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2.
마왕의 저택
그로부터 약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단체 의뢰가 들어와서 하루 종일 행사장 근처를 지키며 고생을 한 터라, 이화는 일이 끝난 후 진기와 상우 등 동료들과 함께 고깃집에서 술을 마셨다. 한참 맛있게 먹고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을 무렵, 고깃집의 분위기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야, 야. 이화야.”
상우가 입을 떡 벌리고 이화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저것 좀 보라니까.”
“왜 뭔데?”
누가 떠들건 말건 상추 하나에 고기를 세 점씩 올려 가며 식사에만 열을 올리고 있던 이화는 마지못해 TV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깜짝 놀라 쌈을 싸다 말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아홉 시 뉴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그랬다. 5년 전 황시운의 자살 사건 이후로 이토록 대중의 관심을 끄는 사건은 처음이었다. 유신이 일주일간 사생팬과 동거를 했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그러나 유신은 정작 자신의 동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혼자 사는 집에 사생팬이 몰래 숨어들어 일주일을 기거했던 것이다.
“아직 열아홉 살도 되지 않은 김 모 양은 배우 유신의 집에 몰래 거주하면서 밤마다 그의 침실에 들어가서, 자는 유신의 사진을 찍고 속옷을 훔쳐 가고 침대 밑에서 고양이처럼 잠드는 등 상상 이상의 행동들로 유신의 팬들을 경악케 했습니다. 김 모 양은 유신의 집에 잠입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잠든 유신의 옆에 몰래 드러누웠고 세 시간 이상을 함께 취침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배우 유신의 집이 삼백 평이 넘는 대저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허술한 경호를 탓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앵커가 설명해 주는 사건은 굳이 팬이 아니어도 충격적일 만한 것이었다.
“팬들은 김 모 양을 고소할 것과 강력히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신은 이미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뜻을 표명하며 더 이상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무언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당분간 사회적으로도 끝없는 찬반 논란을 끌어낼 것으로 보이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유신의 소속사는 유신의 경호를 지극히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말도 안 돼…….”
모두가 이 같은 사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는 와중에, 이화만 혼자 아무 말이 없다가 뉴스가 끝나자 다시 원래대로 쌈을 싸먹는 데 열중했다. 그러더니 누구보다 태연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쌤통이다.”
“뭐? 너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상우가 기겁을 하고 물었다.
“저 자식은 한 번 당해 봐야 돼. 저게 얼마나 가식 덩어린데?”
“누님, 고깃집에서 통바베큐 되려고 작정했어요? 얼른 더 먹이고 차라리 재워 버려요.”
진기와 상우가 합심해서 술을 더 먹이려고 하자 이화가 몸부림을 쳤다.
가장 안티 없는 연예인 1위, 자랑스러운 국민 배우 1위, 평생을 병 수발만 들어도 결혼하고 싶은 연예인 1위 등 모든 설문 조사에서 1위를 휩쓰는 것은 물론 방송 사상 최초로 드라마 시상식 3사 방송사 대상을 모두 거머쥔 전설적인 인물 유신을,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의 떠오르는 핫스타 30위와 타임즈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 안에, 그것도 상위권에 들었던 유신을 대놓고 모함하는 저런 배짱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거 왜 이래! 진짜라니까! 저 자식 저거 순 가식! 읍!”
“먹고 죽어라, 그냥.”
“너네 진짜 가만 안 둬, 내가!”
이화는 진기와 상우에게 붙잡힌 채 억울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고깃집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술 취한 진상녀 보듯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화는 그때 처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지유신에 대한 분노에 이를 갈았다.
다음 날이었다. 지난밤 새벽 내내 술을 먹어서 그런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이화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끓어오르는 배를 붙잡고 이불에 몸을 의지한 채 끝없이 비비적거렸다. 계속해서 시끄럽게 울려 대는 전화기 소리가 알람 소리가 아닌 벨소리라는 것은 한참 뒤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긴 생머리가 얼굴을 몽땅 덮고 있어서 얼핏 봐서는 귀신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힘들 정도였다. 하룻밤 사이 지나치게 푸석해진 피부와 움푹 파인 눈두덩, 턱 끝까지 내려온 눈 그림자가 그녀를 괴롭게 했다.
“여보세요.”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이화는 충격적인 소식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화는 전화를 끊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미친 듯이 택시를 타고 회사로 달려갔다. 자다 깨니 웬 벼락같은 소식이 그녀를 때리듯이 덮쳐 왔다. 이건 도대체 기뻐해야 할 일인지 절망해야 할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화는 헐떡거리며 달려와 벌컥 팀장실 문을 열었다.
“어, 왔어?”
팀장이 반가운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이화는 짧게 인사를 하고 재빨리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상당히 낯익은 역삼각형 몸매를 가진 누군가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가 팀장을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이화를 향해 섰다. 이화는 멍하니 굳어 버렸다.
정말이었다. 꿈이 아니고 진짜였다. 한 달 전 그녀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그 남자가 지금 의뢰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번 사건은 당분간 사회적으로도 끝없는 찬반 논란을 끌어낼 것으로 보이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유신의 소속사는 유신의 경호를 지극히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어젯밤 코웃음을 치며 보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 여기, 왜 하필 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비몽사몽 한 상태여서 실감이 안 났는데 막상 와서 지유신이라는 인물을 마주하고 보니 이것이 진정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면서 머리가 멍해져 왔다.
“또 보네요.”
또 보네요, 그 말인즉슨 그는 한 달 전에 보았던 이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날 이후 이화는 유신의 팬들 사이에서 공식 폭행녀가 되었고 유신은 영웅이 되어 유신의 팬 사랑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한낱 경호원인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졌다.
유신이 뚜벅뚜벅 걸어 그녀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화는 웬만한 남자들과 서도 키로는 쉽게 밀리지 않았는데 앞에 다가온 그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바람에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그녀를 내리깔아 보면서 얼핏 웃는 그 모습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수행 경호를 의뢰하러 왔습니다.”
유신이 황금같이 빛나는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
“지유신입니다.”
유신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유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 이화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악수를 한 뒤 버리다시피 툭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화는 헛웃음을 흘렸다.
“급히 뛰어오신 것 같은데 좀 앉으시죠.”
유신이 정중하게 자리를 권하자 이화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기는 분명 SP 회사인데 유신이 마치 제집인 양 주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화의 눈꼬리는 위쪽으로 올라간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표정이 굳어 있어서인지 매섭게 보였다. 하지만 큰 눈과 오뚝한 코, 불그스름한 빛에 예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가지런한 이와 반듯한 턱선 등을 보면 여지없이 청순하고 아리따운 여성이었다. 육감적인 몸매와 큰 키가 어찌나 완벽한지 웬만한 모델을 뺨치는 체형이라 겉모습만 보면 어떤 남자도 한눈에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유신이 그녀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당돌한 태도와 당시 상황 때문이었지만 경호원치고는 지나치게 튀는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신은 한동안 그녀를 잊고 지냈다. 일개 경호원에게 한 방 당했다는 충격은 그녀의 이름을 뇌리에 강하게 박아 놓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깃을 스치는 인연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살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런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토킹을 경험한 뒤에 유신은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좀 더 철저하고 안전한 경호를 위해서 당연히 한국 제일의 경호 업체인 SP 경호에 의뢰를 넣었는데, A급 경호원들의 이력서들을 모조리 받아 보니 그 안에 황이화라는 이름의 여경호원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사진과 이름을 보고 유신은 곧바로 그녀가 누군지 기억해 내었다. 왠지 두 번 이상 부르게 될 것만 같았던 그 이름을 다시 보니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차마 유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살면서 더럽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보았다. 말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화는 그를 더러운 사람 대하듯이 했었다.
이화의 그런 당돌한 태도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중죄는 아니었지만, 정신이 쏙 들도록 골려 주고 싶을 정도의 흥미는 되었다. 어차피 구해야 하는 경호원이라면 재미있는 상대를 고용해서 일상의 지루함을 잠시나마 날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전화로 대충 얘기를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조건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출퇴근이 아닌 24시간 기숙이고 기간은 우선 한 달입니다. 숙식 제공에 차는 따로 대 주실 필요 없습니다. 이력서를 보니 한국대 경호비서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더군요. 황이화 씨께서 해 주실 일은 신변 보호와 수행 경호이지만 간간이 매니저 같은 역할을 해 주셔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전반적인 조건에 동의하신다면, SP 경호의 브랜드와 황이화 씨의 실력을 감안하여 선후 천만 원씩 총 이천만 원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 나왔다. 이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한다는 직감이 뇌리를 관통한 것이다. 팀장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눈을 희번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화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유신은 표면상으로는 이화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SP 경호에게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런 최상의 조건이라면 저희는 언제나…….”
“황이화 씨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유신은 과감히 팀장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이화는 흠칫했다. 팀장의 말대로 조건은 최상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편이었다. 다만 유신이 그녀를 기숙까지 시키면서 얼마나 굴려 먹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화는 팀장 앞에서 굴러온 보석을 걷어찰 수는 없었다.
“저는…….”
이화는 유신의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엘리트들을 두고 자신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음침한 속셈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눈치 없는 이천만 원은 어서 잡아 달라며 이화의 손톱을 간질이고 있었다.
“저는…… 좋습니다.”
이화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결국 첫 번째 라운드는 백기를 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있던 주원은 예능 프로를 보며 깔깔 웃다 말고 갑자기 차분해졌다. 문제를 틀릴 때마다 물벼락을 맞는 개그맨들을 보면서 무언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안 돼!’
블록버스터 급 표정과 함께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이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곧 기억날 것처럼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빚을 지고 아직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 못했다.
‘SP 경호, 황이화…….’
주원은 문득 웃음이 났다. 그때의 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지간히 재미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원에게는 경호원이 네 명이나 있었고 매니저도 있었는데, 자기가 고용한 적도 없는 다른 사람의 경호원이 그에게 날아오는 물풍선을 대신 맞다니. 그것도 아주 강한 파워로 정확히 두 번이었다. 두 번째는 그녀의 얼굴에 명중했는데 그때는 보는 사람도 코피가 터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파 보였다. 주원은 돌연 궁금해졌다.
그렇게까지 몸을 날려 대신 맞아 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혹시 평소에 팬이었을까? 그래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주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나중에 주원이 이름을 물어봤을 때 명함이라도 주면서 자기를 알리려고 했을 텐데, 물풍선을 맞고는 얼굴도 보려 하지 않았다.
아무튼 재밌는 사람이었다. 주원은 얼핏 웃으며 그때를 생각하다가 곧 방에서 스케줄 표를 가지고 나와서 뒤져 보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요즘은 쉬고 있는 찰나여서 스케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흠…… 어쩌지.’
가장 가까운 스케줄이 일주일 뒤에 있는 화보 촬영이었다. 몇 주 뒤에 있는 영화제라면 모를까 이때 경호원을 데리고 가는 것은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았다. 주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케줄이 없다면 만들어 내면 그만이었다.
“어, 현수야. 지금 SP 경호 회사에 전화 좀 걸어서 황이화 씨한테 경호 의뢰할 수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응. 내일모레. 부탁해.”
직접 할 수도 있었지만 주원은 나름대로 톱스타의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전화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데 괜스레 긴장이 됐다. 잠시 후,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원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매니저가 하는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그게, 황이화 씨는 앞으로 한 달간 지유신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하게 됐다는데요?
“뭐……?”
* * *
며칠 뒤, 이화는 약속된 열 시까지 유신의 집에 가기 위해 서둘러서 짐을 싸고 나왔다.
이화는 열여덟 살 때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시운과 아버지와 함께 셋이서 살다가 스무 살 때 시운이 자살로 세상을 뜨고 난 뒤에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형사였기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지만 이화는 세상에 딱 하나 남은 딸이었기 때문에 마음만은 지극정성으로 쏟았다. 때문에 이화도 서울로 대학을 다니면서도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꿋꿋이 집에서 통학을 했다.
그런데 생전 처음 이화가 한 달 동안이나 집을 비워 가며 한 연예인의 개인 경호를 하게 되었다니 아버지는 기겁을 하며 혹시 그놈이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냐며 형사의 의심 본능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이내 그 상대가 지유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상당히 놀라서 이런 인연이 있냐며 오히려 잘해 보라고 토닥거렸다. 아버지 역시 유신이 시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식으로 본 것은 이화와 마찬가지로 장례식 때가 처음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도 몇 번 유신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시운의 기일에 납골당에서였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유신을 꽤 의리 있고 괜찮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찌됐건 이화가 한 달이나 나가 살아야 하는 것이 걱정이 된 아버지는 손수 짐을 싸는 것까지 도와주었는데 마치 1년간 세계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온갖 세세한 물건들을 다 싸 주는 바람에 한 달 동안 기숙하려고 챙긴 짐이 여행 가방 두 개가 넘었다. 이화는 짐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짐에 끌려가는 것만 같았다.
“황이화 씨.”
한 손에 캐리어 하나를 들고 다른 팔에 가방 하나를 걸쳐 메고 열심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걸어오듯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캐주얼한 차림의 낯선 남자 한 명이 차에서 내렸다.
“황이화 씨 맞으시죠? 형님께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형님? 누구…….”
이화는 말을 하다가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유신이 매니저에게 이화를 직접 데려오라고 한 모양이었다. 이런 땡볕에 고생하며 집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으니 기쁘긴 했지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런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미심쩍었다.
도형은 이화의 짐을 모두 트렁크에 실었다. 이화가 보기에 유신의 밴은 아니고 매니저의 차인 것 같았는데 그 내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잘나가는 톱스타는 매니저도 잘나가는구나 싶었다. 한 달 전에 공연장 대기실에서 유신의 실체를 목격했을 때 이화는 속으로 분명 매니저가 유신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 좀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할 만한 일이겠다 싶었다.
“저기…….”
차를 타고 가면서 이화가 슬쩍 말을 붙여 보았다. 도형은 덩치에 비해 키가 작았고 생긴 것에 비해 말투가 순했다. 나이는 이화와 비슷한 또래 같았지만 이화보다 두세 살쯤 많아 보였다.
“유신 씨요. 좀 어떤가요?”
“좀 어떻다뇨?”
“성격 같은 거 말이에요.”
갑작스레 유신의 성격을 묻자 도형은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이에 신뢰 없이 말하기는 힘든 주제였다.
“글쎄요. 그건 직접 겪어 보셔야지……. 사람 평가하는 게,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거니까요.”
이화는 도형의 입에서 바로 좋다, 자상하다 등의 칭찬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며 감을 잡았다. 아무리 사람에 따라 다르다지만 좋은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군요.”
이화는 잠시 눈을 감고 몸을 뒤로 젖혔다.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고 느낌도 매우 편안했다. 그런데 자꾸만 이 잠시의 휴식이, 저승으로 가는 강에서 뱃사공이 건네는 마지막 친절처럼 수상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