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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울에는 여행 목적으로 오신 건가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왔어요.”
방문하는 곳과 체류 기간을 물은 공항 직원이 여권을 건네주며 가벼운 미소를 건넸다.
“한국 유명 여배우와 많이 닮았어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 말에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지안은 입국 심사를 위해서 벗어 놓은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입국 심사대를 거쳐서 인파로 붐비는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흘금대며 따라붙는 시선이 점점 더 심해졌다.
지유는 늘 이런 시선을 받으며 사는 것일까. 지금껏 자유롭게 살아온 지안으로선 모르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거북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부추기듯이 공항 로비로 들어섰을 때, 느닷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윤지유 씨! 잠깐만요.”
세월이 흘러도 ‘윤지유’라는 언니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언니는 새아버지의 성을 따랐는데, 영화배우로 데뷔하면서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재혼 사실 역시 숨긴 거로 알고 있다.
“최근 얼굴을 뵐 수 없었는데, 여행을 다녀오신 건가요?”
순간, 당황한 지안은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휴대 전화 플래시가 더해졌다.
지안을 쌍둥이 언니, 지유로 착각했는지, 기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신건설 유재원 대표와 열애설 기사가 났는데, 두 분은 정확히 어떤 사이입니까?”
지안은 뜻밖의 질문만큼이나 눈앞의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저는 윤지유가 아닙니다.”
“지난번 시사회에서 인터뷰했던 K 신문사의 정 기자입니다. 옷차림이 달라졌다고 제가 윤지유 씨를 몰라보겠어요? 그러지 마시고 인터뷰 좀 부탁합니다.”
정 기자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명색이 연예부 베테랑 기자인데 누구를 속이려고.
하긴 워낙 화려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이다 보니, 단순하다 못해 초라한 옷차림이 이외이긴 하다. 영화배우 윤지유는 모델 출신답게 도회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였다. 명품을 즐겨 입고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로 카메라 앞에 나선 적이 없을 정도로 외모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데뷔 이후, 승승장구하며 주연 자리를 꿰차더니 현재는 탑 급 배우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평소 여러 무성한 소문을 몰고 다녔는데, 최근 건설사 대표와 또다시 열애설이 불거지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었다.
사실 돈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업가와 연예인이 엮이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정 기자가 보기에도 이합집산 하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 흔한 나머지 이제는 싫증이 날 정도니까.
스캔들 기사가 난 이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제법 긴 여행을 다녀왔는지 피부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꾸미지 않은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이지만, 어쩌면 그녀의 직업이 배우이니 이런 모습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꾸민 모습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강승원 대표와는 아주 헤어진 겁니까. 작년에는 결혼 기사까지 난 거로 아는데.”
지안은 현재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기자는 낯선 이름들을 쏟아 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아니고서야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지유에게 연락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지안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자가 또다시 질문을 쏟아 냈다.
“우신건설 측에서는 열애설을 부인하데요. 그럼 항간의 떠도는 소문처럼 두 사람과는 단순한 스폰 관계인가요?”
사적이고도 노골적인 질문에 저도 모르게 지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언니, 지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을 전혀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린다는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 달라는 지유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망설이다가 비행기를 탔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하니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잘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 땅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낯선 얼굴들뿐, 누구 하나 반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외롭게 자란 언니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을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쉬지 않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몰려드는 인파에 지안은 출구로 가는 걸 포기하고 그대로 멈춘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헤치며 세련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185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주변을 압도하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식의 인터뷰는 곤란합니다. 인터뷰를 원하시면 기획사를 통해 연락하세요.”
차분하지만, 묘하게 상대를 위협하는 톤의 목소리. 남자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런 주변 분위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지안의 여행 가방을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짐은 이것뿐이에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묻는 말에 지안은 ‘네.’ 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는 언니가 보낸 사람인가. 명령조의 말투, 무미건조해 보이는 표정을 보면 언니의 부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앞서가는 남자를 따라서 출구로 향하려 할 때, 때를 놓치지 않고 정 기자가 끼어들었다.
“……저기 혹시.”
“…….”
“우신건설의 유재원 대표님?”
유재원? 조금 전 기자가 말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인데. 지안은 곁에 선 재원을 올려다보았다. 재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원인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내리뜬 눈동자에서 짜증과 권태로움이 스치고 지났기 때문이다.
“윤지유 씨를 만나러 직접 공항까지 나온 겁니까?”
정 기자가 다그치듯 물었다. 재원은 끈질기게 들러붙는 정 기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K 신문사라고 했죠? 명함이나 한 장 주시죠.”
정 기자가 머뭇거리며 명함을 내밀자, 그가 명함을 쓱 한 번 훑어본 후에 한 손으로 구겨서 그대로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만큼이나 무례한 태도였다.
“조만간 정식으로 기자 회견을 할 생각입니다. 그때 뵙죠.”
남자 특유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에 기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모두 길 좀 비켜 주세요.”
그의 말 한마디에 웅성대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길을 열었다. 마치 보란 듯이 한쪽 팔로 지안의 어깨를 감싼 그는 수많은 인파를 가르며 공항 출구로 향했다.
잠시 후, 지안은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가 못마땅한지 짧은 욕설을 잇새로 내뱉었다.
“……미친 것들.”
놀라서 남자를 올려다보니, 재원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정신 나갔어요? 숨어 지내도 모자랄 판에, 공항을 활보하고 다니다니.”
힐난하는 말투에 저절로 뺨이 달아올랐다.
택시 정류장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검은색 벤틀리가 미끄러지듯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고개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그러자 재원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지안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뒤를 보고 그런 소리를 하던가.”
뒤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인 채 웅성대고 있었다. 동영상으로 찍는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도 여럿 보였다.
“내일 조간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나겠어. 혹시 이런 상황도 직접 꾸민 거 아니에요?”
조롱 섞인 말투였지만, 그래도 평소 매너가 몸에 뱄는지, 그는 뒷문을 열어 둔 채 그녀가 차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택시 타는 건 포기해야 했다. 지안이 뒷좌석에 오르기가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차는 출발했지만,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를 뿐 곁에 앉은 재원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운전기사 역시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긴 출장으로 피곤하실 텐데, 집으로 모실까요?”
출장이라니, 그는 예상했던 것처럼 언니의 부탁으로 지안을 마중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 역시 지안을 지유로 착각하고 도와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실이 어떠하든 그는 지안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지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애정은커녕 최소한의 호의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대상이 윤지유이든, 아니면 서지안이든.
“일단 출발해.”
아까의 소란으로 피곤했는지, 재원은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어딘가 불편한지, 셔츠 맨 위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고쳐 맸다.
도로는 한산했고 고급 세단은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 때문일까.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느긋하게 이어지는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자극했다. 잘 손질된 옷감에서 나는 서걱대는 소리와 코끝을 간질이는 남자다운 스킨 향. 오르내리는 희미한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지안은 재원에게 감사 인사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의 도움으로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차창을 응시하던 재원이 고개를 돌렸다.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지안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문득 이런 제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처럼 살아온 지안은 또래 아이들보다 철이 빨리 든 편이었다. 국제 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극한 상황에 처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심리 상담가로 일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웬만한 일로는 기죽거나 놀라는 법이 없었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지안을 두고 주변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라고 놀리지만, 사실 내색하지 않을 뿐, 그녀는 예민한 성격에 직감이 유달리 발달한 편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빠르게 포착하고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 역시 훈련보다는, 본능적인 직감을 통해 익숙해진 것이었다.
재원의 공격적인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자제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의 눈동자 속에서 감추어진 혐오와 적의가 언니를 향한 것이라면, 그 까닭을 알고 싶었다. 관찰하는 듯한 그녀의 차분한 시선에 재원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외네요. 내가 아는 윤지유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모르는 사람인데.”
“서울에는 여행 목적으로 오신 건가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왔어요.”
방문하는 곳과 체류 기간을 물은 공항 직원이 여권을 건네주며 가벼운 미소를 건넸다.
“한국 유명 여배우와 많이 닮았어요.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 말에 희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지안은 입국 심사를 위해서 벗어 놓은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입국 심사대를 거쳐서 인파로 붐비는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흘금대며 따라붙는 시선이 점점 더 심해졌다.
지유는 늘 이런 시선을 받으며 사는 것일까. 지금껏 자유롭게 살아온 지안으로선 모르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거북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부추기듯이 공항 로비로 들어섰을 때, 느닷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윤지유 씨! 잠깐만요.”
세월이 흘러도 ‘윤지유’라는 언니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언니는 새아버지의 성을 따랐는데, 영화배우로 데뷔하면서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재혼 사실 역시 숨긴 거로 알고 있다.
“최근 얼굴을 뵐 수 없었는데, 여행을 다녀오신 건가요?”
순간, 당황한 지안은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휴대 전화 플래시가 더해졌다.
지안을 쌍둥이 언니, 지유로 착각했는지, 기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신건설 유재원 대표와 열애설 기사가 났는데, 두 분은 정확히 어떤 사이입니까?”
지안은 뜻밖의 질문만큼이나 눈앞의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길 좀 비켜 주세요. 저는 윤지유가 아닙니다.”
“지난번 시사회에서 인터뷰했던 K 신문사의 정 기자입니다. 옷차림이 달라졌다고 제가 윤지유 씨를 몰라보겠어요? 그러지 마시고 인터뷰 좀 부탁합니다.”
정 기자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명색이 연예부 베테랑 기자인데 누구를 속이려고.
하긴 워낙 화려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이다 보니, 단순하다 못해 초라한 옷차림이 이외이긴 하다. 영화배우 윤지유는 모델 출신답게 도회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였다. 명품을 즐겨 입고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로 카메라 앞에 나선 적이 없을 정도로 외모에 신경 쓰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데뷔 이후, 승승장구하며 주연 자리를 꿰차더니 현재는 탑 급 배우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평소 여러 무성한 소문을 몰고 다녔는데, 최근 건설사 대표와 또다시 열애설이 불거지면서 좋지 않은 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었다.
사실 돈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업가와 연예인이 엮이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정 기자가 보기에도 이합집산 하는 그들의 관계가 너무 흔한 나머지 이제는 싫증이 날 정도니까.
스캔들 기사가 난 이후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제법 긴 여행을 다녀왔는지 피부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꾸미지 않은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이 평소와 달라 보이지만, 어쩌면 그녀의 직업이 배우이니 이런 모습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꾸민 모습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 강승원 대표와는 아주 헤어진 겁니까. 작년에는 결혼 기사까지 난 거로 아는데.”
지안은 현재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기자는 낯선 이름들을 쏟아 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아니고서야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지유에게 연락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전화조차 할 수 없었다.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지안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자가 또다시 질문을 쏟아 냈다.
“우신건설 측에서는 열애설을 부인하데요. 그럼 항간의 떠도는 소문처럼 두 사람과는 단순한 스폰 관계인가요?”
사적이고도 노골적인 질문에 저도 모르게 지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언니, 지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을 전혀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린다는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 달라는 지유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망설이다가 비행기를 탔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하니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잘한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 땅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낯선 얼굴들뿐, 누구 하나 반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외롭게 자란 언니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을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쉬지 않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몰려드는 인파에 지안은 출구로 가는 걸 포기하고 그대로 멈춘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웅성대는 사람들을 헤치며 세련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185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키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주변을 압도하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식의 인터뷰는 곤란합니다. 인터뷰를 원하시면 기획사를 통해 연락하세요.”
차분하지만, 묘하게 상대를 위협하는 톤의 목소리. 남자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주변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런 주변 분위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지안의 여행 가방을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짐은 이것뿐이에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묻는 말에 지안은 ‘네.’ 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는 언니가 보낸 사람인가. 명령조의 말투, 무미건조해 보이는 표정을 보면 언니의 부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앞서가는 남자를 따라서 출구로 향하려 할 때, 때를 놓치지 않고 정 기자가 끼어들었다.
“……저기 혹시.”
“…….”
“우신건설의 유재원 대표님?”
유재원? 조금 전 기자가 말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인데. 지안은 곁에 선 재원을 올려다보았다. 재원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원인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내리뜬 눈동자에서 짜증과 권태로움이 스치고 지났기 때문이다.
“윤지유 씨를 만나러 직접 공항까지 나온 겁니까?”
정 기자가 다그치듯 물었다. 재원은 끈질기게 들러붙는 정 기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K 신문사라고 했죠? 명함이나 한 장 주시죠.”
정 기자가 머뭇거리며 명함을 내밀자, 그가 명함을 쓱 한 번 훑어본 후에 한 손으로 구겨서 그대로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만큼이나 무례한 태도였다.
“조만간 정식으로 기자 회견을 할 생각입니다. 그때 뵙죠.”
남자 특유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태도에 기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모두 길 좀 비켜 주세요.”
그의 말 한마디에 웅성대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길을 열었다. 마치 보란 듯이 한쪽 팔로 지안의 어깨를 감싼 그는 수많은 인파를 가르며 공항 출구로 향했다.
잠시 후, 지안은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가 못마땅한지 짧은 욕설을 잇새로 내뱉었다.
“……미친 것들.”
놀라서 남자를 올려다보니, 재원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정신 나갔어요? 숨어 지내도 모자랄 판에, 공항을 활보하고 다니다니.”
힐난하는 말투에 저절로 뺨이 달아올랐다.
택시 정류장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검은색 벤틀리가 미끄러지듯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고개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그러자 재원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지안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뒤를 보고 그런 소리를 하던가.”
뒤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삼삼오오 모인 채 웅성대고 있었다. 동영상으로 찍는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도 여럿 보였다.
“내일 조간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나겠어. 혹시 이런 상황도 직접 꾸민 거 아니에요?”
조롱 섞인 말투였지만, 그래도 평소 매너가 몸에 뱄는지, 그는 뒷문을 열어 둔 채 그녀가 차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택시 타는 건 포기해야 했다. 지안이 뒷좌석에 오르기가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차는 출발했지만,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를 뿐 곁에 앉은 재원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운전기사 역시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긴 출장으로 피곤하실 텐데, 집으로 모실까요?”
출장이라니, 그는 예상했던 것처럼 언니의 부탁으로 지안을 마중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 역시 지안을 지유로 착각하고 도와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실이 어떠하든 그는 지안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지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서는 애정은커녕 최소한의 호의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대상이 윤지유이든, 아니면 서지안이든.
“일단 출발해.”
아까의 소란으로 피곤했는지, 재원은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한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어딘가 불편한지, 셔츠 맨 위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고쳐 맸다.
도로는 한산했고 고급 세단은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 때문일까.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느긋하게 이어지는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자극했다. 잘 손질된 옷감에서 나는 서걱대는 소리와 코끝을 간질이는 남자다운 스킨 향. 오르내리는 희미한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지안은 재원에게 감사 인사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의 도움으로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
무표정한 얼굴로 차창을 응시하던 재원이 고개를 돌렸다.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지안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문득 이런 제 모습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한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처럼 살아온 지안은 또래 아이들보다 철이 빨리 든 편이었다. 국제 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안 극한 상황에 처한 적도 여러 번이었고 심리 상담가로 일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웬만한 일로는 기죽거나 놀라는 법이 없었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지안을 두고 주변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라고 놀리지만, 사실 내색하지 않을 뿐, 그녀는 예민한 성격에 직감이 유달리 발달한 편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빠르게 포착하고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 역시 훈련보다는, 본능적인 직감을 통해 익숙해진 것이었다.
재원의 공격적인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자제심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의 눈동자 속에서 감추어진 혐오와 적의가 언니를 향한 것이라면, 그 까닭을 알고 싶었다. 관찰하는 듯한 그녀의 차분한 시선에 재원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외네요. 내가 아는 윤지유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모르는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