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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사랑해서였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뙤약볕이 거칠게 내리쬐는 아침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산란하는 태양에 한없이 눈살이 찌푸려진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문제다.
날이 너무 좋으면 덥고, 날이 너무 안 좋으면 몸 자체가 무거워진다. 그건 모두 자신이 아닌 수연의 몫으로 배정된 일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찜통처럼 더울 테니 물을 많이 준비해야 했다. 결은 편의점에 들어가 2+1 행사를 하는 물 아홉 병을 계산했다. 편의점 주인이 오늘은 저녁까지 내도록 덥겠네요, 하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어 결은 잠시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왔다.
7시 31분.
차에 올라 시간을 확인하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그대로 곧장 달렸다. 아침의 청량한 색감과 함께 폐부 깊숙이 선선한 공기를 집어넣고 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는 수연이 서 있었다. 입에 샌드위치를 물고 덜 마른 긴 머리를 툭툭 털어 낸다.
오늘도 수연은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을 택했다.
“뒷좌석에 타세요.”
다른 날과 다름없이 결은 항상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시끄러어, 빠리 추발해.”
그리고 수연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은 채로 성질을 낸다. 차를 급히 출발시켰다. 수연은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며 민낯에 선크림을 바른다. 수연의 집 앞까지 올 때 걸리지 않던 신호가 그녀의 집 앞을 벗어나자마자 걸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빨간불에 걸린 틈을 타 결은 편의점에서 사 온 물을 수연에게 건넸다. 수연이 물을 마시다 캑캑거렸다. 결이 등을 두드려 주자 괜찮아진 것인지 수연은 한 손을 들어 그만해도 된다는 제스처를 표했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천천히 드세요. 급한 것도 아닌데.”
“급해. 오늘 열두 동 다 돌아봐야 돼. 오늘 안으로 안 끝나면 내일로 미뤄지잖아.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이 있는 거고. 그러니까 오늘 무조건 다 보고 확인해야 해.”
“동종 업계에서 대표가 이렇게까지 하는 회사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돈 더 많이 벌잖아. 그렇게까지 하는 회사가 없으니까 우리 회사는 꼭 그래야 하고. 그 덕에 너도 월급 많이 받아 가면서, 뭘 새침이야.”
웃음 섞인 농담을 던지며 수연이 마저 바르지 못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른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하루 종일 종종걸음. 그렇게 저녁이 되어 다시 집에 들어갈 때 즈음의 수연은 몸의 에너지를 다 소비해 버린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그런 날의 연속이면서 수연은 그래도 언제나 씩씩하다. 이런 수연의 모습을 곁에서 보아 온 게 결의 29년 인생에서 20년을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8시 30분이 가까워졌을 즈음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먼저 후다닥 내린 수연은 오는 동안 바싹 마른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려 묶고 트렁크에 있던 안전모를 꺼내 쓴다.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서 안전화도 신었다.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려는 그녀는 누가 보아도 빛나고 예뻤다.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시죠?”
현장 인부들에게 다정히 인사하는 수연의 뒤를 결도 조용히 따랐다.
공사용 승강기에 오르자 수연이 결을 보며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이, 거기 고소 공포증 고결 씨.”
매번 실내 승강기가 설치되기 전에 공사용 승강기를 사용할 때 수연이 결을 놀리는 방식이었다. 공사용 승강기를 타면 외부의 아찔한 높이가 눈에 여과 없이 투영된다. 처음 비서 일을 시작하고 공사용 승강기를 탔을 때, 결은 정신을 잃고 기절하였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고, 수연은 결이 눈을 뜨자마자 깔깔거리며 놀리기 바빴다. 사내자식이 심장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다 써먹느냐며 무안을 주었다. 하지만 겉으로 놀렸을지언정 속으로는 다분히 걱정이 되었는지 그 일 이후로 현장에 오면 수연은 결을 차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일개 비서가 대표 혼자 현장을 둘러보게 할 수는 없어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공사용 승강기에 타는 연습을 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이까짓 것 뭐라고 기절했나 싶을 정도로 덤덤해졌다.
“놀리지 마세요.”
“이런 건 놀려야 제맛 아닌가?”
수연이 천진하게 샐긋 웃었다.
“계속 놀리시면 저 사표 씁니다.”
“야, 그건 절대 안 돼. 너 사표 쓰면 내 수발 누가 해.”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승강기가 현장 제일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수연이 먼저 승강기를 나서다 절뚝거린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수연의 몸을 다급하게 결이 붙잡았다. 수연이 머쓱하게 웃으며 미안, 하고 속살거렸다.
“그제 병원 안 가셨어요?”
“바빴어.”
“제가 본사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모셔다드렸잖아요?”
“그날 시공 팀 사장님한테 전화 왔거든.”
“하, 진짜. 왜 병원 가는 걸 빼세요? 그 약속을 미루셨어야죠.”
결의 인상이 찌푸려져도 수연은 무연히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대표님은 지금 병원 가세요. 제가 병원 모셔다드리고 와서 현장 다 둘러보고 보고드릴게요.”
“내가 대표거든.”
수연이 절뚝거리며 도안을 펼쳐 들고 다시 앞서 걷는다.
“내가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서 그래. 현장 다 돌고 나면 병원 가자. 그땐 두말 안 하고 간다.”
꼭 저러지.
결은 도리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사 일은 꼭 다른 사람 손 빌리지 않고 자신이 다 해야만 속이 시원한 타입. 상사로 두면 별로 좋을 것이 없는 피곤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수연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에게 있어 수연은 놓칠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인연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수연을 사랑해서였다.
열두 동, 총 1,288세대를 돌아보는 데만 꼬박 열네 시간이 걸렸다. 그러느라 점심도 먹지 못했고, 숨 돌릴 틈도 포기했다.
현장이 막바지 작업이라 동마다 전등이 달려 있기에 망정이었지 아니면 다 못 돌아보고 내일까지 일이 미루어졌을 터였다. 오늘 안에 일을 끝낸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수연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른쪽 다리가 더는 못 버티려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으어, 개힘들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괜히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에 썼던 안전모를 벗었다. 땀 때문에 이마에 잔머리가 다닥다닥 붙어 간지러웠다.
“차가운 바닥에 앉지 마세요. 여자한테 그거 안 좋아요.”
바닥에 굴러다니던 종이 박스를 수연의 엉덩이와 바닥 사이에 드밀며 결이 기어코 한소리를 했다.
“내가 무슨 여자야? 네 대표지.”
“성별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결의 성의에 수연은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들었다. 박스 하나 덕에 엉덩이에 밀려들던 한기가 훨씬 덜했다. 수연은 싱긋 웃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수연의 옆에 자리를 같이했다.
“저녁 뭐 먹을까?”
수연의 한마디에 결의 눈에서 매섭게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병원 가셔야죠.”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지, 뭐. 귀찮아. 갈 힘도 없구.”
“제가 모셔다드리는데 뭐가 귀찮아요. 병원 가셔야 해요. 강 박사님께는 연락 넣어 뒀어요. 늦어도 기다려 주신댔어요.”
또 잔소리.
수연의 입에서 하는 수 없이 픽, 웃음이 터졌다. 축 늘어뜨렸던 팔에 힘을 주어 안전모를 벗은 단정한 결의 머리를 헝클었다. 결이 먼지 묻는다며 질색을 했지만 수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 더 웃음이 났다.
의경을 지냈던 시절을 제외하고 결이 수연의 비서로 옆에 있은 지 7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지각 한 번을 한 적이 없는 인사였다. 성실하고 반듯하며, 언제나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던. 한결같은 모습으로 결은 수연의 옆에서 일해 주었다. 수연은 내심 그것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원자재를 받아 가공해 건설사들이 짓는 아파트에 주방 가구를 넣겠다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만만찮았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를 물고 빨며 손녀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해 주던 할머니마저 그건 안 될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아버지는 거기다 대고 일이 하고 싶으면 충분히 회사에 근사한 직책 하나 내어 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집안의 그 엄했던 반대를 무릅쓰고 수연은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다.
㈜HS
회사를 차리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결을 비서로 들이는 일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나이 열네 살에 결을 처음 보았다. 본가에 입주 도우미로 들어온 안동댁의 자식이었다. 하얀 피부에 눈이 방울만 한 아직은 어리던 아이. 고3을 끝내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결에게 수연은 제안을 하였다. 대학 대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대우를 달리 해 주겠다고. 결정 내리면 연락을 달라고.
하지만 제안한 지 1주일이 다 되도록 수연에게 결의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2주일이 다 되어 갈 때서야 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앞이야. 그 한마디에 헐레벌떡 나갔다.
어릴 적에는 조그마했던 녀석이 안 본 사이에 또 큰 것인지 키가 훌쩍했다. 그 아래에서 결을 올려다보며 수연은 하필 슬리퍼를 신고 나온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런데 결이 난데없이 수연에게 술을 마시자 권했다. 결의 손에 맥주 두 캔이 들려 있었다.
집 앞의 놀이터에서 각자 몫의 맥주를 마셨다. 한 캔을 다 비울 때까지도 입을 떼지 않던 결이 다 마신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비서, 그거 할게.
<사랑해서였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뙤약볕이 거칠게 내리쬐는 아침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산란하는 태양에 한없이 눈살이 찌푸려진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문제다.
날이 너무 좋으면 덥고, 날이 너무 안 좋으면 몸 자체가 무거워진다. 그건 모두 자신이 아닌 수연의 몫으로 배정된 일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찜통처럼 더울 테니 물을 많이 준비해야 했다. 결은 편의점에 들어가 2+1 행사를 하는 물 아홉 병을 계산했다. 편의점 주인이 오늘은 저녁까지 내도록 덥겠네요, 하는 말을 인사처럼 건네어 결은 잠시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하고 나왔다.
7시 31분.
차에 올라 시간을 확인하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그대로 곧장 달렸다. 아침의 청량한 색감과 함께 폐부 깊숙이 선선한 공기를 집어넣고 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는 수연이 서 있었다. 입에 샌드위치를 물고 덜 마른 긴 머리를 툭툭 털어 낸다.
오늘도 수연은 뒷좌석이 아닌 조수석을 택했다.
“뒷좌석에 타세요.”
다른 날과 다름없이 결은 항상 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시끄러어, 빠리 추발해.”
그리고 수연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은 채로 성질을 낸다. 차를 급히 출발시켰다. 수연은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며 민낯에 선크림을 바른다. 수연의 집 앞까지 올 때 걸리지 않던 신호가 그녀의 집 앞을 벗어나자마자 걸리기 시작했다. 신호가 빨간불에 걸린 틈을 타 결은 편의점에서 사 온 물을 수연에게 건넸다. 수연이 물을 마시다 캑캑거렸다. 결이 등을 두드려 주자 괜찮아진 것인지 수연은 한 손을 들어 그만해도 된다는 제스처를 표했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천천히 드세요. 급한 것도 아닌데.”
“급해. 오늘 열두 동 다 돌아봐야 돼. 오늘 안으로 안 끝나면 내일로 미뤄지잖아. 내일은 또 내일 할 일이 있는 거고. 그러니까 오늘 무조건 다 보고 확인해야 해.”
“동종 업계에서 대표가 이렇게까지 하는 회사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내가 돈 더 많이 벌잖아. 그렇게까지 하는 회사가 없으니까 우리 회사는 꼭 그래야 하고. 그 덕에 너도 월급 많이 받아 가면서, 뭘 새침이야.”
웃음 섞인 농담을 던지며 수연이 마저 바르지 못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선크림을 바른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하루 종일 종종걸음. 그렇게 저녁이 되어 다시 집에 들어갈 때 즈음의 수연은 몸의 에너지를 다 소비해 버린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그런 날의 연속이면서 수연은 그래도 언제나 씩씩하다. 이런 수연의 모습을 곁에서 보아 온 게 결의 29년 인생에서 20년을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8시 30분이 가까워졌을 즈음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먼저 후다닥 내린 수연은 오는 동안 바싹 마른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려 묶고 트렁크에 있던 안전모를 꺼내 쓴다.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놓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서 안전화도 신었다.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려는 그녀는 누가 보아도 빛나고 예뻤다.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시죠?”
현장 인부들에게 다정히 인사하는 수연의 뒤를 결도 조용히 따랐다.
공사용 승강기에 오르자 수연이 결을 보며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이, 거기 고소 공포증 고결 씨.”
매번 실내 승강기가 설치되기 전에 공사용 승강기를 사용할 때 수연이 결을 놀리는 방식이었다. 공사용 승강기를 타면 외부의 아찔한 높이가 눈에 여과 없이 투영된다. 처음 비서 일을 시작하고 공사용 승강기를 탔을 때, 결은 정신을 잃고 기절하였다. 눈을 뜨니 병원이었고, 수연은 결이 눈을 뜨자마자 깔깔거리며 놀리기 바빴다. 사내자식이 심장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다 써먹느냐며 무안을 주었다. 하지만 겉으로 놀렸을지언정 속으로는 다분히 걱정이 되었는지 그 일 이후로 현장에 오면 수연은 결을 차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일개 비서가 대표 혼자 현장을 둘러보게 할 수는 없어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공사용 승강기에 타는 연습을 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이까짓 것 뭐라고 기절했나 싶을 정도로 덤덤해졌다.
“놀리지 마세요.”
“이런 건 놀려야 제맛 아닌가?”
수연이 천진하게 샐긋 웃었다.
“계속 놀리시면 저 사표 씁니다.”
“야, 그건 절대 안 돼. 너 사표 쓰면 내 수발 누가 해.”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승강기가 현장 제일 꼭대기에 도착해 있었다. 수연이 먼저 승강기를 나서다 절뚝거린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수연의 몸을 다급하게 결이 붙잡았다. 수연이 머쓱하게 웃으며 미안, 하고 속살거렸다.
“그제 병원 안 가셨어요?”
“바빴어.”
“제가 본사 들어가기 전에 병원에 모셔다드렸잖아요?”
“그날 시공 팀 사장님한테 전화 왔거든.”
“하, 진짜. 왜 병원 가는 걸 빼세요? 그 약속을 미루셨어야죠.”
결의 인상이 찌푸려져도 수연은 무연히 웃을 뿐, 더는 말이 없었다.
“대표님은 지금 병원 가세요. 제가 병원 모셔다드리고 와서 현장 다 둘러보고 보고드릴게요.”
“내가 대표거든.”
수연이 절뚝거리며 도안을 펼쳐 들고 다시 앞서 걷는다.
“내가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서 그래. 현장 다 돌고 나면 병원 가자. 그땐 두말 안 하고 간다.”
꼭 저러지.
결은 도리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회사 일은 꼭 다른 사람 손 빌리지 않고 자신이 다 해야만 속이 시원한 타입. 상사로 두면 별로 좋을 것이 없는 피곤한 스타일이다. 하지만 수연을 떠날 수가 없었다. 결에게 있어 수연은 놓칠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인연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수연을 사랑해서였다.
열두 동, 총 1,288세대를 돌아보는 데만 꼬박 열네 시간이 걸렸다. 그러느라 점심도 먹지 못했고, 숨 돌릴 틈도 포기했다.
현장이 막바지 작업이라 동마다 전등이 달려 있기에 망정이었지 아니면 다 못 돌아보고 내일까지 일이 미루어졌을 터였다. 오늘 안에 일을 끝낸 것이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수연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오른쪽 다리가 더는 못 버티려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으어, 개힘들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괜히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에 썼던 안전모를 벗었다. 땀 때문에 이마에 잔머리가 다닥다닥 붙어 간지러웠다.
“차가운 바닥에 앉지 마세요. 여자한테 그거 안 좋아요.”
바닥에 굴러다니던 종이 박스를 수연의 엉덩이와 바닥 사이에 드밀며 결이 기어코 한소리를 했다.
“내가 무슨 여자야? 네 대표지.”
“성별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결의 성의에 수연은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들었다. 박스 하나 덕에 엉덩이에 밀려들던 한기가 훨씬 덜했다. 수연은 싱긋 웃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수연의 옆에 자리를 같이했다.
“저녁 뭐 먹을까?”
수연의 한마디에 결의 눈에서 매섭게 레이저가 발사되었다.
“병원 가셔야죠.”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지, 뭐. 귀찮아. 갈 힘도 없구.”
“제가 모셔다드리는데 뭐가 귀찮아요. 병원 가셔야 해요. 강 박사님께는 연락 넣어 뒀어요. 늦어도 기다려 주신댔어요.”
또 잔소리.
수연의 입에서 하는 수 없이 픽, 웃음이 터졌다. 축 늘어뜨렸던 팔에 힘을 주어 안전모를 벗은 단정한 결의 머리를 헝클었다. 결이 먼지 묻는다며 질색을 했지만 수연은 그런 그의 모습에 더 웃음이 났다.
의경을 지냈던 시절을 제외하고 결이 수연의 비서로 옆에 있은 지 7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지각 한 번을 한 적이 없는 인사였다. 성실하고 반듯하며, 언제나 자기 몫의 책임을 다하던. 한결같은 모습으로 결은 수연의 옆에서 일해 주었다. 수연은 내심 그것이 고마웠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원자재를 받아 가공해 건설사들이 짓는 아파트에 주방 가구를 넣겠다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만만찮았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를 물고 빨며 손녀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해 주던 할머니마저 그건 안 될 일이라고 못을 박았다. 아버지는 거기다 대고 일이 하고 싶으면 충분히 회사에 근사한 직책 하나 내어 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집안의 그 엄했던 반대를 무릅쓰고 수연은 자신만의 회사를 차렸다.
㈜HS
회사를 차리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결을 비서로 들이는 일이었다. 수연은 자신의 나이 열네 살에 결을 처음 보았다. 본가에 입주 도우미로 들어온 안동댁의 자식이었다. 하얀 피부에 눈이 방울만 한 아직은 어리던 아이. 고3을 끝내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결에게 수연은 제안을 하였다. 대학 대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대우를 달리 해 주겠다고. 결정 내리면 연락을 달라고.
하지만 제안한 지 1주일이 다 되도록 수연에게 결의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2주일이 다 되어 갈 때서야 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앞이야. 그 한마디에 헐레벌떡 나갔다.
어릴 적에는 조그마했던 녀석이 안 본 사이에 또 큰 것인지 키가 훌쩍했다. 그 아래에서 결을 올려다보며 수연은 하필 슬리퍼를 신고 나온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런데 결이 난데없이 수연에게 술을 마시자 권했다. 결의 손에 맥주 두 캔이 들려 있었다.
집 앞의 놀이터에서 각자 몫의 맥주를 마셨다. 한 캔을 다 비울 때까지도 입을 떼지 않던 결이 다 마신 맥주 캔을 우그러뜨리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비서, 그거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