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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택시를 잡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고집부리지 마세요.’
해찬은 무턱대고 팔을 뻗어 대신 택시를 잡아 주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혹여나 해찬이 따라 탈까 도희는 재빨리 뒷좌석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뒷좌석 문을 닫기 무섭게 다시금 번쩍 열렸다. 따라 탄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요. 지금 상황에선 누구든 나처럼 했어.’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뜻.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도희는 기사님에게 목적지와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세워 달라 요구했다.
힘주어 밀면 툭 부서질 것만 같은 녹슨 대문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창피하다기보단 동정할 눈빛이 싫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해찬이 어두컴컴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 도희는 성큼성큼 앞만 보며 걸었다.
흔히 달동네라 불리는 오르막길은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다. 매번 걷는 길인데도 늘 버거웠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느덧 도착한 집을 코앞에 두고도 두 다리는 그 자리에 기둥처럼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허름한 대문 앞에 멈춰 서 있는 검은색 세단. 그 안에서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반강제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50대 나이와 어울리지 못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몸서리치며 얼굴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깊게 달려들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도희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당장 달려가 뜯어말리며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 저 징그러운 행위가 끝이 나면, 낯선 남자는 그 답례로 여자에게 돈을 건넬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묵묵히 몫을 챙길 테고 그 이상을 요구하는 남자를 거부하지 못하겠지. 뻔한 전개였다.
알기에, 도망쳐야 했다.
몇 번을 봐 놓고도 못 본 척,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재 도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무리였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도희는 얼마 가지 못해 장애물에 부딪혔다.
“선배.”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너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의도치 않게 나의 치부를 보게 된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야경이 예뻐요.”
거짓말.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해찬이 손을 뻗어 눈을 가린 것이다.
그에게선 시원한 바디 워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뭐 하는 짓이야. 치워.”
“나랑 술 한잔 더 할래요?”
내가 너랑 왜.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야속한 입술은 엉뚱한 말을 뱉고 만다.
“……어디서.”
“어디든.”
도희는 끝내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래. 부정할 수 없다. 그곳이 어디든 이곳보단 나을 테니.
* * *
걷는 내내 멍했다. 무수한 상념을 감당하지 못해 생각하길 포기한 뇌는 제 기능을 멈춘 지 오래였다.
해찬은 혹여나 어린아이를 잊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부모처럼 도희의 앙상한 손목을 꼬옥 부여잡은 채 묵묵히 앞장서 걸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허름한 포장마차 안에 해찬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각이라 손님은 해찬과 도희 단둘뿐이었다.
꽤 자주 찾는 곳인 듯했다.
해찬은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곤 익숙하게 메뉴를 시켰다. 닭똥집과 소주 한 병. 의외였다. 몇만 원 하는 값비싼 안주만 먹게 생겨선.
무의미한 생각에 잠긴 사이 도희의 눈앞에 놓인 빈 잔으로 투명한 액체가 반쯤 채워졌다.
술이 아닌, 물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도희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너, 뭐 해?”
“취했잖아요.”
해찬은 초연했다. 멀쩡한 소주를 곁에 두고 뭐 하는 짓인지. 예외는 없었다. 해찬의 잔도 생수로 채워졌다.
“지금 물 마시려고 왔어?”
“여기 안주 맛있어요.”
동문서답이었다. 해찬은 작게 웃으며 잔을 부딪쳐 왔다.
술을 가까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당장 알코올이 절실했다. 도희는 잔을 단박에 비워 내더니 즉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책임 못 져요.”
무슨 뜻인지 해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희는 해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술을 따랐다.
“과정이 어땠든 나 따라온 여자 취했다고 사정 봐줄 만큼 착한 놈 아니란 뜻이에요.”
우스웠다.
삐딱하게 시선을 올린 도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해찬을 응시했다.
“착각하지 마. 취하더라도 너한테 사정 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 없으니까. 무엇보다 너, 안 착해 보여.”
해찬이 엷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단절됐다. 도희 혼자 연속으로 따르고 마시기를 반복할 동안 해찬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도희를 건너다보았다. 미약한 호기심과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난 눈빛으로.
동정일까. 연민일까.
도희는 무시하며 술을 마저 넘겼다. 술맛은 썼다. 아주, 많이.
술병에 채워진 술이 반쯤 사라지고 난 후에야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도희가 서론 없이 물었다.
“선미가 시켰니?”
걱정되니까 데려다주라고.
“왜 그렇게 생각해요?”
턱에 손을 괸 채 물끄러미 도희를 바라보던 해찬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올라선 입매는 더없이 태연스럽다. 조금은 당혹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선배를 여기로 데려온 건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어요. 그 누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도 내 선택이었고.”
돌려 말했지만 결국 부탁받았다는 거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거슬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선미는 누나고 왜 나는 선배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지금 와서 따져 물어봤자.
도희는 잠자코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까 본 여자, 엄마였어.”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 꺼낸 말은 아니었다. 답답한 속을 어찌할 수 없으니 벽과 대화라도 해 보자는, 단순한 심정이었다.
“난 나대로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고 했는데, 부족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얼마만큼 더 해야 하는지.
중년 여자가 한탕 크게 벌 수 있는 일자리는 흔치 않았다. 룸살롱에선 마담 정도가 아니면 대부분 젊은 여성을 선호할 테니까.
평소 같았으면 늘 후줄근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모습이어야 할 엄마가 언제부턴가 서툰 솜씨로 분칠하는 모습을 봤다.
수상한 마음에 몰래 뒤를 밟았다. 도착한 곳은 한 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먼 동네에 위치한 노래방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엄마의 모습은 익숙했다.
도희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그날을 회상하며 쓰게 웃었다.
“말릴 수도 욕할 수도 없어. 나마저 몰아세웠다간…….”
죽어 버릴까 봐.
꼭 변명하는 모습 같아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왜 이런 말을 너에게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취했나.
도희는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려는 혀를 간신히 붙잡았다.
“여동생이 열다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
한번 시작된 신세 한탄은 끝이 없었다.
“멀쩡했다면 지금쯤 너처럼 유명해졌을지도 몰라. 나완 다르게 정말 꿈 많던 애였는데. 차라리 내가…….”
도희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여동생 도영은 여섯 살 때부터 발레에 두각을 드러냈다. 레슨 선생님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아이니 반드시 외국으로 나가야 한단 말로 엄마를 들뜨게 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던 동생은 아름다웠고, 눈부셨으며, 찬란했다.
여동생 도영은 도희에겐 없는 열정이 있었고, 무기력한 엄마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끝내 고개가 푹 떨궈졌다. 자꾸만 픽, 픽 실없는 웃음이 샌다.
아무래도 많이 취했나 보다.
“예뻤겠네요.”
뜬금없는 말에 도희의 얼굴이 힘겹게 올라갔다.
“동생이 선배 닮았으면.”
도희는 능청스럽게 웃는 해찬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고해찬의 눈은 정말 신기했다. 암흑처럼 까맣고, 우주처럼 고요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깨끗한 피부와 대조되는 색이라 그런지 깊은 심연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서늘한 눈매와 높게 솟은 콧대. 남자치곤 지나치게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고해찬의 외모는 화려했다. 다른 말론 굉장히……, 야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꿰뚫듯 상대를 직시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내뱉은 감상평일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아.
“설레게.”
화들짝 놀란 도희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해찬은 느슨히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특해요, 선배.”
이상해.
“이젠 울지도 않고.”
넌 정말,
“착해.”
이상하다고.
* * *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머리를 푹푹 찔러 댔다.
“아…….”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도희는 미약한 신음을 토해 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초점이 또렷해질 때까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대강 훑어봐도 자신의 좁은 방이 아니었다. 세 명은 거뜬히 수용하고도 남을 법한 넓은 침대를 지나, 그 옆 협탁에 놓인 빈 재떨이를 지나, 침대 맞은편 벽면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로이나 MOTEL」
모텔.
“이거, 꿈인가.”
난생처음 모텔이란 곳에 왔다.
상상 속 모텔은 허름할 줄 알았는데, 꽤 값비싼 호텔방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깔끔함을 갖추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끊겼는지도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이곳에 왔겠지. 차라리 기억 못 하는 편이 다행일지도.
슬쩍 시선을 내렸다. 몸에 걸친 거라곤 달랑 끈나시 하나와 팬티가 전부였다.
잤을까?
잠을 잘 때 옷을 벗는 습관이 있어 무엇 하나 확신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뭐 어쩔 거야.”
보통 사람 같았으면 놀라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도희는 달랐다.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면 사전에 조심했어야 했다. 결국 화를 자초한 사람이 본인이란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옆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직까지도 곤히 잠에 취해 있는 고해찬은 잘못이 없다. 오히려 길바닥에 내던지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면 또 모를까.
침대에서 벗어난 도희는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해찬의 작품인 걸까. 천천히 팔을 뻗었다. 옷에선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처럼 침착하게 옷가지를 빼내어 입기 시작했다.
반팔 티를 입고 청바지 버클까지 채운 뒤 침대 협탁으로 다가갔다.
쓸까, 말까. 수십 번이나 고민을 반복한 끝에 펜을 쥐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메모를 남겼다.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어 올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달 치 저녁값이었지만 편의점에서 유통 기한이 임박한 음식으로 대충 때우면 될 일이었다.
도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삐비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그시 감겨 있던 해찬의 눈꺼풀이 날렵하게 떠밀려 올라갔다.
곧이어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은 자연스레 도희가 오래 머무른 곳으로 향했다. 해찬은 단정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을 눈으로만 읽었다.
「먼저 갈게. 어제는 수고했어.」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현금을 보자마자 입매가 뒤틀렸다.
“아…….”
해찬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대로 메모지를 구겨 버렸다.
“제대로 엿 먹었네.”
잠시나마 얼굴에 머무른 웃음기마저 싹 가셨다.
택시를 잡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고집부리지 마세요.’
해찬은 무턱대고 팔을 뻗어 대신 택시를 잡아 주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혹여나 해찬이 따라 탈까 도희는 재빨리 뒷좌석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뒷좌석 문을 닫기 무섭게 다시금 번쩍 열렸다. 따라 탄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요. 지금 상황에선 누구든 나처럼 했어.’
네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뜻.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도희는 기사님에게 목적지와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세워 달라 요구했다.
힘주어 밀면 툭 부서질 것만 같은 녹슨 대문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창피하다기보단 동정할 눈빛이 싫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
해찬이 어두컴컴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 도희는 성큼성큼 앞만 보며 걸었다.
흔히 달동네라 불리는 오르막길은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었다. 매번 걷는 길인데도 늘 버거웠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어느덧 도착한 집을 코앞에 두고도 두 다리는 그 자리에 기둥처럼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허름한 대문 앞에 멈춰 서 있는 검은색 세단. 그 안에서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반강제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50대 나이와 어울리지 못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몸서리치며 얼굴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깊게 달려들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도희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당장 달려가 뜯어말리며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 저 징그러운 행위가 끝이 나면, 낯선 남자는 그 답례로 여자에게 돈을 건넬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묵묵히 몫을 챙길 테고 그 이상을 요구하는 남자를 거부하지 못하겠지. 뻔한 전개였다.
알기에, 도망쳐야 했다.
몇 번을 봐 놓고도 못 본 척, 모르는 척해야만 한다. 그것이 현재 도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무리였다.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도희는 얼마 가지 못해 장애물에 부딪혔다.
“선배.”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너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의도치 않게 나의 치부를 보게 된 너는 어떤 표정을 짓고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야경이 예뻐요.”
거짓말.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해찬이 손을 뻗어 눈을 가린 것이다.
그에게선 시원한 바디 워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뭐 하는 짓이야. 치워.”
“나랑 술 한잔 더 할래요?”
내가 너랑 왜. 싫다고 말해야 하는데 야속한 입술은 엉뚱한 말을 뱉고 만다.
“……어디서.”
“어디든.”
도희는 끝내 헛웃음을 토해 냈다.
그래. 부정할 수 없다. 그곳이 어디든 이곳보단 나을 테니.
* * *
걷는 내내 멍했다. 무수한 상념을 감당하지 못해 생각하길 포기한 뇌는 제 기능을 멈춘 지 오래였다.
해찬은 혹여나 어린아이를 잊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부모처럼 도희의 앙상한 손목을 꼬옥 부여잡은 채 묵묵히 앞장서 걸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땐 허름한 포장마차 안에 해찬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각이라 손님은 해찬과 도희 단둘뿐이었다.
꽤 자주 찾는 곳인 듯했다.
해찬은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건네곤 익숙하게 메뉴를 시켰다. 닭똥집과 소주 한 병. 의외였다. 몇만 원 하는 값비싼 안주만 먹게 생겨선.
무의미한 생각에 잠긴 사이 도희의 눈앞에 놓인 빈 잔으로 투명한 액체가 반쯤 채워졌다.
술이 아닌, 물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도희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너, 뭐 해?”
“취했잖아요.”
해찬은 초연했다. 멀쩡한 소주를 곁에 두고 뭐 하는 짓인지. 예외는 없었다. 해찬의 잔도 생수로 채워졌다.
“지금 물 마시려고 왔어?”
“여기 안주 맛있어요.”
동문서답이었다. 해찬은 작게 웃으며 잔을 부딪쳐 왔다.
술을 가까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당장 알코올이 절실했다. 도희는 잔을 단박에 비워 내더니 즉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책임 못 져요.”
무슨 뜻인지 해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희는 해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술을 따랐다.
“과정이 어땠든 나 따라온 여자 취했다고 사정 봐줄 만큼 착한 놈 아니란 뜻이에요.”
우스웠다.
삐딱하게 시선을 올린 도희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해찬을 응시했다.
“착각하지 마. 취하더라도 너한테 사정 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 없으니까. 무엇보다 너, 안 착해 보여.”
해찬이 엷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단절됐다. 도희 혼자 연속으로 따르고 마시기를 반복할 동안 해찬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도희를 건너다보았다. 미약한 호기심과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난 눈빛으로.
동정일까. 연민일까.
도희는 무시하며 술을 마저 넘겼다. 술맛은 썼다. 아주, 많이.
술병에 채워진 술이 반쯤 사라지고 난 후에야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은 도희가 서론 없이 물었다.
“선미가 시켰니?”
걱정되니까 데려다주라고.
“왜 그렇게 생각해요?”
턱에 손을 괸 채 물끄러미 도희를 바라보던 해찬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올라선 입매는 더없이 태연스럽다. 조금은 당혹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선배를 여기로 데려온 건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어요. 그 누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도 내 선택이었고.”
돌려 말했지만 결국 부탁받았다는 거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거슬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선미는 누나고 왜 나는 선배인 건지.
묻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지금 와서 따져 물어봤자.
도희는 잠자코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까 본 여자, 엄마였어.”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 꺼낸 말은 아니었다. 답답한 속을 어찌할 수 없으니 벽과 대화라도 해 보자는, 단순한 심정이었다.
“난 나대로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고 했는데, 부족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얼마만큼 더 해야 하는지.
중년 여자가 한탕 크게 벌 수 있는 일자리는 흔치 않았다. 룸살롱에선 마담 정도가 아니면 대부분 젊은 여성을 선호할 테니까.
평소 같았으면 늘 후줄근한 차림에 화장기 없는 모습이어야 할 엄마가 언제부턴가 서툰 솜씨로 분칠하는 모습을 봤다.
수상한 마음에 몰래 뒤를 밟았다. 도착한 곳은 한 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먼 동네에 위치한 노래방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엄마의 모습은 익숙했다.
도희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그날을 회상하며 쓰게 웃었다.
“말릴 수도 욕할 수도 없어. 나마저 몰아세웠다간…….”
죽어 버릴까 봐.
꼭 변명하는 모습 같아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왜 이런 말을 너에게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취했나.
도희는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려는 혀를 간신히 붙잡았다.
“여동생이 열다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
한번 시작된 신세 한탄은 끝이 없었다.
“멀쩡했다면 지금쯤 너처럼 유명해졌을지도 몰라. 나완 다르게 정말 꿈 많던 애였는데. 차라리 내가…….”
도희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여동생 도영은 여섯 살 때부터 발레에 두각을 드러냈다. 레슨 선생님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아이니 반드시 외국으로 나가야 한단 말로 엄마를 들뜨게 했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니던 동생은 아름다웠고, 눈부셨으며, 찬란했다.
여동생 도영은 도희에겐 없는 열정이 있었고, 무기력한 엄마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끝내 고개가 푹 떨궈졌다. 자꾸만 픽, 픽 실없는 웃음이 샌다.
아무래도 많이 취했나 보다.
“예뻤겠네요.”
뜬금없는 말에 도희의 얼굴이 힘겹게 올라갔다.
“동생이 선배 닮았으면.”
도희는 능청스럽게 웃는 해찬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본 고해찬의 눈은 정말 신기했다. 암흑처럼 까맣고, 우주처럼 고요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깨끗한 피부와 대조되는 색이라 그런지 깊은 심연보다 더 짙게 느껴졌다.
서늘한 눈매와 높게 솟은 콧대. 남자치곤 지나치게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고해찬의 외모는 화려했다. 다른 말론 굉장히……, 야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꿰뚫듯 상대를 직시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내뱉은 감상평일지도 모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아.
“설레게.”
화들짝 놀란 도희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해찬은 느슨히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특해요, 선배.”
이상해.
“이젠 울지도 않고.”
넌 정말,
“착해.”
이상하다고.
* * *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머리를 푹푹 찔러 댔다.
“아…….”
대체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도희는 미약한 신음을 토해 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초점이 또렷해질 때까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대강 훑어봐도 자신의 좁은 방이 아니었다. 세 명은 거뜬히 수용하고도 남을 법한 넓은 침대를 지나, 그 옆 협탁에 놓인 빈 재떨이를 지나, 침대 맞은편 벽면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로이나 MOTEL」
모텔.
“이거, 꿈인가.”
난생처음 모텔이란 곳에 왔다.
상상 속 모텔은 허름할 줄 알았는데, 꽤 값비싼 호텔방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깔끔함을 갖추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기억이 끊겼는지도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이곳에 왔겠지. 차라리 기억 못 하는 편이 다행일지도.
슬쩍 시선을 내렸다. 몸에 걸친 거라곤 달랑 끈나시 하나와 팬티가 전부였다.
잤을까?
잠을 잘 때 옷을 벗는 습관이 있어 무엇 하나 확신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뭐 어쩔 거야.”
보통 사람 같았으면 놀라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도희는 달랐다.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면 사전에 조심했어야 했다. 결국 화를 자초한 사람이 본인이란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옆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직까지도 곤히 잠에 취해 있는 고해찬은 잘못이 없다. 오히려 길바닥에 내던지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면 또 모를까.
침대에서 벗어난 도희는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해찬의 작품인 걸까. 천천히 팔을 뻗었다. 옷에선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처럼 침착하게 옷가지를 빼내어 입기 시작했다.
반팔 티를 입고 청바지 버클까지 채운 뒤 침대 협탁으로 다가갔다.
쓸까, 말까. 수십 번이나 고민을 반복한 끝에 펜을 쥐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메모를 남겼다.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어 올려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달 치 저녁값이었지만 편의점에서 유통 기한이 임박한 음식으로 대충 때우면 될 일이었다.
도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삐비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지그시 감겨 있던 해찬의 눈꺼풀이 날렵하게 떠밀려 올라갔다.
곧이어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은 자연스레 도희가 오래 머무른 곳으로 향했다. 해찬은 단정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을 눈으로만 읽었다.
「먼저 갈게. 어제는 수고했어.」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현금을 보자마자 입매가 뒤틀렸다.
“아…….”
해찬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대로 메모지를 구겨 버렸다.
“제대로 엿 먹었네.”
잠시나마 얼굴에 머무른 웃음기마저 싹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