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



샬럿의 집에서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로즈메리와 아카시아, 감귤과 설탕시럽. 이 향기들이 아침 햇살과 섞여 기분 좋게 잠을 깨웠다.

부스스, 기지개를 켜며 진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옆에는 아직 곤히 잠든 샬럿이 누워 있었다.

진저는 잠시 샬럿의 앳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렸을 적 이 숲에 들어와 줄곧 혼자 지낸 여자아이.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진저는 창문의 커튼을 더욱 꼼꼼히 닫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가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아침 공기에서 이슬 냄새가 났다.



‘구질구질해. 평생 빵이나 구우면서 살라고? 이러려고 그곳에서 나온 게 아니야……!’



불현듯 새빨개진 눈으로 소리쳐 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할퀴었다. 진저가 미간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뭐 해?”

돌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진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목뒤가 서늘해진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왔는지, 잠에서 막 깬 얼굴의 샬럿이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진저는 묘한 기분을 털어 내며 부드럽게 대답을 꺼냈다.

“그냥, 아침 공기 좀 쐬고 있었어.”

“돌아가고 싶어?”

샬럿이 물었다. 진저는 가만히 샬럿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그야…… 진은, 마을에 두고 온 연인이 보고 싶잖아.”

진저가 흠칫했다. ‘그녀’에 대해선 샬럿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샬럿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며 말했다.

“네가 잠꼬대로 중얼거리는 거 들었어.”

“아니야…….”

진저는 메는 목소리를 다잡으려 노력하며 말을 꺼냈다.

“이제 연인도, 아무것도 아니야. 오히려…….”

돌아가고 싶으냐고? 진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을에, 그 집에 그녀가 있기 때문에 돌아가기 두려웠다.

“샬럿, 나는 오히려…… 가능하다면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어.”

진심을 담아 그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전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샬럿은 잠시 동안 멍하니 진저를 바라보았다. 약한 바람에 샬럿의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기뻐.”

이윽고 샬럿의 맑은 음성이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오늘은 버섯 키슈를 구워 줄게. 기대해 줘.”

진저는 샬럿과 같은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 * *



그날 저녁에는 창고에 고이 묵혀 두었던 살구주를 땄다. 풀 향기 가득한 저녁의 정원에서 조금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진저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불그스름한 기가 다 가시지 않은 보랏빛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진……. 하나 물어봐도 돼?”

취기가 오른 건지 한층 느려진 샬럿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저가 그러라는 의미로 눈을 돌리자 샬럿이 두 손으로 잔을 그러쥐며 말했다.

“그녀랑은…… 어떻게 만났었어?”

그는 잠시 멈칫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샬럿이 궁금해한다면 얘기해 주고 싶었다.

“조금 오래된 얘기야. 내가 열여덟 정도였을까. 그녀는…… 너랑 살짝 닮았었어. 네가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듯이, 그녀도 갇혀 있었거든.”

“어디에……?”

“마녀에게.”

진저가 말을 멈추고 술로 목을 축였다. 그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열여섯이 되는 해까지 그 마녀는 그녀를 집에 가둬 두고 있었어. 간혹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으면, 모조리 망치로 머리를 갈겨 죽여 버리면서.”

그가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아주 우연이었다.

새로 개발할 레시피에 쓸 만한 재료가 없을까, 고심하며 숲을 돌아다니던 그는 그녀를 만났다. 유독 길디긴 금발이 신기하여 말을 붙인 것이 시작. 왜인지 잠들기 전 그녀의 생각이 나 자꾸만 찾아가게 되었다.

기이한 탑처럼 생긴 그녀의 집에선 겨우 창문을 통해 대화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그녀를 마을로 데리고 오리라 결심했다.

“그녀와 힘을 합쳐 마녀를 죽였어. 그다음 마을로 돌아와 함께 가정을 차렸지. 평생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 깨달은 거야. 나는 그녀의 운명이 아니란 걸.”

“무슨 뜻이야?”

“나는 빵집 주인이야. 부모님의 가게를 물려받아 평생 빵을 굽는…….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삶을 원했던 게 아니었어.”

그로선 그녀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차라리 다른 이가 그녀를 구해 줬어야 했다.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켜고서 진저는 한쪽 무릎에 제 이마를 묻었다. 풀꽃과 살구 향기, 알코올 냄새가 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역시…… 아직 사랑하는 거지?”

조용히 샬럿이 말을 뱉었다. 진저가 눈썹을 움찔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진, 굉장히 슬픈 얼굴이야.”

진저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슬픈가?

당연히 슬펐다.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사랑이 허무하게 깨져 버렸으니. 그가 순순히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래, 슬퍼. 하지만 더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도…….”

“어떻게 하면 믿어 주겠어?”

샬럿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달빛 아래 수줍게 빛났다.

“돌아가지…… 말아 줘.”

그녀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다.

“여기서…… 나랑, 계속.”

진저는 가만히 샬럿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줄곧 외톨이였던 여자아이.

조금 두려웠다. 이제 누군가에게 함부로 약속을 거는 것이 자만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게.”

그가 아주 따뜻하게 미소를 보였다.

“잘 부탁해, 샬럿.”

그 말에 샬럿의 얼굴에 앳된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그 모습에 진저 또한 저도 모르게 웃음 지으며 그녀에게 짧게 키스했다. 쪽. 찰나 포개어진 입술의 온도는 따뜻했다.

잠시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곧 다시 진저의 입술이 샬럿에게로 포개졌다. 츕.

“샬럿…….”

그가 이름을 속삭이며 샬럿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샬럿은 두 팔로 진저를 끌어안으며 그에게 응했다.

샬럿의 입술은 도톰한 젤리처럼, 이로 살짝 깨물어 빨면 시럽을 뿌린 딸기 같은 단맛이 났다. 혀를 얽으며 진저는 풀밭에 치렁치렁 드리워진 샬럿의 치맛단 안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진저가 낮은 목소리로 샬럿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겹치며 말캉한 혀가 입안을 휘저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샬럿의 등허리를 쓰다듬자, 샬럿이 진저의 어깨를 안으며 재촉하듯 어루만졌다.

“진, 계속…….”

“계속 여기에서, 너와 함께 있을게. 하아, 샬럿.”

“흐읏.”

질척한 소리가 풀숲 가운데 조용히 울려 퍼졌다. 진저는 샬럿을 달래듯이 목에 여러 번 키스했다. 하아. 그의 숨소리가 낮아졌다.

애를 태우듯 움직이던 진저가 문득 멈추었다. 그는 샬럿의 턱과 귓불에 쪽 쪽 입을 맞추더니 이내 샬럿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아!”

샬럿의 목소리가 과즙처럼 터졌다. 진저는 그녀의 달콤한 음성을 즐기며 샬럿의 살결에 입술을 묻었다. 샬럿은 양팔로 진저에게 매달리며 그의 이름을 되뇌어 불렀다.

“진저. 진…….”

“샬럿…….”

하, 하아. 둘의 숨소리가 공기 중에 선명하게 울렸다.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잔디 냄새와 함께 따라 놓은 술에서 살구의 새큼하며 단내가 풍겨 오고 있었다.

한순간 진저가 입술을 깨물며 멈추었다. 이내 열에 들뜬 낮고 긴 숨결이 진저의 잇새에서 샬럿의 살갗 안으로 스며들었다.

스륵. 진저가 샬럿을 껴안듯 몸을 기대며 풀숲에 누웠다.

몸이 풀린 듯 멍하니 여운에 잠긴 샬럿은 배시시 웃으며 진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진저는 그녀에게 다시금 쪽 키스했다. 샬럿은 더 키스해 달라는 듯 그의 품에 안기며 앳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터는 쭉 함께야.”

“……응. 샬럿.”

진저는 맹세하며 그녀의 밤갈색 머리카락에 조용히 키스했다. 밤하늘은 어느새 새까매져 높이 걸린 초승달이 두 사람을 내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