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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 이후로부터 결은 회사에 헌신하였다. 덕분에 회사는 제법 잘 성장했다. 연 매출 천억 원을 돌파했고, 초창기에 비해 직원들 수가 열 배 이상으로 늘었으며, 이제는 먼저 건설사에서 알아서 연락이 온다.
지금 이 자리가 있기까지, 그러니까 적어도 수연의 옆에서 보좌했던 결의 공이 컸다. 성실 근무자의 표본과도 같던 사람이 결이었다. 회사의 소유주가 한수연일지언정 그 회사의 안주인인 한수연에게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비서 고결이었다.
오래도록 봐 온 아이가 이만큼 잘 자란 것이 신기해, 이만큼 같이 나이 먹은 것이 대견해 수연은 항상 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많이 컸다, 우리 결이.”
“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 소리세요.”
결에게 붙박였던 시선을 옮겨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캄캄하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사이로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다. 그 아파트들 층층마다 ㈜HS라고 새겨진 주방 가구들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수연은 오늘도 가슴이 벅찼다.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우리가 만든 이 주방을 이용하면서, 주방 가구 참 좋다, 그런 생각 한 번쯤은 했으면 좋겠다.”
“그 전에 입주민 사전 점검에서 무사통과되는 게 먼저예요.”
“어휴, 꼭 초를 쳐요, 초를!”
“화내지 마세요. 그러면 빨리 늙어요.”
“너 나보다 나이 어리다고 자랑하냐, 지금? 진짜 어이가 없어서.”
툴툴거리는 수연을 두고 결이 웃는다. 결의 웃음에 수연도 덩달아 다시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결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벗어 놓은 두 개의 안전모와 도안들을 챙기고는 무릎을 굽혀 수연에게 등을 내주었다.
“업히세요.”
항상 그렇듯 수연은 결의 너른 등에 스스럼없이 업혔다.
“잘 좀 챙겨 드세요. 무슨 쌀 반 가마니도 안 나가는 거 같잖아요.”
“그거 좀 오버 아님? 나 그것보다는 많이 나간다.”
“맨날 인스턴트 음식 아니면 끼니 거르기 일쑤시잖아요.”
“아아― 잔소리 그만해. 귀 떨어지겠다.”
“잔소리 듣기 싫으시면 저 사표 쓰구요.”
“와, 진짜 인성 대박이다, 너.”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절 흔드는 수연을 두고 결이 작다랗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결이 편해 수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전신에 피로가 번져 나간다. 곧 잠들 것처럼 몸에 맥이 풀렸다.
“피곤하시면 좀 주무세요. 제가 병원까지 잘 모셔다드릴게요.”
결의 나긋한 음성에,
“병원은 진짜 내일 가면 안 되냐. 눈 감겨. 죽을 거 같아서 그래.”
수연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이렇게 집에 가면 내일 못 걸으실 수도 있잖아요.”
“네가 봐 주고 가. 감각은 멀쩡해. 그냥 잘 못 움직이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수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일정한 호흡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차에 도착해 결이 뒷좌석에다 내려놓을 때도 수연은 잠을 이겨 내지 못하고 쌕쌕 고른 숨소리만 내었다. 그런 수연이 안쓰러워 결은 수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는 그래서 병원이 아닌 수연의 집이었다.
수연의 집 안은 여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본가에서 보내 준 가정부를 또 귀찮다고 물린 모양이다. 결은 수연을 침대에 눕혀 놓고 나와 소매를 걷었다. 집 안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서류들과 도안들을 먼저 정리하고, 주방에 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들을 치웠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냉동실에 인스턴트식품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또 텅텅 비어 있었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개수대에 쌓인 컵들을 뜨거운 물로 박박 씻었다. 마지막으로 청소기를 돌리는 것으로 대략적인 집안일이 끝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한숨을 돌리려 결은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발에 무엇인가 걸리적거렸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도안들이 테이블 밑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계속 참아 왔던 한숨이 훅 하고 흘러나왔다.
여태까지 보아 온 수연은 경주마와 닮았다. 지치면서, 힘들면서,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몸으로도 앞밖에 볼 줄 모르고 질주하는 경주마. 회사가 아니면 현장에 나가 하루 종일 종종거리면서 쉬는 공간인 집에서마저도 미처 다 보지 못한 회사 일을 살핀다. 결이 이대로 몇 년 더 하다 회사 문 닫을 거냐고, 쉬엄쉬엄해도 된다고 설득해 보아도 수연은 단호하게 자신이 열심히 해야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덜 힘들다고 했다.
선물한 지 채 2주가 지나지 않은 로즈마리 화분은 테이블 위에서 또 말라 있었다. 원래 로즈마리가 맞긴 한 것인지 손가락만 갖다 대어도 부서질 정도로 이미 색을 달리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수연은 마치 자신의 인생에 전혀 여유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산다. 화분에 물 한 번 줄 정도의 여유라도 가지라고 선물한 화분이 벌써 여럿이다. 그 여럿 중에 로즈마리도 결국 말라 죽었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도안들을 챙겨 들고는 죽어 버린 로즈마리 화분을 버리려 몸을 일으키는데 수연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침실에서 나왔다. 많이 피곤한 것인지 눈을 비비면서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속상한 마음이 자각도 못한 채 표출될까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자정 지났어.”
수연이 퍼석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표님 집이 너무 쓰레기장 같았거든요.”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지? 그래서 맨날 그러지?”
핀잔을 주며 수연은 자연스레 소파에 몸을 누였다. 수연의 만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겨우 떠진 눈을 다시 감으며 수연이 늦었어, 얼른 가, 하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결은 조용히 화분과 도안들을 마저 치우고 거실 장에서 장비를 꺼내 수연의 곁으로 갔다.
“다리 걷어 보세요.”
“됐어. 내일 아침에 병원 가지 뭐.”
“비서 말 좀 들으세요. 내일 괜히 못 걸어서 저보고 올라오라고 하지 마시고요. 그럼 저 더 번거로워지잖아요.”
“똑같은 말을 꼭 그렇게 밉게 하지. 그것도 재주다.”
그러면서도 수연은 느릿느릿 바지를 걷었다.
“발가락 움직여 보세요.”
의족으로 이루어진 오른쪽 발가락 다섯 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걷기만 불편하신 거예요?”
“좀 삐걱거려. 그것 말고는 감각도 있고 다 괜찮아.”
수연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되어 있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온전한 제 팔과 다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은 대체할 부위에 수술로 전자칩을 심어 신경과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팔과 다리를 일반인과 엇비슷하게 움직이며 감각도 어느 정도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의수나 의족에 문제가 생기면 움직임 자체에 제한이 걸린다. 해서 병원을 가야 하는 것인데 수연은 큰 문제가 아니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야 할 자신의 몸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이런 식의 일이 허다해 결은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에 대해 따로 공부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수연의 의수와 의족에 생기는 간단한 문제 정도는 손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결은 수연이 어떠한 이유로 팔과 다리를 잃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수연을 봤을 때가 결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다. 그때 열네 살이었던 수연은 이미 팔과 다리가 없는 채였다.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수연이 술을 마시다 말고 자신의 입으로 어릴 때 사고가 났대, 로 시작해 워낙 어릴 때라 나도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니까 더는 묻지 마, 로 끝난 이야기였다. 그래서 결은 굳이 궁금해하거나 물어보지 않았다.
“혹시 아프면 말씀하세요.”
수연의 의족에 항상 문제가 생기는 부분을 열어 보며 결이 말했다. 수연은 괜찮아, 하고 담담하게 말할 뿐 눈을 뜨거나 의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때제때 병원 좀 가세요. 이러다 문제 생기면 또 수술하셔야 하잖아요. 그럼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일도 못 보세요.”
“입 안 아파?”
수연이 심드렁하게 묻는다.
“대표님이 부리는 사람이 간언하면 좀 들을 줄도 아셔야죠.”
“걱정 마. 네가 하는 말 말고 다른 직원들 말은 엄청 귀담아들어.”
수연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결은 의족을 손보던 드라이버를 슬그머니 손에서 놓았다.
“저 갈게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결의 팔을 수연이 다급히 붙잡는다.
“알았어, 미안. 잘못했어. 야, 암만 그래도 하던 건 마저 해 주고 가야지. 난 볼 줄도 모르는데. 매정한 놈.”
결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수연의 곁에 앉아 다시 드라이버를 들었다. 분주히 손을 움직이는 결을 수연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결이 아기 새라도 돌보는 양 의족을 조심스레 다룬다.
“넌 왜 연애를 안 해?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고 그래도 마다하고.”
수연의 물음에 결은 덜컥 당황스러웠다.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는 수연의 말을 매번 거절하면서도 수연에게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수연이 사랑했던 사람과 파혼을 하며 울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서. 자신이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수연과 거리가 생길까 봐 결은 무서웠다. 이대로, 정말 이대로 영원히 대표와 비서의 관계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였다.
“바쁘니까요. 하루 종일 대표님한테 매달려 있는데 제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물론 연애에 관심도 없구요.”
“그러다 파파노인으로 늙어 죽을래?”
“네. 저는 이렇게 대표님 따까리나 하다 늙어 죽을 팔자인가 보죠.”
항상 문제가 있는 부분에 조금 손상이 일어난 것 말고 다른 문제는 없었다. 살펴보았던 부분을 정리하고 장비를 다시 챙겨 케이스에 넣었다. 수연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거실을 거닐어 본다. 절뚝거림이 완연히 사라져 있었다. 수연이 가벼운 걸음으로 함지박만 한 미소를 머금었다. 결은 수연이 걷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방적인 파혼을 당했을 때, 수연은 비를 흠뻑 맞고 와 결에게 의수와 의족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화가 난다며 울었다. 파혼을 당한 상처 때문에 운다는 걸 알면서도 결은 의수랑 의족 때문에 화가 난 것이냐고 물었다.
그 이후로부터 결은 회사에 헌신하였다. 덕분에 회사는 제법 잘 성장했다. 연 매출 천억 원을 돌파했고, 초창기에 비해 직원들 수가 열 배 이상으로 늘었으며, 이제는 먼저 건설사에서 알아서 연락이 온다.
지금 이 자리가 있기까지, 그러니까 적어도 수연의 옆에서 보좌했던 결의 공이 컸다. 성실 근무자의 표본과도 같던 사람이 결이었다. 회사의 소유주가 한수연일지언정 그 회사의 안주인인 한수연에게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비서 고결이었다.
오래도록 봐 온 아이가 이만큼 잘 자란 것이 신기해, 이만큼 같이 나이 먹은 것이 대견해 수연은 항상 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많이 컸다, 우리 결이.”
“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 소리세요.”
결에게 붙박였던 시선을 옮겨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캄캄하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사이로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다. 그 아파트들 층층마다 ㈜HS라고 새겨진 주방 가구들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수연은 오늘도 가슴이 벅찼다.
“사람들이 이사를 와서 우리가 만든 이 주방을 이용하면서, 주방 가구 참 좋다, 그런 생각 한 번쯤은 했으면 좋겠다.”
“그 전에 입주민 사전 점검에서 무사통과되는 게 먼저예요.”
“어휴, 꼭 초를 쳐요, 초를!”
“화내지 마세요. 그러면 빨리 늙어요.”
“너 나보다 나이 어리다고 자랑하냐, 지금? 진짜 어이가 없어서.”
툴툴거리는 수연을 두고 결이 웃는다. 결의 웃음에 수연도 덩달아 다시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결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벗어 놓은 두 개의 안전모와 도안들을 챙기고는 무릎을 굽혀 수연에게 등을 내주었다.
“업히세요.”
항상 그렇듯 수연은 결의 너른 등에 스스럼없이 업혔다.
“잘 좀 챙겨 드세요. 무슨 쌀 반 가마니도 안 나가는 거 같잖아요.”
“그거 좀 오버 아님? 나 그것보다는 많이 나간다.”
“맨날 인스턴트 음식 아니면 끼니 거르기 일쑤시잖아요.”
“아아― 잔소리 그만해. 귀 떨어지겠다.”
“잔소리 듣기 싫으시면 저 사표 쓰구요.”
“와, 진짜 인성 대박이다, 너.”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절 흔드는 수연을 두고 결이 작다랗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결이 편해 수연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전신에 피로가 번져 나간다. 곧 잠들 것처럼 몸에 맥이 풀렸다.
“피곤하시면 좀 주무세요. 제가 병원까지 잘 모셔다드릴게요.”
결의 나긋한 음성에,
“병원은 진짜 내일 가면 안 되냐. 눈 감겨. 죽을 거 같아서 그래.”
수연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이렇게 집에 가면 내일 못 걸으실 수도 있잖아요.”
“네가 봐 주고 가. 감각은 멀쩡해. 그냥 잘 못 움직이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수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일정한 호흡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차에 도착해 결이 뒷좌석에다 내려놓을 때도 수연은 잠을 이겨 내지 못하고 쌕쌕 고른 숨소리만 내었다. 그런 수연이 안쓰러워 결은 수연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목적지는 그래서 병원이 아닌 수연의 집이었다.
수연의 집 안은 여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본가에서 보내 준 가정부를 또 귀찮다고 물린 모양이다. 결은 수연을 침대에 눕혀 놓고 나와 소매를 걷었다. 집 안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서류들과 도안들을 먼저 정리하고, 주방에 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들을 치웠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냉동실에 인스턴트식품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또 텅텅 비어 있었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개수대에 쌓인 컵들을 뜨거운 물로 박박 씻었다. 마지막으로 청소기를 돌리는 것으로 대략적인 집안일이 끝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한숨을 돌리려 결은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러자 발에 무엇인가 걸리적거렸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도안들이 테이블 밑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계속 참아 왔던 한숨이 훅 하고 흘러나왔다.
여태까지 보아 온 수연은 경주마와 닮았다. 지치면서, 힘들면서,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몸으로도 앞밖에 볼 줄 모르고 질주하는 경주마. 회사가 아니면 현장에 나가 하루 종일 종종거리면서 쉬는 공간인 집에서마저도 미처 다 보지 못한 회사 일을 살핀다. 결이 이대로 몇 년 더 하다 회사 문 닫을 거냐고, 쉬엄쉬엄해도 된다고 설득해 보아도 수연은 단호하게 자신이 열심히 해야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덜 힘들다고 했다.
선물한 지 채 2주가 지나지 않은 로즈마리 화분은 테이블 위에서 또 말라 있었다. 원래 로즈마리가 맞긴 한 것인지 손가락만 갖다 대어도 부서질 정도로 이미 색을 달리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수연은 마치 자신의 인생에 전혀 여유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산다. 화분에 물 한 번 줄 정도의 여유라도 가지라고 선물한 화분이 벌써 여럿이다. 그 여럿 중에 로즈마리도 결국 말라 죽었다.
미처 다 치우지 못한 도안들을 챙겨 들고는 죽어 버린 로즈마리 화분을 버리려 몸을 일으키는데 수연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침실에서 나왔다. 많이 피곤한 것인지 눈을 비비면서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속상한 마음이 자각도 못한 채 표출될까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자정 지났어.”
수연이 퍼석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표님 집이 너무 쓰레기장 같았거든요.”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지? 그래서 맨날 그러지?”
핀잔을 주며 수연은 자연스레 소파에 몸을 누였다. 수연의 만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겨우 떠진 눈을 다시 감으며 수연이 늦었어, 얼른 가, 하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결은 조용히 화분과 도안들을 마저 치우고 거실 장에서 장비를 꺼내 수연의 곁으로 갔다.
“다리 걷어 보세요.”
“됐어. 내일 아침에 병원 가지 뭐.”
“비서 말 좀 들으세요. 내일 괜히 못 걸어서 저보고 올라오라고 하지 마시고요. 그럼 저 더 번거로워지잖아요.”
“똑같은 말을 꼭 그렇게 밉게 하지. 그것도 재주다.”
그러면서도 수연은 느릿느릿 바지를 걷었다.
“발가락 움직여 보세요.”
의족으로 이루어진 오른쪽 발가락 다섯 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걷기만 불편하신 거예요?”
“좀 삐걱거려. 그것 말고는 감각도 있고 다 괜찮아.”
수연의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되어 있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온전한 제 팔과 다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은 대체할 부위에 수술로 전자칩을 심어 신경과 교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팔과 다리를 일반인과 엇비슷하게 움직이며 감각도 어느 정도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의수나 의족에 문제가 생기면 움직임 자체에 제한이 걸린다. 해서 병원을 가야 하는 것인데 수연은 큰 문제가 아니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야 할 자신의 몸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다. 이런 식의 일이 허다해 결은 생체공학 의수와 의족에 대해 따로 공부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수연의 의수와 의족에 생기는 간단한 문제 정도는 손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결은 수연이 어떠한 이유로 팔과 다리를 잃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수연을 봤을 때가 결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다. 그때 열네 살이었던 수연은 이미 팔과 다리가 없는 채였다.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수연이 술을 마시다 말고 자신의 입으로 어릴 때 사고가 났대, 로 시작해 워낙 어릴 때라 나도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르니까 더는 묻지 마, 로 끝난 이야기였다. 그래서 결은 굳이 궁금해하거나 물어보지 않았다.
“혹시 아프면 말씀하세요.”
수연의 의족에 항상 문제가 생기는 부분을 열어 보며 결이 말했다. 수연은 괜찮아, 하고 담담하게 말할 뿐 눈을 뜨거나 의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때제때 병원 좀 가세요. 이러다 문제 생기면 또 수술하셔야 하잖아요. 그럼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 일도 못 보세요.”
“입 안 아파?”
수연이 심드렁하게 묻는다.
“대표님이 부리는 사람이 간언하면 좀 들을 줄도 아셔야죠.”
“걱정 마. 네가 하는 말 말고 다른 직원들 말은 엄청 귀담아들어.”
수연의 시시껄렁한 농담에 결은 의족을 손보던 드라이버를 슬그머니 손에서 놓았다.
“저 갈게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결의 팔을 수연이 다급히 붙잡는다.
“알았어, 미안. 잘못했어. 야, 암만 그래도 하던 건 마저 해 주고 가야지. 난 볼 줄도 모르는데. 매정한 놈.”
결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수연의 곁에 앉아 다시 드라이버를 들었다. 분주히 손을 움직이는 결을 수연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결이 아기 새라도 돌보는 양 의족을 조심스레 다룬다.
“넌 왜 연애를 안 해?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고 그래도 마다하고.”
수연의 물음에 결은 덜컥 당황스러웠다. 좋은 사람 소개시켜 준다는 수연의 말을 매번 거절하면서도 수연에게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수연이 사랑했던 사람과 파혼을 하며 울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서. 자신이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수연과 거리가 생길까 봐 결은 무서웠다. 이대로, 정말 이대로 영원히 대표와 비서의 관계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였다.
“바쁘니까요. 하루 종일 대표님한테 매달려 있는데 제가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물론 연애에 관심도 없구요.”
“그러다 파파노인으로 늙어 죽을래?”
“네. 저는 이렇게 대표님 따까리나 하다 늙어 죽을 팔자인가 보죠.”
항상 문제가 있는 부분에 조금 손상이 일어난 것 말고 다른 문제는 없었다. 살펴보았던 부분을 정리하고 장비를 다시 챙겨 케이스에 넣었다. 수연이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거실을 거닐어 본다. 절뚝거림이 완연히 사라져 있었다. 수연이 가벼운 걸음으로 함지박만 한 미소를 머금었다. 결은 수연이 걷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방적인 파혼을 당했을 때, 수연은 비를 흠뻑 맞고 와 결에게 의수와 의족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서 화가 난다며 울었다. 파혼을 당한 상처 때문에 운다는 걸 알면서도 결은 의수랑 의족 때문에 화가 난 것이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