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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프러포즈


1화


1.
두 명의 다른 별



스르륵. 포크에 크림 스파게티가 미끄러지듯 감겼다. 후루룩. 말린 스파게티가 여자의 목구멍으로 쑥 넘어갔다. 여자는 나름대로 조신하게 씹으려고 노력했지만 쩝쩝거리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저는 원래 이런 스파게티보다는 포장마차 같은 데서 우동 한 그릇에 소주 한 잔 탁 걸치면서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하하하. 유신 씨께서 워낙 유명하신 데다 소주를 잘 못하신다는 얘기를 들어서 이리 모셨는데, 어째 입에 맞으세요?”
유신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하네요.”
“어이쿠,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기름 좀 묻히고 좋은데요, 뭐.”
여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왼쪽에 놓인 스테이크를 크게 한 조각 썰어 먹었다. 유신의 눈에 우윳빛 크림이 묻어 있는 여자의 입술이 들어왔다. 여자의 입술은 마치 가뭄이 든 논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어서 그 위에 살짝 덧발라진 크림은 가뭄 위에 덧없이 뿌려진 거름처럼 보였다. 여자는 크림이 묻은 줄도 모르고 스테이크를 두 조각 연속 입으로 집어넣으며 맛있게 씹었다. 유신의 귓가에는 그 소리가 마치 날라리 여고생이 질겅질겅 껌을 씹어 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리 뵈니 정말 영광이에요.”
여자는 스테이크를 채 삼키지도 않은 채 유신에게 와인 잔을 내밀며 말했다. 유신은 마치 맥주 잔 잡듯이 와인 잔을 잡는 여자를 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그 미소에 덩달아 눈웃음을 짓더니 짠, 하고 잔을 부딪친 뒤 벌컥벌컥 마셨다. 반대로 유신은 목을 축일 정도로만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유신 씨가 대본을 좋게 보셨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날은 아주 로또 맞은 분위기였다니까요.”
“네. 근데 제가 미리 말씀드렸듯이 스케줄상 아직 정확히는…….”
“근데 이번 영화 놓치면 유신 씨 백 억짜리 로또를 눈앞에서 날리는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지금 벌써 투자건만 해도…….”
여자는 와인 두어 잔에 취기가 돌았는지 제 멋에 취해 말을 늘어놓았다. 유신의 난감한 표정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스파게티를 포크가 파묻힐 정도로 크게 말아서 한 입에 삼켰다.
여자가 제 멋에 취해 자기 얘기만 하듯, 유신도 여자의 얘기는 듣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여자가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소리는 유신의 예민한 귀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후루룩 쩝쩝 다음엔 질겅질겅. 질겅질겅 다음엔 후루룩 쩝쩝. 다음은 꿀꺽꿀꺽. 일정한 소리들이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그렇게 여자만 먹고 떠들기를 한참, 유신은 점잖게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아직 마흔이 안 된 꽤 젊은 나이였지만 충무로에서 각광받고 있는 감독이었다. 대본이 워낙 마음에 들어 자리를 마련하긴 했지만 유신은 그만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여자의 말이 멈추기를 가만히 기다렸다가, 여자가 목이 타는지 마지막 남은 와인을 원샷 했을 때 조심스럽게 타이밍을 잡아 말했다.
“다 드셨으면.”
여자의 앞에 놓인 접시는 설거지라도 한 것처럼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그만 일어날까요?”

유신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매니저 도형을 향해 말했다.
“안 해.”
“예?”
도형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안 한다고.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아니, 거의 하실 것처럼 하시고서는 그럼 오늘 자리는 왜…….”
유신은 도형이 더 말하지 못하도록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았다. 유신의 귓가에 여자가 질겅질겅 스테이크 씹던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유신은 머리를 털고 창문을 내다보며 말했다.
“말이 너무 많아. 수다쟁이 아줌마 스타일, 딱 싫어. 피곤하고 지친다고. 카리스마 있고 조용한 감독 중에 없어? 봉준 감독 같은.”
유신은 차마 여자의 스파게티 삼키는 소리와 스테이크 씹는 소리, 와인 마시는 소리가 심히 짜증스러웠기 때문이라곤 말하지 못했다.
“그럼 아예 봉준 감독님 걸로 하시죠? 요즘 준비 중이신 것 같은데.”
“그래?”
유신이 솔깃하여 도형을 보았다.
“네. 이제 막 시작하셔서 그런지 아직 연락은 없는데…… 조만간 들어오지 않을까요?”
“조용히 알아봐.”
“네. 아 참.”
도형이 운전대를 잡다 말고 룸미러를 통해 유신을 쳐다보며 주저하는 듯이 말했다.
“오늘, 귀국이라는데요.”
“누가?”
“……강주원이요.”
유신의 눈동자가 바싹 굳었다.
“뭐?”

* * *

“일이니 하긴 한다만, 진짜 맘에 안 들어. 정치인도 레벨이 있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사람도 유명 정치인이라고 경호를 하라니. 이건 정치인 경호가 아니라 그냥 사경호야, 사경호. 돈만 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개인 경호.”
―거 이왕 하기로 한 거 작작 좀 투덜대고 잘 모셔 와라. 우리가 언제 의뢰인 가려 가면서 경호했냐?
“그야 그렇지만. 너무 극성맞으니 그렇지. 누가 자기 신변을 위협한다고 공항까지 와서 보호를 해 달래? 우리가 그렇게 한가로워 보이나?”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한가해 보이냐? 나도 지금 임무 수행하러 가야 되니까 빨리 끊어.
전화가 끊겼다. 상우는 냉정했다.
“인간 배려심 하고는. 그나저나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화는 뚫어져라 출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의뢰인은 일부러 비행기 도착 15분 전으로 약속 시간을 잡은 듯했다. 혹시나 경호원이 약속 시간에 늦어 자신이 예기치 못한 위험에 처하면 안 되므로 가끔 있는 일이었다.
“와아아!”
그때였다. 공항을 꽉 메우고 있던 여성 팬들 사이에서 우렁찬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 있는 이들을 보며 이화는 오늘 필시 유명 연예인 하나가 귀국하겠구나, 눈치를 챘고 그들이 들고 있는 플랜카드에 공통적으로 쓰여 있는 글귀가 ‘강주원’이라는 것을 보고 그 유명 연예인이 강주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필 강주원이랑 붙을 게 뭐람. 혹시 이 설레발 정치인도 오늘 강주원이랑 같이 귀국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공항이 마비돼서 자기가 소녀 팬들한테 떠밀려 온갖 체면을 구기며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가?’
그런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강주원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배우라고 하면 단연 지유신과 강주원이 사이좋게 1, 2위로 꼽혔다. 그것은 언제부턴가 정해진 공식같은 것이었고 결코 쉽게 깨지지 않았다.
이화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오빠! 주원 오빠!”
지유신과 강주원은, 5년 전 세상을 떠났던 이화의 하나뿐인 오빠 황시운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시운의 장례식장에서 잠깐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기 때문에 이화는 두 배우 모두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나쁜 감정도 없었다. 두 사람을 보면 그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다 떠나 버린 오빠가 생각나 마음이 착잡해지면서도, 그래도 오빠를 곁에서 지켜봐 준 친구들이었다는 사실에 고마워지기도 했다.
5년 전 장례식장 이후로 주원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이화는 강주원에게 넋이 빼앗긴 바람에 자신의 의뢰인이 도착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전화가 울리고 저 멀리서 땅딸만 한 중년의 의뢰인이 두리번거리는 것을 발견했을 때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15분 전에 미리 와 있으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제야 오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미리 와 있긴 했는데, 미처 찾지를 못했습니다.”
“흐흠.”
“인사드리겠습니다. SP 경호 황이화입니다. 댁까지 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화의 바로 옆에서는 강주원이 매니저와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원과 이화의 거리는 채 열 보도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이화는 의뢰인을 경호하면서 슬쩍 주원을 쳐다보았다. 주원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키가 큰 덕에 혼자만 우뚝 솟아 있어서 찾기가 쉬웠다.
그때 팬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던 주원과 이화의 눈이 마주쳤다. 이화는 갑작스러운 아이컨택에 놀라 시선을 피해 버렸다.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던 주원의 시선도 이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화는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애써 시선을 돌린 곳에서 웬 떡대 좋은 여고생 하나가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만 한 물풍선을 주원에게 던지려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안티팬 아니면 사생팬인 것 같았다. 요새는 사생팬들이 좋아하는 스타에게 자신의 얼굴을 각인시키기 위해 폭행을 비롯한 온갖 잔인한 행위들을 일삼는 것이 화제가 되고 있던 터라 이화는 그녀도 주원의 사생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실로 강주원에게 안티팬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불행히도 강주원의 경호원들과 매니저는 뒤쪽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는 수 없었다. 이화는 평소에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불의를 보고도 잘 참는 인간형이었지만, 같은 경호원으로서 이를 보고도 못 본 척해 버린다면 양심에 찔릴 것 같았다.
강주원과 이화의 거리는 단 열 보. 지금부터 마구 뛰어가면 막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이화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원을 향해 내달렸다.
“안 돼!”
그와 동시에 물풍선이 여고생의 손아귀에서 떨어졌다. 이화의 목소리를 들은 주원이 이화를 쳐다보았다. 이화는 입 모양으로 피해! 라고 외치며 주원을 있는 힘껏 밀쳤다. 그 바람에 주원은 물론 주원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옆으로 밀려갔고, 이화는 그 자리에 서서 장렬히 물풍선을 맞았다.
퍼억!
물풍선이 이화의 뒷목에 정확히 맞아 터졌다.
‘앗, 차가!’
그 순간 드는 생각은 오로지 그거 하나였다. 이화는 이제 끝났거니 싶어 물풍선이 날아온 곳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런데 방심은 경호원에게 있어 독약과도 같다 했던가. 이화는 여고생의 가방에 물풍선이 하나 더 쟁여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넌 뭐야!”
퍼억!
여고생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이화에게 잔뜩 뿔이 난 듯 성난 얼굴로 두 번째 물풍선을 내던졌다. 곧이어 여고생의 팔에서 무려 세 번이나 회전을 했던 물풍선은 이화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다. 곳곳에서 플래시가 마구 터져 나왔다. 주원의 팬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도 들렸다.
그 와중에 이화는 지금 막 바다에 뛰어든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을 느끼며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여고생은 이화가 당황하는 사이 주원을 한 번 보고는 오빠 사랑해요! 라고 외치고 재빨리 사람들 틈으로 도망쳐 버렸다. 사생팬이 틀림없었다.
여고생이 도망가고 이화는 간신히 어푸어푸 호흡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바로 옆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화는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물풍선의 잔해들이 아직 얼굴 위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기요.”
“괘, 괜찮습니다. 조심하세요.”
이화는 뒤늦게 주원을 구하느라 내팽개쳐 둔 자신의 의뢰인에게 가려고 했는데, 주원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래도 은혜를 입었는데 이름이라도…….”
톱스타 강주원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라니. 앞으로 다시는 없을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이화는 아직 얼굴에 붙은 풍선 찌꺼기들을 떼어 내느라 바빴다. 이런 꼴로 마주하느니 차라리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괜찮아요.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그때 저 멀리서 이화의 의뢰인이 소리쳤다.
“황이화 씨! 대체 거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안 와요?”
망할, 이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거 SP 경호래서 믿고 맡겼더니 이게 뭐 하는 거야? 자기 의뢰인은 팽개쳐 두고 어딜 가서 저런 물 폭탄이나 맞고 오는 거야? 하여간에 요즘 경호 회사들은 당최 믿을 만한 데가 없어서 말이지. 쯧쯧.”
의뢰인은 그녀의 이름은 물론 회사까지 요란스럽게 떠벌려 주었다.
“SP 경호, 황이화…….”
주원이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황이화 씨.”

* * *

<강주원 귀국하다 봉변당할 뻔해>
<포토―강주원 대신 물폭탄 맞은 여경호원, 앗 차가!>
<몸 날려 강주원 구한 원더우먼 누구?>
그날 일의 파장은 컸다. 이화는 생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라는 자리에 올랐고 ‘물폭탄녀’, ‘원더우먼’ 등 가지각색의 별명도 얻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화는 신문 1면에 물풍선을 맞고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보기도 했고 각종 패러디나 웃긴 영상에 그 사진이 소스로 이용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자기 의뢰인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다른 연예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는 사실이 SP 회사 내에서 문제가 될 뻔했지만, 곧 그녀로 인해 SP 회사가 알려지고 좋은 평을 받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수그러들었다.
그런데 이화에게 닥친 허무맹랑한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이화는 또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을 겪게 되었다. 그것도 하필 지유신과 관련한 일이었다.
장동권의 결혼 전 마지막 팬미팅이 있던 날이었다. 1만 명이 넘는 대규모 팬미팅이라 SP 회사에 대거 요원을 투입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총 열 명 이상의 A급 경호원들이 투입되었고 그중에는 물론 이화도 있었다. 그런데 사전에 이미 유신이 게스트로 온다는 얘기가 퍼졌는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엄청난 수의 팬들이 막 도착한 그의 밴을 둘러싸고 길을 막아 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에 급히 SP 경호원 중 소수를 빼서 유신을 경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공연장 출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이화가 몇 명의 다른 요원들과 함께 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가히 월드컵 응원 열기와 맞먹는 엄청난 열기와 환호성이 이화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화와 경호원들은 밴의 양옆과 뒤에 붙어 서서 팬들을 통제하며 길을 이끌고 있었는데 점차 몇몇 팬들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차 안으로 비치는 유신의 얼굴을 잠깐 보려고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하필 이화가 유신이 타고 있는 뒷좌석의 창문 바로 옆에 서서 그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찌는 듯한 더위에 모두의 불쾌지수가 200퍼센트까지 올라가 있던 그 순간,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말았다. 앞 쪽에 있던 팬 하나가 들고 있던 부채를 이화를 향해 냅다 던진 것이다.
“안 보인다고, 비켜!”
부채가 이화의 눈을 향해 빛의 속도로 날아왔다. 그러나 날아오는 부채에게 멍하니 자신의 소중한 눈두덩을 내어 줄 이화가 아니었다. 그녀는 부채가 팬의 손에서 떨어져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신경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고 재빨리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이화의 빠른 행동에 의해 반동을 얻은 부채가 다시 왔던 길로 휙 하고 튕기듯이 돌아갔다.
탁! 하는 경쾌한 마찰 소리가 이화의 귀를 때렸다. 부채가 원래 주인의 이마 정중앙에 꽂힌 소리였다. 그것도 하필 날개 면이 아닌 막대 부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희열의 미소가 떠오른 것도 잠시, 이화는 여자의 “아악!” 하는 비명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팬은 이마를 움켜쥐고 자리에 주저앉으며 헐리우드 급 오버 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순식간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이화에게 꽂혔다. 무슨 일이 벌어질 느낌에 미리부터 이화를 겨누고 있던 핸드폰 사진기, 디지털 카메라만 수십 개였다. 이건 명백한 폭행사건이라며 팬들이 흥분을 해서 상황은 더욱 통제 불능이었다. 고의도 아니었고 단지 실수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화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덜컥.
문제의 뒷좌석 문이 열렸다. 먼저 윤기 나는 검은 구두와 기다랗게 쭉 뻗은 튼튼한 다리가 밖으로 나왔고 뒤이어 역삼각형의 완벽한 바디와 지금 막 빚어낸 듯한 조각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유신의 온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 광채는 실로 어마어마해서, 멍하니 보고 있던 이화는 눈앞에 저절로 레드카펫이 펼쳐지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마네킹 하나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멀대처럼 큰 키가 그의 위엄에 한 몫 하고 있었다. 키가 170cm나 되는, 여자치곤 매우 장신 축에 속하는 이화도 고개를 한껏 꺾어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괜찮아요?”
그 물음은, 혹시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기대를 했던 이화를 매정하게 지나쳐 할리우드 액션을 취하고 있던 팬에게 당도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팬에게 키를 맞춘 채 물었다. 이미 주위의 팬들은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다들 그저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처럼 넋이 나간 채로 유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었다.
“많이 안 다쳤어요?”
문제의 팬은 혼수상태 직전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집에 가서 멍 안 들게 조심해요.”
유신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팬의 몸 곳곳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만져 주고는 다시 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기 전에 잠시 이화를 쳐다보았다. 이화는 말로만 듣던 유신을 1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이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모호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주 잠시였다.
쨍그랑. 이화의 환상을 깨 버리는 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 모양을 보고서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오로지 이화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똑바로 해.”
이화는 너무나 기가 막혔지만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꾹 눌러 참고 팬미팅 경호를 마저 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침내 팬미팅 도중 유신이 게스트로 나왔을 때 팬서비스 차원에서 안아 주기 제비뽑기를 했다. 그런데 뽑힌 여성 팬이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올라오더니 사회자의 멘트가 있기도 전에 달려들듯이 유신에게 덥석 안겼다. 이화는 보았다. 유신이 주춤 하고 한 발 밀리는 것을.
홀이 떠나갈듯 괴성들이 난무하던 순간, 여성 팬은 과감히 모험을 시도했다. 유신의 입술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 것이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 듯 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은 과연 장동권의 팬인지 장동권의 팬을 가장한 유신의 팬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문제의 팬은 쏜살같이 도망쳤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지옥의 손길을 맛보아야 했다. 장동권의 표정이 더 이상 일그러지지 않게 유신은 적절한 시기에 마무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화 누님! 따라가셔야죠. 많이 충격 받은 것 같은데 졸도라도 하면 어떡해요.”
옆에 있던 후배 진기가 장난스레 킬킬대며 이화의 신경을 긁었다.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리고 왜 내가 가?”
“아까 경호하셨잖아요.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이화는 기가 찼지만 원칙상 한 번 경호한 사람은 완벽히 경호해 내야 했다.
“나만 갔냐? 다른 요원들도 많았는데 왜 나한테…….”
“다들 지금 바쁘잖아요. 얼른요! 우리 단체 기합 받아요.”
하필 출구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도 이화였다. 이화는 하는 수 없이 유신을 따라 나갔다. 일단 천만 분의 일 확률이라도 혹시 잠복해 있을지 모르는 사생팬을 대비해 유신을 대기실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고, 팬미팅이 끝나면 밴에 타는 것까지만 경호하면 임무는 끝이었다.
유신은 복도를 지나 성큼성큼 대기실로 걸어갔다. 어딘가 기분이 안 좋은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는 듯했다. 이화도 그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유신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른 게스트들은 모두 귀가를 했는지 아무도 없었고 대기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이화는 간단한 인사만 전하고 대기실 밖에 나가 있으려고 입을 열 타이밍을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유신이 휴지 하나를 뜯더니 거칠게 퉤, 하고 침을 뱉는 것이었다.
“더럽게.”
그는 한 번으론 부족했는지 한두 번 더 침을 뱉더니 이내 휴지를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그리고 정장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짜증스럽게 닦았다. 이화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 전 팬의 기습 키스 때문인 것 같았다. 당시에는 마냥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며 모든 여성 팬들의 마음을 녹이더니 돌아서자마자 침을 뱉다니. 이화의 입은 이미 턱이 나갈 정도로 떡 벌어진 지 오래였다.
“아, 냄새 나.”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유신은 자신의 재킷 냄새를 킁킁 맡더니 훌렁 벗었다. 그리고 뒤를 향해 척 내밀었다. 유신의 재킷이 이화의 품으로 불쑥 다가왔다.
“드라이클리닝 해 와. 깨끗하게.”
“…….”
“뭐해? 안 받고.”
유신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대로 정적. 두 사람의 시선이 두 번째로 마주쳤다. 이화는 멈춰 있던 유신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당혹스러움을 캐치했다는 것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유신은 자신의 뒤를 따라온 사람이 매니저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아까 그 아가씨네.”
유신이 급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화에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난 매니전 줄 알고.”
이화는 그의 살인 미소를 보며 코웃음을 날렸다.
“도와주러 온 것 같은데, 괜찮아요.”
유신이 이화의 코앞까지 다가와도 이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그의 실체를 보았다고 해도 이화 역시 여린 여자인지라 본능적으로 떨리긴 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유신이 이화의 볼륨 있는 가슴 아래와 정장 재킷 사이에 끼워져 있는 명찰을 아슬아슬하게 꺼내 보였다. 이화는 흠칫 놀라 미간을 좁히고 유신을 보았다.
“그만 가 봐도 된다구요.”
유신이 그녀의 명찰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얼핏 웃었다.
“SP 경호 황이화 씨.”
그는 이화의 이름 세 글자를 아주 또박또박 불렀다. 이화는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편이라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명찰을 읽어 줌으로써 조금이라도 허튼 소문을 퍼뜨렸다간 네 직장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한 것이었다.
용건을 마친 유신이 자리를 피하려는 듯 몸을 돌렸다. 차갑게 이화를 스쳐 가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이화가 말했다.
“더럽게.”
유신의 동작이 정지했다. 그가 반쯤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여자는 분명, 더럽게, 라는 말을 했다.
“뭐가 묻었네, 에이 씨.”
이화는 방금 전 유신이 만졌던 명찰을 툭툭 털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클리닝이나 해야지.”
유신은 기가 막혔다. 감히 일개 경호원에게 농락당하는 느낌이 들어 파르르 분노가 일었다. 유신이 다시 돌아보며 무언가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 이화가 재빨리 전화를 받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유신보다 앞질러 문을 열고 나가며 유신에게 꾸벅 목례를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가시는 길까지는 다른 경호원이 무사히 경호해 드릴 것입니다.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SP 경호! 언제든 연락 주십쇼.”
활짝 웃으며 후다닥 달려 나가는 이화를 보며 유신은 할 말을 잃었다. 유신은 분노에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살며시 풀었다. 그러곤 꽤나 풀어진 미소를 흘렸다. SP 경호 황이화. 겁을 주려고 불러 본 이름이었지만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이름이란 자고로 두 번 이상 부를 때 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