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
“하긴, 우리가 그런 말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제대로 말 섞어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분명 그와 관련된 추문이라고 들었는데 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지안 역시 전후 사정을 모르니, 대화를 이어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그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차는 도심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이라고 표시된 초록색 이정표가 나타났다. 쌀쌀한 바깥 날씨와 다르게 차 안은 쾌적한 온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우울한 기분 탓인지, 도심으로 가까워질수록 체감 온도가 낮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한국행을 결정하는 바람에 초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을 입은 탓도 있지만, 입은 옷과 상관없이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고국 땅에 대한 마음의 온도인 듯싶기도 하다.
멍하니 차장 밖을 응시하고 있을 때, 재원은 침묵을 깨고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형준아. 차 히터 좀 올려.”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운전기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준이 서둘러 차 히터를 돌리며 물었다.
“추우세요?”
형준의 질문에 대답하듯, 재원은 지안이 입은 얇은 점퍼를 힐금 보았다.
조금 전 그 말은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일까. 적개심을 보이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을 도운 것이나,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려 준 것도 이상하긴 하다. 여러 사람을 상대해 온 지안이지만, 눈빛과 말과 행동이 제각기 다른 그의 속내를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었다.
시트에 기대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윤지유 씨.”
지안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윤지유가 아니니까. 대답이 없으니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그리고 느긋한 동작으로 운전석과 뒷좌석을 분리하는 블라인드 버튼을 눌렀다. 밀폐된 공간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탁 막혀 왔다. 그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차 안에 설치된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술 한잔 할래요?”
차 안에서 술이라니, 게다가 환한 대낮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이런 식으로 술을 권유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지안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괜찮습니다.”
“이상하네. 볼 때마다 취해 있던데, 내가 술 상대로 별로인가.”
비아냥거리는 그를 점점 더 상대하기 버거웠다. 대답 없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가 못마땅한지, 그가 술잔에 따른 위스키를 훌쩍 비웠다. 한동안 빈 술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지안에게 옮겨 갔다.
꽤 오래 입었던 거 같은 낡은 사파리 점퍼에 빛바랜 청바지, 화장기 없이 자연스러운 윤기가 도는 피부와 숱이 많아 보이는 긴 속눈썹. 선이 고운 콧대에서 배회하던 시선이 가는 목선으로 넘어갔다.
지안은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잠시 후,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가 불쑥 물었다.
“윤지유 씨.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느닷없는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지안이 대답이 없으니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면 된 거 아닌가. 배우로서 성공했고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만큼 벌어 놓은 거 같고. 게다가 남자도 아쉬울 리 없을 테고.”
“…….”
“그러니까 괜한 욕심 부리지 말아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승원 못 가져요.”
지유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진 않다. 늘 술에 취해 있다는 지유, 연기보다 그녀의 외모나 몸매 등의 가십 기사가 더 많다는 지유, 바닥부터 시작해서 유명 여배우가 된 지유. 전부 자신이 모르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지안이 기억하는 지유는 유난히 웃음이 많던 소녀였다. 텅 빈 방 안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으면 등을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속삭여 주던 다정한 언니이기도 했다.
온갖 복잡한 생각이 엉켜 왔지만, 단 하나 분명한 건, 지유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지안은 언니를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지유는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없으니까.
“그거 알아요? 다들 재벌 운운하지만, 나와 강승원은 태생부터 다르다는 거. 그 자식은 뼛속까지 재벌이지만, 나는 시궁창을 구르던 양아치 출신이거든. 당신과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래서인지 상대를 보면 딱 견적이 나와.”
“…….”
“내가 겪어 본 온갖 처치 곤란한 쓰레기 중에서도…….”
“…….”
“윤지유, 당신이 단연코 탑이었어.”
불시에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처럼 뒷골이 얼얼했다.
“욕심도 정도껏 하지, 그러다 진짜 다쳐요.”
도대체 언니 주변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끔 언니에 관한 소식을 인터넷 기사로 접하긴 했지만, 기사 대부분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십성 기사뿐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인격과 외모를 비하하는 억측성 글을 볼 때마다 절로 화가 나서 어느 순간부터 보는 걸 피하게 되었다.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낯선 남자에게 언니의 소식을 물을 수도 없고.
지안의 굳어진 표정을 의식한 듯,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일 수습할 때까지 딱 한 달 시간 줄 테니까, 그동안 강승원 깨끗이 정리해요. 나 역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은 없어요. 이후로 당신 안전은 누구도 책임 못 져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갑고 공격적이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지유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몇 달 전, 언니는 전화 통화 중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혹시 강승원이라는 남자와 지유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주변 반대에 부딪혀서 억지도 떨어져 지내는 상황은 아닐까. 한국에 와 달라는 지유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초조하게 들리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흠칫 놀란 지안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아니,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지나친 욕심인가요?”
짧은 침묵이 흐르고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차 안을 쩡쩡 울리던 남자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뒤이어 나지막한 속삭임이 지안의 귓가를 간질였다.
“윤지유 씨.”
“…….”
“그 사랑이라는 거, 나하고도 한번 해 볼래요? 강승원보다 내가 훨씬 잘할 자신이 있는데.”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대화에 지안은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지안의 물음에 남자가 자신의 오른쪽 손을 둥글게 모아 쥔 상태에서 왼쪽 손바닥을 탁탁 쳤다.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있잖아. 당신이 끝내주게 잘하는 거.”
탁탁. 손바닥으로 주먹을 치는 행위가 성행위를 연상시켰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지안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성적 모욕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려 왔다. 사실 그가 보는 대상은 서지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안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고 제 일처럼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전후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단순한 스폰 제안이니까.”
쓰레기라고 비난하면서 스폰을 제안한다? 아무리 스폰 관계라도 상대에 대한 약간의 호감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게다가 싫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면서 스폰을 제안하다니, 그 나름대로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유재원 씨.”
지안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그가 했던 질문을 돌려주자, 건조해 보이던 표정에서 흥미가 묻어났다.
“알면 놀랄 텐데?”
놀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오늘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남자와 이런 대화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당황스럽긴 하다.
“쓰레기라는 비난에 이어 스폰 제안까지 받았는데, 이보다 더 놀랄 게 있나요?”
그는 내려놓은 위스키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긋한 동작으로 술을 마신 후에 유리잔을 부술 듯 손아귀에 거머쥐었다.
“강승원이라는 낡은 성은 이제 곧 무너질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는 거고.”
하얀 연골이 드러날 정도로 거칠게 유리잔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보고 있으니, 까닭도 없이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현재 분위기와 그가 했던 말을 미루어 짐작건대, 유재원과 강승원이 대립 구조인 건 분명해 보였다. 두 사람의 문제에 상관할 바 아니지만, 언니가 끼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죠?”
지안의 물음에 그가 피식하며 짧게 웃었다.
“맹탕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똑똑하네.”
“…….”
“근데 당신 역시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닌가? 엉뚱한 스캔들 기사가 났는데. 반박하지도 않고 내내 잠자코 있었잖아.”
지안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요. 내가 당신을 이용하듯이 당신도 나를 이용하면서 서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면 그뿐이니까.”
말속에서 그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지만, 그는 강승원을 표적으로 삼았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언니를 이용할 생각인 모양이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그가 느린 시선으로 지안의 전신을 훑었다.
“이왕이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당신이 가진 특기를 발휘해도 좋고.”
그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성적인 뉘앙스가 아까보다 더 참기 어려웠다.
“저는 택시 타고 갈 테니, 여기서 내려 주세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보다시피 택시 잡기 힘든 곳이에요.”
그가 보란 듯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심한 듯 권태로워 보이지만, 선이 깨끗한 남자의 옆모습만큼이나 바깥 풍경이 서늘해 보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달리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택시 잡기는 무리일 테지.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무례한 남자와 단 한 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까.
“상관없으니까, 내려 주세요.”
차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운전석과 차단된 블라인드를 올렸다.
“차 세워.”
“…….”
“하긴, 우리가 그런 말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제대로 말 섞어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분명 그와 관련된 추문이라고 들었는데 그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 지안 역시 전후 사정을 모르니, 대화를 이어 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는 그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차는 도심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울이라고 표시된 초록색 이정표가 나타났다. 쌀쌀한 바깥 날씨와 다르게 차 안은 쾌적한 온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우울한 기분 탓인지, 도심으로 가까워질수록 체감 온도가 낮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한국행을 결정하는 바람에 초겨울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을 입은 탓도 있지만, 입은 옷과 상관없이 반겨 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고국 땅에 대한 마음의 온도인 듯싶기도 하다.
멍하니 차장 밖을 응시하고 있을 때, 재원은 침묵을 깨고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
“……형준아. 차 히터 좀 올려.”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운전기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준이 서둘러 차 히터를 돌리며 물었다.
“추우세요?”
형준의 질문에 대답하듯, 재원은 지안이 입은 얇은 점퍼를 힐금 보았다.
조금 전 그 말은 자신을 배려해서 한 말일까. 적개심을 보이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을 도운 것이나,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려 준 것도 이상하긴 하다. 여러 사람을 상대해 온 지안이지만, 눈빛과 말과 행동이 제각기 다른 그의 속내를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었다.
시트에 기대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윤지유 씨.”
지안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윤지유가 아니니까. 대답이 없으니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그리고 느긋한 동작으로 운전석과 뒷좌석을 분리하는 블라인드 버튼을 눌렀다. 밀폐된 공간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에 숨이 탁 막혀 왔다. 그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차 안에 설치된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술 한잔 할래요?”
차 안에서 술이라니, 게다가 환한 대낮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이런 식으로 술을 권유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지안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괜찮습니다.”
“이상하네. 볼 때마다 취해 있던데, 내가 술 상대로 별로인가.”
비아냥거리는 그를 점점 더 상대하기 버거웠다. 대답 없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녀가 못마땅한지, 그가 술잔에 따른 위스키를 훌쩍 비웠다. 한동안 빈 술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지안에게 옮겨 갔다.
꽤 오래 입었던 거 같은 낡은 사파리 점퍼에 빛바랜 청바지, 화장기 없이 자연스러운 윤기가 도는 피부와 숱이 많아 보이는 긴 속눈썹. 선이 고운 콧대에서 배회하던 시선이 가는 목선으로 넘어갔다.
지안은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잠시 후,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가 불쑥 물었다.
“윤지유 씨.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느닷없는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지안이 대답이 없으니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면 된 거 아닌가. 배우로서 성공했고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만큼 벌어 놓은 거 같고. 게다가 남자도 아쉬울 리 없을 테고.”
“…….”
“그러니까 괜한 욕심 부리지 말아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승원 못 가져요.”
지유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진 않다. 늘 술에 취해 있다는 지유, 연기보다 그녀의 외모나 몸매 등의 가십 기사가 더 많다는 지유, 바닥부터 시작해서 유명 여배우가 된 지유. 전부 자신이 모르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지안이 기억하는 지유는 유난히 웃음이 많던 소녀였다. 텅 빈 방 안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으면 등을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속삭여 주던 다정한 언니이기도 했다.
온갖 복잡한 생각이 엉켜 왔지만, 단 하나 분명한 건, 지유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지안은 언니를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지유는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없으니까.
“그거 알아요? 다들 재벌 운운하지만, 나와 강승원은 태생부터 다르다는 거. 그 자식은 뼛속까지 재벌이지만, 나는 시궁창을 구르던 양아치 출신이거든. 당신과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그래서인지 상대를 보면 딱 견적이 나와.”
“…….”
“내가 겪어 본 온갖 처치 곤란한 쓰레기 중에서도…….”
“…….”
“윤지유, 당신이 단연코 탑이었어.”
불시에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처럼 뒷골이 얼얼했다.
“욕심도 정도껏 하지, 그러다 진짜 다쳐요.”
도대체 언니 주변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끔 언니에 관한 소식을 인터넷 기사로 접하긴 했지만, 기사 대부분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십성 기사뿐이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인격과 외모를 비하하는 억측성 글을 볼 때마다 절로 화가 나서 어느 순간부터 보는 걸 피하게 되었다.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낯선 남자에게 언니의 소식을 물을 수도 없고.
지안의 굳어진 표정을 의식한 듯, 그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일 수습할 때까지 딱 한 달 시간 줄 테니까, 그동안 강승원 깨끗이 정리해요. 나 역시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갔지만, 다음은 없어요. 이후로 당신 안전은 누구도 책임 못 져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차갑고 공격적이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지유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몇 달 전, 언니는 전화 통화 중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혹시 강승원이라는 남자와 지유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주변 반대에 부딪혀서 억지도 떨어져 지내는 상황은 아닐까. 한국에 와 달라는 지유의 목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초조하게 들리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지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니가…….”
흠칫 놀란 지안은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아니,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지나친 욕심인가요?”
짧은 침묵이 흐르고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차 안을 쩡쩡 울리던 남자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뒤이어 나지막한 속삭임이 지안의 귓가를 간질였다.
“윤지유 씨.”
“…….”
“그 사랑이라는 거, 나하고도 한번 해 볼래요? 강승원보다 내가 훨씬 잘할 자신이 있는데.”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대화에 지안은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죠?”
지안의 물음에 남자가 자신의 오른쪽 손을 둥글게 모아 쥔 상태에서 왼쪽 손바닥을 탁탁 쳤다.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있잖아. 당신이 끝내주게 잘하는 거.”
탁탁. 손바닥으로 주먹을 치는 행위가 성행위를 연상시켰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지안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성적 모욕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려 왔다. 사실 그가 보는 대상은 서지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안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고 제 일처럼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전후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단순한 스폰 제안이니까.”
쓰레기라고 비난하면서 스폰을 제안한다? 아무리 스폰 관계라도 상대에 대한 약간의 호감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의 무미건조한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게다가 싫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면서 스폰을 제안하다니, 그 나름대로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유재원 씨.”
지안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그가 했던 질문을 돌려주자, 건조해 보이던 표정에서 흥미가 묻어났다.
“알면 놀랄 텐데?”
놀리는 듯한 말투였지만,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오늘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남자와 이런 대화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당황스럽긴 하다.
“쓰레기라는 비난에 이어 스폰 제안까지 받았는데, 이보다 더 놀랄 게 있나요?”
그는 내려놓은 위스키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긋한 동작으로 술을 마신 후에 유리잔을 부술 듯 손아귀에 거머쥐었다.
“강승원이라는 낡은 성은 이제 곧 무너질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는 거고.”
하얀 연골이 드러날 정도로 거칠게 유리잔을 움켜잡은 그의 손을 보고 있으니, 까닭도 없이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현재 분위기와 그가 했던 말을 미루어 짐작건대, 유재원과 강승원이 대립 구조인 건 분명해 보였다. 두 사람의 문제에 상관할 바 아니지만, 언니가 끼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죠?”
지안의 물음에 그가 피식하며 짧게 웃었다.
“맹탕인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똑똑하네.”
“…….”
“근데 당신 역시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닌가? 엉뚱한 스캔들 기사가 났는데. 반박하지도 않고 내내 잠자코 있었잖아.”
지안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지금처럼만 해요. 내가 당신을 이용하듯이 당신도 나를 이용하면서 서로 원하는 목적을 이루면 그뿐이니까.”
말속에서 그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지만, 그는 강승원을 표적으로 삼았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언니를 이용할 생각인 모양이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그가 느린 시선으로 지안의 전신을 훑었다.
“이왕이면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당신이 가진 특기를 발휘해도 좋고.”
그의 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성적인 뉘앙스가 아까보다 더 참기 어려웠다.
“저는 택시 타고 갈 테니, 여기서 내려 주세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보다시피 택시 잡기 힘든 곳이에요.”
그가 보란 듯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심한 듯 권태로워 보이지만, 선이 깨끗한 남자의 옆모습만큼이나 바깥 풍경이 서늘해 보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달리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택시 잡기는 무리일 테지.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무례한 남자와 단 한 순간도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까.
“상관없으니까, 내려 주세요.”
차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운전석과 차단된 블라인드를 올렸다.
“차 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