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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화는 하마터면 헉! 하고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번호를 알려 주더니 같은 집에서 용건이 있으면 전화로 하라니.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사무적인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유신은 안 보는 척하면서도 곁눈질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황당해하는 이화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는 컴퓨터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문제없으면 나가죠.”
“…….”
“나가라니까 뭐해요?”
유신의 재촉에 결국 참다못한 이화가 입을 열었다.
“못 나가겠는데요.”
유신이 멈칫하며 이화를 보았다. 이화는 당당한 걸음으로 유신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문제가 없으면 나가라면서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서 못 나가겠다고요.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유신은 이화의 위압적인 걸음걸이와 말투에 순간 몸이 움찔할 뻔했다. 그는 약간 당황한 채 이화를 보며 말했다.
“그게 뭐죠?”
“전 여기 이 집에, 지유신 씨를 경호하기 위해 온 경호원이에요. 근데 무슨 볼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고 웬만하면 2층에 올라오지 말라니, 이게 말이 돼요? 도형 씨한테 들었는데 유신 씨 당분간 일도 없다면서요. 근데 한 달씩이나 개인 경호를 의뢰해 놓고 이렇게 얼굴 맞대지 말고 살자면 저는 대체 무슨 일을 하라는 거죠?”
유신은 올해 초 영화를 마지막으로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폭풍처럼 쏟아지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들을 보며 차기작을 생각 중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눈에 띄는 작품도 없고 평소 좋아하던 감독들의 러브콜도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도형에게 그러한 사실을 대강 전해 들은 이화는 걱정이 됐다. 다음 주에 있는 영화제에 유신이 초청되기는 했지만 그런 공식적인 자리가 매일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신의 경호원으로 있는 한 달 간, 그녀는 거의 지금과 같은 일들을 해야 할 게 뻔했다.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집 구조와 물품들을 외우고 무슨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전화로 해결을 보고 유신이 어디 나갈 일이 없는지만 손꼽아 기다리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광 스토커를 대비하여 집과 유신을 철저히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저는 지유신 씨 경호를 하러 온 거지 여기 집사를 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일은 둘째 치더라도 경호원과 의뢰인 사이에는 최소한의 신뢰가 형성되어야 하는 거 모르세요? 아무리 일적인 관계라지만 인간적인 믿음과 애착이 없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경호를 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라도 저는 이렇게 사무적이고 비인간적인 관계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이화를 보며 유신은 얼핏 웃었다.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예상은 했지만 천하의 지유신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기를 펴고 당돌하게 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말을 꽤나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잘 하는 편이었다. 자칫 대화에서는 밀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자 유신은 왠지 자존심을 긁힌 것 같은 느낌에 열이 올랐다. 그는 이참에 상하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황이화 씨의 말은 잘 알겠습니다.”
유신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황이화 씨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게 뭐죠?”
유신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롭게 말했다.
“처지.”
“…….”
“지금 당신의 처지 말입니다.”
“무슨 뜻이죠?”
“황이화 씨는 지금 나한테 ‘고용’된 처지라는 것 말입니다. 단순히 나를 경호하기 위해 온 경호원이 아니라 나를 경호하기 위해 ‘고용’된 경호원입니다. 그 중요한 말을 빼먹으면 안 되죠. 내가 필요에 의해서 황이화 씨에게 돈을 주고 고용을 한 겁니다. 산 거란 말이죠. 그러니 황이화 씨는 그런 나를 지켜 주고 보호해야 할 의무는 물론, 내 말에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자, 알겠습니까? 황이화 씨는 앞으로 한 달간 순전히 나를 위해서 행동해야 하고 존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봐요, 지유신 씨!”
이화는 의뢰인과 경호원의 관계에 대한 이해불가의 권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유신에게 즉각 반발하려고 했으나, 유신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사생활을 터치 당하는 것을 무엇보다 끔찍해하는 내가, 2층에 올라오지 말아 달라고 하는 부탁쯤은 들어줄 수 있어야 하는, 아니, 들어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황이화 씨가 앞으로 할 일은 무궁무진하게 많을 테니 집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 따윈 접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호원과 의뢰인 사이의 최소한의 신뢰란, 제 생각엔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뭐라구요?”
“그저 불필요한 감정 소모일 뿐이죠. 어차피 한 달 보고 끝날 관계에 무슨 인간적인 감정이 필요합니까? 그런 게 없어도 자신의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만 있다면 경호를 하는 데는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우리가 의사나 환자, 내담자와 상담자의 관계도 아니고 라포(rapport : 주로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관계를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 카운슬링, 심리테스트, 교육 분야 등에서 중요시된다.) 따위의 형성이 없다고 해서 일처리가 제대로 안 된다면 그건 본인의 직업의식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짧게 웃었다. 이화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한다고 해서 말이 통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유신은 보란 듯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컴퓨터에 시선을 꽂고 냉철한 말투로 말했다.
“자, 문제가 풀렸다면 이제 그만 나가 보시죠.”
이화는 유신과는 절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이화의 눈에 유신이 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이 들어왔다.
“나가라니까 뭐하는 겁니까?”
유신이 그토록 집중해 가면서 한 일은 다름 아닌 검색이었다. 인터넷 창에는 송동진을 비롯해 여러 배우들의 최근 근황에 대한 기사 등이 널려 있었다. 눈치로 보아 다들 다음 주 영화제에 오는 배우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영화제를 생각하니 순간 이화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했다. 이화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상적인 말이 안 통한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그의 코를 바짝 눌러 주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아, 저 궁금한 거 있었는데.”
“지금은 황이화 씨의 어떤 궁금증에도 답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나가죠.”
그러나 이화는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큰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게이세요?”
푸웃. 유신이 깜짝 놀라서 마시던 차를 입 밖으로 뿜어냈다. 컴퓨터 옆에 놓여 있던 대본들에 찻물이 튀었다. 이화가 호들갑을 떨며 휴지를 찾는답시고 온갖 서랍을 열어 댔다.
“그, 그만. 됐습니다.”
유신은 오른쪽 서랍 첫째 칸에서 티슈를 꺼내 손수 대본들을 닦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게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유신은 화를 삭이며 침착하게 물었다. 더 이상 동요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 당황하세요.”
“당황은 누가 당황을 했다고 그럽니까.”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 그게 대체 왜 궁금하냔 말입니다!”
유신은 순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 못마땅해 보이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 모르세요?”
유신이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유신 씨 게이라는 소문 있는데, 모르셨구나.”
물론 지어낸 얘기는 아니었다. 여느 잘생기고 키 크고 남 주기 아까운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겪고 보는 것이 게이 소문이었다. 다른 여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남자에게 주는 것이 낫다는 팬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다른 배우들에 대한 조사는 자주 해도 절대 자신에 대한 검색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루머와 악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인터넷에 쳐 보시면 나와요. 왜 강주원 있잖아요. 그분이랑 둘이 신주커플이라고 팬 페이지까지 있는데 진짜 모르셨나 봐요. 요즘 네티즌들 장난 아니에요. 합성사진에 가상 뮤직비디오에 얼마나 열을 올리는데……. 진짜 모르셨구나.”
이화는 새침한 말투로 술술 잘도 이야기했다. 다시 힐끗 들여다 본 모니터에 얼핏 강주원의 사진이 보였다. 공격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이화는 짜릿한 승리감이 들었다.
반면 유신은 패닉 상태에 빠진 지 오래였다. 상대가 강주원이라는 것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주원은 한때 황시운과 함께 유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지만 현재는 원수보다도 못한 사이었다.
유신의 표정이 잘 깎아 놓은 조각처럼 굳어 있는 것을 보고 이화는 살짝 긴장했다. 도를 넘었나 하는 두려움이 잠깐 일었다. 그러나 유신이 주는 무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조심하시라구요. 그런 소문도 알고 있어야 일이 나도 대응을 할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황이화.”
그런데 유신이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그것도 황이화 씨도 아닌 황이화, 라는 반말로.
“최대한 대우해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유신이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의자를 돌리며 씩 웃었다. 이화는 그가 마침내 감추어 두었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이가 아니면.”
“…….”
“지금 이 모욕감은 어떻게 보상할 거지?”
“게이가 아닌 건 어떻게 증명하실 건데요?”
유신은 지지 않고 말하는 이화를 보며 역시나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신 웃고만 있다가 갑자기 이화의 팔을 확 잡아당겼다. 이화는 본능적으로 공격적 방어를 하려다가 상대가 의뢰인인 것을 깨닫고 아차 싶어 힘을 뺐다. 그러자 순간 유신의 힘에 이끌려 그의 다리 위에 앉혀지고 말았다. 그녀는 균형을 잡기 위해 저도 모르게 팔을 유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완전히 애매한 자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꼴이라니. 당황한 이화와는 다르게 유신은 여전히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얼굴과 얼굴 사이가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느낌도 무척 이상했다.
유신이 비열한 웃음을 거두지 않고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천천히 다가오던 그가 갑자기 빠르게 다가와 이화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이화도 여자인지라 유신의 입술을 코앞에 두고 심장이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허나 그런 장난에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화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나려 하자 유신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스윽 감쌌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게이가 아닌 걸 증명해 보라며.”
“……!”
“그에 대한 보답은 일단 하고 나서 받지.”
장난이 아니라 진짜인 건가 싶을 정도로 둘의 입술 사이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 짧은 순간 이화의 머리에 형광등이 번쩍했다.
“에, 에에 에이취!”
아까부터 가래가 바글바글 끓는 것 같더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지어낸 기침이 아니라 진짜 기침이었다. 가래까지 나오진 않았지만 방울방울 자그마한 침들이 분수처럼 튀어 올라 유신의 얼굴 위로 정확히 낙하했다.
“어머, 어떡해! 괜찮으세요?”
두 번째 패닉에 빠진 유신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마자 이화는 그에게서 벗어나 첫 번째 서랍을 열고 티슈를 잔뜩 꺼냈다. 그리고 유신의 얼굴을 벅벅 닦아 주었다.
“이걸 어쩌면 좋아.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
“죄송해요. 제가 맘에 안 드는 남자랑 스킨십 할 때 기침하는 버릇이 있어서.”
유신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있는 휴지들을 떼어 냈다. 아직도 휴지 조각들이 얼굴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맘에 안 드는 남자라. 목구멍이 간질간질한 게, 이번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더 있다가는 제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겠네요. 이만 자러 갈게요. 밤이 늦었는데 유신 씨도 얼른 주무세요. 그럼 안녕히.”
도망치듯 쪼르르 서재를 나가는 이화를 보며 유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주 영악하고 기가 센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와 온 집 안을 헤집어 놓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신은 휴지를 쥔 주먹에 힘을 잔뜩 넣었다. 손에 힘은 들어가는데 왜 자꾸 얼핏얼핏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라고. 정말 황당해서라고. 이렇게 꼼짝없이 당해 보는 것이 29년간 살아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 정말 순전히, 어이가 없어서라고. 그래, 단지 그뿐일 것이라고.
4.
그 남자의 미소
똑똑. 노크 소리가 몇 번이나 반복됐지만 이화는 듣지 못했다. 이전처럼 출퇴근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아침 일찍 유신의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곱 시쯤 일어나면 되겠거니 하고 알람을 일곱 시에 맞춰 놓았는데, 노크 소리는 여섯 시에 들린 것이었다. 그 시각 편안한 마음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화가 깰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유모는 문을 열고 들어가 이화를 깨웠다.
“이봐요, 경호 아가씨. 일어나 봐요.”
“으음…….”
이화는 잠꼬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일 뿐, 결코 눈을 뜨지는 않았다.
“이름이 뭐랬더라…….”
유모는 이화가 책상 위에 던져 놓았던 명찰을 발견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화 양. 황이화 양. 얼른 일어나요. 도련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참다못한 유모가 막 목청을 높이려는 찰나, 이화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유신은 모로 누운 채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 요상한 자세로 자고 있는 이화를 보더니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표정을 구기고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황이화 씨! 당장 안 일어나면 오늘부로 해곱니다. 당장 일어나요, 당장!”
그의 고함에 깜짝 놀란 이화가 벌떡 일어나 눈을 떴다. 이화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려고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유신은 이미 가고 없었다. 뭐지?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꿈이었나? 어안이 벙벙해하는 이화에게 유모가 웃으며 말했다.
“얼른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도대체 내가 왜 이 새벽에 일어나서 이 인간을 따라가야 하는 거야!’
이화는 숨을 몰아쉬며 앞서 가는 유신을 힘들게 쫓았다. 살다 살다 의뢰인이 조깅하는 것까지 따라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경호원은 절대 그토록 만만하고 한가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신은 이화를 마치 자기 수하 부리듯 대하는 것 같았다.
이화는 아침부터 온갖 불만과 짜증이 솟구쳤다. 할 수만 있다면 유신의 앞으로 뛰어가 태클이라도 걸어서 그를 우스꽝스럽게 넘어뜨리고 싶었다.
그때 유신이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았다. 이화는 헉헉거리며 따라 멈추었다.
“왜 이렇게 못 따라옵니까. 경호원 맞아요?”
“경호원은 뭐, 자다 일어나서 갑자기 하는 조깅도 남자보다 잘해야 한다는 법 있어요?”
“회사에서 웬만한 남자 경호원들보다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실적도 우수하다고 들어서 데려왔더니 이건 뭐, 거의 사기당한 수준이군요.”
“뭐, 뭐라구요?”
“앞으로 황이화 씨의 기상 시간은 다섯 시나 다섯 시 반으로 잡으세요. 그리고 여섯 시까지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다 마친 뒤 현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세요. 난 시간 약속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1분 1초라도 늦으면 안 됩니다. 정확히 여섯 시 정각까지 준비 마치고 기다리고 있어야 돼요. 알았어요?”
이화는 입이 떡 벌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휘익 하고 공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화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물체를 확인하고 몸을 움직였다. 손으로 낚아챘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잠에서 덜 깬 탓인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바람에 피할 생각도 못하고 이마 정중앙을 공에게 넙죽 내주고 말았다.
퍼억!
도둑질하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이화는 요즘 들어 부쩍 맞는 일이 많아졌다.
“죄송합니다! 공 좀 던져 주세요!”
근처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던 학생들에게서 날아온 배드민턴공이었다. 유신은 이마를 움켜쥐고 격하게 신음하는 이화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대신 공을 던져 주고는 꽤나 당당한 기세로 말했다.
“바로 이런 일 때문입니다.”
“네?”
“내가 언제 이런 위험에 처할지 모르잖아요. 바로 이런 때, 바로 지금처럼, 황이화 씨가 대신 공을 막아 주면 되는 겁니다.”
‘막아 주는 게 아니라 맞아 주는 거겠지!’
이화는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비웃고 다시 앞서 가는 유신을 보며, 그 뒤통수에 감히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 올려 주려다 말았다.
‘하여간 왕 재수! 가다 쾅 넘어져라!’
조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유신은 가정부들이 정성껏 준비해 놓은 아침을 먹었다. 이화는 당연히 앉아서 같이 먹으려다가 유모의 손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원래 유신은 손님이 온 경우가 아니면 밥을 혼자 먹는다고 했다. 유모와 가정부는 모두 유신이 먹은 뒤에 함께 둘러앉아 먹는다고 했다.
이화는 기가 막혔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유신과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그것 하나였다. 그의 모든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이 다 되도록 유신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이화는 마음이 답답한 것을 떠나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유신은 아침 식사 이후 한 번도 2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점심은 가정부들이 일식으로 준비해서 2층까지 직접 가져다주었다.
이화는 아무리 개인 경호원이라지만 이토록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패션룸 수량 체크라도 시켜 주었으면 했다.
결국 이화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신에게 가서 오늘 별다른 할 일이 없는지, 앞으로 계속 이런 날이 반복되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조금의 언질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다.
웬만하면 2층에 올라오지 말고 전화로 하라는 유신의 당부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조금 더 인간적인 갑을 관계를 위해 이 정도의 반항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지붕 아래 전화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슬금슬금 유신만의 공간에 침범한 이화는 겁도 없이 그의 방으로 갔다.
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한 번 더 노크를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지유신 씨. 계세요?”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지난번 악몽으로 욕실을 제외한 다른 방들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노크를 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유신의 말대로 전화도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뢰인이 눈앞에 보이지 않자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덮쳐 왔다.
이화는 다시 그의 침실로 돌아왔다. 한 번 더 노크를 해 본 뒤 혹시 자고 있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유신은 없었다. 그러나 이화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면서 유신이 없다는 사실은 잠시 망각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유신의 침실은 대단했다. 침실 하나가 이화의 집만 했고 인테리어는 그 큰 집을 통틀어 가장 신경을 쓴 듯했다. 분위기 있는 유신의 사진들도 곳곳에 걸려 있었고 고풍스러운 그림들도 보였다. 넋 놓고 방을 구경하던 이화는 문득 침실 한구석에 있는 의문의 문을 발견했다.
‘어? 어제 체크하지 못한 곳인데…….’
욕실이나 화장실은 밖에 있으니 또 있을 리 없었다. 이화는 자신이 모르는 곳은 없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단순한 호기심이 동시에 발동해서 조용히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헉……!’
왠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불을 켠 뒤 정확히 3초 후, 이화는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유신이 침실 안에 꽁꽁 숨겨 둔 비밀의 방은 다름 아닌 ‘퍼즐 천국’이었다. 그곳은 온통 퍼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방 한구석에 매우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고 그 위에 요즘 맞추고 있는 듯한 천 피스의 미완성 퍼즐이 보였다.
그 외에 방의 4면은 모두 퍼즐들이 벽지를 대신하듯 꽉 들어차 있었다. 모두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의 서양 풍경화들이었다. 백 피스, 오백 피스, 천 피스, 만 피스 등 크기도 매우 다양했다. 이화는 정갈하게 잘 정리된 퍼즐 방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이내 책상 앞으로 왔다.
‘세상에. 별 취미를 다 가지고 있네. 진짜……. 이걸 혼자 다 맞췄단 말이야?’
책상 위의 현재 진행 중인 퍼즐도 삼분의 이는 거의 맞추어진 상태였다. 잘못 손댔다가는 큰일이 나도 제대로 날 것 같았다. 이화는 위험 지역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몸을 틀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이화의 발목을 잡았다. 얼핏 시야에 들어왔던 액자 하나가 이화의 두 눈에 다시 꽂혔다. 이화는 퍼즐 옆에 놓여 있던 작은 액자를 들어 보았다.
그 작은 사진 속에는 세 명의 건강한 청년들이 있었다. 양 사이드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두 명의 배우, 지유신과 강주원이었고,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가운데의 남자는 분명 황시운이었다.
이화는 낯선 곳에서 오빠를 만난 것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5년 전 죽은 오빠의 얼굴을 보고 슬퍼할 자신이 없어 사진을 일부러라도 숨겨 놓고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유신. 그가 시운의 친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