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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
잠익비상(潛翼飛上)



무영신위 1권(1화)
序章


불귀곡(不歸谷).
그는 그 안에서 지옥을 보았다.
이제 그는 어떠한 일을 보아도, 어떠한 일을 겪어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끔찍하고 참혹한 일에 당면해도 놀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싫어졌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던 정혼녀의 차갑게 식은 눈과 이미 딴살림을 차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는 그로서도 진정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영십익(無影十翼).
제왕성의 요직을 호위하는,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던 열 명의 날개.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솜씨로 십익의 수좌로 손꼽히던 촉망받는 기재.
일익(一翼) 주운(周雲).
오 년 만에 돌아온 그가 처음으로 겪은 것은…….
바로 실연이었다.
그것이 그의 첫 불행이었다.



第一章 주운(周雲) - 오 년 만의 귀환(1)


오 년 전.
지독한 혈풍의 난세가 끝나고 마침내 정마양도는 휴전을 맺고 정마대전의 막을 내렸다.
그것이 바로 제이차 정마대전의 결말이었다.
주운(周雲)은 제왕성주의 호위로서 정마대전에 참가했다. 호위무사의 정체가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방침 탓에 얼굴을 가리고 참전한 터라 수많은 마두를 척살했음에도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뒤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정혼녀를 찾아간 그를 맞이한 것은 품에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진다 해도 전혀 놀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그녀가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어 그들 사이에서 맺은 결실을 보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렸음을 알았다.
‘하아…….’
주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몰았다.
착잡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말 잔등에 걸터앉아 독한 화주를 꾸역꾸역 들이켰다.
속이 후끈 달아오르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좋은 걸 어째서 여태껏 모르고 살았을까?’
주운은 붉어진 얼굴로 히죽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우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호위 일을 하려면 냉정함과 침착함을 제일 덕목으로 삼는다. 술 따위를 마셔서 일을 그르쳤다간 경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명예도 실추된다. 해서 그의 아버지도 한평생 술이라곤 입에도 대지 않았잖은가?
만에 하나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크게 호통치셨을 일이었다.

“그깟 실연 따위에 이 꼴이 다 뭐냔 말이다. 네놈은 정녕 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할 셈이더냐?”

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쓴웃음을 머금은 주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냅다 술병을 던져 버렸다.
와장창!
술병이 깨지는 음향에 느릿느릿 걸음을 떼던 말이 놀라 거칠게 투레질했다.
푸륵, 푸륵.
‘고놈 참, 겁도 많구나.’
주운은 실소를 흘리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끝없이 푸르른 하늘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의 마음은 먹구름이 뭉글거리는데 눈에 보이는 하늘은 너무도 맑기만 했다.
‘하늘마저 내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입속 가득히 씁쓰레한 맛이 느껴졌다. 방금 전 마신 화주의 향이 오래도록 남아 그의 입뿐만 아니라 가슴, 그리고 머릿속까지 어지럽혔다.
‘이제 무얼 해야 할까?’
그러고 나니 한 가지 질문만이 떠올랐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래야 할 터였다. 오 년 전의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도 궁금했고, 또…….
‘‘그’가 온전한지도 궁금하군.’
세상을 속이고 신분을 감춰야 하는 호위무사로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은 진실한 친구.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그날의 내상은 회복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연당한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심한 자괴감과 무기력함에 만사가 귀찮아졌다. 생전 처음으로 술을 접한 터라 취기가 올라 점점 감겨 오는 눈꺼풀에 힘을 주기조차 귀찮았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주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아직까지 술기운으로 죽었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하기에 그저 주워들은 말이 실현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스스로가 한없이 우스웠다.
이윽고 주운의 눈이 감겼다.
드르렁…….
인적 드문 관도 위.
적막만이 감돌던 관도에 나직한 코 고는 소리가 곁들여졌다. 마치 숲 속의 고요함에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정취를 더하듯 묘하게 어울렸다.
달가닥달가닥.
오로지 주운을 등에 업고 느긋하게 관도를 밟아 가는 말만이 말똥한 눈으로 깨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관도의 끝은 주운이 잠에 들기 전 떠올렸던 ‘그’가 있는 곳이었다.

제왕성(帝王城)

으리으리한 성문 앞에 걸려 있는 편액.
그 편액을 올려다보는 주운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내가 이곳에?’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느라 상체를 뒤로 젖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틀림없는 제왕성의 편액이었다.
‘설마?’
주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그를 태운 말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가라는 대로 왔는데요?’라고 묻는 모양새였다.
주운은 그제야 자신이 잠들기 전, 제왕성으로 향하는 관도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런.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됐는데.’
딱히 마음의 준비랄 것도 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확실히 실연의 아픔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이왕 도착한 것,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운은 말고삐를 쥐고 말을 몰아 성문으로 향했다.

“어디서 오셨소?”
문지기가 제왕성의 위압감을 등에 업고 자못 삼엄한 얼굴로 주운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 아니, 등에 멘 봇짐 틈새로 얼핏 보이는 검초(劍?)로 보아 낭인무사라 하는 것이 옳겠다. 어쨌든 이 낭인무사는 무인으로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눈빛이 죽어 있었다.
문지기는 이런 자를 대제왕성 안에 들여놓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기에 한 걸음 나서며 내치려 했다.
그 순간 불어온 바람결에 독한 술내가 훅, 문지기의 코를 찔러 왔다.
‘어딘지 몽롱해 보이는 눈빛이다 싶었더니만, 이거 술에 잔뜩 취한 거였군.’
문지기는 이자를 내쫓아 버리자는 결심을 굳히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그러자 그보다 먼저 주운이 말없이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먹빛의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의 묵패(墨牌).
“헛?”
문지기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의 시선이 묵패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묵패는 오금(烏金)으로 주조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나 문지기가 놀란 이유는 조금 달랐다.
“죄, 죄송합니다. 어서 드십시오.”
문지기는 최대한 공손하게 길을 터 주며 성벽 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성벽 위에 대기하던 다른 문지기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성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아마도 기관을 작동해 열고 닫는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는 문지기들이 이를 작동시키는 듯했다.
“그럼 수고하게.”
“옙!”
문지기는 주운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멍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약간 입이 벌어져 일견 모자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 전 묵패를 보았던 것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떻게 사라졌다던 묵패가…….”
문지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문지기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보았던 묵패에 음각된 글귀가 지워지지 않았다.

제왕령(帝王令)

제왕령은 제왕성의 성주를 뜻하는, 성주만이 지닐 수 있는 신물이었다. 지금의 성주는 제왕령을 가지지 못해 반쪽짜리 권력만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 년 전 제이차 정마대전 때 사라졌다던 제왕령이 나타난 것이다.

성문을 뒤로하고 천천히 말을 몰아 성내로 들어선 주운은 묵패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거참, 편리한 물건이군.”
제왕성의 권위를 나타내는 제왕령이 주운의 수중에서는 단지 ‘귀찮음을 피할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다.
당금 제왕성의 성주가 이를 보았다면 꼭지가 돌아도 한참은 돌았을 일이었지만 주운은 몰랐다.
모르고 범한 죄는 떳떳하다던가?
지금 주운의 위태로운 행위가 딱 그러했다.
꼬로록.
“그건 그렇고, 이거 어디 객잔에라도 가서 먼저 배나 좀 채워야겠는데? 요놈아, 곧 배부르게 먹여 줄 테니 조용히 해라. 사람들이 쳐다보잖느냐.”
조금 걷다 보니 오전 내내 굶은 배가 극성을 부렸다.
주운은 히죽 웃으며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배를 툭툭 두드려 달래면서도 느긋한 걸음은 여전했다.
그 태평스러운 모양새는 말한 것과는 달리 사람들의 이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

제왕성은 굉장히 거대하다.
항주(杭州) 전체가 제왕성이란 성벽에 둘러싸인 형국이니 만큼 가히 하나의 도시라 해도 무방했다.
그 때문에 제왕성에는 객잔도 무수히 많았고 온갖 잡다한 것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불과 한 걸음 너머 객잔과 주루가 줄을 지을 정도니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운은 충분히 이름난 곳도 많을진대 굳이 가장자리에 있는 인적이 드물고 허름한 객잔을 택했다.
후루룩!
간단한 소면과 만두를 시켜 허겁지겁 입속에 우겨 넣는 주운을 쳐다보던 점소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나 급히 먹는지 저러다 분명 탈나겠다 싶었다.
‘하기야 며칠을 굶긴 했지.’
비단 먹는 모양새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색도 말이 아니었다. 상거지 중의 상거지가 저러할까?
옷은 닳아서 누렇게 변색되었고, 찢어진 가죽신 틈새로 보이는 발톱이 길게 자란 발가락이 수줍은 듯 꼼지락댄다.

‘우윽.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누나한테 구역질나게 치근덕거리는 놈들이 나타나질 않나, 이제는 별 더러운 놈 다 보겠네.’
이를 본 점소이가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끼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주운은 면발을 세차게 빨아들이는 와중에도 내심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자식, 많이 컸네. 한데 아무리 오 년 만이라곤 하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내 모습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나 보구나.’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오 년 전만 해도 이 객잔의 단골손님이었다. 하기에 당시 열두 살이었던 점소이를 아주 잘 알았다.
‘벌써 열일곱인가?’
세월여류라 했던가?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지냈던 탓에 보고, 듣고, 겪는 모든 것이 감회가 새로웠다. 정혼녀의 변심이 그러했고, 점소이 장두(張荳)의 장성이 그러했다.
장두는 이 객잔 주인의 자식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일손을 거들려고 점소이 일을 자청할 만큼 효심이 지극한 아이였고 손위 누이를 잘 따르는 착한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소하(素霞)는 보이지 않는군. 심부름이라도 갔나? 어쨌든 장두 녀석, 이제 그 별명은 조만간 바꿔 줘야 할 것 같군.’
오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은 키도 훌쩍 크고 번듯한 장부가 되었지만 예전만 해도 대단히 왜소해 일부러 별명까지 붙여 놀려 주곤 했었다.
‘그때가 좋았는데…….’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을 더듬는 주운의 맞은편에 한 사내가 동의도 없이 앉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신이오?”
부리부리한 눈에 고슴도치수염을 기른 사내는 앉자마자 대뜸 그렇게 물었다.
우렁우렁한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외모와 커다란 덩치에 딱 알맞아 오히려 듣기 좋았다.
주운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