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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ER]



1.


노라는 제게로 다가오는 여자를 바라본다. 밝은 금발 머리를 단정히 묶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노라를 바라본다. 노라는 여자를 안다. 헨리에타 콜튼. 후작가의 금지옥엽은 온실 속 화초라기보다는 돌을 뚫고 자라는 야생화와 같고, 그보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나는 나무와 더 비슷하다.

“오셨군요.”

헨리에타의 목소리는 건조하다. 별것 아닌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그 위압감은 그리 적지 않다. 노라는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헨리에타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노라는, 빙의를 했다. 책 속 조연도 못 되는 지나가는 역 중 하나로. 온갖 암투가 벌어지는 책 속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노라는 책 내용을 알고 있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주인공들은 각자 특정한 부분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상식적이고 성격도 나름대로 다들 괜찮다.

노라는 어느 시골의 자작가 출신이다. 말만 귀족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렇지도 않다. 책 속에서는 황태자비의 시녀로 나온다. 노라는 그걸 깨닫자마자 수도로 왔고 오페라 극장 앞에서 황태자를 붙잡았다.

시민들에게 적당히 웃어 주던 황태자에게 다짜고짜 저가 예언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황태자는 믿지 않았지만, 얼마간의 검증 끝에는 믿어 주었다. 책의 내용을 모두 아는 노라에게 그 검증을 통과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 결과로, 노라는 황성으로 들어왔다. 어느 돈도, 명예도 없는 자작 영애로는 꿈도 꾸지 못할 귀한 옷감, 화려한 장식, 아늑한 침대, 그 모든 것이 노라의 것이다. 노라는 책 속에 들어왔고, 저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걸 이용했다.

그러다 보면 가끔, 귀족들을 위해 예언을 해 주는 일이 있다. 황족이 거들먹을 부리는 것이다. 너를 이리도 신뢰해 내가 귀한 예언자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그런 것처럼. 헨리에타와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노라는 말한다. 헨리에타는 그저 노라를 바라본다. 조연도 못 되는 노라와는 달리, 원래의 헨리에타는 책 속 조연 정도는 된다. 그런데 그 끝이 좋지가 않다.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가까스로 도망친 어린 남자주인공, 클라우스를 성노예로 쓰려 데려왔던 게 헨리에타의 새어머니다. 다행히도 클라우스는 그 이후 가까스로 도망치기는 하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헨리에타의 집안인 콜튼 후작가는 클라우스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거기다 원래대로라면 헨리에타는 후작 위를 어느 날 나타난 사생아에게 빼앗기고 제 방계의 어느 백작가와 결혼을 할 예정이었지만, 헨리에타는 원래부터 욕심이 꽤 많다. 그래서 몇 가지 방법을 동원해 2황자와 결혼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2황자의 외가가 클라우스에게 반역죄를 씌운 가문이었다. 클라우스는 복수를 했고 그 과정에서 헨리에타는 죽는다. 헨리에타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정해진 대로 백작가의 자제와 결혼을 했다면 어쨌거나 살기는 했을 텐데.

“참,”

하지만 그건 노라가 아는, 책 속의 헨리에타이다. 지금의 헨리에타는 그렇지 않다.

“대단하세요.”

노라가 지금에 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이다. 지금은 후작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헨리에타 대신 후작 위를 이어받았을 사생아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후작 위는 그대로 헨리에타의 것이다. 이렇게 되었으니 당연히 헨리에타는 굳이 2황자와 결혼할 일도 없고 클라우스의 복수에 휘말릴 일도 없다.

“기분이 어떠세요?”

헨리에타가 묻는다. 헨리에타에게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시리고 시리다. 하지만 그다지 건조하지는 않다. 가까이 가면 베여 버릴 것만 같다. 헨리에타가 묻는 것이 뭔지 노라는 안다. 노라가 아는 책 속 내용이 바뀌었다. 그 심정을 묻는 것이다. 헨리에타는 이곳이 책 속이라는 것을 안다. 적어도 노라가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은 안다. 노라가 말했다. 자의는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그렇게 됐다.

헨리에타의 이야기는 소설 속 아주 작은 비중의 이야기인지라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바뀌었다. 노라는 그게 조금 불안하기도 하면서, 그래도 역시 상대가 헨리에타인 이상에야 어쩔 수 없다. 헨리에타에게 몇 가지 정보를 전해 준 게 노라이기는 하지만, 노라가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헨리에타는 후작 위를 지켰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잘 모르겠어요.”

노라는 주위를 둘러본다. 꽤나 많은 사람이 자리해 있다. 당연한 일이다. 무려 그 콜튼 후작의 장례식이다. 후작은 그리 평판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단 돈은 많았다. 그래서 다들 잘 보이고 싶어 했다. 이제 후작은 죽었지만, 그렇다 해서 돈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차기 후작에게도 잘 보이려 노력한다.

“아가씨, 집사님께서 찾으십니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노라는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래. 곧 가겠다 전해 드려.”

헨리에타는 짧게 말했고 그 말에 헨리에타에게 말을 전한 남자는 걸음을 옮겨 멀어진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지만, 노라는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저 사람이 왜,

“말도 안 돼.”

검은 머리, 짙고 어두운 보랏빛의 눈. 무엇보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그 모든 게 가리키는 건 명확하다. 하지만, 왜, 지금, 이 시기에, 이곳에,

“클라우스 에드먼스턴이잖아.”

책의 남자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