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유신의 저택은 괜히 ‘대저택’이 아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도저히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드넓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반듯하게 잘 깎인 잔디며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다듬어진 나무들, 한여름에 알맞게 피어난 꽃들이 그날따라 유난히 세게 내리쬐던 태양 때문인지 더없이 빛나 보였다.
왼쪽 한구석에는 바람 좋은 밤에 나와서 티 한 잔 하기 좋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오른쪽 위편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문부터 가옥까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커다랗고 예쁜 돌계단이었다.
만화에나 있는 줄 알았던 이런 집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그런 집에 자신이 발을 들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 힘들었다. 넋이 나간 채 저택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을 때 이화의 환상을 툭 깨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잖아! 몇 번을 하고도 똑바로 못해?”
정신을 놓고 보느라 이화는 미처 가든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난리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로 둘러싸인 기다란 테이블 위에는 ‘파티’ 같은 데에나 있을 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이 차려지고 있었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전문 요리사인 것 같았고 평범한 옷에 앞치마를 두른 중년의 아줌마 둘은 가정부인 듯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열심히 상을 차리고 있었는데 아주 분주하고 급박해 보였다. 평화로운 정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요리사 다섯 명 중 셰프로 보이는 요리사가 한 요리사에게 구박을 주고 있었다.
“마왕이 브로콜리 40도로 놓으면 안 먹는 거 몰라? 꼭 새우랑 간격을 이렇게 45도로 딱 맞춰서 놓으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
“죄송합니다.”
“얼른 가서 나머지 손봐.”
마왕? 이화는 그 자리에 굳어서 머리에 돌이라도 맞은 듯 멍청하게 서 있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들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마왕이라 칭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도 너무 빠르게 유추가 되어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음식과 브로콜리의 간격이 45도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이해 불가의 사람은 유신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요리사들과 가정부들 사이에서 마왕이라고 불릴 만큼 악독하고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대충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했지만 왠지 자신이 상상하고 또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새로 온 경호원 아가씨?”
이화가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을 무렵, 뒤에서 꽤나 자상하고 친근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홱 뒤를 돌아보니 이화보다 키가 반 뼘쯤 작은 한 아주머니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이는 50이 조금 덜 되어 보였다.
“아, 네. 저 뭐부터 해야 할지를 몰라서……. 유신 씨는 지금 집에 없나요?”
“아마 2층에 있을 거예요. 일단 짐부터 풀게 나 따라와요.”
가정부나 요리사는 아닌 것 같고. 유신이 엄마 같은 유모와 함께 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 그녀가 유모인 것 같았다. 이화는 유모를 보니 왠지 모르게 심적으로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짐을 끌고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저택 평수만 총 300평이라고 했으니 1층만 해도 150평이 넘는 것이었다. 이화는 자기 집의 다섯 배가 넘는 집을 보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냥 한 바퀴 돌기만 해도 다이어트를 위한 다른 운동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화이트를 써서 깔끔하고 심플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까 보니 가정부는 두 명인 것 같은데 이렇게 큰 집을 가정부 둘이서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유모는 레스트룸―가정부와 요리사들의 휴식 공간으로 쓰이는 듯했다―옆에 비어 있는 방을 이화에게 내주었다. 빈방이 이화네 집 안방과 거실을 합친 것보다 컸다. 나름대로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화장대도 있는 데다 옷장까지 갖춘 것이 쓸 맛 나는 방이었다.
이화는 대충 짐을 풀어놓고 밖으로 나왔다. 식사 준비가 한창인 걸 보니 유신이 곧 식사를 하러 내려올 것 같았다. 일단 유신을 직접 보고 무슨 일부터 할지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유모의 말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둘러보며 쉬고 있는데 한참 뒤에 이층에서 유신이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이화와 눈이 마주친 유신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이화는 뜨끔했다. 왠지 그의 미소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었다. 유신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 시간에 잘 오셨군요. 식사하시죠.”

이화는 유신과 마주 보고 단둘이 앉았다. 그토록 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으니 거리가 너무 멀었다. 대화를 하려거든 마이크가 필요할 것만 같은 길이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서 뷔페식처럼 원하는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어야 했다. 그에 비해 유신은 원하는 음식을 말하면 요리사가 직접 앞에 가져다주었다. 이화도 따라 해 보려다가 괜히 욕만 먹을 것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
“많이 드세요.”
유신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런데 많이 먹으라고 해 놓고 정작 자신은 미각이 여간 까탈진 게 아니었다. 스테이크 위에 곁들인 소스를 포크로 살짝 찍어 먹더니 이내 얼굴색을 싹 바꾸고 매정하게 왼쪽으로 치워 버렸다. 맛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화는 깜짝 놀라 자신에게도 있는 똑같은 스테이크를 잘라 먹어 보았다. 입에서 사르르 녹는 육질이며 부드럽고 매콤한 소스가 그녀에게는 천상의 맛처럼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유신은 그 이후로도 곁들인 채소를 한 입 먹어 보거나 샐러드의 옥수수 콘 하나를 찍어 먹어 봄으로써 맛을 평가했고 냉정하게 치워 버렸다. 그때마다 요리사들의 표정이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그의 앞에 남은 것은 열 접시가 넘는 음식 중 네 접시밖에 되지 않았다. 유신은 그것을 가지고 차분하고 조용히 식사를 해 나갔다.
이화는 기가 막혀서 유신더러 보란 듯이 앞에 놓인 열 접시를 거의 싹쓸이했다. 이화의 파괴적인 식성을 보며 유신은 속으로 지난번 한 여자 감독과의 레스토랑 식사 자리가 생각나 불쾌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이화는 고급스러운 생김새와는 다르게 품위나 격조와는 거리가 무척 먼 사람이라고 홀로 단정 지었다.

“집 구조랑 방, 물품들을 모두 외우세요.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모든 방문과 수납장, 틈새까지 모조리 살펴보는 일입니다. 오늘은 우선 집 구조와 물품부터 외우고 2층 패션룸에 있는 옷가지들과 액세서리를 빠짐없이 정리하고 체크하세요.”
이화는 뜨악했다. 역시 최고급 서비스는 점심 식사까지가 끝이었다. 오늘은 손님인 만큼 대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내일부터는 이화도 유신이 식사를 한 뒤 유모와 가정부들과 함께 밥을 먹어야 했다. 휴식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보다 더 못하면 못했지 좋아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화는 유신이 2층 피트니스룸에서 운동을 하는 동안 그가 시킨 일들을 해내야 했다. 온 집안을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며 샅샅이 살폈다. 방은 1층만 해도 유모의 방부터 이화의 방, 레스트룸에 빈 방이 하나 더 있었고 주방과 식당, 거실은 개방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각종 장식품들로 꾸며진 진열장이 군데군데 여러 개 있었고 유리로 된 기다란 수납장 안에는 온갖 수입산, 국내산 와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화는 와인 진열장을 살필 때 그 어느 때보다 군침이 돌았다. 그 외 욕실과 화장실, 창고 등은 굳이 체크하지 않아도 되었다. 약 한 시간가량을 돌아보며 꼼꼼히 살피고 익힌 뒤에야 2층에 올라갈 수 있었다. 2층은 오로지 유신만의 공간이라 그가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살았다는 유모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다고 했다.
2층은 의외로 더 간단했다. 가장 오른편에 유신의 침실이 있었고 중앙 위편에 피트니스룸, 비디오방, 서재가 쭉 이어져 있었다. 거실에는 소파와 티비, 테이블 등이 심플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가장 왼쪽 위편에 1층보다 두 배 정도는 큰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문제는 제일 왼쪽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패션룸이었다.
패션룸은 2층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입이 떡 벌어져서 침이 줄줄 흐를 것만 같았다. 이화는 재빨리 침을 닦고 패션룸을 구경했다. 정장은 정장별로, 운동복은 운동복별로, 일반 캐주얼들은 캐주얼대로 정리되어 있었는데 각 종류당 족히 백 벌은 되어 보였다. 액세서리와 신발도 종류별로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신발은 구두, 운동화, 단화까지 모두 이백 개가 넘어 보였고 액세서리는 4층짜리 수납장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책 하나를 들고 와서 수량을 체크하던 이화는 도대체 내가 왜 이토록 힘들게 경호원이 되어서 남의 옷장이나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울분과 회의가 치밀었지만 곧이어 유신의 선글라스 수납장을 보고는 순식간에 넋이 나갔다.
“우와.”
이화는 족히 오십 개는 넘어 보이는 선글라스 중 가장 비싼 메이커를 하나 들어 보았다. 당연히 모조품일 리는 없겠지만 진품이라면 오백만 원 상당의 선글라스였다. 그 생각을 하니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못 먹는 떡 만져나 볼까 하는 심정으로 거울 앞에서 조심스럽게 선글라스를 써 보았다.
이럴 수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유신의 사이즈에 맞게 나온 것인데도 자신의 얼굴에 딱 맞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것은 금세 잊어버릴 만큼 마음에 들었다. 이화는 신이 나서 거울 앞에서 빙빙 돌아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배에 찌릿 하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까 먹은 점심에서 무언가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먹었다 싶어 걱정이 되었는데 결국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온갖 기름진 음식들을 한꺼번에 쑤셔 넣는데 위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화는 선글라스를 벗는 것도 깜박하고 후다닥 패션룸을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
그러나 순간, 이화는 머리가 어질해서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뻔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화는 자신의 귀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 미안합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죄송합니다도 아니고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내던지고 이화는 문을 도로 확 닫아 버렸다. 분명히 화장실인 줄 알았던 그곳은 욕실이었다. 웬만한 방 두어 개를 합친 것 정도의 넓은 크기의 욕실에서, 유신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바디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그것도 허리춤에 수건 한 개만 달랑 걸치고서. 그것은 이화가 봤을 때도 충격적일 만큼 자극적이었다.
이화는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허둥지둥 도망쳤다. 어디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지금의 상황보다는 끊임없이 신호가 오는 배가 더 중요했다. 어서 싸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신이었다.
유신은 아까처럼 허리춤에 아슬아슬하게 수건 하나를 걸친 채로 이화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한 군데에만 꽂혀 있었다. 선글라스. 놀라서 달아나는 이화의 한쪽 귀에서 삐뚤어져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걸쳐져 있는 선글라스!
“이봐. 잠깐만.”
“…….”
“거기 서 보라니까.”
이화는 이미 선글라스의 존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집 안이 시커멓게 보이는 이유는 유신의 알몸을 본 것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라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유신이 자신을 구박하려고 쫓아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더욱 다급히 도망쳤다.
“야!”
유신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버럭 소리쳤다. 이화는 야! 소리에 발끈해서 자칫 홱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넘겼다. 돌아보면 앞뒤 가릴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돌려차기를 시전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악!”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이화가 계단을 도망치듯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딘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고 말았다. 거의 다 내려와서 이게 웬 봉변인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일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코가 깨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손쓸 수도 없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몸이 차가운 맨 바닥에 닿는 느낌은커녕 누군가의 낯선 손길이 허리를 덥석 잡아채는 오묘한 느낌이 이화의 몸을 감쌌다. 이화는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
두 사람 사이에는 아까처럼 정적이 흘렀다. 이화는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당황하기는 유신도 마찬가지였다. 유신은 이화가 넘어지기 바로 직전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이화는 저도 모르게 유신의 가슴과 어깨 사이에 손을 올렸다. 누가 봐도 블루스를 추다 만 것 같은 애매한 자세였다.
바로 그때. 유신의 허리춤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수건의 매듭이 툭 풀어졌다. 먼저 발견한 이화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수건을 잡았다. 아니, 수건을 잡은 게 아니라 수건이 있던 자리를 잡았다. 수건의 매듭이 있던 그의 허리와 엉덩이 사이. 치골이 있는 부분. 이화는 그 황금 같은 부위를 아주 꽉 잡아챈 것이었다.
손끝에서 단단하면서도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 다행히 수건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자세는 더욱 야릇해지고 말았다.
‘헉……!’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아그작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3.
영악한 고양이


이화는 다급하게 수건에서 손을 떼고 한 발 떨어졌다. 그 바람에 방심하고 있던 유신이 하마터면 알몸이 될 뻔했다. 그는 빠른 순발력으로 떨어지는 수건을 잡고는, 기분 나쁜 수치심에 신경질이 솟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수건의 매듭을 도로 지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대체, 지금, 뭘, 하는, 겁니까. 그 선글…….”
“윽. 잠깐만요! 나중에!”
그런데 이화는 유신의 말은 더 듣지도 않고 싹둑 잘라 먹더니 다급히 어디론가 돌진했다. 1층 화장실을 찾는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한 번에 못 찾고 여기저기를 열어 보다가 뒤늦게서야 들어갔다. 유신은 기가 막혀서 입이 얼었다.
그때 방에서 나온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유모가 반나체의 유신을 보더니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련님, 어찌…….”
“벼, 별일 아니니까 들어가 있어.”
유신은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유모는 끝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유모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화를 삭였다. 맘 같아서는 허공에 발차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20년이 넘게 같이 산 유모였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유신은 애써 차분히 한 발 한 발 내디뎌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빠른 속도로 옷을 챙겨 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선글라스를 쓰고 화장실로 들어간 이화가 걱정이 됐다. 바로 말하자면 이화가 아니라 선글라스가 걱정이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품위 있는 자세로 이화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2층에 올라가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진작 나와서 제 방으로 들어갔나 싶어 유신은 조심스레 이화의 방까지 가서 노크를 해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이화는 방에 없었다.
유신의 얼굴이 영락없이 구겨졌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큰일을 보고 있음을 뜻했다. 그 고귀한 선글라스를 쓰고 큰일을 보다니. 유신은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윽.”
그 시각 화장실 안에서 이화는 대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곧이어 경쾌한 시원함이 밀려들었다. 속 안에서 꾹꾹 굳어 가던 것들이 모두 방출되는 느낌이었다. 휴우……. 그러나 찰나의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이화는 뒤처리를 하려고 휴지를 찾았다. 일순간 휴지가 없으면 어쩌나 가슴이 덜컹 했지만 다행히도 있었다.
이화는 깔끔하게 뒤처리를 한 후 변기 물을 내리려다 말고 다시 멈칫했다. 뜬금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밀려든 것이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다가 몇 번 물이 안 내려가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있었다. 그 후로 집이 아니면 변기 물을 내릴 때 간혹 긴장을 하곤 했다.
이화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굳건한 마음으로 버튼을 꾸욱 눌렀다. 다행히도 물은 시원하게 내려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자 그제야 까만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화는 자신이 여태까지 선글라스를 끼고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히 벗어서 본다는 게 손이 미끄러져 그만 변기에 빠뜨리고 말았다.
“앗!”
이미 물이 다 갈아진 뒤였기에 깨끗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변기 물인지라 이화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나 밖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신이 들었을까 봐 겁이 났다. 이화는 꺼림칙한 듯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선글라스의 다리를 집어 들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세면대의 물을 틀어 세척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흐르는 물에 선글라스를 대충 씻어 낸 이화는 알 위에 남은 어설픈 지문들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런 뒤 선글라스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집어넣고 손을 씻었다.
달칵.
화장실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유신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던 이화는 매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한 발 주춤했다.
“여, 여기 계셨어요?”
유신이 TV를 끄고 이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말없이 이화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선글라스를 찾는 것이었다.
“왜 그러세요?”
유신은 이화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이화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선글라스가 이화의 주머니에 있는 것도 모르고 화장실 문을 쳐다보았다. 필시 저 안에 놓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귀한 것을 쓰고 들어가 큰일을 본 것도 모자라 화장실 안에 내팽개쳐 두고 오다니. 유신은 잠시 분노가 치밀었지만 꿋꿋이 참고 화장실로 향했다.
이화는 순간 뜨끔했다. 의식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머리통을 퍽 내리치는 기분이 들었다. 변기 물도, 휴지도, 모두 성공적이었지만 한 가지 예상치 못했던 것이 있었다. 냄새! 지금 막 나왔는데 아직 냄새가 다 빠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화는 앞뒤 가릴 새도 없이 후다닥 화장실 앞으로 가서 그를 막아섰다.
“자, 잠깐만요!”
“뭐죠.”
“윽. 저, 저 먼저 좀…….”
이화는 다시 화장실이 가고 싶은 척 연기를 하며 무작정 화장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깊이 숨을 들이쉬며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이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아기 주먹만 한 작은 창문을 열어 보기도 하고 손으로 훠이훠이 냄새를 치워 보기도 했다. 방향제를 뿌려 볼까 했지만 괜히 더 티가 날 것 같아서 포기했다.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는 겁니까!”
유신이 결국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2층 가시죠? 2층이 유신 씨 쓰는 방이라면서요.”
“지금 내가 볼일 보러 들어가려던 건 줄 알아요?”
“그럼, 아니에요?”
“당장 나와요.”
이화는 뭔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변기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왔는데요.”
이화의 당당한 태도에 유신은 기가 막혀서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어디 있어요?”
“뭐가요?”
“내 선글라스 말입니다. 황이화 씨가 마음대로 쓰고 화장실까지 가지고 들어갔던.”
“아! 그거 때문에 그러셨구나.”
이화는 자기 주머니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요.”
“아니, 그걸 왜!”
유신은 흥분한 나머지 말도 없이 이화의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빼 갔다. 찝찝한 듯 다리만 들고 살피던 그는 갑자기 얼굴이 밀가루처럼 창백해져서 말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지문들은 뭡니까.”
“아, 그건…….”
차마 변기에 빠뜨린 선글라스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는 과정에서 생긴 거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잠깐 세면대에 떨어져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느라고……. 잘 닦아서 제자리에 꽂아 놓을게요.”
유신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야 선글라스를 틱 건네며 말했다.
“당장 올라가서 정리하세요.”

이화는 밤늦게까지 패션룸 안의 물품 수량을 체크했다. 변기에 빠졌던 선글라스를 제자리에 놓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이걸 공식적인 자리에 쓰고 나갈 유신을 생각하니 절로 키득키득 웃음이 샜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패션룸의 수량을 체크하고 나자 새벽 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극한 회의감을 느끼며 집 안 구조를 달달 외웠다. 이런 하찮고 의미 없는 일 따위를 길게 잡고 늘어지게 했다가는 회의감만 여러 번 느낄 게 뻔하니 하루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한 시 반경. 이화는 마침내 유신이 시킨 모든 일을 끝내 놓고 그를 찾아 2층을 헤맸다. 방이 워낙 많아서 한 번에 찾을 수가 없었다. 유신은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한두 번은 노크를 하다가 지쳐서 벌컥 열었던 방에 하필 유신이 있었다. 그가 얼음처럼 꽁꽁 언 얼굴을 하고 이화를 쳐다보았다.
“노크 모릅니까.”
이화는 들고 있던 수첩을 가지고 유신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패션룸에 있는 옷가지들과 액세서리 종류별로 수량 다 체크했습니다.”
“알았으니까 나가요.”
유신은 수첩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화는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나가라니까 뭐해요?”
이화는 기분이 확 상해서 등을 돌린 채 입모양으로 개자식, 읊조렸다.
“잠깐.”
흠칫, 이화는 발을 멈췄다. 설마 그토록 작게 말했는데 들은 건가 싶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리 와 봐요.”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뭐야?’
이화는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았다. 유신의 시선은 여전히 컴퓨터에만 꽂혀 있었다. 유신에게 다시 다가가려는데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됐어. 거기 서 있어요.”
이화는 참다못해 욕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손톱이 살갗을 파헤치도록 주먹을 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핸드폰 꺼내요.”
이화는 그가 대체 뭘 하고 있기에 사람 얼굴 한 번 쳐다볼 여유가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괜히 부딪치고 싶지는 않아서 마지막으로 꾹 참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010 3398…….”
그는 다짜고짜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화는 영문도 모르고 부르는 대로 받아 눌렀다. 열한 자리를 다 누르고 나니 그가 말했다.
“내 번호예요. 무슨 볼일 있으면 전화로 해요.”
“네?”
“웬만하면 2층에 잘 올라오지 말라구요,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