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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게는 왕좌가 필요하다
3화
“여자를요.”
“…….”
“하여튼 양쪽 다 결함이 하나씩 있어서 어느 쪽이 이길지는 시간만이 정하겠지만, 양모 사업이 망했으니 4왕자님 파가 승리하는 쪽에 걸겠어요. 1왕자님 파는 안 그래도 자금이 부족한데 그리되어 버렸으니……. 어휴, 양모를 왜 그렇게 많이 들여와서는. 물량이 많아지면 값이 내려간단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더군다나 양모는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데 어느 누가 새로 구매하겠느냐고요. 사치를 즐기는 귀족들? 작년에 유행 돌았던 상품을 누가 재구매하겠어요. 안 팔리니까 어쩔 수 없이 평민들이 구매할 정도로 값을 내려 판매할 수밖에 없었겠죠. 뭐 그런 것들만 영향을 끼치진 않았겠지만 말이에요. 세상은 일반적 공급 법칙만 따르진 않으니까. 아마도 4왕자 파의 방해도 꽤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럼 그로 인해 누가 악영향을 입을 것 같니?”
“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양모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낮으니까, 고프 영지?”
“고프 사람들이 내년에도 잘 팔릴 줄 알고 무리하게 양을 더 기른다면 그리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의 영주는 머리가 좋으니까 아마도 아닐걸. 더 생각해 봐.”
“흐으으음……. 아, 양고기 판매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질까요? 양의 수가 늘어나면 양고깃값도 내려갈 거 아녜요.”
“글쎄, 양의 수를 늘리지 않는 이상 크게 변동은 없을 것 같지만 확언할 수는 없네. 우리는 언제나 미래의 일을 가정해서 추론해 보는 것뿐이니까.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뚜렷하게 악영향을 받는 곳이 있어.”
“와, 어렵다. 공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밀레나가 방그레 웃었다.
“비밀! 뮈블랑 혼자서 고민해 봐.”
“……공주님은 짓궂으세요.”
기테모어가 배를 잡고 낄낄거리다가 뮈블랑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뮈블랑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기테모어 같은 사람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단 사실이 못마땅하지만 평화로운 나들이를 망칠 수 없기에 입을 다물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양산을 떨어뜨리고 욕설을 삼키며 곧장 밀레나의 눈을 가렸다. 젠장, 수도 광장 언저리에서도 저런 종자가 기어 다니다니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밀레나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뮈블랑의 손을 떼어 내지는 않았다. 뮈블랑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 어? 왜 그래?”
뮈블랑은 사늘하게 식은 눈으로 한쪽을 눈짓했다. 기테모어가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자리를 피할까요.”
기테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절대로 공주님의 눈에 담겨서는 안 됐다. 그런데 블리마데세가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공주님께 저 꼴을 보여 주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뮈블랑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양 재촉했다.
“어서요, 주인님. 저건 공주님이 보실 만한 게 못 돼요.”
“왜, 왜 그러는데?”
그러나 블리마데세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우뚝 서 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뮈블랑은 주인의 고민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블리마데세로서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둔 셈이었다. 어찌 되었든 왕족이라는 기득권층으로 자라 온 아이에게 현실의 비참함을 직면시키느냐 아니면 온실 속 꽃으로 키우느냐. 만약 보여 준다면, 사랑하는 딸은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결국 블리마데세는 딸을 사랑스럽고 또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딸아, 감당할 수 있겠니?”
“주인님!”
그리고 밀레나는 대답했다.
“……감당해 보이겠어요.”
뮈블랑은 이를 악물었다. 주인이 명했으니 그녀는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귀하게 보듬어지며 자라 온 아이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 건…….
뮈블랑이 손을 뗐다.
공주의 눈동자에 채찍질당하는 노예의 모습이 담겼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눈이 좋은 뮈블랑에게는 살점과 피가 튀기는 장면이 똑똑히 보였다. 채찍이 등을 갈길 때마다 붉은 것이 가죽 끄트머리에 달린 짐승의 뼛조각에 들러붙었다가 쫘악쫘악 뜯겨 나왔다. 그가 입은 낡은 옷은 그저 다리 사이를 가리기 위한 거적때기라 채찍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못했다.
잘생긴 낯. 찡그러진 표정. 한 열여덟 정도 될까. 젊다 못해 어린 나이. 소년과 청년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에 노출된 사내는 개에게나 채울 법한 목줄을 질질 끄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었는데 비틀거리는 매무새를 보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나 뮈블랑을 비롯한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힐긋힐긋 쳐다만 볼 뿐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언뜻언뜻 보이지 않는 남자의 뒷목에 노예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사창가 골목에서 구르며 보내 이런저런 쓸데없는 안목을 익힌 뮈블랑이 보기엔 아마도 바흐무트 상단 소속 낙인인 듯한데. 제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는 상단의 노예가 왜 아슈타르에 있는지는 알 도리 없었지만 말이다.
혹자는 아무리 노예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어떻게 길거리에서 채찍질을 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노예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든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받을 피해 때문이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흉악한 노예 상인에게 대거리를 시도할 용기와 배짱, 그리고 그들에게 후폭풍으로 가해를 당하지 않을 만큼의 뒷배가 필요했다. 어느 것 하나 선량한 시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공주님에겐 그 두 가지 모두가 존재했다.
밀레나는 히끅거리면서도 그대로 직진했다. 뮈블랑이 기겁하며 밀레나를 막아섰지만 밀레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하신 분이 어찌 더러운 걸 가까이서 보려 하세요!”
“세상에 더러운 생명은 없어.”
“안 돼요, 안 돼!”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자 주위에서 껄렁대며 수다를 떨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뮈블랑이 대강 얼버무리기 전에 밀레나가 눈가를 아무렇게나 비비며 잽싸게 대꾸했다.
“저 사람을 돕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돕는다니, 어…… 저 노예를 말입니까? 구매하시면 되겠지만 국왕 전하께서 허락하실지는…….”
“충고 고마워!”
용감한 밀레나는 푸른색 공단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뮈블랑은 마른세수를 하며 따라갔고 기사들이 어어거리다가 뒤늦게 그녀들을 쫓았다. 밀레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소리 쳤다.
“그만해!”
울음기 젖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흉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던 노예 상인들은 뒤따라온 기사들을 보고 뭔가 싶은 표정을 짓다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대강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아, 놀랍게도 어리석은 정의감에 사로잡힌 꼬맹이가 우리에게 돈을 주기 위해 왔구나!
“아이고, 꼬마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저 아이를 때리지 마!”
“아이? 아이라, 허허, 열일곱 살 먹은 징그러운 게 아이는 무슨. 아가씨, 이놈의 주인은 저희입니다. 만약 채찍질을 보기 싫으시다면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시면 돼요.”
노예 상인은 밀레나의 귀에 가격을 속닥였고 다음 순간 밀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그대로 엄마에게 달려가 속닥거렸다. 그러자 블리마데세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기테모어의 귓가에 중얼거렸고 기테모어는 뮈블랑을 힐끔힐끔 보다가 시선을 외면했다.
뮈블랑이 알면 무조건 구매를 막으려 들 가격이기에 저러는 것이다. 아니, 그런 가격이면 좀 사질 말라고! 그러나 뮈블랑이 답답해하건 말건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서 어떻게 비상금을 털어야 저 애를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조잘대고 있었다. 뮈블랑은 허탈한 심정으로 노예 상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오빠라 불러.”
“할아범.”
딱! 노예 상인이 뮈블랑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쬐끄만 게 어디서 염병이야. 너 하녀인 거 모를 거 같아?”
뮈블랑은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아, 아프잖아요! 아저씨 늙은 걸 내가 모를 거 같습니까? 됐고 얼만지나 말해 봐요.”
“저기 귀하신 분들이 말하지 말라는데 내가 왜.”
“아저씨가 바가지를 씌우니까 그렇지. 저 비쩍 곯은 게 뭐 그리 비싸다고 올려 치쇼?”
“뭐가 어째? 이게 뭐가 곯았다고 그래?”
눈이 뒤집힌 노예 상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앓던 남자의 팔뚝을 거칠게 끌어 올려 일으켜 세웠다. 안 그래도 잔뜩 찢어져 있던 옷가지를 억지로 벗겨 내서 몸을 주물럭거리는 통에 뮈블랑은 조금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거 몸 좋군, 하고 떨떠름하게 생각했을 뿐.
“이 몸의 근육을 좀 보라고. 이렇게 단단한 근육은 기사 나리들 몸에서도 보기 어려워. 실전으로 각이 잡혀서 날렵한 거야. 실전을 어디서 했냐고? 얘 제국 출신 검투사거든. 백전백승 무패의 기록을 세우던 걸 사 왔는데 무예 솜씨가 뛰어나 가지고 호위로 쓰면 딱이지. 너야말로 후려치지 말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가만히 있어라잉.”
남자를 아무 데나 내동댕이친 노예 상인이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이밀었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을 거면 뮈블랑은 진작 죽었을 테다. 뮈블랑이 바락바락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야말로 뭐 모르는 소리 마쇼! 그렇게 좋은 노예를 왜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우리에게 파네 마네 하는데? 오호라, 아저씨들, 기껏 훔쳐 왔는데 길들이질 못했나 보죠?”
“뭣?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훔치긴 누가!”
“저 낙인이 바흐무트 상단 거란 걸 모르는 애가 어디 있어요? 설마 아저씨가 ‘그’ 바흐무트 소속이진 아닐 테고! 그럼 훔쳐 왔단 건데, 이걸 어쩌면 좋아?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고 다니니까 어떻게 이용해 먹을 수도 없네? 그런데 바흐무트의 낙인이 찍혀 있으니 다른 상단에 되팔 수도 없고, 처분할 방법이 없죠? 그래 놓고 바가지를 씌워? 이거 이 사람들이랑 앞으로 거래 못 하겠네! 노예 거래하는 사람들이 신용을 이따위로 관리해? 고객과의 신뢰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아저씨네 상단 이름이 뭐예요? 어―이, 동네 사람들! 이 사람들이 싸가지에 바가지를…… 읍읍!”
“알았어, 알았다고. 깎아 주면 되잖아!”
뮈블랑이 상단 지점에 갈 때까지 끊임없이 값을 후려친 결과 기존 금액에서 삼분의 일 가격으로 노예를 구매하게 되었다.
망할 것들, 바가지를 얼마나 씌워 먹은 거야?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역시 윗대가리들이란 막무가내로 일을 벌여 놓고 뒷수습은 다 아랫사람에게 시킨다. 뮈블랑이 속으로 투덜대는 걸 모르는 밀레나가 동경하는 눈빛으로 초롱초롱하게 뮈블랑을 바라보았다.
3화
“여자를요.”
“…….”
“하여튼 양쪽 다 결함이 하나씩 있어서 어느 쪽이 이길지는 시간만이 정하겠지만, 양모 사업이 망했으니 4왕자님 파가 승리하는 쪽에 걸겠어요. 1왕자님 파는 안 그래도 자금이 부족한데 그리되어 버렸으니……. 어휴, 양모를 왜 그렇게 많이 들여와서는. 물량이 많아지면 값이 내려간단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더군다나 양모는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데 어느 누가 새로 구매하겠느냐고요. 사치를 즐기는 귀족들? 작년에 유행 돌았던 상품을 누가 재구매하겠어요. 안 팔리니까 어쩔 수 없이 평민들이 구매할 정도로 값을 내려 판매할 수밖에 없었겠죠. 뭐 그런 것들만 영향을 끼치진 않았겠지만 말이에요. 세상은 일반적 공급 법칙만 따르진 않으니까. 아마도 4왕자 파의 방해도 꽤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럼 그로 인해 누가 악영향을 입을 것 같니?”
“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양모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낮으니까, 고프 영지?”
“고프 사람들이 내년에도 잘 팔릴 줄 알고 무리하게 양을 더 기른다면 그리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곳의 영주는 머리가 좋으니까 아마도 아닐걸. 더 생각해 봐.”
“흐으으음……. 아, 양고기 판매하는 사람들이 곤란해질까요? 양의 수가 늘어나면 양고깃값도 내려갈 거 아녜요.”
“글쎄, 양의 수를 늘리지 않는 이상 크게 변동은 없을 것 같지만 확언할 수는 없네. 우리는 언제나 미래의 일을 가정해서 추론해 보는 것뿐이니까.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뚜렷하게 악영향을 받는 곳이 있어.”
“와, 어렵다. 공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밀레나가 방그레 웃었다.
“비밀! 뮈블랑 혼자서 고민해 봐.”
“……공주님은 짓궂으세요.”
기테모어가 배를 잡고 낄낄거리다가 뮈블랑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뮈블랑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기테모어 같은 사람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단 사실이 못마땅하지만 평화로운 나들이를 망칠 수 없기에 입을 다물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양산을 떨어뜨리고 욕설을 삼키며 곧장 밀레나의 눈을 가렸다. 젠장, 수도 광장 언저리에서도 저런 종자가 기어 다니다니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야. 밀레나는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뮈블랑의 손을 떼어 내지는 않았다. 뮈블랑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 어? 왜 그래?”
뮈블랑은 사늘하게 식은 눈으로 한쪽을 눈짓했다. 기테모어가 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자리를 피할까요.”
기테모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건 절대로 공주님의 눈에 담겨서는 안 됐다. 그런데 블리마데세가 무언가를 고민하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공주님께 저 꼴을 보여 주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뮈블랑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양 재촉했다.
“어서요, 주인님. 저건 공주님이 보실 만한 게 못 돼요.”
“왜, 왜 그러는데?”
그러나 블리마데세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우뚝 서 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뮈블랑은 주인의 고민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블리마데세로서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둔 셈이었다. 어찌 되었든 왕족이라는 기득권층으로 자라 온 아이에게 현실의 비참함을 직면시키느냐 아니면 온실 속 꽃으로 키우느냐. 만약 보여 준다면, 사랑하는 딸은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결국 블리마데세는 딸을 사랑스럽고 또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 딸아, 감당할 수 있겠니?”
“주인님!”
그리고 밀레나는 대답했다.
“……감당해 보이겠어요.”
뮈블랑은 이를 악물었다. 주인이 명했으니 그녀는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귀하게 보듬어지며 자라 온 아이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 건…….
뮈블랑이 손을 뗐다.
공주의 눈동자에 채찍질당하는 노예의 모습이 담겼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눈이 좋은 뮈블랑에게는 살점과 피가 튀기는 장면이 똑똑히 보였다. 채찍이 등을 갈길 때마다 붉은 것이 가죽 끄트머리에 달린 짐승의 뼛조각에 들러붙었다가 쫘악쫘악 뜯겨 나왔다. 그가 입은 낡은 옷은 그저 다리 사이를 가리기 위한 거적때기라 채찍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못했다.
잘생긴 낯. 찡그러진 표정. 한 열여덟 정도 될까. 젊다 못해 어린 나이. 소년과 청년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에 노출된 사내는 개에게나 채울 법한 목줄을 질질 끄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었는데 비틀거리는 매무새를 보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러나 뮈블랑을 비롯한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힐긋힐긋 쳐다만 볼 뿐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언뜻언뜻 보이지 않는 남자의 뒷목에 노예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사창가 골목에서 구르며 보내 이런저런 쓸데없는 안목을 익힌 뮈블랑이 보기엔 아마도 바흐무트 상단 소속 낙인인 듯한데. 제국을 본거지로 두고 있는 상단의 노예가 왜 아슈타르에 있는지는 알 도리 없었지만 말이다.
혹자는 아무리 노예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어떻게 길거리에서 채찍질을 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노예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든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받을 피해 때문이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흉악한 노예 상인에게 대거리를 시도할 용기와 배짱, 그리고 그들에게 후폭풍으로 가해를 당하지 않을 만큼의 뒷배가 필요했다. 어느 것 하나 선량한 시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공주님에겐 그 두 가지 모두가 존재했다.
밀레나는 히끅거리면서도 그대로 직진했다. 뮈블랑이 기겁하며 밀레나를 막아섰지만 밀레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하신 분이 어찌 더러운 걸 가까이서 보려 하세요!”
“세상에 더러운 생명은 없어.”
“안 돼요, 안 돼!”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자 주위에서 껄렁대며 수다를 떨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뮈블랑이 대강 얼버무리기 전에 밀레나가 눈가를 아무렇게나 비비며 잽싸게 대꾸했다.
“저 사람을 돕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돕는다니, 어…… 저 노예를 말입니까? 구매하시면 되겠지만 국왕 전하께서 허락하실지는…….”
“충고 고마워!”
용감한 밀레나는 푸른색 공단 구두를 신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뮈블랑은 마른세수를 하며 따라갔고 기사들이 어어거리다가 뒤늦게 그녀들을 쫓았다. 밀레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소리 쳤다.
“그만해!”
울음기 젖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흉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던 노예 상인들은 뒤따라온 기사들을 보고 뭔가 싶은 표정을 짓다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대강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아, 놀랍게도 어리석은 정의감에 사로잡힌 꼬맹이가 우리에게 돈을 주기 위해 왔구나!
“아이고, 꼬마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저 아이를 때리지 마!”
“아이? 아이라, 허허, 열일곱 살 먹은 징그러운 게 아이는 무슨. 아가씨, 이놈의 주인은 저희입니다. 만약 채찍질을 보기 싫으시다면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시면 돼요.”
노예 상인은 밀레나의 귀에 가격을 속닥였고 다음 순간 밀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그대로 엄마에게 달려가 속닥거렸다. 그러자 블리마데세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기테모어의 귓가에 중얼거렸고 기테모어는 뮈블랑을 힐끔힐끔 보다가 시선을 외면했다.
뮈블랑이 알면 무조건 구매를 막으려 들 가격이기에 저러는 것이다. 아니, 그런 가격이면 좀 사질 말라고! 그러나 뮈블랑이 답답해하건 말건 세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서 어떻게 비상금을 털어야 저 애를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조잘대고 있었다. 뮈블랑은 허탈한 심정으로 노예 상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오빠라 불러.”
“할아범.”
딱! 노예 상인이 뮈블랑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쬐끄만 게 어디서 염병이야. 너 하녀인 거 모를 거 같아?”
뮈블랑은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아, 아프잖아요! 아저씨 늙은 걸 내가 모를 거 같습니까? 됐고 얼만지나 말해 봐요.”
“저기 귀하신 분들이 말하지 말라는데 내가 왜.”
“아저씨가 바가지를 씌우니까 그렇지. 저 비쩍 곯은 게 뭐 그리 비싸다고 올려 치쇼?”
“뭐가 어째? 이게 뭐가 곯았다고 그래?”
눈이 뒤집힌 노예 상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앓던 남자의 팔뚝을 거칠게 끌어 올려 일으켜 세웠다. 안 그래도 잔뜩 찢어져 있던 옷가지를 억지로 벗겨 내서 몸을 주물럭거리는 통에 뮈블랑은 조금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거 몸 좋군, 하고 떨떠름하게 생각했을 뿐.
“이 몸의 근육을 좀 보라고. 이렇게 단단한 근육은 기사 나리들 몸에서도 보기 어려워. 실전으로 각이 잡혀서 날렵한 거야. 실전을 어디서 했냐고? 얘 제국 출신 검투사거든. 백전백승 무패의 기록을 세우던 걸 사 왔는데 무예 솜씨가 뛰어나 가지고 호위로 쓰면 딱이지. 너야말로 후려치지 말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가만히 있어라잉.”
남자를 아무 데나 내동댕이친 노예 상인이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이밀었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을 거면 뮈블랑은 진작 죽었을 테다. 뮈블랑이 바락바락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야말로 뭐 모르는 소리 마쇼! 그렇게 좋은 노예를 왜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우리에게 파네 마네 하는데? 오호라, 아저씨들, 기껏 훔쳐 왔는데 길들이질 못했나 보죠?”
“뭣?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훔치긴 누가!”
“저 낙인이 바흐무트 상단 거란 걸 모르는 애가 어디 있어요? 설마 아저씨가 ‘그’ 바흐무트 소속이진 아닐 테고! 그럼 훔쳐 왔단 건데, 이걸 어쩌면 좋아?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고 다니니까 어떻게 이용해 먹을 수도 없네? 그런데 바흐무트의 낙인이 찍혀 있으니 다른 상단에 되팔 수도 없고, 처분할 방법이 없죠? 그래 놓고 바가지를 씌워? 이거 이 사람들이랑 앞으로 거래 못 하겠네! 노예 거래하는 사람들이 신용을 이따위로 관리해? 고객과의 신뢰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아저씨네 상단 이름이 뭐예요? 어―이, 동네 사람들! 이 사람들이 싸가지에 바가지를…… 읍읍!”
“알았어, 알았다고. 깎아 주면 되잖아!”
뮈블랑이 상단 지점에 갈 때까지 끊임없이 값을 후려친 결과 기존 금액에서 삼분의 일 가격으로 노예를 구매하게 되었다.
망할 것들, 바가지를 얼마나 씌워 먹은 거야?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역시 윗대가리들이란 막무가내로 일을 벌여 놓고 뒷수습은 다 아랫사람에게 시킨다. 뮈블랑이 속으로 투덜대는 걸 모르는 밀레나가 동경하는 눈빛으로 초롱초롱하게 뮈블랑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