랑이랑 전부 다 귀여워 죽겠다니까?”
밀레나는 헤헤 웃었고 뮈블랑은 표정을 이상하게 찡그렸다. 우리 밀레나랑, 뮈블랑이라. 뮈블랑은 블리마데세가 자기까지 챙겨 주는 게 부담스러웠다. 블리마데세의 딸은 밀레나였다. 아무리 어여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뮈블랑은 블리마데세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었다.
불현듯 불타는 격정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뮈블랑은 언제나처럼 그냥 조금 기분이 언짢은 척을 했다. 기테모어와 블리마데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련된 연기였다.
마차를 타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을 벗어난 그들은 평범하게 수도의 거리를 거닐었다. 날씨는 겨울이었지만 해가 쨍쨍했기에 뮈블랑이 양산을 들었다. 간신히 받아 낸 외출 승인인데도 굳이 거리를 택한 것은 평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에 담고 싶다는 밀레나의 의견 때문이었다. 밀레나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넓은 세상을 담기 바빴다.
‘어차피 따라붙는 기사들 때문에 겁먹는 백성들을 보는 것뿐이면서 뭐 저리 감격한대.’
사람들은 누가 봐도 귀족인 티가 나는 그들을 살살 피해 가며 눈을 깔았지만 철없는 밀레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
“그 사업 망할 줄 알았는데 진짜네! 신기해!”
엥?
“무슨 말씀이세요, 공주님?”
“아, 평민들이 양모로 지은 옷을 입고 있어서. 헤헤.”
“……한 번 더 물을게요. 무슨 말씀이세요?”
“양모는 비싼데 평민들이 양모로 지은 옷을 입고 있단 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내용이랑 일맥상통하잖아!”
뮈블랑은 인상을 찡그리며 머릿속을 헤집어 봤지만 기억나는 내용이 없었다. 기테모어가 힌트를 주듯 천천히 말했다.
“아슈타르 왕국의 후계 문제로 어느 파벌이 우세해질까에 대해 얘기할 때 잠깐 다뤘었지.”
“아! 그 소리였군요. 지금 기억났어요!”
블리마데세가 고개를 비틀어 양산을 쥔 뮈블랑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유쾌하게 지껄였다.
“우리 뮈블랑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우리에게 설명해 주렴.”
“음, 현재 차기 왕으로 손꼽히는 왕자들의 파벌은……. 저 같은 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요?”
“기사들은 멀찍이 있잖니.”
“음음, 그렇다면…… 만약의 경우에는 저 꼭 살려 주셔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릴게.”
물론 뮈블랑은 믿지 않았다.
“……현시점에선 1왕자 파와 4왕자 파가 제일 인기 좋죠. 1왕자는 정통성, 4왕자는 뒷배. 4왕자님 뒤엔 아드리안 공작가와 슈메프 후작가가 단단히 버티고 있죠. 1왕자님은 제일 먼저 태어난 걸로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될 줄 알고 유세 부리는……. 죄송합니다. 나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건방진 태도를 보여서 귀족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들었고요, 4왕자님은…… 많이 죽인다던데요.”
조금 숨을 참았다가 도저히 밀레나 얼굴을 보곤 말 못 하겠어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어 말했다.
2화
말의 무게가 너무도 컸다. 뮈블랑은 희게 질린 얼굴로 두어 발자국 물러서려다가, 악에 받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녀는 전부 불타 죽었어. 당신이 마녀일 리 없다고.”
기테모어가 작게 웃었다.
“그래. 전부 불타 죽었어. 그러니 이제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지 않겠니.”
“밀레나는 마녀가 아니야!”
“내가 마녀이듯이 그녀도 마녀야. 공부를 꿈꾸는 여자가, 세상을 바꾸려는 여자가 마녀라면.”
뮈블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테모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대체 무슨 헛소리를…… 헉!”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뮈블랑은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꿇었다. 망할, 왕궁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그것도 이런 안건으로 이야기하던 중에 소리를 지르다니 제정신인가? 만약 지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사람이 다른 궁의 사람이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알몸으로 채찍질을 당하고 성벽에 걸려도 할 말이 없었다.
뮈블랑 혼자만 그 꼴을 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러나 마녀에 관련된 이야기는 너무도 중대한 죄이기에 그분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뮈블랑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잘못……!”
한데 무언가가 달랐다. 매서운 채찍질이 없었다. 다만 다가온 것은 손을 잡은 손. 이게 무엇일까?
뮈블랑의 등 뒤에서 다가온 사람은 호들갑스럽게 포옹을 시도하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손 위에 손을 겹쳐 올리고 다독였다.
아, 그분이었다. 그녀를 나락에서 꺼내어 준 이였다. 뮈블랑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밀레나의 어미, 뮈블랑의 주인, 아슈타르에 잡혀 온 샛별.
블리마데세가 그곳에 있었다.
당신에게 피해 끼치지 않을 수 있단 사실이 뮈블랑을 안심하게 했다. 뮈블랑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충성스러운 개처럼 웃었다. 블리마데세는 밀렌도요프에게 물려준 것과 똑같은 하늘색 눈동자로 뮈블랑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니?”
“죄송해요…….”
“아니야, 내가 놀라게 해서 미안해.”
“주인님은 제게 그런 말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 그보다!”
뮈블랑이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로 펄쩍 뛰어올랐다.
“주인님! 저 여자를 쫓아내야 해요! 마녀라고 했어요! 밀레나, 아니, 공주님께 이상한 것을 가르쳤다구요!”
그러나 블리마데세는 곤란한 양 웃을 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뮈블랑은 자기답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가만두면 큰일이 날 거예요!”
“음, 뮈블랑……. 사실 기테모어를 초빙한 건 나야.”
“네에?”
“밀레나가 그녀에게 교육받길 원했거든.”
뮈블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너도 언젠간 알지 않을까?”
그렇지만 뮈블랑은 도무지 다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결국 기테모어를 내쫓으라는 뮈블랑의 건의는 그대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러나 뮈블랑은 그 후로도 내내 기테모어를 경계했는데, 매일같이 밀레나와 기테모어의 수업을 참관하며 그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일일이 감시할 정도로 그 경계심은 강렬했다. 졸지에 뮈블랑까지 수업에 참여하게 된 셈이었지만 뮈블랑만 그걸 몰랐다.
뮈블랑은 그들과 함께 정치에 대해서, 철학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배웠다.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교류했다. 그렇게 사창가 골목 심부름꾼 아이로만 살아가던 뮈블랑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뮈블랑, 너는 신화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니? 공주님은 들으셨던 내용이겠지만 덧대어 말하자면, 신화에는 아주 많은 내용이 나오지만 개중에는 여신이 강간당하는 설화도 아주 많아.”
‘미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구나.”
‘들켰네.’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도 많단다. 그게 현실이야.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런 이야기들에서 얻을 수 있는 현명하고 정숙하고 지혜로운 여자의 교훈을 알려 주진 않을 거야. 그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마. 밀레나 공주님도 이제부터 잘 들으세요. 신들의 경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 옛날에, 고대의 사람들은 숱하면 경합을 벌였답니다…….”
기테모어의 수업을 들으며, 뮈블랑은 포만감이 들어차도록 풍부하게 지식을 섭취했다. 교육이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은 한번 알게 된 이상은 눈 돌릴 수 없는 환희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정의 내릴 단어를 원했고 더 넓은 세계를 맛보기 위해 살기에.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밀레나가 여섯 살, 뮈블랑이 열세 살이 된 것이다.
“뮈블랑!”
이제 밀레나도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뮈블랑을 언니라 부름으로써 뮈블랑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래도 더없는 애정은 여전해서 그녀가 뮈블랑을 볼 때면 눈에서 꿀이 떨어질 정도였다. 뮈블랑은 그 무구한 사랑을 느낄 때마다 개미를 눌러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은 차마 품어서는 안 될 무엄한 것이었다. 그녀는 심장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을 애써 내리누르며 대꾸했다.
“네, 공주님의 뮈블랑이 여기 있어요.”
이런들 저런들 뮈블랑은 공주님의 뮈블랑이었다. 밀레나는 뮈블랑에게 팔짱을 끼며 볼을 비볐다.
“헤헤, 오늘 나들이 나가는 거 너무 신난다, 그치?”
오늘은 간만에 외출 승인을 받아 내 기사들을 대동하고 바깥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다. 블리마데세는 별다른 작위 없는 평민 무희 출신 첩이었기에 왕에게 청을 올리기는 쉽지 않았고 따라서 이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밀레나가 들떠 뛰어다니는 게 당연했다.
“공주님이 신나신다니 다행이에요.”
그러나 뮈블랑은 전혀 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테모어까지 함께 나들이를 가기 때문이었다. 주인님과 공주님은 저 망할 스승을 너무 좋아했다. 아, 그래, 단신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학문을 가르쳤으니 머리가 좋은 건 인정한다, 그러나 사상이 글러 먹었는데 어쩌란 말인가.
……물론 아주 다 글러 먹은 건 아니지만. 일 년간의 토론 끝에 솔직한 심정으로 어느 정도 동조하는 면도 생기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첫 만남 당시 들었던 마녀 운운은 너무 심하지 않았나. 밀레나와 자신이 교육받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모든 여자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마녀는 화형 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밀레나는 마녀가 아니고.
뮈블랑이 은근슬쩍 기테모어를 노려보자 기테모어가 조금 웃었다.
“내 둘째 제자님은 참 귀엽다니까.”
뮈블랑은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는 욕설을 삼켰다.
“기테모어 님, 저는 귀하신 분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어요. 저는 하녀로서 공주님이 수업을 들으시는 내내 시중을 들 뿐이에요.”
물론 지혜롭고 원숙한 기테모어의 눈에는 그런 속내가 전부 다 읽혔다.
“그런 면까지 합쳐서 전부 귀여워. 그렇지요, 블리마데세 님?”
“물론이지. 우리 밀레나랑, 뮈블랑이랑 전부 다 귀여워 죽겠다니까?”
밀레나는 헤헤 웃었고 뮈블랑은 표정을 이상하게 찡그렸다. 우리 밀레나랑, 뮈블랑이라. 뮈블랑은 블리마데세가 자기까지 챙겨 주는 게 부담스러웠다. 블리마데세의 딸은 밀레나였다. 아무리 어여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뮈블랑은 블리마데세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었다.
불현듯 불타는 격정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뮈블랑은 언제나처럼 그냥 조금 기분이 언짢은 척을 했다. 기테모어와 블리마데세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련된 연기였다.
마차를 타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을 벗어난 그들은 평범하게 수도의 거리를 거닐었다. 날씨는 겨울이었지만 해가 쨍쨍했기에 뮈블랑이 양산을 들었다. 간신히 받아 낸 외출 승인인데도 굳이 거리를 택한 것은 평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눈에 담고 싶다는 밀레나의 의견 때문이었다. 밀레나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넓은 세상을 담기 바빴다.
‘어차피 따라붙는 기사들 때문에 겁먹는 백성들을 보는 것뿐이면서 뭐 저리 감격한대.’
사람들은 누가 봐도 귀족인 티가 나는 그들을 살살 피해 가며 눈을 깔았지만 철없는 밀레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
“그 사업 망할 줄 알았는데 진짜네! 신기해!”
엥?
“무슨 말씀이세요, 공주님?”
“아, 평민들이 양모로 지은 옷을 입고 있어서. 헤헤.”
“……한 번 더 물을게요. 무슨 말씀이세요?”
“양모는 비싼데 평민들이 양모로 지은 옷을 입고 있단 것은 우리가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내용이랑 일맥상통하잖아!”
뮈블랑은 인상을 찡그리며 머릿속을 헤집어 봤지만 기억나는 내용이 없었다. 기테모어가 힌트를 주듯 천천히 말했다.
“아슈타르 왕국의 후계 문제로 어느 파벌이 우세해질까에 대해 얘기할 때 잠깐 다뤘었지.”
“아! 그 소리였군요. 지금 기억났어요!”
블리마데세가 고개를 비틀어 양산을 쥔 뮈블랑과 시선을 마주하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유쾌하게 지껄였다.
“우리 뮈블랑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우리에게 설명해 주렴.”
“음, 현재 차기 왕으로 손꼽히는 왕자들의 파벌은……. 저 같은 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요?”
“기사들은 멀찍이 있잖니.”
“음음, 그렇다면…… 만약의 경우에는 저 꼭 살려 주셔야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살릴게.”
물론 뮈블랑은 믿지 않았다.
“……현시점에선 1왕자 파와 4왕자 파가 제일 인기 좋죠. 1왕자는 정통성, 4왕자는 뒷배. 4왕자님 뒤엔 아드리안 공작가와 슈메프 후작가가 단단히 버티고 있죠. 1왕자님은 제일 먼저 태어난 걸로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될 줄 알고 유세 부리는……. 죄송합니다. 나이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건방진 태도를 보여서 귀족들에게 욕을 먹는다고 들었고요, 4왕자님은…… 많이 죽인다던데요.”
조금 숨을 참았다가 도저히 밀레나 얼굴을 보곤 말 못 하겠어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