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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장 운명의 연인


휘영청 달이 떠오른다. 숲의 냄새가 짙어진다. 머리 위로 검게 일렁이는 밤하늘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다.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것은 마치 가슴 속의 단검처럼, 항상 은밀하게 품고 있던 한마디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다.

그녀의 금발은 숨이 막힐 듯 눈부셨다. 발그레한 뺨과 순수한 미소가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열여섯 살의 그녀, 처음 그 미소를 보았을 때, 그녀를 위해서라면 심장을 도려내도 황홀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미칠 것 같은 고양감. 그것이 그저 한때의 감정이었을 줄은.



‘이제 이런 구질구질한 인생엔 지쳤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자존심을 뭉개고 어깨를 짓밟았다. 누구보다 넓은 세계를 약속한다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던 것도 젊은 한때. 현실 속 그는 마을의 작은 빵집 주인일 뿐이었다.

날마다 왕국 제일간다는 칭찬이 자자한 애플파이를 구워 주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 알던.



‘더는 당신을…….’



그래.

사실은 그도 더는, 더는. 더는!

풀썩! 돌부리에 발이 걸리며 그가 풀밭에 얼굴을 박았다.

되는 일이 없다. 그가 흙냄새 섞인 기침을 뱉어 내며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을 비비며 뜨자 문득 밤하늘 높이 떠 있는 순백의 보름달이 보였다.

달빛을 받는 숲 나뭇잎들이 반짝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가 멍하니 시선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날 따라와 주길 바라고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돌연 어디선가 희미한 라일락 향기가 풍겨 왔다. 아니, 꽃향기라고 생각했지만, 살짝 탄 듯한 버터 향 같기도 했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소매로 훔치며 천천히 다리를 일으켰다.

온몸을 부드럽게 에워싸는 듯한 냄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발을 움직였다.

이윽고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나는 들꽃 정원이 나타나고, 그 너머 오뚝이 서 있는 오두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라.”

오두막의 문이 느리게 열렸다. 그 안에서 등장한 것은 별빛이 터지는 듯한 까만 눈동자에 미풍에 흔들리는 고동색 머리카락이 아찔하게 탐스러운 소녀.

“손님이네.”

귓전에 울리는 그 미성이 생크림 같다고 생각하며, 그는 피로에 지친 무릎을 접었다. 의식이 흐려졌다.

아름답다.

시야가 아득해져 가는 사이에도 그는 달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속삭였다.



* * *



“이제 정신 차려.”

막 짜낸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와 함께 가벼운 손짓이 그의 뺨을 찰싹 건드렸다. 진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야? 아름다운 나의…….

“아, 일어났다.”

장난스러운 웃음이 들렸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진저는 낯선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누구?”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침대의 주인.”

곧바로 대답을 내뱉은 소녀의 얼굴은 장밋빛으로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진저는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이 이곳 오두막의 푹신한 풀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는 마을에서 빠져나와 숲을 헤매던 중 이곳에 도착했었다. 꼴사납게 정신을 잃어버렸지만.

“도와준 거지……? 고마워.”

“천만에.”

조심스레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여자아이가 생긋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에 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진저 포레스트라고 해. 숲 아래 벽돌 마을에서 빵집을 하고 있어.”

“멀리서 왔구나. 전혀 모르겠어.”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샬럿. 보다시피 이곳에서 살고 있고, 빵 굽는 건 나도 자신 있어.”

진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집 안을 한 바퀴 훑었다. 침대는 연한 분홍색 이불과 베개로 포근하게 꾸며져 있었고, 침대에 앉아 비스듬히 시선이 닿는 쪽 벽에 고정된 옷걸이엔 진한 색상의 외투와 모자가 겹쳐 걸려 있었다.

그 왼쪽 옆으론 커다란 책장이 서 있었는데 낡은 것부터 비교적 새것까지 가지각색의 서적과 종이 뭉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고, 오른쪽으로 튼튼해 보이는 벽난로가 자리를 지키며 불을 밝혀 주고 있었다.

침대 앞 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 바닥의 공간엔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두툼한 카펫과 쿠션을 여러 겹 쌓은 것이 보였고, 그 너머, 거실을 지나 부엌이 시작되는 곳에는 결이 멋진 네모난 식탁과 동일한 나무로 만든 긴 의자가 양쪽에 하나씩 놓여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부엌과 현관, 침대 머리맡 위로 고급스러운 재질의 커튼이 겹겹이 걸려 있는 넓은 창이 집 안을 햇볕으로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빈 벽과 천장 공간에는 말린 풀꽃이 주렁주렁. 향긋한 풀냄새와 부엌에서 풍겨 오는 달콤한 버터 냄새가 햇빛과 섞인 것이 느껴졌다.

진저는 한결 선명한 정신으로 샬럿을 마주 보았다. 건자두처럼 까만 눈동자가 진저의 눈에 비쳤다.

샬럿. 그녀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아프리콧 파이 구웠는데, 먹어 볼래?”



* * *



북쪽 숲 깊은 한가운데에는 오두막이 한 채 서 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홀로 살고 있었다.

진저는 갓 구운 럼 케이크를 먹음직스럽게 잘라 접시 위에 올렸다. 진득한 시럽을 그 위에 뿌리자 농축된 과일의 단내가 코를 찔렀다.

그는 그것을 들고 정원으로 나왔다. 풍성한 녹색 치마를 잔디에 드리우고 앉은 샬럿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샬럿, 왜 여기서 혼자 살고 있어?”

오늘의 간식을 맛보며 문득 진저가 속에 품고 있던 궁금증을 꺼냈다.

그가 샬럿의 집에서 깨어난 지 하루째. 그는 집안일을 돕는 대신 그녀의 집에서 잠시 머물기를 부탁했다. 정확히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르거니와 아직 마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진저의 질문에 샬럿은 시럽 묻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케이크를 삼킨 다음,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 이 숲에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 알아?”

불현듯 진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녀?”

“응.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오던 얘기라는 것 같아. 못 들어 봤어?”

“글쎄, 우리 마을에선…….”

진저가 말끝을 흐리자, 샬럿은 양 무릎을 세워 치맛단에 고개를 묻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 숲에 들어오게 된 건 아주 어렸을 때야. 우리 부모님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었는데, 어느 날 마차가 강도에게 공격을 받았어. 엄마는…… 내 등을 밀치면서 도망치라고. 무조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리라고 했어. 그래서 달렸어. 이제 숨이 차 죽는 게 아닐까 싶을 때까지 달리는데, 이 집이 보였어.”

마치 진저가 한밤중 이곳을 발견했던 것처럼, 어린 샬럿의 눈에 불 켜진 오두막집이 들어왔다고 한다. 창으로 환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기에 그녀는 홀린 것처럼 문을 두드렸지만, 기이하게도 집은 비어 있었다.

“넌…… 이게 마녀의 집이라고 믿는다는 거야?”

무겁게 터진 음성에 샬럿이 눈을 깜빡였다.

“응.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녀가 나를 이 집에 가둔 게 아닐까? 사실 여러 번 숲 밖으로 나가 보려고 했어. 그런데 그때마다 길을 잃고 결국 이 집에 돌아오게 됐지. 이상하지 않아?”

진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슬픈 기색이 감돌고, 이내 그가 나직이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외로웠겠다.”

샬럿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고운 미소였다.

“나는 진이 와 줘서 정말 기뻐. 이렇게 즐거운 적은 정말 오랜만이야.”

진저는 샬럿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적 속에서 마주쳤다.

진저는 홀린 듯 천천히 손을 내려 샬럿의 뺨을 쓰다듬었다. 말캉한 볼의 살갗이 곱게 간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그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샬럿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눈을 한 번 깜빡이며 그의 손가락에 츕, 입을 맞추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진저가 아주 천천히 샬럿에게로 얼굴을 기울였다. 곧 입술이 맞닿고 따뜻한 혀가 닿았다.

달다.

정작 먹으려던 케이크는 접시에 고스란히 내버려 둔 채 진저는 샬럿의 허리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취할 것 같은 달콤함이 몸을 무겁게 달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