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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설마, 혼내지 않으시겠지? 요강 가져다 놓으라고 부르신 거니까……. 호, 혹시 다른 뜻이 있으신 거면 어쩌지? 아닐 거야. 그러면 안 돼!’

어르신이 얼마나 심한 호색한인지 알기에 겁이 났다. 차라리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오아야, 조만간 칠아를 불러서 보여 주어야겠구나. 요즘 칠아의 뒤태를 보니 여인이 다 되었던데, 부지런히 가르쳐 놔야지.”

“주인님, 칠아가 아니라 육아를 부르셔야지요. 곧 육아가 혼인하지 않습니까. 흐으읏.”

“그래. 알았다. 너도 있고, 육아와 칠아도 있고. 참말로 기쁘구나.”

“주인님의 숨이 뜨겁습니다. 저 때문에 뜨거워지신 거죠?”

오아는 무엇이 불안한지 자꾸만 어르신의 마음을 확인받으려 들었다.

“알면서 뭘 또 확인하려 드느냐? 그 말을 하는데 왜 콧소리까지 내고? 네년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지 않으냐!”

“주인님도 소녀가 좋아하는 걸 아시잖아요. 소녀는 어르신과 함께 있기만 해도 좋지만요. 아무것도 안 해 주셔도 그냥 좋기만 합니다.”

“지금 너와 함께 있지 않으냐? 욕심 많은 것!”

오아는 그 말에 몸을 앞으로 돌려 어르신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다. 어르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크게 웃었다.

“아이구, 예쁜 것. 너는 어찌 예쁜 짓만 골라 하느냐? 기특하구나.”

“그럼 소녀를 빨리 첩실로 삼아 주셔요. 네?”

그녀와 대화하면서도 누군가를 찾듯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어르신이 두려워 칠아는 숨을 죽였다.

“칠아, 고것이 뭐든 잘 기억하니 기대가 아주 크다. 너와 육아, 칠아를 모두 데리고 놀면 얼마나 재미날지 생각만 해도 즐겁구나.”

칠아는 주인 어르신과 또 눈이 마주칠까 봐 겁이 났다. 별채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빠르게 뛰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소녀는요? 육아와 칠아를 취하시면 이제 소녀는 안 찾으시겠네요?”

오아가 어르신의 손에 제 뺨을 비벼 대며 콧소리를 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네 콧소리가 꿀 빠는 소리보다 다디달게 들리는데.”

“참말이시죠? 그럼 소녀를 빨리 데려가 주셔요. 매일매일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 죽겠습니다.”

어르신은 대답 대신 품에 안긴 오아의 등을 토닥였다. 오아의 정수리에 턱을 비비며 기분 좋게 웃었다. 겨우 숨을 고른 칠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두 사람의 은밀한 약속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어르신의 요구와 오아의 약속이 너무 적나라해서일까?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고 허벅다리 안쪽에 힘이 들어갔다.

칠아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은근하게 누르며 숨을 잔뜩 들이마셨다.

집안 하인들의 이름부터 초경과 몽정, 혼인과 초야까지 주인 어르신은 모든 것을 통제했다. 하인은 주인의 재산이었고, 주인은 재산에 대해 모르는 게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내가 노루랑 이미 배 맞춘 걸 알면 노루까지 죽이실지도 몰라.’

칠아는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 버리려 머리를 마구 흔들며 노루의 얼굴을 떠올렸다.

산막에서 그와 무얼 하며 즐겼는지를 생각하자 배꼽 아래 깊은 곳이 근질근질 야릇해졌다. 뜨겁고 부드러운 노루의 입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더워졌다. 빨리 산막에 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뿐. 별채에 어르신과 단둘이 남겨지는 걱정은 이미 사라졌다.

칠아는 노루에게 힘든 일을 종알종알 이야기하며 어리광부리는 게 좋았다. 그가 고생 많았다고 위로해 주며 어깨를 다독여줄 때마다 마음이 녹아내렸다. 고단한 하녀의 일상에서 그런 시간마저 누릴 수 없다면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겠지? 돈도 안 들고 따로 준비할 것도 없으니 그의 다독임보다 더 좋은 것은 알지 못했다.

노루는 원래 이 집안의 하인이 아니었다.

주인 어르신이 세력가들과 사냥을 갔을 때 토끼 한 마리조차 못 잡은 황족에게 자신이 잡은 노루를 슬쩍 주었단다. 황족의 체면을 살려 준 보답으로 사내아이를 받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노루였다.

귀족 중에서도 부유한 귀족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 이름만 대면 알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집집이 하인들만 수십에 집 지키는 무사만 삼십 넘게 부리는 집도 있었다. 그렇게 넘쳐 나는 사내들 틈에서도 노루는 유독 눈에 띄는 사내로 자랐다.

노루는 다른 사내들보다 키도 크고 손과 발도 컸다. 날렵해 보이면서도 몸이 아주 단단해 허름한 옷을 입어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반듯한데도 묘하게 고운 느낌을 주는 미남자라 여인들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을 붉혔다.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여인들의 보는 눈은 다 같은 모양이었다. 다들 한 번쯤은 노루를 마음에 품었고, 개중에는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인도 있었다.

칠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칠아는 노루가 얼마나 근사한 사내가 될지 남들보다 일찍 눈치챘다. 은근하고 꾸준하게 애를 써서 기어이 노루의 주인이 되었다.

오늘도 해가 지면 노루에게 다리를 주물러 달라 말하며 자신이 그의 진짜 주인임을 확인받을 생각이었다.

보고 싶다.

노루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뜨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를 생각하며 서둘러 별채에서 벗어나려는데 큰 문밖을 나가기도 전에 어깨가 붙들렸다.

주인 어르신의 하나뿐인 아들, 종리였다.

“도련님, 별채에는 어쩐 일이세요?”

“여기 있었구나. 한참을 찾았는데.”

“저를요?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채에는 왜 왔느냐? 혹여 아버님께서 너를 부르셨느냐?”

“예, 요강을 가져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칠아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요강을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설마, 어제처럼 또 뒤를 밟은 건가.

유명한 기루의 어린 기녀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던 종리가 요즘 부쩍 달라졌다. 자꾸만 칠아를 따라다니고, 틈만 나면 손을 잡고 더듬으려 했다.

별채에서 그와 마주친 게 영 찜찜했다. 불편한 마음에 칠아는 확인하듯 다시 말했다.

“도련님, 어서 나가세요. 주인님께서 도련님이 별채에 오신 걸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겁니다.”

어르신은 아들조차도 별채에 오지 못하게 했다. 그걸 알면서도 종리는 몰래 들어온 것이다.

“칠아야, 너 열이 나는 것 같구나? 목덜미가 빨간데……. 혹시 아버님이 오아와 있는 것을 본 것이냐?”

“예? 아, 아닙니다. 저도 방금 온걸요. 그럼 저 먼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와 낯뜨거운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아니, 눈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졌다. 칠아는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 탁 트인 곳으로 가고 싶었다.

“널 찾아다닌 내 성의를 생각해다오.”

“저를…… 찾았다고요?”

종리는 입꼬리를 바짝 당겨 미소 지으며 칠아의 뺨을 손끝으로 쓱 훑어 내렸다. 기분 나쁜 감촉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칠아는 노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종리의 손을 쳐 내고 싶었지만 하녀 주제에 그럴 수는 없기에 입술을 꾹 다물고 마음을 진정시킬 뿐이었다.

“빨래가 밀려서요. 어서 가 봐야 합니다.”

핑계를 대며 얼굴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도 도련님이 얼굴에 또 손을 댈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개 숙인 칠아는 입술이 말라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 순간, 종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가 작정한 게 아니냐?”

“무슨 말씀이신지…….”

“누구 앞에서 겁도 없이 입술을 핥는 것이냐? 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모르겠느냐?”

아니,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미천한 것이 어찌 도련님의 생각을 알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녀는 빨래하는 거 외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도련님, 마님께서 찾으시기 전에 전 이만……. 흡!”

불쑥 종리의 뜨거운 손이 칠아의 손을 감싸 쥐듯 잡았다. 종리는 칠아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벌리고는 제 손을 그곳에 맞추듯 깍지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힘을 주어 손을 겹치는 느낌이 징그러웠다.

칠아는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다.

“칠아야, 나랑 장난하자는 게냐?”

칠아는 고개를 젓는 척하며 몸을 홱 돌렸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 틈을 타 깍지를 풀고 손을 허리 뒤로 숨겼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종리를 바라보자 그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러지 마세요, 도련님.”

요즘 부쩍 이런 일이 잦았다. 칠아는 매번 하지 말라고 나름 용기 내어 거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손깍지를 꼈지만, 다음에는 어디에 닿으려고 할지 몰라 겁이 났다.

듣기로는 몇 시간이고 입 맞추는 걸 좋아한다지. 싫은 사내와 그러는 건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

“네가 하지 말라 하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냐? 응?”

종리의 얇은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칠아가 대답할 말을 생각하느라 멀뚱히 있자 종리가 뭉툭한 엄지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어찌 제 아비의 안 좋은 점만 이리 쏙 빼닮았을까?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었다.

종리는 일찍이 노름과 여색에 빠져 가문의 골칫거리였다.

하는 일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지만 부유한 귀족이라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사는 팔자 좋은 사내였다.

마음 같아서는 종리의 손가락을 확 물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칠아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 집안의 재산이었다.

종리가 무예를 단련한다며 재미 삼아 발로 차도 얌전히 맞아야 하는 하녀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